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58화 (158/401)

< 노을 앞의 그림자. (5) >

아침 7시. 이혜정은 침대에서 기상. 전날 남자친구에게 온 문자에 답장을 해주고 있었다.

[점심 때는 도착하지?]

[응. 이따가 봐.]

[학관에서 점심 먹을까?]

[그래.]

툭. 던져지는 핸드폰과 함께 그녀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하고 있었다.

"후우..."

미안하지만 그에게 아무 감정이 안 느껴진다.

착하고 좋은 애라는 건 알지만, 어딘가 마음이 끌리는 게 없다.

"됐어.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첫 학기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2학기부턴 여유롭게 오후 시간에 시간표를 배치해 짜뒀다.

하지만, 그렇게 되버리니 또 저녁이 늦어지고.

이러자니 이게 걸리고 저러자니 저게 걸리고.

"아 재미없어..."

대학생이 된 기쁨을 모르겠다.

따져보면 버스타고 지하철 타고 가는데 그리 큰 시간이 소요되는 건 아니지만, 하루를 마치고 돌아보면 교통편에 앉아 멍하니 창문만 보고있는 자신이었다.

"..."

[재훈아. 수업 들어갔어?]

그래서 일탈이라도 꿈꿔보려고. 문자를 보내보지만.

[어. 조금 늦었는데. 출석은 체크 함.]

[우리 오늘 끝나고 영화보러 갈까?]

[그럼 너 늦게 집에 갈 건데?]

[음. 데려다 주면 안돼?]

새로사귄 남자친구는 부천 인근에서 등교를 한다.

얘도 왔다갔다 귀찮을 건데... 미안하게...

하지만 우리도 시작한 지 몇 달 됐고.

얘는 너무 착해서 다가오는 시간이 더디고.

이혜정이 먼저 손을 뻗어 보는데.

[미안. 나 오늘 중동에서 친구들 만나기로 해서]

[그래. 알았어]

[진짜야. 진짜로 애들 보기로 먼저부터 약속한 거라.]

[알어 알어.]

외출 준비를 마치고 이혜정도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도 지금 출발.]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원래 이게 정상이지만, 구마하 같이 자극적인 아이와 있다보면 모든 것이 그쪽에 맞춰지는 게 두려웠다.

"..."

진정하고. 차근차근히 나의 시간을 다시 쌓아가자.

재훈이랑도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음악을 듣고 책을 펼치며 오늘의 이동시간을 풍족하게 만드는 이혜정.

그러고보니 전날 기가막힌 소식을 들은 터라 바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솔직히 말해.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싱글벙글 답장이 오기까지 다시 고개를 들어 음악을 고르는데. 바로 핸드폰이 지잉지잉 울려퍼졌다.

[어떻게 알았어...?]

오늘 등교길은 꽤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다.

* * *

"아~ 가자~~"

"..."

"자기야. 우리 또 오빠네 밥 먹으러 가자~~"

마포 집. 수빈이와 함께 지낸지도 며칠이 지났다.

"오늘 수업 없어?"

"응. 휴강."

"이라고 하고 또 혼자 수업 땡땡이 치고 계시는구만..."

"자기도 학교 안 가잖아!"

"난 휴학중이잖아! 오히려 휴학중이어도 막상 학교가면 내가 운동 젤 많이 해!"

"알겠으니까. 가자. 응? 내가 운전 할 게."

"보자. 묵은지가 어딨더라? 일단 나가서 고기를 먼저 사고. 버섯이랑 양파랑"

"집에서 먹는 거랑 다르단 말야."

"반찬이랑 다 있어. 가게에서 먹는 거 똑같이 해줄게!!"

"싫어!"

하하하...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 재주 있다니까...

처음과 다르게 이제는 그녀의 사랑스러움과 애교에 어느정도 주도권이 넘어간 부분이 있다.

내가 주도권을 잡고 있을 때는 서로의 시간과 생활이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본다.

하지만, 둘이 붙어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마포 집에 수빈이의 물건들이 늘어가기 시작하면서. 많은 것이 점점 그녀에게 끌려가는 것 같다.

"자기야. 형네 가도 애들 다 자기 시간 있고 그렇게 못 모인다니까."

"정석이는 있잖아."

