< 처음이기에. 처음이니까. 처음이라서. (5) >
한수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야. 너 빨리 다 말해. 너 뭐야? 뭐하다 온 애야?"
"뭐하긴. 그냥 운동하고. 다양한 연습을 통해 기술을 익히고."
"아니. 정말로 그게 또 돼? 진짜로? 대체 누구랑 그렇게 했어? 여섯 번? 걔? 그 파트너 였다는 애?"
"자 자. 지나간 이야기는 과거로 덮고. 이제는 내 사랑만 보고 있으니까. 으쌰~"
"아. 야아~ 내려 놔! 아하하~"
"으챠챠. 방으로 갑시다. 침대가 어디있나?"
"저기 거실 앞에."
한수빈은 버둥버둥 구마하의 품에 안겨 침대에 던져지듯 누웠다.
그녀도 뭔가 설레이는 순간이지만 정말이지 몸에 체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자기야. 근데 나 진짜 힘이 하나도 없어..."
"괜찮아. 힘 없어도 돼."
"진짜 이럴래?"
"가만히 누워서 하는 자세도 있는데."
"...너 빨리 말해. 여섯 번은 누구랑 한 거야? 상대방은 뭐하던 사람이고?"
"한 사람은 아니었어."
"그럼...? 둘?"
"어."
한수빈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구마하를 보았다.
"얘 완전 내숭 장난 아니었네..."
"하하! 내가 언제 내숭을 떨었다고 그래?"
"운동만 아는 앤 줄 알았더니. 그런 짓은 언제 하고 다녔던 거야?"
"뭐. 나중엔 한다는 개념도 없는 거의 미쳐있던 밤이었지."
"취한 거야 뭐야...? 혹시 약 했어?"
"하하하! 내가 약을 어떻게 해. 나 그런 거 하면 큰일 나."
구마하가 가운을 풀썩 풀어 해치자 수빈이 양손으로 몸을 가린다.
"안돼..."
"진짜?"
"진짜 장난 아니야. 오늘은 그만."
"오케이. 알았어."
시원하게 마음을 접으며 구마하도 한수빈의 옆에 풀썩 누워버렸다.
"아~ 침대도 엄청 푹신하다."
"..."
"자기네 가구 좋다. 나도 이런 걸로 쓸까?"
"자기야. 진짜 안 해?"
"응. 안 해."
"...진짜로?"
"응. 얘기 했잖아. 하기 싫다면 안 한다고."
안심은 되는데 또 막상 손도 대지 않는다니까 왜 허전함을 느끼는 걸까...?
한수빈이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방금까지 달려들던 기세는 어디가고?"
"내가 원체 성욕이 쎄다보니까 또 나름 조절하는 법이 있어."
"정말 신기하다..."
"와~ 근데 천장 진짜 높다. 이런 집은 얼마나 해?"
"몰라 나도. 비싸긴 할 거야. 동네가 동네다 보니까."
"부모님이 사주신 거지?"
"그럼. 내가 돈이 어딨어."
"이번에 찍는 광고비 싹 끌어모아서 나도 이런 집이나 들어올까?"
"자기야."
"응?"
한수빈은 구마하를 멀뚱멀뚱 지켜보며 묻는다.
"자기는 나 왜 좋아해?"
"왜가 어딨어. 사람이 좋으니까 좋은 거지."
"내가 좋은 사람같애?"
"쓰읍. 솔직히 말하면 조금 의심은 가지?"
"..."
"그래도 좋아. 그건 맞어. 감정은 확실해."
"그러니까 왜? 무슨 이유로?"
"처음 클럽에서 볼 때부터 느낌은 있었어."
"근데 왜 매번 피했어?"
"뭔가 나랑 다른 사람인 거 같아서."
한수빈이 상체를 일으켜 구마하를 멍하니 쳐다본다.
"그렇게 일어나면 가슴 보이는데..."
"남자도 그런 걸 따져??"
"그럼 따지지. 남자는 사람 아닌가...?"
"...남자는 그냥 어리고 예쁜 여자 좋아하는 거 아냐?"
"아니야! 아 물론 그렇긴 한데. 내 나이에 어리고 예쁜 애 해봐야..."
구마하는 클럽에서 느낀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을 지난 공연 때 느꼈다고 전해준다.
"그때 무대에서. 자기 몸이 막 빛나더라고."
"조명 받고 있으니까 당연하지."
"그런 인위적인 걸 떠나서. 뭔가 자기 일에 집중하고 강한 의지를 낼 때 빛이 나는 사람들이 있어."
"나한테 그런 게 있다고?"
"응."
"...그런 얘기 처음 들어봐."
외모나 배경이 아닌 스스로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되는 한수빈이었다.
