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57화 (157/401)

< 노을 앞의 그림자. (4) >

"아~ 먼저 얘기했던 그분요."

"응. 요즘 마하랑 연락 안 해?"

"오빠. 저 걔랑 그렇게 친한 거 아니에요."

"왜? 너네 다 같이 여행도 가고 그랬었잖아."

"그건 그냥 어울리다보니까 그랬죠."

"그렇구나. 미안. 잘 몰랐어."

사람의 내공을 볼 수 있는 구마윤이었다.

처음부터 구마하와 이혜정이 몰래 만나고 있음을 알았지만, 한사코 두 녀석이 부정하니 그 이상 아는 척 하기가 어려웠다.

구마윤 입장에선 오래 보고 알아왔던 혜정이가 아무래도 한수빈보단 더 정이가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오빠."

"응?"

"...어떤 사람이에요?"

"누구? 수빈이?"

"이름이 수빈이에요. 이름 예쁘다."

"혜정이보단 언닐 걸. 마하보다 나이 많다고 하니까."

"그렇구나. 다행이다."

"...왜 다행이라고 생각해?"

"마하는 좀 그런 게 있으니까요. 누가 케어해주고 보살펴주고 해야되는데."

친하지 않았다면서 세심하게 보고 있구나.

구마윤이 아파트 앞 편의점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혜정아. 뭐 하나 마실래?"

"아니요. 괜찮아요."

"마셔. 요즘 1+1 되는 거 많더라."

"집에가서 언니 주세요."

"언니?"

"엄마가 그러던데. 오빠 요즘 누구랑 같이 지내신다고."

"아~ 하하하! 사장님도 참. 먼저 한번 같이 가다가 인사했었는데."

"복덕방 아줌마잖아요. 그러니까 오빠도 우리 엄마한테 아무 얘기나 하지 마세요. 동네 사람들 다 알아요."

"후후. 그렇구나. 그럼 2+1 되는 거 있나 찾아보자."

달짝지근한 커피우유를 하나씩 나눠들며 두 사람이 집으로 걸었다.

이혜정이 먼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한다.

"마하랑도 이렇게 산책하고 다녔었는데."

"그래. 너희 그랬었다며."

"그때는 얘가 이렇게 잘 될 줄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그건 나도 그래."

"오빠."

"응."

"저 마하랑 진짜 아무관계도 아니에요."

"그래 알았어."

"그리고 저도 요즘 만나는 친구 있어요."

"그렇구나. 잘 됐다."

"..."

마침내 아파트 앞.

11층과 14층으로 나뉘어진 이웃들.

대화를 나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때 이혜정이 먼저 말했다.

"제가 마하한테 그러라고 했어요."

"뭐를?"

"...나한테 매달리지 말고 좋은 여자친구 사귀라고."

"음. 근데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 눈빛이 위로해주려고 그러셨잖아요. 이런 것도 사주고."

"하하하! 내가 널 왜 위로해. 오히려 널 더 좋아했던 건 마한데."

"그러게요..."

이혜정의 덤덤한 미소에 구마윤도 마침내 동생의 말을 이해한다.

그래서 이 녀석이 혜정이 소리 하지 말라고...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구나.

사람의 속을 볼 수 있다고 감정변화까지 읽어내는 건 아니었다.

어린 동생들의 관계를 받아들이며 구마윤이 부드럽게 웃어보인다.

이혜정도 수줍게 눈을 피하며 인사를 건넸다.

"전 좀 있다가 들어갈게요. 먼저 올라가세요."

"요즘 우리 가게에 선아란 친구가 자주 와."

"네? 제 친구 선아요? 걔가 거길 왜요?"

"정석이 끝나면 둘이 데이트 간다고."

"...누구요??"

"애들이 그러던데 너희들 다 친구라며. 선아랑 같이 한번 놀러와."

"오빠 잠깐만요. 방금 누구요? 누구랑 누구요? 이정석이요? 마하 친구?"

"하하하. 너도 몰랐구나."

"아니 이정석? 선아랑? 둘이 언제 말이라도 했었나???"

