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타는 청춘 (6) >
"후우. 헉. 후우! 훅!!"
"오~ 고익범. 무게 빡시게 드는데?"
"빡시게 해야지!! 누구 때문에 기사까지 떴는데. 훅!"
"하하하! 그게 나 때문이냐? 니가 그날 잘하니까 기자들이 찾아왔겠지."
"아무튼!! 후욱!"
휴학중이지만 육상부 활동도 있고, 나도 훈련을 위해선 역시 학교만한 시설이 없는지라 시간 날 때마다 등교중이었다.
체력단련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익범이를 만났다.
"잡아줄까?"
"후욱!"
"천천히. 그렇지. 숨 들이 마쉬고."
NICE 행사장에서 브라운 제임스와 호흡을 맞춘 익범이에게 프로구단의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나 애가 요즘 굉장히 몸 관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좀 쉬자. 땀 때문에 봉이 미끄럽다."
"후우! 후우~!! 이것만 하고."
"오케이 오케이. 천천히."
쩔렁~! 바벨을 내려놓은 익범이가 수건을 들어 땀을 닦아내며 웃었다.
"후우~ 후우~ 야 이거 진짜 운동 된다."
"그럼. 근데 갑자기 무리하지 마라. 부상 온다."
"명색이 농구 선순데 육상보다 점프력이 낮아서야 쪽팔리니까."
"무릎 조심해. 알지?"
"당연하지. 야 근데. 그런 기사 하나 뜨니까 마음가짐이 달라지긴 하더라."
"그치. 누가 지켜보고 있다는 게 진짜 좀 있지."
"넌 참 대단하다... 긴장 안 되냐?"
"난 누가 봐주는 게 좋아서 더 열심히 하는 것도 있어."
"하하하! 유명인이 확실히 다르긴 하네."
익범이는 몸이 식기 전에 다시 운동을 이어갔다.
"벌써?"
"열심히 해야지! 그래서 다음에 또 그런 파티 할 거야!! 이번엔 내 능력으로! 훅!"
"그래. 그게 바로 올림픽 정신이다."
낮동안 열심히 땀 흘리고 저녁엔 수빈이를 만나 강남으로 향했다.
오늘은 남수와 베일에 쌓여있던 은정이와 약속이 잡혀 있는 날이었다.
원래는 셋이서 간단하게 보기로 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수빈이까지 포함 된 더블데이트가 되고 말았다.
학교 앞에 포르쉐가 도착하자 주변의 시선이 몰리지만. 그녀와 함께하다보니 이런 분위기도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 같다.
"자기야~!"
"어우. 힘들다."
"으음~ 샴푸 냄새. 씻었구나?"
"씻어야지. 바로 약속 가는데."
"흠. 그냥 이대로 집으로 데려가고 싶다..."
"안돼. 오늘 약속도 정말 오랜만에 잡은 거라고 했잖아. 끝나고."
"좀 쉬어. 이거 마실 거."
"오 땡큐."
포르쉐가 출발하며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 앉았다.
"아 익범이 새끼 열 올리는 바람에 나까지 무리했네..."
"오늘은 익범이랑 같이 운동했어?"
"응. 애가 뭔가 각성을 한 거 같더라고."
"근데 자기야. 오늘 진짜 내가 가도 되는 자리 맞어?"
"뭐래. 같이 가고 싶어서 차까지 끌고와서 태워놓고. 나 그냥 지하철 타고 간단하게 갔다 온다니까."
"후후후. 힘들게 왜 고생해. 그리고 자기 친구들 보고 싶었단 말야."
형과 수정이 누나가 다녀가고 난 뒤 수빈이는 내 주변 사람들에 관심이 커지는 것 같았다.
"먼저 나 공연할 때 왔던 그 친구 맞지?"
"맞어. 박남수."
"그럼 남수가 자기랑 젤 친한 사람이야?"
"누구 하나 뽑긴 애매하고. 넷이 비슷비슷해. 그래도 남수랑 성향적으로 잘 맞는 건 있어. 태윤이랑 정석이가 유머코드가 비슷하고. 친하긴 다 친해."
"자기 친구들은 어떤 애들이야?"
"그냥 병신들이지 뭐. 크하하하!"
"남자들은 꼭 친구를 그렇게 말하더라."
"사실이니까. 하하하!"
나보다 더 베스트 드라이버인 수빈이는 막히는 길도 슉슉 잘 찾아 들어간다.
"어우. 방금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친구 보러 간다니까 좋은가 보네."
"왜?"
