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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141화 (141/401)

별 하나의 사랑과 추억 그리고 쓸쓸함. (1)

"자기야. 자기네 감독님은 어떤 분이셔?"

"감독님 그냥 감독님이지. 유머도 있고 생각도 깊고. 또 선생님 출신이라 지식도 많고. 믿을 만한 어른이야."

일정 마치고 집으로 간다고 했을 때, 자기도 같이 가자고 하더니 그게 이런 뜻이었구나.

수빈이가 트렁크를 펼쳐 놓고 이것저것 뭘 엄청 챙기고 있었다.

"저기. 그걸 다 가져가게?"

"응."

"...어디 이민 가?"

"간단하게 챙기는 건데?"

"하하하..."

"왜? 싫어? 내가 자기한테 빌붙어서 안 떨어질 거 같아서 질려?"

"아 누가 뭐래. 그냥 나 지금 시간 없으니까 그러지."

"지금 시간 없는 걸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 누가 먼저 하자고 매달리지만 않았으면."

"오오~ 우와~ 이런 게 진짜 싸움이 되는구나. 하하하!!"

"후후후. 약속 장소가 어딘데?"

"강남역. 지금 한 사십 분 정도밖에 안 남았어"

"그래? 그럼 퇴근 시간이라 조금 막히긴 하겠다..."

"그러니까. 가깝길래 여유 부리고 있었는데 지금 자기 가방 챙기는 거 보면."

수빈이도 시계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 되겠네. 자기야 먼저 가. 내가 이따 자기 차 끌고 갈 테니까 키 두고 가."

"그럼 난 어떻게 가라고...?"

"촌에서 왔어? 서울 처음이야? 지하철 타. 여기 바로 앞이라 얼마 안 걸려. 교대 가서 갈아타면 돼."

오~ 그런 간단한 방법을 내가 미처 생각을 못 해 촌놈 소리를 들어야 하는구나.

아니 지금 누구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데.

자기가 끝끝내 같이 가서 미팅하는 동안 아래서 기다린다고 하니까 기다리고 있는 거지.

"보자. 이거랑 그리고~ 아 맞다! 화장품."

"..."

"뭐 해? 바쁘다며? 안 나가?"

"저기. 나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뭐?"

"혹시, 자기도 지하철 타고 다녀?"

"그럼. 자주는 아니어도 나도 지하철 타지."

"...뭔가 엄청 서민적인데?"

"하하~! 나는 뭐 맨날 차 끌고 운전기사 매달고 그러고 다닐 거 같아?"

"아니였어?"

"자기야.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 있으면 빨리 나가. 바쁘단 사람이 뭐 하는 거야."

그녀가 나를 보며 이해 못 할 것들이 있다고 하듯이. 나도 수빈이를 보면서 매치되지 않는 이미지들이 있다.

내 여자 친구는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고, 말도 안 되는 매력을 풍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가끔은 이 사람이 정말 같은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과격한 언행과 시각을 보여 준다.

돈 쓰는 건 문제도 아니야. 자기가 쓸 여력이 있어 쓰겠다는 걸 내가 뭐라고 그래.

말이나 행동. 아니 왜 거기서 그렇게 쏘아붙이냐고...?

너무 배려해 주고 맞춘 게 실수였던 건가?

따지고 보면 수빈이가 잘못한 건 없는데, 굳이 서울이 처음이니 뭐니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

내가 지금 조바심을 내나?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녀를 다 아는 것처럼 자만을 한 걸까?

좋은 이야기만 듣고 싶고, 좋은 기분만 나누고 싶은데.

서로 양보하고 알콩달콩 쌓아 가는 그런 걸 바랬는데.

역시 이번에도 너무 빠르게 선을 넘은 건 아닐까?

남자든 여자든 어찌 됐든 섹스를 하면 전과는 같을 수 없으니까. 서로가 편해지는 만큼 조금 더 감추고 싶은 모습도 편하게 드러내고, 조심해야 할 것도 무의식중에 튀어 나가고 그런 건 있잖아.

근데 이건 진짜 연인 간에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인데...

아 역시 또 너무 빠르게 진도가 나갔나...

"마하야. 여기."

"네 감독님."

"어? 너 어제도 이 옷 입고 있지 않았냐?"

"아. 네..."

"애들이랑 밤샌 거야?"

"하하... 감독님은 이 감독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셨어요?"

"몰라 기절해서 잤어. 눈 뜨니까 제수씨가 콩나물국 끓여 주더라."

"하하하... 들어가시죠."

* * *

광고주 미팅 중 잠시 상대방이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됐다.

"우리도 전지훈련만 아니면 여유로운데... 뭐 보고 올리고 기다리면 답 나오겠지."

"근데요 감독님. 제가 보험 광고랑 어울릴까요?"

"너한텐 세계적인 이미지라는 게 있으니까. 저쪽도 너한테 원하는 게 있으니 이런 제의가 오지 않았을까?"

"음. 근데 뭔가 앞으로 운동하다 다치면 안 될 것 같은..."