"하하! 다들 똑같은 반응이네."

친구들의 비밀 연애를 알게 되자 이혜정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얘 뭐지? 지 공부한다고 우리도 안 봐놓고 혼자 뒤에서 뭘..."

"그러니까 놀러와. 오빠도 너 괜히 거리두는 거 조금 불편해."

"..."

"마하도 잘 지내고 있고. 너가 그럴 필요 없잖아. 편하게 친구랑 같이 와. 요즘 우리 가게에 정석이도 있고 니가 아는 애들도 많을 거야."

"음. 저 은근 가난한 대학생이라 고기 먹기 그런데..."

"아무렴 오빠가 너한테 돈 받을까."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장산데."

"하하하! 공기밥에 된장국은 서비스로 내줄게."

"음. 계란찜을 더해준다면 한번 생각해 볼게요. 먼저 그거 맛있었어요."

"그래. 그렇게 하자."

구마윤이 계단을 오르자 이혜정이 조용히 묻는다.

"오빠."

"어."

"...오빠는 마하 여자친구 보셨죠."

"그럼."

"어때요?"

"너보다 별로야."

"거짓말. 예쁘구나."

"글쎄 마하랑 나는 여자 보는 눈이 달라서."

"오빠가 절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네요."

"혜정아. 나도 하나 물어보고 싶은데."

"뭐요?"

"너한테 마하는 어떤 애였어?"

"그냥... 재밋는 애?"

"내 동생 좋게 봐줘서 고맙다."

구마윤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가고 이혜정이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든다.

"재밌는 애. 자주 생각나는 재밌는 애... 그랬죠..."

* * *

"확실히 반찬 맛이 다르구나. 가게에서 먹을 땐 이거보다 짰는데."

"매장은 좀 간이 세게 나가고 집에서 먹는 건 삼삼하게 하고 그런 편이지."

"오빠는 참 부드럽고 세심해. 요리에서도 그 사람의 얼굴이 보여."

"하하하! 아 진짜."

오늘은 수빈이가 마포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둘이 여기저기 왔다리 갔다리 떨어지는 거 같으면서도 따로 사는 거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붙어있는 시간들이 이어진다.

"오빤 어떻게 이렇게 요리를 잘해?"

"조미료를 잘 쓰지. 형이 뭘 잘해."

"아니거든! 마윤이 오빠는 조미료 같은 거 안 쓰거든!!"

"제발 형에 대해 이상한 환상 좀 버려!! 세상에 조미료 안 쓰는 식당이 어딨어!!"

마침. 수빈이 생리도 끝났고. 오늘은 오랜만에 기절하기 전까지 하고 싶은데. 얘가 왜 이렇게 말이 많을까?

"언니는 무슨 일 하셔? 직장 어디?"

"몰라 거기까지는. 판교 쪽으로 왔다갔다 하는 거 같던데. 그냥 회사 아닌가?"

"둘이 결혼하면 안 되나? 꼭 굳이 어른들 허락이 필요할까?"

"와... 누나랑 그런 얘기도 했었어?"

"응."

"자기야."

"응?"

"자기 가족 이야기는 왜 안 해줘?"

수빈이가 내 주변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나도 어떻게 보면 그녀의 주변에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 건가? 어떻게 보면 재벌이란 두 글자에 너무 무관심했나.

"..."

"말하기 싫은 건 아는데. 그래도 나한테는 얘기 해줘도 되는 거 아닌가?"

"두 분 잘 지내."

"음. 건강하시면 좋지."

"..."

"......"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변하는 것 같다.

가족은 수빈이 안에서도 커다란 고민이 드는 주제구나.

"말하기 싫으면 하지말고."

"내가 내 얘기는 안 하는데, 자기 이야기만 물어서 기분 나빴어?"

"에이. 그건 아니고. 이렇게 주변에 관심 많은 사람이 뭐가 있나 싶어서."

"우리 엄만 일본 사람이야. 아빠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고."

"하하! 어어~ 그랬구나."

"자기야. 다카라즈카라고 들어봤어?"

"그게 뭐야?"

"일본에서 제일 인기좋은 극단 이름인데."

