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자와 패자 (1) >
[영문과야 학번은 05고.]
구마하의 첫사랑 이혜정이라.
그 자식의 첫사랑이든 뭐든, 대체 어떻게 생긴 애길래 수빈이가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이도형은 호기심이 생겨서라도 서울 장충동을 찾아갔다.
"어이! 도형아!"
"야. 오랜만이다."
"하하! 이 새끼. 그러게? 이게 진짜 몇 년 만이지?"
이도형은 건너건너 몇 년 전 연락이 끊긴 고등학교 친구를 찾아왔다.
"그래서? 왜 보자고 한 거야?"
"아. 거 참. 쪽팔린 이야기기도 한데."
"뭔데? 여자냐?"
"하하하..."
"혹시 혜정이?"
"...어. 너도 알어?"
"야 이 씨. 우리 학교 여신이야 새끼야."
묻기도 전에 친구의 입을 통해 그녀의 이름이 먼저 나왔다.
뭔가 존재감이 있긴 있는 앤가 보구나 여기며 이도형이 이야기를 듣는다.
"일단 다들 연영과라고 알고 있었서 그러는데. 거기서 이제 핀트가 어긋나는 거지."
"어어..."
"와~ 근데 그 소문이 서울대까지 가냐? 너가 여자애 보려고 여기까지 와?"
"아니 그냥 지나가던 길에 너도 볼 겸. 근데 오랜만에 보니까 뭐 무슨 얘기를 해야하나 싶어서."
"하하하! 이 새끼. 아무튼 보자. 걔가 어. 그래! 내 친구가 걔랑 같은 수업 듣는다고 했는데."
사냥감을 물색하듯 이도형이 조용히 잠입해 들어간다.
"야 씨발 근데 얘는 아니지!"
"아니 그냥 어떻게 생긴 앤가 궁금한 거 뿐이라고."
"넌 누구냐. 걔 어. 뭐 재벌 딸인가 하나 있었잖아."
"...하하하. 미친 놈."
캠퍼스에 앉아 수다를 떨고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 친구들과 웃으며 지나가는 한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야 그럼 넌 내년 2월에 시험인 거냐?"
"어."
"외무고시 본다는 새끼가 참... 이런 놈이 외교관이 된다면."
"쟤구나."
"어? 아... 젠장. 봤네."
"..."
한눈에 알겠다. 진짜 분위기가 뭔가 다른 아이가 있었다.
"예쁘긴 하네."
"예쁘지. 남자친구 있어."
"으음."
"참 신기하지? 진짜 예쁜 애들이 평범한 애들 사귄다더니 그 말이 맞더라."
"남자친군 어떤데?"
"몰라. 애들 말에 의하면 그냥 존나 평범하데."
"후후. 그렇구나. 아무튼 봤으니까 됐다."
"너 진짜 쟤한테 관심있어서 여기까지 왔어?"
"아니야. 궁금해서 한번 보고 싶다고 한 거야."
"스토커냐? 공부 잘하는 새끼들이 변태 같은 짓들 한다더니."
"미친놈 연락이나 해. 어차피 우리 다 제대했고 졸업한 애들도 있는데."
"니가 빠졌지. 우리끼리는 다 보고있어."
이도형은 멀찌감치 떨어져 이혜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한발 물러선다.
수빈이가 제대로 봤네. 내가 좋아할 스타일이 맞다. 저런 청순한 애들이 또 느낌이 다르긴 하니까.
이도형은 차분하게 시간을 갖고 기다렸다.
그렇게 일주일 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다시한번 이혜정을 보았다.
"..."
그녀가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따라나서는 이도형,
이혜정은 버스에 올라타 서울 종로에서 내렸다.
이도형도 그녀를 뒤따라 서점에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얼음은 빼고요."
서점 입구에 위치한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빼든 이도형.
두리번 두리번 레이더에서 사라진 목표물을 수색해 가는데.
이혜정은 사람도 거의 없는 영어 원문 도서칸 앞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
고전적이지만. 또 그러니까 클래식이라고 하는 거지.
이도형이 모르는 척 시선을 외면한 채 뒷걸음질을 친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에서 턴.
"어머?"
"어! 어! 미안해요."
"..."
커피를 그녀의 자켓 외부에 슬쩍 묻히며 접점을 만들었다.
