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53화 (153/401)

< 불타는 청춘 (8) >

다음 날 학교에서 육상팀 훈련하느라 핸드폰을 치워뒀는데 두 통의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정석이와 수정이 누나였다.

수정이 누나는 좀 의외라 나중에 걸어보기로 하고, 우선 정석이 번호를 먼저 눌렀다.

"어. 왜?"

"왜는 뭔 왜야. 니가 걸었잖아 병신아."

"구마. 니네 뭐 남수네랑 둘이 만났었다며?"

"정석아. 나도 궁금한 거 있는데."

"맞어. 선아 맞는데..."

"하하하! 이 미친새끼! 언제? 어떻게??? 아니 둘이서 뭐 이야기라도 했었어?"

"아 씨발놈아 우리가 숨길려고 숨긴 건 아니고... 우리도 너랑 혜정이도 있고 하니까 니네 생각해서..."

"꺼져 병신아! 여기서 이혜정이 왜 나오는데! 제발 나랑 걔랑 역지좀 마!!"

몰랐는데, 선아가 지방대를 다니다 지금 반수중이란다.

지나가다 한번 만났는데, 애가 의기소침해 보이길래 데려가 밥도 먹이고 어쩌고 하다보니 둘의 이야기가 시작됐다고 그런다.

"너 우리 형한테 연애 배웠지?"

"어. 사장님도 수정이 누나 그렇게 꼬셨다고."

"하하하 미친놈. 아니 언제? 언제 그렇게? 둘이 언제부터 만난 거야?"

"좀 됐어. 비밀로 한 지도 좀 됐고."

"하하~ 아무튼. 축하한다."

"야. 이제 너도 알았으니까 태윤이한테는 비밀이다."

"또 왜? 넌 왜 우리끼리 그런 걸 숨기려고 그러냐?"

"아 공돌이 새끼 불쌍하잖아... 니가 몰라서 그러는데. 태윤이 여자 얘기 존나 해. 예전 너는 저리가라야..."

"크하하하! 진짜?"

"아무튼, 다음에 너도 그 뭐 누나라는 사람이랑 한번 와."

"그래. 야 근데 정석아."

"음?"

"수빈이 앞에서 절대 혜정이 이야기는 하지마라..."

"이 씨발년아! 너 설마 여자친구 있는데 걔 만나냐? 그거 바람이야 미친놈아!"

"병신아... 제발 혼자 급발진 좀 하지말고..."

"근데 왜? 왜 하지 말라고 그러는데?"

"얘가 그런 농담을 싫어해."

"나도 싫어해!! 우리도 니랑 혜정이랑 가까운 거 좆같았었어!"

그런 의미에서도 수빈이가 은정이는 몰라도, 선아와 만나는 건 꺼려진다.

마침 선아는 반수 중이라 수능을 얼마 안 남기고 지도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래서 밥만 먹여 보내는 거야."

"완전 수험생 뒷바라지 하는구만... 딸 키우냐?"

"그렇지 뭐. 고기 잘 먹어 그러나 성적은 잘 나오더라고."

"너 그렇게 챙겨주다, 걔 대학가서 남자친구 사귀면 어떡하려고?"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오오~ 오오! 이 새끼 당당한데?"

"남자는 능력이야. 선아가 좋은 대학 가도 내가 멋진 인간이 되면 얘도 딴 짓 못해. 사장님이랑 수정이 누나 같이."

"하하! 아무튼, 다 동창들 만나니까 신기하네. 이 새끼들 그럴 거면 학생 때 연애를 하지."

"아 씨발 남녀공학 나왔으면 이런 맛도 있어야지. 너도 혜정이 만났으면"

"아 제발 이혜정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겸사겸사 근황을 나누면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난 그냥 계속 운동하고 있고, 안 그래도 전부터 수빈이가 형네 가고 싶다고 말한 게 있는데. 곧 전지훈련 가기전에 한번 내려갈까 싶다."

"와. 오면 되지. 근데 무슨 전지훈련?"

"뉴질랜드. 지금 거기는 아직 스키 시즌이라."

"하여간 존나 구마하 주제에 여기저기 잘 나가."

"갈 때 전화할게. 방 하나만 세팅해줘."

"꺼져 병신아. 방 예약은 단골들만 받아줘. 와서 줄 서."

"하하하! 미친 새끼!"