수빈이가 손을 붙잡고 컴퓨터 앞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쳐 봐. 다카라즈카. 센쿠보 마코토."

"자기가 쳐. 자기가 무릎에 앉아 있으면서."

"난 지금 손이 바빠서."

"그냥 나만 끌어안고 있는 거잖아."

"흠. 아 손 아퍼."

"어리광은... 이래놓고 무슨 자기가 누나라고..."

검색을 해봐도 나오는 게 없다.

"아무것도 안 나오는데?"

"어? 그럴 리가..."

수빈이가 놀라면서 타자를 다시 두드려본다.

"그러게. 왜 없지?"

"어머니 사진 있었어?"

"응."

한글로 검색이 되질 않자 타자를 잡고 영문으로 검색하는 수빈이.

"..."

"영어로 검색하니까 나오네."

"지웠구나..."

"누가? 왜? 어머니를 왜?"

"아빠지 뭐..."

"으음. 사진 보자."

어딘가 깊은 내막이 느껴지는 분위기에 서둘러 마우스를 쥐고 모니터에 집중했다.

빛 바랜 칼라 사진으로 아름답고 멋진 여성분이 귀공자 같은 옷을 입고 계셨다.

"이분이셔...?"

"응. 예쁘지."

"오... 이야... 아니. 기사에서 본 거랑은..."

"그건 나이들어 사진들이고. 이건 엄마 젊을 때."

정말이지 미인(美人)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한수빈 외모가 어디서 왔나 했더니...

"멋있으시네... 연극배우셨구나."

"멋있고 예쁘고. 엄마는 무대에서도 최고 인기배우 였다고 했었어."

"봐 봐. 오오~ 닮았어. 근데 어머니를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나한테는 아빠 모습도 있지. 어쨌든 두 분이 만났으니까."

"어떻게 만나신 거야?"

"...아빠가 그때 일본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공연보러 갔다 엄마한테 반해서 그렇게 만나게 됐다고 들었어."

"역시.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음. 역시 회장님. 사나이."

"자기는 그렇게 생각해?"

수빈이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하는 바람에 장난끼를 싹 거두고 물었다.

"그럼 자기는 뭐라고 생각하는데?"

"힘이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 거 아닐까..."

"난 힘 없는데 미인을 얻었잖아."

"자기야말로 힘으로 얻은 사람이지. 난 자기 힘에 반했는 걸?"

"그렇지. 내가 또 한 정력하고"

"그렇게. 엄마는 아빠의 컬렉션이 됐지."

"..."

설마 이런 말을 농담으로 하는 건 아닐 것이고...

"에이 왜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두 분이 사랑하니까 결혼을 하셨겠지."

"아빠가 만나던 사람 중 가장 예쁜 사람이 엄마였던 거 같애. 그러니까 결혼을 했고. 집에 들여놓았고. 나를 낳게 했고. 무슨 일 있을 때 같이 다니고."

"..."

"이쪽에선 흔한 얘기야. 불쌍하게 볼 거 없어."

형이 보았던 그녀의 아픔이 이건가.

두 눈이 검게 변한 수빈이가 덤덤하게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여사님이 처음 한국으로 올 때만 하더라도 한국 말을 하나도 못 했었단다.

그래서 자리를 잡은 게 우리 학교 근처에 위치한 연희동.

"어학당. 우리 학교 어학당. 선배님이셨구나."

"어학당이 무슨 선배야."

"선배님이지. 윤동주 시인도 우리 선배고. 그땐 연대도 전문대였어."

"하하하하! 진짜 자기는!!"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여사님은 남편의 비밀에 더 깊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고. 집에 자주 못 오는 건 일이 바빠서가 아니라, 다른 여자들이 있어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상처를 입은 마코토 여사는 수빈이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가셨단다.

"일본에서 살았었구나."

"잠깐. 한 2년 반 정도. 결국 돌아왔지만."

"왜?"

"그냥 받아들이신 거 같애. 남편이 바람을 피고 다녀도. 말이 통하지 않아도. 결국 풍요로운 생활을 벗어나서 살 수 없다는 현실을."