"하하! 지레 겁먹지 말고. 야. 그보다. 방금 여기 계시던 직원분. 예쁘지 않냐?"

"뭐예요...? 감독님 곧 결혼하실 거라면서요?"

"뭐? 결혼할 거면 예쁜 사람도 예쁘다 못 해?"

"글쎄요. 전 그냥 평범해 보이던데."

"오오~ 이 자식."

한때는 세상 머리 긴 여잔 다 예쁘게 보이던 때도 있었다.

그러다 혜정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어느 정도 여자들을 알게 되자. 이제는 매력이 있고 없고를 구분하는 시각이 생겼다.

그랬던 시각도 수빈이를 만나면서 바뀌게 된다.

"그냥 평범했죠. 냉정하게 예쁘다고 하기는 어려운 거 같아요."

"아이고 이 자식 말 하는 인성 보게나..."

"이게 왜 인성이 나와요. 감독님. 원래 저같이 못생긴 애들이 더 외모에 깐깐한 법이라고요."

"하하하~ 마하야. 너 인마..."

"왜요? 저 뭐요?"

"아니다. 됐어. 별거 아냐. 연애 잘하라고."

"안 그래도 저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온다고 했었는데."

"어? 여길?"

"저... 실은 어제 여자 친구랑 같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차도 여자 친구가 끌고 오고 있고."

"...너 외박했냐?"

"왜요...? 감독님도 외박하셨으면서 왜 저한테만 뭐라고 하시는?"

"이 자식이! 맨날 맞먹으려고!!"

"아악!"

감독님이 헤드록을 걸어 엎치락뒤치락 우당탕거리고 있는데 기업 홍보실 분들이 돌아오셨다.

"하하. 잠깐 자리 비웠는데 왜 싸우고 계세요?"

"그냥 팀워크 좀 올리고 있었죠."

"컥컥... 저기... 경찰 좀 불러 주세요... 감독이 선수 폭행한다고..."

"아하하~ 보기 좋은 사제지간이시네요. 보고 올렸습니다. 위에서도 좋다고 승인하셨구요. 다음에 구마하 선수 스케줄이랑 저희들 제작 일정 잡아서 촬영 진행하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오는 길에 몇몇 분이 사인과 사진 촬영을 부탁하시는데, 그사이 수빈이한테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자. 그럼. 오늘 일정은 다 끝났고. 넌 어떻게 할 거냐?"

"어? 감독님. 저 지금 얘 밑에 와 있대요. 그냥 제 차 타고 집으로 갈게요. 감독님도 편하게 움직이셔도 될 거 같아요."

"하하. 되게 편하게 부르는데? 연상이라고 하지 않았어?"

"두 살 많은데. 남녀 사이에 뭐 그런 걸 일일이 따져요."

"이야~ 궁금하기도 하고. 서로 사생활은 존중해 주고 싶기도 하고."

"그럼 마침 시간도 그렇고. 저녁 같이 드실래요? 저도 소개해 드리고 싶었는데."

수빈이한테 이러저러 감독님이랑 같이 저녁 먹을래? 물어보니 좋다고 답해 준다.

"후우... 다행이다... 혹시 몰라서 부랴부랴 나오기 전에 화장하고 왔는데."

"안 해도 예뻐."

"후후후. 자기야. 차는 그냥 여기다 놔둬도 되지?"

"어. 1층에서 봐."

* * *

"..."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한수빈이라고 합니다."

"감독님. 여기 제 여자 친구."

"......"

"왜요?"

"감독님? 아 사람 얼굴을 뭐 그렇게 빤하게 보세요?"

"자기야.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런 거 없는데."

감독님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씀하셨다.

"큼. 크흠. 아니... 어... 그러니까... 나도 어제 들었는데. 학생이 우리 마하랑 사귀는 사이라고?"

"네."

"..."

"왜요 감독님? 뭐 있으세요?"

"...아니다. 밥 먹으러 가자. 뭐 먹을래? 수빈 씨 뭐 먹고 싶어요?"

"전 그냥 아무거나."

"자기야 여기 뭐 아는 식당 있어?"

"강남은 그냥 다 먹고 마시는 데지. 감독님 좋아하시는 걸로 고르는 게 어떨까?"

"감독님 뭐 좋아하세요? 고기? 회?"

"......"

"감독님?"

"밥. 그냥 밥 먹자... 나 아는 식당 있어. 그리로 가."

감독님이 조용한 한정식집을 찾아오셨다.

"자기야. 나 잠깐 화장실 좀."

"어. 다녀와."

그리고 단둘이 남자마자 감독님이 수빈이의 빈자리를 보며 말씀하셨다.

"야... 진짜냐?"

"뭐가요?"

"진짜로 저 친구가... 여자 친구?"

"네. 왜요?"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으쓱거리는 감정을 누르며 감독님의 반응을 살폈다.

"허허... 너 이 자식... 허허허..."

"제가 예쁘다고 했잖아요."

"그래. 인정한다. 이야 엄청 화려한 친구네..."

"꾸며서 그렇지. 화장 지우고 귀걸이 떼고 이러면 또 소소해요."

"하하하... 하하..."