"표정이 더 개구지는 거 같이 보여."
"내가 개그지라고?"
"썰렁한 놈당 좀 하지 마. 짜증나..."
"하하하! 왜? 아 운전이나 살살 해."
아무리 포르쉐 드라이버 한수빈이라도 한강 넘어가는 퇴근길은 답이 없다.
막혀있는 도로 위에서 겸사겸사 친구들에 관한 이야길 해줬다.
"그래서, 나 빼고 셋이 맨날 형네 모여서 술 먹고 그래. 평범한 애들이야."
"자기도 없는데 오빠네를 간다고?"
"얘네는 옛날부터 그랬어. 나 없어도 그냥 형한테 가서 밥 먹고 오고. 배고프다고 찾아가서 고기 구워먹고. 대학생 되고나선 그냥 거기가 지들 아지트가 됐지. 애들끼리는 방학이고 주말이고 자주 모인다고 그러더라고."
"자기는? 자기는 왜 빼? 자기도 대학생인데?"
"난 서울에 있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선수권이 있었고. 6월부터 태릉 갔는데. 남수도 그날 예술의 전당에서 보고 처음 보는 거야."
"으음~ 어색하지 않어?"
"뭐가?"
"그렇게 자주 못 보던 친구들 가끔 보면 어색하거나 그런 거 없어?"
어찌어찌 한강을 건너와도 강남으로 진입하는 테헤란로는 더 막힌다.
"세상이 뻘겋네... 차 진짜 막힌다."
"그래도 차 타고 오는 게 편하지?"
"편하지. 어쨌든 부대끼는 건 없으니까."
"후후. 나 고맙지? 그치? 나 착하지?"
"그럼. 아. 한수빈이 최고지."
"후후후. 그래서?"
"한수빈은 여신이고. 다산의 여왕이자. 퀸. 선덕여왕."
"이상한 소리하지말고, 하던 이야기나 이어서 해."
친구들 보는데 어색한 거 없냐라? 없다. 얘네랑은 오늘 보고 죽기 전 날 봐도 '병신아 죽냐?' 이런 농담 할 수 있는 놈들이라고 해줬다.
"흐음."
"진짜 친한 애들이란 뜻이야."
수빈이가 은은하게 돌아보며 말했다.
"소중한 사람들 같네."
"소중하지. 개새끼들이라 문제지만."
"..."
"그래도 아테네 때 생각하면 나름 감동을 주는 놈들이야."
"나도 자기 응원하러 갔었는데?"
"하하! 그러니까 내가 자기한테도 감동받았던 거잖아."
"가만보면 은근 사람이 계산적이야..."
"내가 뭘 계산을 하냐. 마음이 어쨌든 그런 부분이 있다는 거지."
"나는? 나는 어떤데?"
"하하하! 한수빈은 나의 사랑이자 연인이고. 정혼자요 춘향이에 심청이"
"심청이는 왜 들어가. 진짜 썰렁한 농담 잘해"
"콩쥐팥쥐 백설공주. 아무튼 다다 다."
친구들 이야기에 수빈이도 싱글벙글 웃고있고, 반응도 나쁘지 않은 터라 나도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블데이트라니까? 우리가!! 하하! 진짜 그게 지금 믿기지가 않어!"
"친구들이랑 같이 여자친구 만난 적 한번도 없었어?"
"없어! 우리가 여자친구가 어딨어! 다 인기 없던 놈들인데. 그나마 남수가 한명 사귀긴 했지만."
"자기도 여자친구 만났었잖아."
"그때는 또 남수가... 크하하! 남수 가오를 생각해 여기까지만 하겠어."
"자기가 좋아하는 건 여기 나도 있어서야?"
"그렇지."
"후후후. 좋다."
진짜. 살다보니 우리가 이런 날도 오는구나.
정석이도 여자친구 있으니까 셋이 만나도 여섯이 되나?
크하하! 김태윤 이 새끼 너 그래서 어디로 도망쳤냐?
"와 진짜. 언젠가 다들 결혼도 하고 애들도 있고. 가족여행도 가고. 그런 순간이 올까?"
"살다보면 오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온다라... 생각만해도 가슴이 울컥울컥 해진다."
"은정이란 친구는 몇 살이야 그럼?"
"그러고 보니 자기가 젤 누나네? 은정이도 우리랑 동창이니까."
"내가 맏이라. 그건 좀 싫다..."
"자기는 어딜가나 막내였어?"
"아무래도 막내 아니면 동갑이거나 늘 그랬지."
