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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142화 (142/401)

별 하나의 사랑과 추억 그리고 쓸쓸함. (2)

"에이. 왜 그래 감독님도 그냥 장난치신 거지."

"장난. 음. 그런 장난."

운전대를 잡고 고개를 끄덕이던 수빈이의 목소리가 바뀌고 있었다.

"난 그런 장난치는 어른들 싫던데."

"..."

정말 똑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딘가 좀 낯설은 분위기였다.

"자기야. 감독님 나이가 어떻게 되시지?"

"올해 서른하나."

"먹을 만큼 먹었네."

"..."

와 뭐야 이거. 정신 차려라. 여기 끌려가면 안 돼.

"자기야."

"응?"

"한상률 감독님은 내가 육상을 시작해서 금메달을 따고 아테네를 다녀오는데. 정말 절대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야."

"오해하지 마. 내가 그분을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감독님 이상하게 보지 마."

"자기 기분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라."

"하지 말라고..."

사랑하는 이가 나의 소중한 동료에 대해 그 어떤 나쁜 말도 하는 걸 듣고 싶지 않다.

우리 감독님이 나쁜 사람이고 알고 보면 날 그저 자기 돈벌이에 휘두르는 썩을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감당할 일이다.

그녀가 나를 걱정해 주는 건 좋지만, 이건 아니었다.

하물며 작은 농담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미연에 막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사랑이 지켜진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야. 내 주변에 이상한 사람들은 없어."

"..."

"진짜야 있으면 내가 그런 사람들 가까이 두지 않아."

"자기는 감독님이랑 나랑 누가 더 소중해?"

어우야. 사귄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이런 말을 듣는다고??

"무슨 대답이 듣고 싶어서 그런 걸 물어봐?"

"그냥. 그냥 물어봤어."

"그냥 할 말이 아니잖아. 자기는 내 여자 친구고 감독님은 내 동룐데. 거기에 누가 더 소중하고 아니고를 어떻게 따져."

"알아. 그냥 물어봤어."

"누가 더 소중한지는 말할 수 없어. 애초에 그걸 내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니까."

"나 아까 부모님 전화 왔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한수빈이야."

"..."

"감독님이랑 자기랑 둘이 물에 빠지면 일단 내 여자 친구를 구해. 나는 그럴 사람이야.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어딘가 싸늘하던 수빈이의 표정이 와르르 풀리는 게 보였다.

"...누가 뭐래."

된 건가? 말이 좀 그렇지만 해치운 건가...?

"화 풀렸어?"

"화 난 적 없거든."

"..."

와 근데 진짜 방금 뭐였을까? 그 낯선 분위기는 대체. 마치 형이 아테네에서 봤다는 검은 아우라가 나를 감싸고 있는 듯한 그런 불안감이.

아냐 차가 어두워서 그렇지 아마 밝은 낯이었다면 그런 게 진짜 수빈이 몸에 피어오르고 있었을 거야.

"부모님은 연락하셔서 뭐라셔?"

"으음. 별거 아냐. 집에 언제 오냐고 그래서 내일 간다고 말씀드렸어."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고?"

"응."

운전 중 살짝 돌아보며 미소 짓는 얼굴을 보는데, 다시 수빈이였다.

나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화려한 여자 친구.

"자기야. 원래 남자들끼리 있으면 그런 농담도 하고 그래. 그리고 이런 건 농담 축에도 안 들어가고."

"알아. 나도 그런 걸 따지는 건 아냐."

"순간적으로 사람이 바뀌는 거 같더만."

"후후후."

수빈이가 또 씩 돌아보며 말한다.

"그래도 그건 잘했어."

"뭘?"

"거기서 본 사람. 별로 예쁘지 않다고 한 거."

"사실만 말하는 건데 뭐. 내 눈엔 한수빈이 젤 예뻐."

"됐어. 일부러 점수 따려고 그러지 마."

"자기야. 혹시나 싶어서 그러는데,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 그럼 진짜 여자들한테 돌 맞는다."

"후후후. 아는데."

나에게 한수빈은 큐티 러블리하다가, 그리고 다크하다가. 마지막으로 연약한 모습으로 정리가 된다.

"여자는 아무리 자존감이 높아도 늘 불안한 법이야..."

내가 다채롭다고? 내가 이해가 안 간다고?

자기는 아닌 줄 아나...

"아까 감독님 표정 못 봤어? 놀라 가지고 말을 못 하는데."