수빈이도 돌아와 싱글벙글 물어본다.

"무슨 얘기들 하고 계셨는데 이렇게 웃으세요?"

"그냥 감독님이 자기 예쁘다고."

"아하하~! 감사합니다."

"어우... 난 아까 마하 이 녀석이 뭔 배짱으로 그런 소리를 하나 했더만. 믿는 구석이 있었네."

"음? 자기 무슨 소리 했어?"

"모르겠는데? 감독님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아까 미팅 때."

"아아~ 그거요."

"뭔데? 자기야? 나도 말해 줘."

감독님이 미팅 때 여자 직원분 보면서 하신 말씀에, 별로 안 예쁜 거 같다고 단호하게 답했다고 말하니, 수빈이가 가만히 쳐다본다.

"으음~ 자기는 감독님이랑 그런 이야기도 하는구나..."

"감독님이 가끔 하시지. 난 잘 안 해."

"내가 언제 이놈아? 니가 맨날 연애하고 싶다고 골골댔었지."

"..."

"자기 만나기 전이야. 아 감독님 왜 이러세요!!"

"모르겠다. 행복한 젊은 남녀를 보는데 심술이 생기만 생기는구나."

"늙어서 그래요. 빨리 장가나 가세요."

"하하! 이 자식이!"

"나중에 사모님 만나면 다 이를 거예요."

"크하하하! 야 인마 나는 너한테 할 말 없는 줄 아냐!!"

어느 정도 농담 삼아 웃고 떠들고 지나가는 그런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빈이가 감독님께 묻는다.

"왜요? 감독님은 마하에 대해서 뭐 많이 아세요?"

"음? 으음. 그냥 농담 삼아 하는 말이지."

"..."

"이 자식은 운동밖에 모르는 놈이라. 여자 이런 거 잘 몰라."

솔직히 운동밖에 모르는 건 아닌데... 수빈이도 알 건 다 아는데...

그래도 스승과 제자라고. 이렇게 편 들어 주시는 걸 보면, 스승의 은혜는 아아아~ 고마워라.

웃고 떠들다 보니 요리가 나왔고, 훈련이라든지, 지난 대회라든지. 앞으로의 스케줄이라든지. 풍성한 주제가 어우러지는 식사 시간이 되었다.

"그렇구나. 자기는 전지훈련도 가는구나..."

"이건 아직 일정이 안 나와서. 우리도 휴식은 가져야 하고. 그 쵸?"

"그렇지. 무엇보다 스키 쪽으론 김정준 코치의 의견이 절대적이라."

"어? 자기야 잠깐만. 감독님 죄송해요. 부모님한테 전화가 와가지고."

"그래요. 다녀와요."

감독님이 손을 들어 편하게 나가서 통화하라고 알려 주시자 수빈이가 자리를 비켰다.

"정준이 형한테도 연락해 봐야 하는데."

"마하야."

"음?"

"..."

"왜요?"

감독님이 또다시 수빈이의 빈자리를 돌아보며 말씀하신다.

"저 친구가 널 많이 좋아하는 거 같다..."

"네. 뭐 먼저 좋다고 쫓아다니긴 했어요."

"으음. 그래."

"왜요? 뭐 마음에 안 드시는 거 있으세요?"

"으음. 아니야. 그런 거 없어."

왜 그러시지? 방금까지 잘 웃고 이야기하시더니, 수빈이 나가니까 분위기가 달라지시네.

"뭐 하는 친구라고 그랬지?"

"성악요."

"...집은?"

"집은 그게... 본인이 좀 말하기 꺼려 해서. 아 근데 나쁘고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집안이 좀 살지?"

"...네."

"아까 우리 푼수같이 여자 이야기 농담 삼아 할 때 애 눈빛이 확 뒤집히는 게 보이더라."

"근데 그건 어떤 여자 친구라도 다 싫어하지 않을까요?"

"정도는 있지."

"..."

어 좀 뭔가 떨떠름해지는데.

"수빈이 싫으세요?"

"싫긴. 그냥 아직 너가 만나기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은 거지."

"에이. 제가 잘하면 되죠."

"후후. 그래. 어련히 하겠냐. 슈퍼스타가."

식사를 마치고 감독님은 감독님 차로 이동하시고 우리는 X를 타고 마포로 넘어갔다.

"내가 운전할게. 어차피 좌석도 내 몸에 맞춰 놔서 그게 편해."

"오~ 역시 포르쉐 오너. 믿고 맡길 수 있지."

"후후. 근데 자기야. 감독님이 나한테 뭐라셔?"

"어? 뭘 뭐래. 그냥 예쁘다 어디서 만났냐 그러시지."

"음. 다른 말씀은 없고?"

"그런 거 없어."

태연하게 뒷좌석에 놓인 트렁크를 보며 짐은 저게 단가? 하고 있는데 수빈이가 말했다.

"자기는 저 감독님이랑 계속 같이 일할 거지?"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왜? 감독님이 어떤데?"

"으음. 근데 막 그렇게 선수한테 여자 이야기 하고 그러는 분은 좀 그렇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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