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을 앞의 그림자. (2) >
"감독님. 그럼 일정이 어떻게 되는 거죠?"
"여기는 전지훈련 갔다와서 봐야겠지."
"전지훈련이라. 흐음."
"정준 씨가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대기하고."
"네."
미팅을 마치고 감독님과 로비로 내려왔다.
그러자 바로 앞에서 화려화려한 수빈이가 두 팔 벌려 반겨준다.
"꺄~ 자기야~~!"
"하하하... 데리러 간다고 기다리라니까..."
"어이고 어이고. 좋을 때다."
보는 사람들도 있고, 감독님이 계시는데, 참 수빈이는 주변이 보이질 않는 것 같다.
"아 왜 이래. 왜 이렇게 매달려..."
"싫어?"
"수빈 씨 오랜만."
"감독님 안녕하셨어요."
"하하. 그래도 내가 보이긴 보이나보네."
"일은 어떻게 되셨어요? 계약 하셨어요?"
"했지. 근데 바로는 못 들어가고. 여기도 겨울 시즌 생각하고 만드는 거라."
서로를 대하는 감독님이나 수빈이나 표정이 먼저보단 한결 편해보였다.
그럭저럭 이제 소통이 돼서 그런가?
흠. 좋은 징조네.
"오늘 둘이 어디 가냐?"
"아. 형네 가려고요. 전부터 간다고 했던 거라."
"형님 만나면 내 인사 전해드려."
"감독님도 같이 가실"
"자기야! 차 막히겠다. 얼른 가자! 성남 멀어."
"아니... 강남 바로 아래가 성남인데 그게 뭐가 멀다고..."
감독님이 먼저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제발 같이 가달래도 싫다. 수빈 씨. 나도 결혼 할 사람 있어. 무시하지 마."
"죄송해요. 근데 오늘은 둘이 있고 싶어요."
"언제는 안 그랬나. 간다. 재밌게 보내라. 운전 조심하고."
"네. 감독님."
"안녕히 가세요~~."
* * *
"여기가 내가 말했던 거기. 짜장면 곱베기 한 젓가락에 다 먹으니까 사장님이 막 뭐라고 했다는."
"맛있게 먹은 걸 왜 뭐라고 해?"
"하하! 씹고 먹으라고. 만든 사람 성의는 생각도 안 하냐고. 그리고 저기가 그때 처음으로 운동하고 와서 배고파서 막 맨손으로 주워먹었다는 분식집. 아줌만 바뀌었어."
마침내 성남. 어디 멀리 귀경이라도 온 것마냥 동네 구석구석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 큰길로 맨날 남한산성까지 뛰고 오는 거야. 늦으면 지각이니까."
"엄청 부지런했구나... 금메달이 그냥 받은 게 아니었네."
"저긴 우리 초등학교. 고등학교는 여기서 멀어."
"으음. 운동했단 학굔 줄 알았어."
"한주 고는 용인으로 가야 해. 경계라 바로 앞이긴 한데. 지금은 그다지."
"뭔가 여기는 확실히 사람 사는 동네 같다."
"어? 이건 무슨 뜻이지? 청담동 아가씨?"
"조용해 보여. 소박하고."
"당연하지! 원래 성남이 '시'고 분당이 그 안에 속한 '구'야. 단대 오거리는 단국대가 아니라."
"뭔 소리야 갑자기?"
"성남도 판교 이런 데 개발 많이 하고. 고속도로 타고 오면 서울보다 성남이 더 먼저 보이고. 물론 고속도로 옆은 분당이지만."
"알았어. 안 무시해. 진정해."
꾸물꾸물 차를 끌고 가 마침내 형네 가게에 닿았다.
"저기다. 그치 맞지?"
"아니 여기가 뭐라고... 그냥 동네 사람들 밥 먹고 술먹는 데가 뭐라고 자꾸 여길 오자고..."
저녁 전이라 손님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정석이와 매니저 형. 그리고 다른 직원들이 앉아서 쉬고 있는 게 보였다.
"오빠는 안 보이네?"
"어. 일 있다고. 저녁에 온다고 그랬어. 놀고 있으래."
"누가 정석이야?"
"쟤. 띨빡하게 생긴 놈. 뭐? 나더로 줄을 스라고? 이 새끼. 우리 형 가겐데..."