정석이와 통화를 마치고 누나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업무중이신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누나와는 집에 와서야 통화가 이어졌다.

"어. 마하야. 누나 아까 퇴근 중이라서."

"네. 누나. 저한테 전화 거신 거 맞죠?"

"응. 맞어."

"왜요? 형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하하~ 마하야. 살다보니 누나도 이런 연락을 다 받는구나."

형이 아니라, 수빈이가 누나한테 전화해 꼬치꼬치 다 일러바쳤단다.

"아니... 그러니까..."

"알어. 이야기만 들어줬어."

"걔가 그래요? 내가 자기 마음을 몰라주고 뭐라고 했대요?"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모르지. 근데, 수빈이가 서운한 게 있던 건 맞는 거 같애."

"후우... 아니 누나 그건 걔가 서운할 게 아니라."

"둘이 인식이 많이 다르지?"

"하하... 네."

원래 연애를 하면 눈에 콩깍지가 끼어 아무것도 들어오질 않는 시기가 있단다.

조심하게 되고, 좋은 모습만 보게 되고. 그러다 서로가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자기 생각과 상식이 부딪히면서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거야."

"근데 누나... 아니 이건 부딪힐 문제가 아니라..."

"알지. 넌 마윤 씨 동생인데. 누나가 니 마음을 왜 모르겠어. 마하도 답답한 게 많은 거 알지만. 그래도 누나가 여기서 니 편 들어주는 건 너무 편파적이니까. 누나는 수빈이 이야기를 조금 순화시켜 말해주고 싶어."

"..."

"그 남수라는 애 여자친구한테 너희들 이야기를 들었었나 봐."

"우리 무슨 얘기요...?"

아마도 화장 고쳐주느라 둘이 나갔을 때 이야기인 것 같다.

* * *

(은정아?)

(음.)

(말해도 돼. 눈 감고 있다고 입 못 여는 건 아니니까.)

(아 네. 왜요?)

(너도 오빠네 가게 가봤어?)

(오빠요?)

(마하네 오빠. 마윤이 오빠. 몰라?)

(아 네. 자주 가는데.)

(으음. 마하도 없는데 불편하지 않어?)

(아. 근데 마하를 떠나서, 거기 정석이란 친구가 있어서. 남수도 그렇고 김태윤도 그렇고 애들 자주 가요.)

(그래?)

(네. 저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넷이 굉장히 끈끈한 게 있어요. 그래서 구마하 올림픽 나갔을 때도 오빠란 분이랑 넷이서 다 같이 응원해주고 왔다 그러고. 지금도 혹시나 정석이란 친구만 일한다고 혼자 멀어질 거 걱정돼서 더 자주 가서 그러는 거 같은데.)

(으음...)

(근데 얘네들 만나면 맨날 욕하고 싸우고 그러니까 저도 애들 보면서 신기하긴 해요. 마하 없어도 셋이서 있어도 똑같고. 오늘 마하 만나도 똑같고. 남수도 저랑만 있으면 그냥 조용한 편인데)

* * *

"...우리 원래 그러는데?"

"그러니까. 수빈이가 그런 게 좋았었다고. 그 친구들이 너한테 해준 것도 다 거짓말이 아니구나 진심이구나. 정말 좋은 애들이다. 라는 걸 느낀 건 아닐까?"

"..."

"밝아 보여도 어딘가 여린 구석이 있는 애니까."

"근데 왜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냐고요... 선물이라고 예정에도 없던 걸 갑자기 막 쥐여주고. 저도 헉 소리 나오는 가게 데리고 가서 애들 기 죽이고."

"설마. 일부러 기 죽이려고 걔가 그랬을까."

"갈 때도 그랬어요. 애들 불편하게 택시 타고 가라고 지가 돈 준다 그러고."

"음. 누나는 그냥 수빈이 입장에선, 돈 말고 다른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닐까 싶네."

"..."

한수빈이니까. 돈으로 살아가는 그녀니까. 그래도 어찌됐든 진심은 진심이라는 건가... 이태원 파티 때도 그랬으니까...

"둘이 잘 이야기 해 봐."

"아니. 뭐 딱히 싸운 것도 아니고요. 저도 그냥 운동 때문에 바빴을 뿐이지..."

