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63화 (163/401)

< 승자와 패자 (2) >

"상택이는 상택이다. 너는 너고. 언제나 그걸 잊지마라."

"좋은 말이네요. 뭔가 형도 비슷한 말을 해줬던 거 같기도 하고..."

"상률이 형도 그러시던데, 형님이 굉장히 철학적이시라며?"

"장사하는 사람이 원래 속이 깊어지잖아요. 안 그러면 상처입으니까."

"너도 그렇게 가면 돼. 녀석을 의식하지 마. 자꾸 그러면 올 초 상택이가 너를 보면서 무너지던 거 같이 이번엔 반대로 너가 그렇게 되는 거야."

"스키는 단순한데 깊이가 있는 운동이네요."

"당연하지. 우리보다 빠른 스포츠는 없어. 우리도 깊어지지 않으면 상처 입는다."

"알겠습니다."

"자. 몸 더 식기전에 몇 바퀴 더 달려보자."

"네!"

자유로워라.

알프스의 독수리라는 예명이 부끄럽지 않게 마음을 벗어던지고 훌훌 날아올라라.

김정준의 코칭하에 구마하는 다양한 족쇄에서 자신을 던지고 눈을 달렸다.

"그래. 그렇게만 해. 그럼 너가 이긴다."

가끔 이상한, 시키지도 않은 터닝을 하긴 하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이미 구마하는 고교레벨까지는 실력이 올라왔다.

두 달 뒤면 유럽에 눈이 쌓인다.

육상도 시즌이 끝난다.

마하도 그때부턴 모든 것을 던지고 스키에 올인 할 수 있다.

국가대표 선발까지 다시 해외로 나가, 자신의 실력을 가다듬는다면.

녀석은 일주일에 1년씩 성장하고 있으니까.

물론 초심자에서 올라서는 과정은 누구나 빠를 수 있지만, 이놈은 진짜 괴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육체적 재능에 한계가 없는 놈이니까.

"..."

어쩌면 상택이가 아니라 이 녀석이 진짜 메달을 딸 수 있을 지도...

김정준은 저 멀리 눈바람을 휘몰아치는 제자를 보며 커다란 기대를 가슴에 품었다.

* * *

"아. 갑자기 왜?"

"그러니까. 뭔 일이 터졌나."

원래는 한 달 예정으로 잡고 있던 뉴질랜드 전지훈련.

10월 중순쯤 돌아와 짧은 휴식을 보내고 다시 유럽으로 갈 일정이었지만.

구마하와 김정준은 석주가 지난 시점에 한상률에게 돌아오라는 호출령을 받았다.

"은근 피곤하네... 빡세게 훈련만 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하필 휴식 기간이라 짐은 챙겼다만."

"아. 뭔가 스키는 막 재밌을 만하면 그만두고. 탈만 하면 눈이 녹고. 참..."

"연애하는 거 같지?"

"음. 연애가 그런가요?"

"다 넘어왔다 싶으면 아니고. 이러면 되겠지 싶으면 또 혼자 팅기고. 원래 그렇잖아."

"...흠. 그런가."

한수빈과의 연애도 그런 식이려나? 우리 굉장히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는데.

오순도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구마하가 짐을 챙겨 게이트를 빠져나가며 말했다.

"아. 뭔가... 한국 들어가려니까 뭔가 막막하네요..."

"하하하! 원래 그렇지. 나가 있을 때가 좋아."

"후우. 그래도 보고싶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래. 가보자."

공항 입국장에 한수빈과 한상률이 두 사람을 반겨준다.

"자기야...!"

늘 그렇듯 구마하를 보자마자 한수빈이 다가와 안겨버린다.

김정준과 한상률이 껄껄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아이고 어디 파병갔다 오나..."

"형님 나오셨어요."

"고생했어."

"네. 근데 왜 갑자기 부르신 거에요?"

"아. 다른 게 아니라..."

구마하는 대롱대롱 한수빈을 안은 상태로 한상률에게 다가와 인사를 나눴다.

"마하야. 아무리 그래도. 감독님인데..."

"놔둬 놔둬."

"아 형... 자기야. 여기 우리 스키 코치님."