"저 뚱뚱해서 머리 노란 사람?"
"아니. 그 옆에 좀 이상하게 생긴 놈 있잖아."
"흠. 남수랑은 이미지가 다르네."
"자기야 우리 잠깐 카페 좀 들렸다 가자."
"여기까지 와서?"
"사람들 커피 좀 사다주려고."
카페에 와 수빈이는 화장실을 이용하고, 난 형들이나 다른 알바분들 줄 음료수를 챙겼다.
그리고 가게로 넘어와 하나 씩 사람들게 건네주는데.
"고맙다 잘 마실게."
"뭐야? 내 껀?"
"뭐. 닌 니가 사마셔."
"어~ 씨발새끼 너 잘 걸렸다. 우리도 이제 CCTV 달았어. 개새끼 뉴스에서 보자. 구마하 동네 상권에 와서 갑질."
"꺼져 병신아."
가게에 들어와 정석이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녀석이 자꾸 뒤를 두리번 거린다.
"근데 왜 혼자냐? 여자친구는?"
"같이 왔는데. 어? 얘 어디갔지?"
"하하하! 어이 구마. 드디어 미친 거냐? 너 시몬이란 영화 봤어? 가상의 존재를 진짜라고 믿는"
"자기야. 여기 옆에는 뭐야?"
가게 앞에서 잠깐 딴 길로 샜던 수빈이가 뒤따라 들어와 물어본다.
"어. 거기 그냥 사무실일걸? 정석아 여기 옆엔 뭐하는데냐?"
"..."
"야."
"어이... 저 분은 누구시냐...?"
"내 여자친구잖아."
"죽을래? 이 새끼가 아직도 장난질을..."
"뭔 장난?"
정석이가 날 툭 밀치며 수빈이 앞에 가서 물어본다.
"저기요."
"네?"
와... 역시 우리 정석이... 수빈이를 쳐다보면서 당당하게 저기요라니... 진짜 언제 어느 때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미친놈이 아닐 수 없다...
"얼마 받았어요?"
"네? 뭘요?"
말릴까? 아니 그냥 한번 둬 보자. 어디까지 폭주하나 이제는 궁금해진다.
"배우죠? 맞죠?"
"아. 아니요..."
"잠깐 여자친구 인 척해달라고 한 거 맞죠? 괜찮아요.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자기야..."
수빈이가 쫄았어...?
역시 이 새끼는 위험해...
"어? 왜 구마 뒤로 가시지?"
"여자친구니까 그러지! 처음 만났는데 예의 좀 지켜!"
"진짜냐? 진짜 니 여자친구 분이셔? 뭔가 이상한데?"
"정신과 약 좀 챙겨 먹고 병신아!!"
방으로 들어와 앉아 있는데, 수빈이가 문 밖 흘깃흘깃 반찬과 이것저것 상을 차리는 정석이를 훔쳐본다.
"..."
"그러니까 저 새끼 딴에는 이제 자기가 예쁘다는 표현인데..."
"자기야. 날 놀래키는 남자애가 또 있다니..."
"미안. 내가 사과할게! 부모님은 괜찮으신데, 저 새끼가 어렸을 때 뭘 잘못 처먹어서!!"
"뭔가. 진짜 음... 역시 세상은 넓구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몰라도, 일단 수빈이한테 정석이가 큰 인상을 때려 박은 건 맞는 것 같다.
"음. 뭔가 으음. 어? 자기야. 오... 온다..."
수빈이가 고개를 피했어...?
"하하! 많이 기다리셨죠! 원래 방은 단골 아니면 안 주는데. 제가 수빈 씨 생각해서 내드렸습니다."
"뭔 개소리야 병신아 손님도 하나도 없구만."
"안 닥쳐?"
남수야... 뭐해? 은정이랑 둘이 빨리 와...
치익~~! 상을 차려준 정석이가 불판위에 고기를 올렸다.
"줘. 내가 할게."
"이 새끼가 건방지게. 야. 니가 나보다 고기 잘 구워?"
"하하하. 미치겠네. 어! 내가 너보다 잘 구워!"
"마하야. 넌 운동 선수잖아. 까불지 마. 뒤지기 싫으면."
"하하하하!!"
"수빈 씨?"
"네?"
"진짜 얘랑 사귀는 거 맞죠?"