"자기는 왜 친구들한테 나 소개 안 시켜 줘?"
"음. 필요 없는 애들이 많어."
"..."
"진짜로."
친구를 필요로 따지나? 흠.
"그때 음악회 할 때 사람들 많았잖아."
"걔들은 그냥 사교계 애들이야. 친구라고 부르기도 애매해."
"오~ 사교계. 근데 그게 뭐야?"
"있어. 그냥 모임 같은 거."
"후계자 모임 같은 건가? 무도회? 살롱? 이런 단어가 연상이 되는데?"
"궁금해? 나가보고 싶어?"
"아니. 부담돼서 싫어..."
"그러니까. 그나마 편하게 연락하는 친구라면 하은이나 다영인데."
"혹시, 패션쇼 할 때 있던 분들?"
"...싫어. 절대 안 보여줄 거야."
"왜?"
"아마 내가 자기 만난다는 거 걔들도 알고 있을 걸? 연락도 없어."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다영이란 분이 나를 좋아했었단다.
하은이란 사람도 그날 자기 애인이 같은 스테이지에 섰었는데, 그쪽 자존심 구겼다고 연락 안 하고 있단다.
"뭐지? 아무짓도 안 했는데 마치 뭔가 내가 잘못 한 거 같은 이 느낌은?"
"괜찮아. 원래 여자들은 남자친구 사귀면 연락 잘 안 해."
"신기하다. 난 시간만 있으면 애들 맨날 보고 싶은데."
"진짜? 내가 있는데?"
"완전 다르지. 자기랑 친구들이랑 어쨌든 뭔가 그 즐거움이 틀려."
"나랑은 야한 짓만 하고 싶지."
"하하! 뭐야 그게? 내가 그러냐? 자기가 더 하자고 그러면서!"
"싫어. 그럼 아무도 못 만나게 할 거야."
친구에 관한 주제가 나오다보니, 그녀의 또 다른 친구들이 궁금해 물어보았다.
"도형이 형은? 클럽 멤버들?"
"거기는 이제 연락도 안 해. 몰라. 잘 살고 있겠지 뭐."
"와... 한수빈 이 차가운 여자. 너무한 거 아냐? 그렇게들 친하게 지냈으면서?"
"친하면 뭐. 이번에도 행사 때 오빠 연락했는데. 봐. 안 왔잖아."
"왔는데 못 만났을 수도 있지. 그날 사람 많았으니까."
"그 오빠가? 나한테 연락도 없고 얼굴도 안 보여줬다는 건 안 왔다는 소리야. 기껏 우리 자기가 초대했는데."
"일이 있었겠지."
"왜? 자기 도형이 오빠 보고싶어? 연락해 봐?"
"됐어. 아무렴 내가 내 여자친구 다른 남자들 사이좋게 지내는 거 좋아하겠어?"
"후후. 그러니까."
수빈이가 애들을 어떻게 볼까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걱정도 조금 드는 게 사실이었다.
형이나 수정이 누나가 말했던 마음의 병이란 대체 뭘까?
내가 느꼈던 과격한 인식과 같은 것이려나?
"자기야."
"응?"
"혹시 뭔가 막 우울하거나 불안하거나 그런 거 있어?"
"내가 그런 걸 느낄 사람 같애?"
"음. 아니."
"난 자기만 딴 짓 안 하면 돼."
"내가 뭔 딴 짓을 해? 운동할 시간도 없는데."
운전중이던 사람이 갑자기 팔을 꼬집는다.
"아야? 뭐지?"
"너. 그날도 내가 진짜 봐준 거야. 알어."
"뭐? 언제?"
"그날 브라운 만났던 날. 이태원에서."
"끝나고 놀 때? 아니 눈앞에서 그런 치마를 입고 돌아다니는데 안 볼 수 있냐고."
"후후후. 자기야 다행인 줄 알아. 그날 내가 기분이 너~무 좋아서 다행이지. 만약 다른 날 같았으면..."
"같았으면 뭐? 호텔에 불이라도 지르시려고?"
"후후. 어쨌든."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질투심이 강한지 아니면 그냥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러는지. 소유욕인지 이게 성격인 건지.
과연 수빈이는 우리 병신들한테 어떻게 행동하려나?
그녀 말대로 소중한 놈들이다보니 일말의 불안이 사라지질 않는다.
* * *
먼저 강남역 카페에 자리를 잡고.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고 있는데, 멀리 남수와 처음 보는 여자애가 오는 모습을 보았다.
"새끼. 왔네."
"어디?"