"아. 진짜 죄송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한수빈에게 빠져 그렇지, 이도형도 누가봐도 반할 매력과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든든한 오빠같은 사람. 지적인 매력이 있는 사람. 무엇보다 훤칠한 마스크를 가진 사람.
짧은 순간 이혜정도 그를 마주보며 여러 가지 정보를 얻게 된다.
"아... 미안해요. 제가. 잠깐 정신이 팔려서."
"..."
"죄송합니다. 꼭 세탁비 드리고."
예의바르게 안절부절 못하는 그를 보며 이혜정이 피식 웃어버렸다.
"와... 이런 게 진짜 있구나."
"네?"
"...고리타분한 방법을 쓰시네요."
"..."
그 한 마디에 이도형은 주도권을 놓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해서..."
"일부러 이러신 거죠? 그쵸?"
"..."
"아. 이러면 내가 그냥 가시라고 할 수도 없고. 여기서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없고..."
"......"
"제가 어떻게 해야돼요?"
"아니 저기... 그러니까... 연락처 주시면 제가 꼭..."
"계좌번호 알려드리면 안될까요?"
"..."
"이거 비싼 건데."
그녀의 말에 이도형도 반사적으로 질문이 나가고 말았다.
"어. 얼만... 데요?"
"십만원 넘어요."
"..."
"진짜로. 제가 뭘 뜯어내려는 게 아니라. 저도 지금 그래서 화를 내야되는지 뭔지 모르겠어요."
귀엽다 얘. 예쁘고 침착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도. 십만원 짜리 옷에 분노하는 게 너무 귀엽고 순수해 보여.
"어. 제가 새로 사드릴게요."
"..."
"그러니까 연락처를..."
"나이 많아 보이시는데, 우리학교 선배님이세요?"
"아. 학번은 그런데... 동국대는 아니라."
"그럼 어디?"
"저기... 다른 학교..."
뭐지? 왜 이렇게 분위기에 주늑이 드는거지?
어린 앤데 왜 이러지...? 예뻐서 그러나?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이 이상 접근을 못 하겠다.
"농담이에요. 이거 싼 거에요."
"..."
"친구들이랑 구제가서 2만원 줬던 옷이에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근데 원래는 십만원 짜리 맞긴해요. 탭에 그렇게 써 있었으니까."
이혜정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가세요."
"저기. 그럼 차 한 잔만."
"..."
"제가 커피를 흘려가지고요. 그 차 한 잔만 같이 마시면 안 될까요?"
"......"
"이도형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도령이에요?"
"네?"
"방금 이도령이라고..."
"아. 도형이요. 삼각형 사각형 할 때 그 도형."
"이과생?"
"..."
하하. 얘 진짜 뭐지? 재밌는데?
어딘가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면서도 서로를 알아가는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도형 입장에선 클럽이나 여기저기 매달리는 까발려진 여성들이 아닌, 이런 낯선 타인과의 경계심 넘치는 대화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차 한 잔만 같이해요. 이상한 사람이다 싶으면 바로 경찰 부르셔도 되니까."
"음..."
"솔직히 고백할게요. 혜정 씨 소문 듣고 접근한 거 맞아요."
"절 아세요?"
"아니까 이런 고전적인 방법을 써서 접근했죠."
"어... 진짜 좀 무서워질라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차 한 잔 같이 해줘요. 무섭지 않게 다가갈테니까."
이도형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진짜에요. 나도 이렇게 누군가한테 다가가는 건 정말 처음이라서."
감정은 진실이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양심에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것도 연기?"
"하하하...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긴장감 때문에."
"..."
"혹시 남자친구가 있나요?"
"와 질문 순서가... 변칙적으로."
"하하..."
"있는데."
"네."
"음. 어. 이렇게 말하면 또 내가 이상한 애가 되려나..."
"왜요?"
"진짜로 이번 주말에 헤어졌어요. 이건 정말로."
"하하! 아 잘 됐네."
"왜요?"
"나한테 기회가 왔으니까"
"..."
진짜로 지난 주말을 보내며 [그럼 끝내자.] 라는 말을 건넨 이혜정.
부천에 사는 재훈이란 친구와의 연애를 마치게 된 속사정은 밝힐 수 없지만, 현재 애인은 없는 상황이었다.