한수빈이 그의 가슴에 매달린 상태로 웅얼웅얼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시네요."

"하하... 이거 참..."

"정준 씨 신경쓰지 말고."

"감독님. 갑자기 왜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음..."

한상률이 한수빈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한수빈이 그렁그렁 속상한 얼굴로 그를 돌아본다.

"그냥 말씀하시면 안 돼요...?"

"진지한 얘기라서 그래. 잠깐만 비켜 줘."

"자기야. 감독님이시잖아."

"싫은데..."

"자기야."

"...그냥 말씀하시죠."

"그래. 뭐. 이 친구 이러는 거 하루 이틀 아니고."

한상률이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을 알려준다.

"바빠질 거 같다."

"갑자기 왜요?"

"음..."

"무슨 문제 생겼나요?"

"말도 안 되는 빌어먹을 문제가 하나 생겼지..."

공식적으로 한상률이 그들에게 내려온 공문 하나를 알려준다.

"...이게 뭐에요?"

"그러니까 개소리긴 한데."

"감독님. 제가 도핑을 몇 번을 받았는데요?"

"알어. 아는데."

"자기야 왜 그래?"

"잠깐만 좀 내려와 봐."

현재 인터넷에서 구마하는 도핑선수라는 의혹이 확산되고 있었다.

육상연맹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그를 더 이상 단독행동을 하게 두지 않겠다는 공문을 전해받는다.

"아니 제가요? 이거 진짜에요?"

"어."

"그래서요? 안 하면요?"

"제명이란다."

"..."

"그 인간을 떠나서 이건 천 선생님도 동의하신 내용이야. 정면돌파를 하자고 하신다."

* * *

"자기가 내 차 가져왔구나."

"응. 감독님이 따로 가시자고 하는데, 많이들 움직이려면 이게 좋을 거 같아서."

"수빈이 운전 잘하더라. 나보다 나은 거 같던데?"

"고맙습니다."

"이야... 마하 너 BMW 타고 있었어? 잘 나가네."

"그냥 여러모로 편할 거 같아서..."

"하하! 차에 관해선 할 말 많지만."

"근데요 감독님. 왜 연맹에서 저를 그렇게...?"

"우리는 떳떳하니 피하지 않겠다는 거지."

"..."

구마하는 다시한번 육상연맹에서 넘어온 공문을 읽어본다.

"그게 저를 보호해주는 거라고요? 연맹이 부끄럽지 않다는 쇼를 하는 거 아니고요?"

"너 소리 지를 거면 창문 열고 소리 질러. 차 울려."

"결국 선수를 보호해준다는 의지는 없는 거 잖아요!"

"..."

"형님. 그럼 마하는 앞으로 스키 훈련을 못하게 되는 건가요?"

"일단 연맹 관련 행사가 없을 때 까지는..."

"그게 언젠데요."

"싫어요 감독님! 아니! 뭔 개소리들이야!! 내가 도핑 테스트를 몇 번을 했는데!!! 내가 무슨 약물을 했다고 지랄들이야!!"

"자기야 어른들 계셔..."

"됐어. 소리치라고 해. 나도 처음 봤을 땐 혼자 난리도 아니었으니까..."

한구 스포츠 사무실에 도착한 네 사람.

인터넷을 열어 기사를 확인해 본다.

"..."

"육상총재가 이런 발언을 한 건 맞어. 그런데 그게 한국 네티즌한테 너를 겨냥했다는 말이 된 거지."

"아니 내가 무슨..."

확인해보니 진짜로 그런 말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마구잡이로 올라오고 있었다.

[구마하 백방 약물이지. 애시당초 그렇게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사람 몸이 단기간에 그렇게 커진다고? 이게 씨발 약 아니고 말이 되냐?]

"..."

그래. 약했다. 내공이란 약을 먹었다.

그 약은 내 몸을 갈아 만들지 않고서는 절대 발휘되지 않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란 힘이었다.

"마하야 흘려들어라. 이런 반응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 넌 올림픽 공식 도핑 테스트를 통과한 놈이야. 아무 문제 될 거 없어."

"후우..."