"후후. 마하야. 누나가 볼 때는 수빈이가 넌지시 너한테 요구하는 게 있는 거 같애."

"뭐요?"

"넌 얘한테 선물 같은 거 해준 적 있어? 넌 시계 받았다면서."

"아니. 그러니까요 누나. 그런 거 때문에라도 제가 카드 한도 좀 풀어달라고 형한테."

누나가 말하길. 여자의 선물에 가격은 중요하지 않단다.

"진짜요?"

"그럼. 진심이 담겨있으면 여자는 장미꽃 한 송이만 건네줘도 좋아해."

"...우리 학교 여자애들은 죄 명품백만 들고 다니던데요? 여자친구 있는 선배들 봐도 알바해서 백 사줬다 이러고."

"그런 애들도 있지만. 수빈이가 그런 핸드백 하나에 아쉬워할까?"

"음... 형은 누나한테 선물 뭐 해줘요?"

"난 마윤 씨가 명품이니까 상관없어."

"누나. 카드 한도만 풀어주시면 제가 백화점 모시고 갈게요. 옆에서 형 설득 좀 부탁드려요."

"하하! 됐어. 나 혼나."

아무튼, 진심을 담은 선물을 건네주며 둘이 잘 화해하고 한번 내려오란다.

"고맙습니다... 신경 쓰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아니야. 나도 한동그룹 외동딸이라는 애가 개인적으로 연락하니까 신기하고 재밌었어."

통화를 마치고 수빈이한테 전화를 건다.

안 받는다.

[나중에 연락하겠습니다.] 라는 사무적인 문자만 돌아왔다.

"그래. 누가 보더라도 우리는 끈끈한 우정을 가지고 있지..."

인간적인 관계에 목이 마른 친구라고 그때 형이랑 누나가 말했지.

나만 챙기는 게 아니라 정석이까지. 친구들의 그런 든든한 모습이 마음 들어 그녀 나름의 호의를 보이는 과정일 수도 있다.

"후우..."

방법이 아닌 진심이라...

에잇 젠장!

보자. 내일 뭔가 스케쥴이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음."

연애란 첫 눈에 반해 서로 사랑하는 게 전부가 아니구나.

싸울 땐 싸우고. 그리고 화해하고. 그렇게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이 다음 페이지인가.

[왜?]

마침 한수빈에게서 문자가 들어왔다.

[레슨?]

[그냥 교양 수업중.]

[수업이면 공부 해. 문자나 하고 있으면 어떡해.]

답장이 안 온다. 혹시 몰라 [ㅋㅋㅋ] 세 개 찍어 보내봤는데 10분 째 응답이 없다.

"오케이. 삐졌다 이거지."

[자기야. 나 오늘 자기네 가서 잔다.]

그러자 잠시 뒤 연락이 들어왔다.

[나 생리 중.]

아니 그러니까... 제발 그쪽으로 몰지 말라고. 밝히기는 지가 더 밝히면서 왜 매번...

[내일 선릉인가 어디서 광고주 미팅있어서 그래. 오늘 밤 갈게.]

그러자 수업을 마칠 시간이 되어 바로 전화가 들어왔다.

"그래서?"

"차 가져 갈 거니까 교문에서 보자고."

"..."

"뭐야? 왜 말이 없어? 끊겼나."

"듣고 있어."

"자기 차 가져왔어?"

"어."

"세워놓고 내일 가져가. 내가 내일 올 때 데려다주면 되니까."

"주차비 나가."

"돈도 많은 사람이 그게 뭐 아깝다고..."

"나도 주차비는 내기 싫어."

"알았어. 알았어. 그럼 집으로 와."

"그냥 우리 집에서 만나. 어차피 그리로 올 거라면서."

교문으로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청담동으로 오란다. 꼴도 보기 싫다는 건가?

에이 잘 됐어. 어차피 가는 길에 살 것도 있었는데.

수정이 누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나한테 옷도 사주고 시계도 주고, 틈틈이 밥 사먹여 좋은 곳 데려가. 많은 것을 해주는데 나는 아직까지 수빈이한테 뭐 하나 선물이라고 준 게 없다.

있다면 그냥 같이 섹스나 질펀하게 하는 거? 그걸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근데 선물이라고 뭐 해주기도 진짜 애매한 게.

원체 저쪽에서 건너오는 것들이 가격이 만만치 않으니까 비교돼서 말이지...