"으음..."

"그래도 어쨌든, 그때 엄마의 항변에 아빠도 놀라셨나. 일주일에 반은 집에서 주무시기 시작했고. 요즘도 한두 번은 꼭 오셔서 같이 지내시고 그래."

"그럼. 자기가 본가에 가는 날이..."

"그렇지. 가족의 시간이라는 무대가 열리는 날이지."

"..."

"그렇게 안 봐도 돼. 우리 집은 어릴 때부터 그랬어. 꾸며진 웃음이어도 나쁘진 않어. 어쨌든 다들 웃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니까."

조용한 시간이 길어지길래 툭 말을 던졌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한테 관심이 많았구나."

"그렇지. 지금까지는 진짜가 뭔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다음에 가면, 그 어색함과 억지 가식 연기를 알 수 있겠지."

"억지 가식이 아닐 수도 있잖아. 짧은 순간이라도 함께하자는 진심이 있을 수도 있고."

"엄마는 극단 배우에, 아빠는 원하는 게 있으면 쟁취하고야 마는 재벌 회장님. 두 분 마스크는 나도 어쩔 수 없어."

"..."

"그래서 얘기 잘 안 했어. 미안."

"아니야. 뭐가 미안해."

처음 청담동 집에서 만난 날. 수빈이는 내가 자는 줄 알고 자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그녀의 교우관계나 지금 부모님의 이야기.

다 가진 줄 알았던 사람도 이런 사정이 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얘기 싫지...?"

"음. 그냥 자기네 저녁 식사에 정석이 같은 놈이 있으면 어떨까 생각 중."

"하하하!! 생각만해도 웃긴다. 정말 어떻게 될까?"

우리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 아련한 기분을 섹스로 날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응!"

"난 자기가 이렇게 막 느낌와서 움직이는 게 좋아."

"으응 멈추지 말고 계속 해줘."

"..."

"왜?"

"어? 아니야."

열심히 움직이다 잠깐 이상한 생각을 해봤는데. 수빈이가 속을 읽은 것 같다.

"일본 말 해 봐 이러기만 해. 죽을 줄 알어..."

"내가 뭐랬나. 난 그냥 잘 느끼네. 하고 얼굴 보고 있었는데."

"해줘? 듣고 싶어?"

"에이... 아니라니까."

"マハちゃん 好き. 大好きだよ."

"..."

어우 씨... 확실히 뭔가 느낌이 다르긴 한데?

"이것 봐 갑자기 더 딱딱해지고"

"아. 아냐 그냥 너무 뭔가 이색적이라"

다시 천천히 움직이자 수빈이가 느끼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으음~ 참 이상해. 이런 게 좋아?"

"아니라니까."

"후후후. 내가 방금 뭐라고 했게?"

"뭐랬지? 마하 짱 스키? 다이스키?"

"무슨 뜻일 거 같애?"

"마하 스키 잘 타? 스키타면 죽어?"

"하하하! 아 됐어. 그만해! 기분 다 깨졌어."

"아. 아니였어? 그. 그럼... 아! 마하는 스끼다시를 좋아해?"

"으하하하! 야!! 너 진짜 분위기 다 망칠래!!"

"아니야? 나 횟집가도 회 잘 안 먹잖아."

정말 좋아한다는 말이란다.

기모찌 이따이 이런 거 기대했다고는 진짜... 내가봐도 너무 저질같아서 말을 못 하겠다..

정말 힙겹게 어르고 달래서 다시 사랑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스키가 그런 뜻이었구나. 난 나 타는 스킨 줄 알고."

"그건 スキー. 이건 好き."

"똑같은 거 같은데? 그럼 아이시떼루는?"

"그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말이고."

"자기는 나 사랑한다며?"

"...섹스 중에 말 거는 사람은 안 사랑해."

"하하하!!"

그러시다면 빨리 기분을 풀어드려야지.

좋아한다는데.

"나도 수빈 스키."

"하아~ 으응 아아 아!"

"차이코프스키. 수상스키"

"하하하! 야!! 너 진짜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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