"아무튼, 그런 상황이라 일단 들어오라고 했다."

마침 천병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선생님. 네. 마하 왔습니다."

한상률이 구마하에게 전화기를 건네준다.

"대 사부님."

"음. 어떻게 운동을 잘하고 왔니?"

"네... 근데요 사부님. 저 진짜..."

"안다. 알어 마하야. 우리보다 저들이 더 너의 메달에 불을 켜고 허점이 없나 찾아봤었다."

"..."

"한국 선수가 이런 성과를 냈는데, 서양놈들이 더 매달렸겠지. 세계육상총재님도 이는 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언제 시간 되실 때 발언해 주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와전되어 가는 이미지라는 건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국민들을 안심시켜준다 생각하고. 움직이자."

"아 진짜..."

"우리 또 달려야지. 스키가 전문은 아니지 않니."

"아... 사부님."

"마하야 줘 봐. 네. 선생님. 얘가 지금 막 들어와서 프레스를 좀 받는 거 같아요. 네. 네 제가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구마하가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고개 들어라."

"후우. 감독님... 모르겠어요. 아 진짜."

"돈 벌자. 그냥. 그렇게 생각해. 행사비도 무시 못 하잖아."

"벌면 뭐하냐고요... 어차피 쓰지도 못 하는 거..."

"..."

"감독님. 마하 그냥 조금 쉬면 안 돼요?"

"안돼. 이럴 때 쉰다는 건 더 큰 의혹을 확산시켜 주는 거 밖에 안돼."

"그래요..."

"마하야."

"네."

"연맹을 떠나서 팬들을 생각해. 너도 지금 힘든 거 알지만, 널 응원해 준 팬들은 얼마나 놀라고 있겠냐."

"..."

"정면 돌파하자."

"감독님. 감독님은 저 믿으시죠?"

"당연하지! 너한테 스타트 자세를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너를 부정한다는 건 곧 나를 부정한다는 소리야!! 우리의 노력이 부정되는데 나는 화 안 나겠냐!!!"

"..."

"나도 미치겠어! 미치겠는데."

한상률이 씩씩 거리며 소리를 지르다 긴 숨을 내쉬었다.

"살다보면 이런 순간도 오는 거다 생각하고 버텨보자. 우리 좋은 시간 많이 보냈으니까."

"감독님."

"잠깐 태풍이 밀려올 뿐이야. 그렇게 보면 돼."

구마하가 마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스트레스는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자기야 그만 봐."

"...미친새끼들. 지들이 약 처먹고 운동해보든가! 씨발."

스키 대표팀 선발전까지 시간이 몇 달 남지 않았다.

일정대로 달려도 될까 말까 한 순간에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지...

"아. 이 새끼들 다 어떻게 고소 못 하나?"

"그만 보라니까."

"어떻게 안 봐! 내가 비겁한 놈이 됐는데!! 내가 피해잔데!!!"

특히나 지난 몇 주간. 해방이라 여길 정도로 자유롭게 스키를 타고 온 때라 더 여러 일이 민감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수빈이 그를 달래기 위해 무릎에 올라 사랑스런 미소로 기분을 달래줬다.

"자기야 우리 방으로 가자. 응?"

"조금만 이따가."

"왜 이렇게 신경을 써. 아까 감독님도 말씀하셨잖아."

"...뭔가 그동안 내가 해온 노력을 부정당하는 기분이야. 진짜 존나 열받어."

"자기야.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한수빈이 말했다.

"잘해도 미워하는 사람은 늘 있어."

"그래서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무시해버려! 뭔 상관인데?"

"..."

"할 일 없이 집에서 타자나 두드리는 것들한테 왜 우리 자기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구마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자기야. 나는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대표야."

"...그래서?"

"그런 불특정 다수의 응원과 지지를 받아 힘을 얻는 사람이야."

"저 인간들이 자기를 응원해주는 거라고 생각해?"

"이런 놈들 때문에 상처입는 사람들이 있어. 나에 대한 믿음이 꺽이는 사람들이 있어. 그게 너무 화가 나."

구마하가 지난 번 구마윤이 했던 말을 전해준다.