"정석이도 그날 하루 우리 왔으니까 형이 빼준 거지. 걔 노는 거 아니야. 일하는 애야."

"..."

"아 제발 이런 걸로 실망하는 얼굴 좀 하지말고..."

마침 동민이한테 연락이 들어와 이 벗어날 수 없는 한수빈 월드에서 구해준다.

"어! 동민아."

"뭐하냐?"

"그냥 여자친구랑 있어."

"이 새끼. 하여튼 부러운 새끼."

"그래. 잘 됐다! 야 너 지금 어디냐? 우리 신촌에서 볼까?"

"꺼져. 훈련 중이야."

"아..."

"하하하! 왜 니가 아쉬워 하는데. 지는 쉬고 난 운동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반갑게 인사 하는데, 다른 게 아니라. 전국체전 이야기를 물어본다.

"난 못 가."

"그러니까 니가 왜? 지성이도 물어 봐. 마하 형 못 온다고 한 거 맞냐고?"

"어. 나 그때 뉴질랜드로 전지훈련 가거든."

"한참 시즌중에 뭔 전지훈련을 가?"

"스키. 거기는 지금 겨울이잖아."

"너 그거 그냥 한번 해보고 만 거 아니었어?"

"하하하!"

"갑자기 왜 웃냐?"

"미안... 자기야 나 통화중이잖아."

수빈이가 옆에서 장난치는 걸 막으니 혼자 삐져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막 퍼먹는다.

"저 저 또 또 내꺼라고 먹지 말라고 했는데..."

"마하야. 진지한 얘기 하는데 연애는 잠깐만 멈추고..."

"어 미안. 동민아 잠깐만."

반 남기라고 경고한 뒤 방으로 들어왔다.

"미안. 괜히 혼자 삐져서. 말해."

"이 새끼. 야 여자친구 좀 보여 줘!"

"진지한 얘기 하자며 미친놈아!"

"아. 훈련만 아니면 확 그냥 서울 가겠는데. 그때 남수 반응 보니까 예쁜 분 같더만."

"아무튼, 하던 이야기나 이어서 하자고."

동민이도 육상인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스키 때문에 전국체전을 멀리하는 부분에 서운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일부러 피하는 것도 조금 있어."

"그러니까 왜? 니가 육상을 왜 피해? 한국 육상이 구마하고. 구마하가 곧 한국 육상인데."

"한국 육상은 박문기지..."

"회장님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그건 아닌데."

국민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지 몰라도 세계선수권 우승은 올림픽의 명성에 떨어지지 않는 육상계의 커다란 성과였다.

실제로 지금 여기저기 부르는 곳이 굉장히 많다.

방송이나 예능. 뉴스 인터뷰도 그렇고. 잡지 등등.

무엇보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어 전국 곳곳에서 온갖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아마 찾아보면 어딘가 밥풀 행사도 있을 거야."

"그래서?"

"나 전국체전 가면, 그런 데 다 끌려다녀야 돼..."

"그게 싫어...?"

"동민아. 진짜 오해해서 듣지마라. 이건 싫은 게 아니라. 내가 누구의 트로피가 돼서 끌려다니는 게 좆같다는 거야."

"흠."

"자유가 없어.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 있어야 되고. 오죽하면 내가 작년에 나가서 안 들어왔겠냐고."

"음. 뭐 그 얘긴 자주 했었지."

전임 회장님은 현재 은퇴 후 전원생활을 즐기고 계신다.

따져보면 작년 그 모든 행사와 정치인들과의 만남은 늘 박문기가 중심에 있었다.

"그나마 감독님 계시니까 커버 되지. 아니면 진작에 다 끝났어. 연애도 못 해. 훈련도 못 해. 내 시간이 없어."

"한 감독님 그런 거 싫어하시니까."

"나 이번에도 여기저기 방송에서 보자는 거 싹 다 무시하고 광고도 그냥 우리들 스케쥴에 맞춰서 몇 개만 골라하고 있어."

"이 새끼. 그래. 뭐 니 입장에선 짜증나겠지."

스키 타는 건 뭐라고 안 하냐니, 그건 또 어떻게 스키연맹이 있어서 그런가 쉽게 터치를 못 하는 것 같다고 해줬다.

"왜? 스키가 우리보다 힘이 세?"