"그러니까. 조금 부담스럽긴 하더라... 그렇게 보시는데."

떠들다 보니 어느덧 막히는 구간도 다 지나고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 * *

"이거 참.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을..."

"와~ 좋다."

집에 도착. 여자 친구가 구두를 벗으며 집 안에 들어서는데.

와 우와~ 스타킹이다~!!

"와 경치 진짜 좋다."

"앞에 운동 가기 좋을 거 같아서 여기로 했는데. 젠장 막상 저기 가려면 우리 동이 젤 많이 돌아가야 돼..."

"후후. 운동 되고 좋지. 아 시원하다."

"한강뷰. 성공의 상징이지."

"서울의 야경은 사람을 매혹시키는 느낌이 있어."

"매혹이라. 자기만 할까."

"아 뭐야! 완전 느끼해 하지 마. 어설픈 바람둥이 같아."

싸구려 개그가 먹힌 듯 수빈이가 막 입을 가리면서 퍽퍽 때리는 데,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다들 그러지...? 나 절대 바람 같은 거 피울 놈 아닌데..."

"음? 또 누가 그랬는데?"

"그냥 뭐 여기저기."

"...그 친구도 그랬지?"

"누구?"

"걔. 그 자기 파트너였다는 애."

설마 또 다크 모든가 하는데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노멀 수빈수빈한 표정으로 베란다에 기대어 돌아보고 있다.

"자기야. 옷에 먼지 묻는다."

"첫사랑이지?"

"아닌데."

"뭐야 거짓말 하고 있어."

"자기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남자들 뻔하지 뭐."

수빈이는 다시 베란다에 기대어 저 멀리 여의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야. 예술 하는 사람이 왜 무서운지 알아?"

"몰라?"

"우리는 상대의 눈을 보면 마음을 알 수 있어."

"오~ 관심법."

"후후후 맞아 관심법이지."

수빈이가 블링블링한 두 눈을 똘망똘망 거리며 말했다.

"짐을 보라. 짐은 관심법이 있느니라."

"아닌데,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 이렇게 해야지. 누군가? 방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하하하하! 뭐야? 너무 똑같잖아. 왜 이렇게 잘해?"

"옛날에 이거 유행했었잖아. 친구들 웃기려다 보니까."

"자기가 그런 짓도 했어?"

"뭐 그냥. 애들 웃기고 이러는 걸 좋아했지."

"흐음. 신기하네."

"아무튼, 내 눈에 지금 뭐라고 쓰여있는데? 궁빈 님."

"얘가 왜 이럴까. 오늘 왜 이렇게 날 불편하게 하는 걸까."

"아닌데. 제대로 틀렸는데."

"거짓말. 그럼 뭔데?"

"또 하자고 하면 싫어하려나? 근데 우리 집에 처음 왔는데 그냥 지나가기도 좀 그렇지 않나? 스타킹 찢으면 새로 사다 주면 되는 건가?"

"하하! 야! 이게 진짜!"

투닥투닥 톰과 제리가 되어 다시 거실로 들어왔다.

"아무튼, 씻자. 저녁은 먹었으니까 치킨이나 시켜 먹을까?"

"저녁을 먹었는데 치킨을 왜 먹어?"

"디저트."

"아하하! 자기야? 치킨이 어떻게 디저트가 돼?"

아쉽게도 치킨은 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섹스는 하게 됐다.

"으음-"

"왜?"

"응... 아무리 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이렇게 많이 하니까 조금 아파."

"아 그래? 그럼 바로 뺄게."

"아니야. 해. 해도 돼. 근데 자기야 지금은 한 번만 하자."

"응 알겠어."

수빈이는 침대고 소파고 죄 몇천 몇억짜리 가구만 쓰는 사람이라, 우리 집 몇십만 원 싸구려 침대 허리 아프다 이럴 줄 알았는 데,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도리어 집은 학생들 사는 집 같다. 어딘가 아늑해서 좋다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나의 공간에 녹아들었다.

"아아~ 하~"

과하지 않고, 무엇보다 서둘지 않는 느긋하고 편안한 사랑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자기야. 이렇게 부드럽게도 할 수 있어?"

"아프다며."

내 볼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아 팔뚝에 키스 마크를 남기려고 하니. 수빈이가 질색하면서 몸을 뺏어 간다.

"아하하. 이건 안 돼. 나 내일 부모님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

"아 그래서 오늘도 이런 옷을 입고 나왔구나. 난 에어컨이 추워서 그러는 줄 알았지."