"저기 아래."
"어디? 나 못 봤어."
"있어 봐. 금방 올 거야."
카페로 들어온 남수 커플과 인사를 나눴다.
반대 편에 앉은 수빈이도 옆으로 건너와 커플들끼리 마주보는 자리가 되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남수가 놀라며 말했다.
"우와~ 하하하!"
"왜? 뭐가?"
"아니. 뭔가 너 이렇게 누나랑 있으니까... 좀 달라 보이는데?"
"그래? 넌 그러고 있으니까 그냥 병신 같은데."
"미친놈아. 하하하!!"
"하하! 지하철 타고 왔냐?"
"버스. 별로 안 막혔어."
남수랑 둘이 이야기를 하는데, 수빈이도 은정이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동창이라면서요?"
"네. 와..."
"왜요?"
"아니요. 그냥... 와... 남수야..."
"하하. 그래서 내가 오는 길에 말했잖아. 누나 진짜 예쁘다고."
"솔직히 놀랬어... 마하도 있고 언니도 이렇게 계시는데. 뭔가 좀 다른 사람들 같아서."
"고마워요. 은정 씨도 남수 씨랑 둘이 잘 어울려요."
"누나 저 그냥 편하게 남수라고 하세요."
"그래도 돼요?"
"말 편하게 하세요. 뭐 어때요."
은정이는 수빈이에 이어 나를 보면서도 놀라고 있었다.
"와... 진짜 마하가 있어. 하하하..."
"왜? 난 왜?"
"은정아. 이 새끼 좆밥이야 긴장하지 마."
"왜 욕을 해... 처음 보는 자리에서."
"얘도 아까 나한테 병신이라고 했어."
"아니냐?"
"죽고싶냐?"
"하하. 아니 그래도. 난 솔직히 마하랑 처음 얘기 나눠 보니까. 학교에서도 거의 못 봤는데."
은정이 이야기에 남수가 웃으면서 말해준다.
"하하하! 마하야. 은정이가 오면서 뭐라는지 아냐? 너 보면 존댓말 써야 하네?"
"야아! 미쳤나 봐. 넌 그런 걸 왜 얘기해!!"
"아 그런 게 어딨어. 우리 다 친군데. 그리고 은정아. 제대로 봤다. 남수가 겉보기엔 깔끔해도 애가 속이 정상이 아니야."
"그러는 니는! 누나 얘는 어떤지 아세요?"
둘이 애정이 담긴 디스전을 펼치고 있는데, 수빈이가 우리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어 확실히 자기 반응이 다른 애들이랑 있을 때랑 뭔가 좀 다르긴 하구나."
"그래?"
"응. 진짜 친하다는 게 보여."
"친하죠. 근데요 누나 우리는 진짜 소프트 한 애들이고... 나머지 두 놈이..."
"하하하! 그것도 내가 얘기했어. 진짜 정신병자는 두 놈이라고."
오가는 대화에 은정이와도 한결 더 편안한 분위기가 되었다.
"은정아 근데 진짜 미안한데. 나 진짜로 너 누군지 몰랐어."
"괜찮아. 내가 뭐 얼마나 특별한 애였다고. 진짜 괜찮아."
"은정 씨는 마하 몰랐어요?"
"알기는 하죠. 마한데. 단지 개인적으론 접점이 없어서. 전 얘도 학교에서 우리 학교 친구라고 하길래 처음에 깜짝 놀랬어요."
"조용히 접근했지. 다가가서 나 구마하 친군데 모르냐면서 어필하고."
"크하하! 너 내 이름 팔고 다녔냐?"
"좀 팔면 안 되냐? 그리고. 우리가 니 이름도 못 파냐?"
"아니. 정식으로 허가서 발급해줄게."
수빈이도 관심 있게 물어보았다.
"왜? 남수가 자기한테 뭘 해줬는데?"
"응원. 아까 얘기했잖아. 수능 100일 앞두고 아테네까지 건너오는 미친 놈들이라고."
"야. 솔직히 응원보단 연애상담이 더 크지 않냐?"
"어이 말 조심해. 너도 지금 여자친구랑 같이 있어."
"함께 가자 친구야. 같이 죽자."
농담삼아 나눈 이야기에 수빈이가 쿡 찌르며 물어본다.
"누구? 자기는 누구 이야기를 그렇게 한 거야?"
"없어. 그냥 하는 말이야."
"아닌 거 같은데? 남수 씨. 마하가 누구를 그렇게 좋아했어요?"
"아~ 아. 농담이에요."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