"스키 회장님이 박문기랑 같은 회사 출신인가 그래. 몰라. 선밴가 뭔가 그렇데."

"와... 뭐가 막 다 이어져 있구나."

"대한민국 인맥 사회니까."

"그럼. 스키는 진지하게 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회장님 피하고 싶어 하는 거야."

"물론 진지하게 임하고 있지. 선발전도 나갈거야."

수빈이와 아무리 사랑 넘치는 순간을 보내고 있어도. 쉬어도 되는 날이나, 시간 없어도 굳이 짬을 내서 몸 관리를 이어가는 이유는 바로.

"좀 밟아주고 싶은 새끼가 있어."

어떤 일이 벌어져도 박상택과의 승부를 잊을 수는 없다.

녀석은 스포츠를. 운동을. 체육을 모독한 자니까.

"너도 뭐 이것저것 많구나. 스타는 괴롭네."

"스타라고 할 것 까진 없고. 아무튼 그래. 전화줘서 고맙다. 야 그렇다고 주변에 막 얘기하지 말고. 말이 퍼지다 보면 또 무슨 오해 생길지 모르니까."

"조용히 있는 것도 오해야. 우리는 니가 세계 선수권 메달 땄다고 전국체전 무시하는 줄 알았어."

"그런 일은 없어. 내가 한국 선수들을 왜 무시해."

"챔피언이니까."

"하하하! 미친 새끼."

"마하야. 요즘 단거리 최고 기록 10.4까지 나왔다. 진운이도 점점 기록 줄여가고 있고."

"오~ 그래? 진운이가 대학와서 달라지는구나."

"대한 체대 에이스지. 먼저 그랑프리도 800미터 진운이가 다 잡았잖아."

"진수랑 지성이는? 누가 10.4냐?"

"둘 다 아니고. 형들 있어. 너 그랑프리 안 봤냐?"

"으음. 그랬구나. 바빠가지고."

"아 이 새끼 연애한다고 티 존나 내네."

방에서 통화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수빈이가 안절부절 거리면서 얌전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괜찮아. 다 먹어도 돼. 어차피 다 먹을 거 알고 있었어."

수빈이 옆에 앉아 한숨을 길게 쉬자 걱정스레 물어본다.

"뭔 일 있어?"

"아니. 없어."

"왜? 누군데? 누가 전화 온 거야?"

"친구."

"친구가 또 있어?"

"육상 친구들. 여기도 친한 애들 많어."

"아~ 먼저 세계선수권 같이 간 애들?"

"응..."

뭔가. 동민이가 박문기를 회장님이라고 깎듯이 대하는 걸 보면서 조금 느끼는 게 있다.

그래. 육상연맹 회장이지... 아무리 내가 챔피언이라고 해도, 수틀리면 뭔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후우. 아 모르겠다..."

"왜? 무슨 일인데?"

"...전국체전이. 여기가 한국 실업팀한테 있어선 진짜 최고로 중요한 대회거든."

"응."

성인 첫 전국체전. 세계선수권 챔피언을 이루고 와 돌아오는 전국체전...

작년 행사인형 때도 체전은 반드시 참석해서 얼굴을 비췄는데.

만약 이번 체전에서 내가 스키훈련으로 못 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런 상황이야... 얘도 좀 그런 게 걱정돼서 전화 준 거 같고."

"흠."

"한번 감독님이랑 상의해 봐야겠다."

"자기야."

"응?"

"우리 오빠네 가자."

"..."

"응? 가자. 가서 또 웃고 떠들고 오면 기분 좋아질 수도 있잖아."

수빈이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렇게 가고싶어?"

"응. 정석이 없어도 좋아. 나 자기랑 둘이 밥 먹고 와도 좋아."

"근데, 지금 가면 차 막힐 건데."

"우리 집까지 지하철 타고. 집에가서 내 차 끌고 가면 되잖아. 그럼 두 시간이면 도착할 걸? 저녁 시간 딱 맞어. 올 땐 차 안 막히잖아."

"하하하! 아 자꾸 그러니까 나도 가고 싶어지네."

그래. 감독님도 감독님이지만, 한번 형의 의견도 물어보자.

이런 권력자가 있을 땐 어떻게 해야 되는걸까.