그래서도 한도 좀 풀어달라고 했던 것도 있는데...

"네. 어서오세요."

"아. 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아. 저 그게... 예전에 여기 공항에서 봤는데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어야지.

일단 가지고 있는 예산에서 해결을 보자.

기억을 더듬어 보면 적어도 수빈이네 집에 이런 건 없었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줄 선물을 사러 왔다.

대회 때문에 오가며 공항 이용하다 면세점에서 보았던 반짝거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크리스탈 공예품. 스와로브스키였다.

"뭔가 이런 작은 곰이 하트 같은 걸 들고 있었는데요."

"아. 잠시만요. 이 모델 말씀하시는 거죠?"

"어! 네! 맞아요. 이거 얼만가요?"

휴... 다행이다. 십몇만 원 안팎에서 끝나긴 한다.

그래도 비싸긴 하네. 이 쪼그만 유리 조각이 십 몇만 원이라니...

"음. 잠시만요."

"네."

"으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작지 않나 싶어 물어보니 장미꽃도 있단다.

"아 그런 것도 있어요?"

"네. 보여드릴까요?"

오오~ 이건 좀 있어 보이네. 크기가 있어.

가격을 물어보니 이것도 이십 얼마 정도 하고 있었다.

합쳐서 삼십 만원 대.

"네. 둘 다 포장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 여자친구 선물이라 포장 좀 어떻게...?"

"네. 예쁘게 준비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남수가 은정이를 만나 첫 데이트 때 곰 인형을 선물해 줬다고 했었다.

애들도 아니고 그런 걸 왜 주냐 물으니, 잘 때 준 사람을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란다.

수정이 누나는 장미꽃 한 송이라도 진심이 담기면 좋아한다고 그러고. 남수는 곰 인형이라 그러고. 둘 다 어떻게 하다 보니 기억 속에 본 건 있고.

"..."

"그래서 내 나름 곰 인형과 크리스탈 장미 두 가지를 준비했는데."

"...갑자기 왜?"

"나도 선물."

"......"

청담동 수빈이네 집에 들려 쇼핑백을 내밀었다.

그녀가 말 없이 식탁으로 건너가 포장을 뜯어본다.

"은근히 살살 뜯네."

"난 선물 포장 막 뜯는 사람 아니야."

긴장되네. 싫어하면 어쩌나 떨리는구만. 선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수빈이가 두 가지 크리스탈 공예품을 손에 쥐었다.

어이 씨 근데 뭐야? 매장에선 존나 비싼 거 같이 번쩍거렸는데, 집에 오니까 그냥 유리 덩어리 같잖아.

"아. 이거. 이게 그러니까."

"..."

"그. 저기... 싼 거긴 한데... 근데 일단 자기도 알다시피 난 지금 자금이 동결된 상태라."

"자기야..."

"응?"

"이게 뭐야...?"

"장식품. 크리스탈이라고."

"재료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걸 나한테 왜 줬어?"

"그러니까 선물이라고."

"왜?"

"여자친구니까."

언젠가 가지고 있는 핸드백 중에 젤 비싼 게 얼만지 물어본 적이 있다.

1억 넘는 건 자기도 없다고 하길래 서둘러 주제를 바꿔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신발장과 드레스 룸을 가득 채운 구두도 기본이 백만 원부터 시작한다.

옷은 또 어떤가. 액세서리는 또 어떤가.

집에서 대충 잠옷으로 입는 반팔 티 한 벌이 몇십만 원을 호가하는 그녀였다.

수빈이가 유리 장미를 둘러보고, 또 곰돌이를 들어보고.

두 개를 같이 테이블 위에 놓아 쳐다보고. 다시 들어보고.

한참을 그렇게 둘러보다 나를 보는데,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나도 형이 돈만 좀 쓰게 해주면..."

"자기야. 나 이런 거 처음 봐..."

이런 싼 물건을 처음 본다는 뜻인가 싶어 뻘쭘히 고개를 피하는데.

"음?"

갑자기 수빈이가 와락 끌어안으며 키스를 막 퍼부었다.

"저기. 잠깐만. 잠깐 자기야?"

"너무 예뻐... 진짜 나 저런 거 처음 봐! 어떻게 된 거야? 나 주려고 산 거야? 진짜로?"

좋아하는 건가? 다행이구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