"그때 형이 그랬지? 바른 것은 옳은 길을 간다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 불신을 가진다면, 나는 그걸 해결해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거야."

"그럼 하면 되잖아."

"아는데. 그게 정리가 안돼. 어찌됐든 나도 여기서 피해를 입으니까... 단순하게 무시가 안돼 지금..."

"..."

"아 답답하다."

박문기가 우리를 휘두른다...

박상택과의 승부에서 불리한 위치가 될 수 밖에 없다...

팬들이 실망을 했다...

노력이 부정당했다...

"모르겠어. 이거 때문에 짜증이 나는지 저거 때문에 짜증이 나는지..."

"...자기야 우리 나갈까? 좋은 데 갈래? 맛있는 디저트 가게 갈까?"

"싫어 그냥 쉴래. 나 거기서도 계속 운동만 하다가 갑자기 불려온 거야."

"그럼 아무것도 안 한다고."

"어. 잘래.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어."

구마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는데 무언가 쨍그랑 박살을 내는 소리를 낸다.

"...뭐야?"

"씩 씩..."

한수빈의 발 아래 유리컵이 깨져있었다.

"이거... 니가 그랬어?"

"난 너만 기다렸는데!!"

"......"

"오자마자 나는 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리컵을 깨...?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나만 좋아하는 거지..."

"자기야..."

구마하는 한수빈의 눈물을 봤었다.

사랑을 나눌 때. 너무 좋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쾌감에 고통스러워 할 때.

무엇보다 진짜 애정을 느껴 안심하던 때...

하지만 지금 눈물은 그와는 의미가 다르다.

그녀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건 미움이다.

"맨날 전화 한다고 해놓고 전화도 가끔 하고..."

"했었잖아. 그리고 통화 안 되는 시간도 그때 그때마다 운동하고 있었고."

"내가 간다고 해도 오지 말라고 그러고. 가만히 기다리라고 그러고!"

"..."

"난 진짜 너 보고 싶었는데... 정말 꾹 참고 있었는데... 나만! 왜 나만!!!"

"이리 와. 미안."

"됐어. 가서 운동이나 해."

"감정적으로 굴지말고. 이리 와."

한수빈이 맞선다.

"니가 와."

"..."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순간마다 매번 내가 넘어가 줬어."

"......"

"빨리 와서 나한테 키스 해."

"거 진짜... 있어 봐. 일단 이거부터 치우고."

"안 하면 나 여기 발 올릴 거야."

뭐야 이건 또?

"뭐라는 거야."

"내 말이 거짓말인 거 같지. 이게 그냥 협박 같지...?"

"야 한수빈. 너 진짜..."

"자기야. 이건 자기가 나한테 실수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남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야."

"..."

"알잖아. 모르고 있었어?"

그래. 모르던 게 아니다.

그녀가 나를 보며 느끼는 강한 애정이 있어 내가 힘을 얻는 순간도 있었으니까.

구마하가 유리 파편을 피해 한수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조금 달래주자 한수빈이 먼저 마구잡이로 키스를 퍼부으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방으로 넘어가 옷을 벗고 누웠다.

거의 찢는다는 표현이 어울리게 천 조각들이 난리를 부리며 한수빈이 구마하의 위에 올라탄다.

"하아 하아..."

"..."

"자기야. 하아. 난 자기 없으면 못 살아..."

"...그렇게 내가 좋아?"

"응. 사랑해."

"미안... 오늘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녀가 원하는 모든 걸 하라는 식으로 몸을 맡기는 구마하였다.

한수빈이 위에 올라타 자기 감정을 채워간다.

"으응! 음!!!"

보통 여성 상위를 하는 상대라 하더라도, 어느정도는 파트너의 호흡을 맞춰주는데. 한수빈은 정말 말 그대로 그의 몸을 자위기구로 쓰듯 다루고 있었다.

"아아 으음~ 아아~!!"

같은 몸에 같은 사람이다.

같은 표정에 같은 소리다.

그런데 왜 다르지...?

구마하 입장에선 전혀 교감되지 않는 어딘가 찝찝함이 남는 그런 섹스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있어 늘 웃고 행복했던 사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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