"아. 네..."
"야. 너 나가. 아 형! 얘 좀 데려가요!! 일하는 시간에 와서 뭐하는 거야!"
"뭐 어때 손님도 없는데, 그냥 놀아."
"그럼 경찰이라도 불러주든가!!"
매니저 형 말대로, 손님이 없으니 정석이가 그냥 옆에 앉아 머물고 있다.
"수빈 씨."
"아. 네..."
"술 좋아하세요?"
"..."
"술 한 잔 드릴까요?"
"아니요. 지금 몸이 좀 안 좋은 상황이라."
"으음. 그러시구나. 넌 운전해서 못 마실거고."
"너도 일하는 중이라 못 마셔."
하하 진짜 한편으론 정석이의 이 무대뽀 정신이 존경스럽기도 하다.
과연 수빈이 집안을 알고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마하가 잘해줘요?"
"네. 잘해주죠."
"아니요. 속고 계신 거에요. 이 새낀 본성이 쓰레기라"
"이 씨발놈이! 나도 더는 못 참어!!"
"크하하하하! 보셨죠!! 그러니까 새끼야! 누가 내 커피만 빼먹으래!!!"
"장난이었지!"
"난 진심이다!"
둘이 한참을 투닥거리고 있으니 수빈이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했다.
"큭큭큭 진짜 뭐야. 왜 만나자마자 싸워?"
* * *
구마하 커플이 이정석과 만나 웃고 떠드는 동안.
서울 청담동 강세준의 아파트.
"어. 왔냐?"
"팔 걷어 봐..."
"아 안 했다니까."
이도형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강세준의 옷을 걷어붙여 주사자국이 남은 팔꿈치를 보았다.
"너 진짜 돌았냐...?"
"아 뭐. 괜찮아 요즘 애들 다 해."
"다 하면. 너도 해야되는 거야."
"괜찮다니까. 너도 해볼래? 진짜 완전 달라."
원래도 대마를 피던 세준이였는데, 이제는 약까지..
"미친 놈."
"아 욕 좀 하지말고."
"..."
"도형아?"
"왜..."
"원석이가 그러는데. 너한테 얘기하라고. 아버지가 해결해 주셨다고."
"...너도 출국금지 걸려있냐?"
"그러니까 씨발. 하루 이틀인가."
"너 이 새끼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 욕 좀 하지말고. 원래 친구끼리 좀 도와주고 그러는 거지."
한 놈은 여자 한 놈은 약...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아니 원래 이런 놈들인데 내가 눈이 뜨인 건가... 그 자식을 만나서...
"몰라. 니네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그런 용건으로 불렀으면 나한테 다시는 전화하지 마."
"야. 우리 아버지 지금 수사중인 거 너도 알잖아."
"그럼 부자끼리 나란히 서초동이나 가든가!!!!"
버럭 소리를 질대는 이도형을 향해 강세준이 눈을 흘겨 떴다.
"이 새끼. 애들 말이 맞구나?"
"뭐가."
"너 저 뭐냐. 아 그 새끼 이름이 뭐지... 어. 구마하. 수빈이 구마하한테 뺏기고 완전 무너졌다며."
"세준아. 하나만 물어보자. 도움이 필요하다고 불렀는데, 날 자극하는 이유가 뭐냐?"
"뭐. 아 걱정마. 구마하 그 새끼 별 거 아냐. 수빈이 곧 니한테 돌아와."
"후우..."
"진짜라고. 그 새끼도 약 해. 나랑 똑같애."
"뭐?"
강세준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공부 좀 작작하고 뉴스도 좀 보고 살라고."
"뭔 소리야... 내가 뉴스를 왜 안 봐..."
"아. 아아~ 그렇구나. 미안 미안. 아직 한국은 모르겠구나."
강세준이 노트북을 펼쳐 유럽 발 스포츠 기사를 클릭해 건네준다.
"이 나라는 참 느려. 좆같애 진짜."
"이게 뭐야?"
"봐. 너 영어 하잖아. 유학생인 나보다 더 잘 하면서."
약에 취해 비틀대는 친구를 피해 기사를 읽었다.
세계육상총재가 언론을 만나 작심 발언을 꺼내들은 내용이었다.