구마하는 자신이 만난 가희 한수빈에 관하여 말했다.
"진짜 막 공주님 같고, 멋있고 예쁘고."
"..."
"그날 나 아니어도 누구라도 자기한테 반했을 걸? 그때 같이 왔던 내 친구도 그랬어. 와 저 사람 뭐냐 이러면서."
"내가 성악에는 나름 진지함이 있긴 해..."
그래도 나름 필살기가 먹혔다니 뒤늦게 다행이구나 싶어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여자의 의심은 더욱 더 깊어져 갔다.
"근데 왜 그날 호텔에서 그냥 갔어...?"
"말했잖아. 나는 섹스가 아닌 연애를 하고 싶다고."
"막상 연애 시작하니 섹스밖에 안 하는 사람이...?"
"하하하! 와 진짜 엄청 따지네. 왜 그래? 대체 뭘 알고 싶어서 그렇게 물어보는거야?"
"모르겠어. 그냥 궁금해. 자기 생각이 이해가 안 되고, 날 어떻게 보는지도 도무지 모르겠고. 말이 너무 앞 뒤가 안 맞는 게 많어."
구마하는 불안해하는 연인을 스르륵 당겨 눕히며 입을 맞췄다.
"좋아해. 이건 진짜야."
"응..."
"자기야. 먼저 내가 우리 집안 이야기 하기 싫다고 했었잖아."
"그랬지."
"...진짜 너무 외로웠는데."
구마하가 한수빈의 가슴에 기대누워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말이 좀 웃긴데, 나는 외롭다는 걸 느낄 수도 없게 외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어."
솔직한 내면을 마주하는 건 세계챔피언 금메달리스트라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감정에 불안을 느끼는 연인을 위해서라면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운동 시작하면서 친구들도 가까워지고. 조금씩 학교에서 인기도 얻고. 그러면서 알게 됐어."
"뭘?"
"아 내가 진짜 누군가한테 사랑받고 싶었구나. 나도 누군가한테 의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구나. 그런 마음이 뼈 속 깊이 박혀 있더라고."
"..."
"그래서 늘 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바랬던 거야."
"그게 나야?"
"자기가 그렇게 해줬지. 그런 사람을 만나면 세상 제일 기쁘게 만들어 주자. 그런 마음을 먹고 있던 거야. 그리고 뭐. 난 섹스를 좋아하고. 나름 여자를 기분 좋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있고."
캐쥬얼한 만남을 즐겨왔던 수빈에게 구마하의 고백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나와 너라는 존재와 존재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야기. 연애.
단편적인 쾌락으로 채울 수 없는 깊은 사랑을 원하는 외로움과 고독. 갈망 등등.
세계인이 열광하는 스포츠 스타는 특별한 누군가가 아닌, 자신과 똑같은 하나의 인간이 되어, 그를 사랑함으로 나도 의미 있는 한 사람이 되어간다.
나 혼자가 아닌, 누군가에게 있어 필요한 존재가.
"신기하다..."
"인생 경험도 많은 사람이 뭐가 그렇게 신기할까?"
"그냥 다..."
"자기야. 내가 더 신기한 거 말해줄까?"
"뭐?"
"나 초능력 가지고 있다."
"재미없어. 신기하지도 않고..."
"하하. 진짠데."
편안히 가슴에 기대어 있음에도 그의 머리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수빈은 구마하의 이마와 머리카락을 조용히 넘기며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런 걸까?"
"뭐가?"
"외로워서. 사랑 받고 싶어서... 그래서 아무나 막 만나고 다녔던 걸까?"
"모르지. 근데 자기가 왜 외로워?"
"말했잖아... 나도 여러 일들이 있었다고."
타인이 아닌, 스스로의 관점으로 한수빈이 자신의 과거를 보았다.
초등학생 시절 그녀는 건방지고 싹수가 없어도, 그 나름 삐뚤어지지 않고 두루두루 사이좋게 지내던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동그룹 경영승계 과정이 기사화되면서 후계자 한권석의 가족관계가 언론에 드러났다.
"누가 퍼트렸는지 몰라도, 학교 애들이 우리 엄마가 일본 사람이라는 걸 다 알았어."
"모르고 있었어?"
"집안은 알아도. 그때는 아빠가 경영자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우리 엄마 국적은 조금 사회적으로 비밀로 해야 되는 이야기라서..."
"으음... 뭐 그럴 수 있지."
"아무튼 힘든 시간이었는데. 내가 그런 걸로 내색하거나 울기라도 하면 엄마가 더 미안해 할 거 같아서 꾹 참고 지냈어."
무리 중 호감 가는 아이가 있었다. 어린 마음에 순정 어린 느낌으로 가까워지고 싶던 그런 멋진 아이였다.