우리만 보고 가도 되는지.

친구들까지 대표팀 승선 여부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사람을 자꾸만 무시해도 되는지.

지금이야 말로 형의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다.

* * *

"네. 어서오세. 어? 너 뭐야? 왜 왔어?"

"왜 오긴. 식당에 밥 먹으러 오지. 여긴 장사를 이따위로 하나?"

"미친 놈 뒤질래?"

수빈이 말대로 지하철 타고 포르쉐 끌고 형네 도착.

강남 성남 퇴근 차량도 만만치 않은지라, 아슬아슬하게 마감시간 직전에 닿을 수 있었다.

"수빈 씨는?"

"주차 중. 화장실도 갔다 온다 그러고. 마감 전인데 사람 많네."

"수빈 씨 면허 있어?"

"우리보다 누나야. 야 그보다 진짜 자리 없냐? 나 배고픈데."

"아. 근데 지금 자리가..."

"..."

"없어."

"꺼져. 저기 한 사람 앉아있는 테이블 보이네."

선아다. 하하하! 아니 진짜였어?

"야."

"어? 어! 구마!"

"하하하! 너도 나 구마로 부르냐?"

"너 여기 왜 왔어?"

"하하하하! 선아야. 여기 우리 형 가게야."

정석이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체념하듯 말한다.

"에이 씨... 그냥 잠깐만 합석 해."

"응. 난 괜찮아. 야 앉어."

"그래. 너 진짜 이러고 혼자 밥 먹고 가고 그래?"

"아냐. 나도 친구들 같이 와."

"공부하느라 힘들다며?"

"그래... 아 재수는 진짜 할 짓이 아니다."

"잘 되겠지. 성적 괜찮게 나온다고 그러던데."

"응."

선아가 바쁘게 손님들 상대하는 정석이를 가만히 보면서 답했다.

"하하하! 와 이거 오늘 또 자리가 길어지겠는데?"

"아 맞다. 야 너."

"응?"

"너 혹시 혼자 온 거야? 아니면...?"

"아니. 여자친구랑 같이 왔는데."

"..."

"왜?"

싱글벙글 오랜만에 얼굴 본 반가움에 미소짓던 선아 얼굴에 한줄기 걱정이 스쳐지나간다.

"왜? 뭐 있어?"

"나 오늘 여기서 혜정이 만나기로 했는데..."

"뭐? 진짜!?"

이런 젠장! 왜 또 이야기가 그렇게!

정석이도 옆에 계산서를 들고와 말했다.

"구마. 뭐 먹을 거야. 주방 퇴근 시간 다가오니까 한번에 다 말해."

"정석아. 선아가 혜정이 불렀데."

"뭐? 너 말 안 했잖아."

"아니... 약속이 갑자기 잡혀서."

선아도 정석이한테 들은 게 있나보다.

셋이 어떻게 할지 몰라 눈치만 보는 가운데. 드르륵 문이 열리면서 수빈이가 들어왔다.

"자기야!"

"..."

수빈이가 정석이 선아 그리고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설마? 선아? 정석 씨 여자친구?"

"어? 어."

"아. 네..."

"아... 안녕하세요."

"꺄! 반가워요! 나 진짜 너무 보고 싶었는데."

선아 입장에선 다짜고짜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친한 척을 하니 애가 눈이 휘둥그래져 정석이를 보는데.

"어...? 너...?"

설마 싶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혜정이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

"..."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 기분이다.

"선아 씨. 나 누군지 알아요?"

"아... 네. 마하 여자친구 분...?"

"응!"

여자친구란 말에 나를 보던 혜정이가 고개를 들어 수빈이를 보았다.

한수빈을 제외한 모두가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혜정이야말로 이해 되지 않는 상황에 수빈이와 나. 정석이와 선아. 모두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뭐야...? 오늘 대체 무슨 자리야?"

혜정이 목소리에 수빈이도 돌아본다.

"음...? 누구셔?"

"어? 어..."

얘를 뭐라고 소개해야 되나 싶은 그때.

혜정이가 먼저 말했다.

"아. 저희 그냥 친구에요."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우리 다 그냥 친구니까.

하지만.

"친구..."

혜정이를 보는 수빈이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다.

"자기야."

"어..."

"여자... 친구가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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