『우리는 아직도 과거 냉전 시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대국의 갈등은 공정한 스포츠 세상에 약물의 그림자를 남겼다. 미래를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남겨진 모든 기록을 지우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올림픽엔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세워놓은 몇 몇 깨지지 않는 공식기록들이 있다.
아무리 스포츠가 발전하고 기술이 발달해도 상식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수치에 사람들은 음모론을 덧붙여 약물이 WR 간판을 걸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스포츠는 선수와 국가를 넘어 구시대의 부정과도 싸우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이게 뭔데?"
"뭐긴 뭐야. 그 새끼도 약물이지."
"뭔 소리야? 이게 구마하랑 무슨 상관인데?"
"야. 넌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듣냐. 그 새끼가 지금 육상 챔피언이잖아. 근데 다름아닌 세계육상총재님께서 말하잖아. 결국 그 새끼도 약물이라는 거지."
"너는 구마하가 여기저기 우승하고 다닌 게 전부 약물 때문인 것 같냐..."
"당연하지! 아니고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단기간에 잘 할 수 있어? 한국 놈이 세계대회에서 어떻게 메달을 딸 수 있어?"
"..."
"운동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놈이? 챔피언이 되고 금메달이 된다고? 씨발 백퍼 약이야."
"세준아... 올림픽 도핑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야. 우리도 존나 빡세. 근데도 숨길라면 얼마든지 숨기는 놈들 존나 많어."
그건 너희가 숨기는 게 아닌 검찰이 봐주는 거겠지... 누군가의 입김과 청탁을 통해서...
차마 더러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도형에게 강세준이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나라가 하는 거야. 다 씨발! 이 코리아라는 민중들을 위해서! 똑똑한 새끼들이! 다 뒤에서 몰래몰래 만드는 거라고!!"
"그래서 구마하가 약물이든 아니든 어쩌라고 나더러..."
"짜증나게 굴지마 병신아!! 넌 우리 중에 젤 머리좋은 새끼잖아!"
"..."
"똑똑한 새끼가. 별것도 아닌 놈 때문에 의기소침하게 구는 모습이 날 존나 좆같게 만들고 있으니까 그만 좀 해!"
강세준은 혼자 버럭버럭 감정에 미쳐 소리를 지르더니 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수빈이는 너한테 꼭 돌아오니까... 슬퍼하지 말라고. 나도 가슴이 아프니까..."
이도형이 차분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세준아. 세상에 그런 애들이 있어..."
"어떤 애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 같은 짓을 해내는 애들이 진짜로 있어... 천재같은 애들이."
"있겠지. 누가 없데?"
"사람들이 다 너 같은 게 아니야... 무엇보다. 수빈이가... 걔가..."
"어. 수빈이 뭐?"
"걔가 진짜로 마하를 좋아해."
어느새 눈물도 슬픔도 다 사라진 강세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묻는다.
"뭔 소리야?"
"수빈이가 아무리 싸가지가 없어도. 걔가 그렇게 반해 미친 상대가 기껏 약물일 리가 없어..."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를 이도형의 20대. 좋은 건 돌이켜보니 좋은 것이 아니고. 남은 것들은 좋은 척했던 것들의 지린내를 풍기는 이 비참한 현실.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면 적어도 십년을 간직한 순애정도 밖에 없거늘...
그 순애를 빼앗아 간 것이 약물이란 더러운 이야기가 된다면...
그의 청춘이란 얼마나 비참하단 말인가.
"하하! 너도 걔 팬이냐? 왜 편드냐?"
"간다..."
"열정. 스포츠. 노력! 이런 거 다 구라야 새끼야!! 정신 차려!!"
매몰차게 떠나버린 이도형의 빈자리에 강세준이 쓸쓸함을 느낀다.
"하... 새끼..."
약에 물들어 있다 하더라도 사고능력은 아직 살아있었다.
기쁨은 더 기쁘게. 분노는 더 분노하게.
제정신이 아닌 강세준이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
[대한민국 스포츠의 더러운 현실!!]
"씨발놈이 내 친구를 괴롭혀... 우리 공주님을 데려가..."
[씨ㅁ버 야ㅑㅇㄱ 머고 메달]
탁탁. 백 스페이스를 눌러 오타를 지우면서 강세준이 혼잣말을 주절거린다.
"나도 아직 못 따먹은 애를... 지가? 우리 도형이도 아끼던 걸. 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