하지만, 그 친구까지 분위기에 휩쓸려 놀림을 가장한 괴롭힘으로 멀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결국 아빠한테 말했고..."
"..."
"자기야? 내 말 듣고 있어?"
"쿠울~ 쿠울~"
"눕자마자 잘 거면서 쎈 척은..."
하긴 척은 아니지. 실제로 강한 사람이 한계점에 도달했을 뿐.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세계대회를 치르고 온 사람이다.
그런 상황에서 열정적인 섹스를 몇 번이나 했었다.
한수빈은 잠든 이를 꼭 끌어안고, 오랜만에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조용히 이야기를 마쳤다.
"그리고 얼마 뒤 걔가 부모님이랑 같이 우리 집을 찾아왔는데. 얼굴이 엄청 상해있더라고."
"커억... 크어억~"
"부모님한테 엄청 혼났던 거지... 걔 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다 비슷비슷하게 멀어졌어."
그날 이후 모든 교우관계가 끝났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비슷한 집안의 아이들을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도도한 공주로 살아야 했다.
세상을 깔보고 있었다.
내가 잘못 한 게 아닌 너희가 날 감당할 수 없었을 뿐이야.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풀어보면, 어쩌면 내가 아닌, 세상이 나를 멀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
그렇구나. 어떻게 우리는 외로운 사람들끼리 만났구나.
한수빈은 꼬물꼬물 그의 팔 베개를 베 누우며 눈을 감았다.
따뜻하다. 누구와 같이 잔다는 건 상상도 못하던 일인데, 왠지 나도 코를 골 정도로 푹 잘 거 같애.
"색 색~"
한수빈의 숨소리가 바뀌자 구마하가 눈을 떠 그녀를 토닥토닥 다독이며 생각했다.
"..."
눈 뜨고 일어나면 점심 쯤 하자고 해야겠다.
* * *
늘어지게 잠에 빠진 한수빈은 정오가 가까워진 시각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기야..."
밤새 뜨거운 온기를 전해주던 사람은 어딜 갔나 보이질 않고, 밖이 뭔가 시끄러워 끔벅끔벅 눈을 뜨고 나가니 구마하가 여기저기 청소를 하고 있었다.
"뭐해...?"
"청소. 그리고 밥. 다 됐어. 안 그래도 깨우려고 했는데 딱 맞춰 일어났네."
"...우리 집에 먹을 게 있었어?"
"나가서 사왔지. 그리고 이거 봐!"
구마하가 패브릭 오염물질 제거재라면서 뭔가 기묘한 것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비싼 동네라, 이런 거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있더라고!!"
"하하하~"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오~ 맛있는데?"
"그럼 맛있지. 이게 바로 20년 자취 인생의 요리실력이라는 거야."
"왜 20년이야...?"
"어젯밤에 말했잖아. 나 거의 혼자 지냈다고."
"아. 맞다. 외로웠다고 그랬지."
소꿉장난 같은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설명서를 보면서 소파 청소에 돌입한다.
"오~ 지워지는데?"
"우와. 이게 되는구나."
"된다니까! 얼룩졌다고 버리는 게 어딨어!"
"흠. 그냥 이참에 가죽 소파로 바꿀까 했는데."
"아무리 싼 거라도 막 버리고 그러지 마."
"이 소파 싼 거 아냐."
"얼만데?"
"몰라. 몇 천 하겠지."
"...자기는 모든 단위가 다 기본 천 만원부터 시작되는구나."
소파 청소를 끝내고 다시 편안히 앉아보는 두 사람.
한수빈도 이 정도라면 찝찝한 느낌 없이 오래 쓸 수 있겠다며 입을 열었다.
"추억이 담겼네."
"하하! 그렇지. 우리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지."
"...근데 자기야."
"응??"
"그 말을 하는데 왜 또 가슴을 만져...?"
"하하..."
어찌어찌 두 사람은 또 침대로 간다.
"이따가 가봐야 돼."
"그래서 가기 전에 하고 가겠다?"
"안 될까?"
"안 될 건 없지. 근데, 어디? 무슨 일 있어?"
"일이야 많지. 감독님 연락 왔는데, 지금 술 깨고 있다고 저녁에 보기로 했어."
"그럼 일 끝나고 어디가?"
"집으로."
"그럼 나도 갈래."
"...진짜? 우리 집을?"
"응. 옷 챙겨서 갈 거야."
"하하! 나야 좋지."
두 사람은 다시 키스를 나누며 오늘의 섹스에 돌입하는데.
"뭐?"
"그러니까 엎드려 보라고."
"..."
사랑은 대체 어디까지 용인 되어야 하는 것인가...
한수빈이 또 한번 커다란 내적갈등을 겪으며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