"자기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어우야. 자기 어디 나일강 갔다 왔어. 몸이 왜 이래?"

"하하하하! 야!! 너 진짜?"

쪽쪽 볼에 키스를 해 주며 어르고 달래 다시 섹스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으응 응! 자기야 이제 그만!!"

머리를 마구잡이로 쓸어 올리며 매끈한 그녀의 겨드랑이가 오픈된다.

내가 허리를 밀어 올릴 때마다 뽕브라에 가려진 가슴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상반신을 지탱하는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붙잡고 템포를 올렸다.

수빈이는 목을 꺾으며 신음 소리를 올리고.

이틀간에 걸친 사랑을 마감한다.

"아아 아!! 자... 자기야!! 으음~!"

* * *

"8번을 했다는 사람은 거기가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가죽이라도 붙었으려나?"

"그렇게 아팠어?"

머리를 살랑살랑 쓸어 넘겨 주며 물어보니 수빈이도 눈을 껌벅이며 말한다.

"후후... 이제 와서 다정한 척하긴 너무 늦은 거 아닐까?"

"미안. 중간까진 좋았는데..."

"괜찮아 마지막만 조금 아팠어. 좋았어."

"그럼 하지 말자고 하지."

"하고 싶은 걸 어떻게 하지 말자고 그래."

수빈이가 그곳을 막아 둔 휴지들을 붙잡으며 일어났다.

"자기를 또 내 안에 담고 싶었거든."

"..."

"왜?"

"자기야... 임신하고 싶어?"

"아하하하! 제발 말을 그렇게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이틀 연속 시간의 텀은 있지만 총 다섯 번 질내 사정을 받아 준 사람이 나를 담고 싶었다라...

뭔가 이해가 안 가는데?

"왜?"

"그냥 자기가 내 안에서 막 그렇게 꿈틀꿈틀하는 게 좋아."

"...수빈아."

"하하! 왜? 마하 씨?"

"혹시나 싶어서 그러는데 나 보면 불안해?"

"..."

수빈이가 다가와 입을 맞추며 말한다.

"자기는 날 두 번이나 버리고 간 사람이야."

"에이. 그걸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자기야. 자긴 내가 어딜 가나 예쁘고 당당하고 그럴 거 같지?"

"어."

"안 그래. 난 생각보다 많이 불안하고 고민도 많고 그러면서도 지기 싫고 걱정도 많은 애야."

"꼭 저거 같네. 그거. 저거 뭐냐."

"뭐?"

"심리 테스트. 당신은 알고 보면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아하하하하!"

수빈이가 배꼽을 잡고 쓰러진다.

"뭐야? 그게 그렇게 웃겼어??"

"하하하! 자긴 진짜 어떻게 그렇게 날 볼 수 있어?"

"아니. 그런 거 보면 꼭 그렇게 말하잖아. 오늘의 운세나 심리 테스트나. 오늘 집안에 슬픈 일이 생기지만 직장에선 기쁜 일이 있을 겁니다."

"맞아 맞아. 오늘은 좋은 기회가 오지만 놓친다고 해서 아쉬워할 건 없습니다."

"세상 범띠는 다 똑같은 운명을 따라가는 거지."

"아 자기 호랑이띠야?"

"응."

"별자리는?"

또 4-3-2-1의 연애를 하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아 가고 있었다.

"자기야. 뭘 그렇게 불안해해?"

"모르겠어. 자기만 보면 그런 기분이 느껴져."

"사람 다 똑같지 않을까? 애초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어.

나만 해도 일상이 곧 불안이지."

"자기는 뭘 그렇게 걱정하는데?"

"부상도 있고. 뭐 잘못 먹어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훈련 하루 이틀 쉬면 몸 컨디션 떨어지지 않나 하는 것도 있고."

"으음. 근데 그건 운동선수니까 당연한 거 아닐까?"

"사랑도 똑같지 뭐.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고."

"..."

"빛과 그림자는 떨어질 수 없는 거야."

음양의 정신이다.

모든 것이 다 양면성이 있다.

남녀도 그렇고, 빛과 어둠도 그렇고. 사랑과 아픔도 늘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럼 자기는 그 불안을 어떻게 떨쳐 내?"

"그래서 훈련하잖아. 그러니까 단련을 하는 거야."

"..."

"약해진 마음은 강한 의지가 있어야 견딜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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