"뭐로 마실래요?"
"음."
"아무거나."
"저거요. 초코라떼."
"귀여운 거 고르네."
"스트레스엔 단 게 땡기잖아요."
"스트레스 받는 일 있어요?"
"옷은 상했고. 모르는 남자는 집요하게 다가오고 있고."
"하하. 112 누르고 기다리고 있자고요."
이혜정의 시선에도 이도형은 나름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었다.
따분할 정도로 변화없던 일상. 마치 드라마에서나 보던 것 같은 상황. 하지만 실제로 벌어지긴 어려운 그런 만남.
생각보다 준수한 외모나 매너있는 행동. 무엇보다 여자를 잘 아는 듯 리드하는 자세에서 어쩔 수 없이 그와 같은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112 누르고 있을게요."
"실수해서 113 누르지 말고."
"네?"
"아 이런 개그는 너무 아저씨스러웠나?"
"많이. 정말 많이. 감점."
"하하하! 득점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음. 일단 세탁문제를 어떻게 하실 건지 상의해 볼까요?"
"좋아요."
수빈이를 통해서가 아닌 진짜 개인적인 만남으로 그녀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는 이도형이었다.
* * *
뉴질랜드 남섬에 위치한 한 스키장.
구마하가 고글을 이마에 걸친 채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
"어이. 알프스의 독수리."
"형."
"속 버리게 차가운 걸 마시냐. 따뜻한 거 먹으라니까."
"오스트리아에선 스키타고 탄산 먹어요."
"여긴 뉴질랜드야."
김정준도 구마하의 옆에 앉아 저 멀리 설산을 바라본다.
"확실히 정해진 트랙이 아닌 그냥 자연에 던져놓으니까 더 낫구나."
"스키 재밌잖아요."
"후후후. 그래. 그렇게 즐겨."
"아. 진짜 경쟁만 아니면... 진짜 재밌게 타겠는데."
"그러니까 왜 시비를 걸었어."
"제가 건 거 아니에요. 박상택이 걸었지!"
"아무튼, 천재는 천재구나. 감각이 살아있다는 게 놀랍다."
"고맙습니다."
뉴질랜드로 건너오고 열 흘이 지났다.
구마하와 김정준은 모든 걸 버려두고 스키만 신나라 타고 있었다.
"근데 정말 이걸로 훈련이 되는 거 맞죠?"
"그럼. 스키는 별 거 없어. 잘 타면 되는 거야."
"하하. 육상이랑 진짜 비슷하네요."
"거기도 빠르면 그만이지? 운동 똑같애. 그러니까 비인기 종목이지."
"하하하하!"
구마하가 저 멀리 훈련중인 다른 태극마크 선수를 보며 말했다.
"형. 제가 박상택을 이길 수 있을까요?"
"못 이기지. 상택이가 그래도 해 온 짬이 있는데."
"역시 그렇겠죠..."
지난 여름. 구마하가 육상으로 떠나있던 시간.
클럽에서도 제명되고 후배에게 하극상을 당한 박상택은 이곳에 건너와 절치부심 자신의 실력을 키워냈다.
그리고 올 8월에 열린 그랑프리에서 우승.
물론, 그 우승도 구마하의 세계선수권 제패라는 기사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는 자기 분야에서 분명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기고 싶냐?"
"전 지는 게임은 안 해요. 시작한 이상 제가 반드시 이겨야 하는 놈입니다."
"승부욕 부리지 마라 다친다."
"..."
"마하야. 즐기는 자는 이길 수 없다고들 하잖아."
"형. 박상택은 스키를 즐기고 있을까요?"
"그건 모르지. 그런데 나도 그렇고. 너도 그래. 스키를 즐기지 않았다면 왜 시작했겠어?"
"그렇죠."
"중심을 잡아야 돼. 우리는 경쟁이 아니야. 무사히 나의 한계점을 시험하는 경기다."
"아 진짜 모르겠어요. 그냥 타면 재밌는데, 박상택을 생각하면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고민하는 구마하에게 김정준이 말해준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니체가 한 말이지. 신촌에선 이런 거 안 가르쳐주나 보지?"
"우린 좀 세련됨을 추구하는 학교라."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