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자와 패자 (3) >
"일어났어?"
"..."
"성질만 있는대로 부리더니... 씻지도 않고 혼자 기절해서 자고."
"자기야 나한테 정 떨어지지..."
"괜찮아. 그런 걸로 쉽게 떨어질 정이면, 애초에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어."
"..."
다음 날 아침. 조마조마거리는 수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 나 어제 진짜 미웠지..."
"아니라니까."
"그럼 키스 해주면 안돼?"
"이리 와."
한차례 분노를 터트린 수빈이는 다시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래. 어른들 말을 믿고 따르자.
세상이 바라는대로만 흘러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감독님 말씀대로 각오를 다지고, 닥쳐오는 풍랑을 맞서면 되는 거야.
언제는 안 그랬냐고.
훈려도 매번 그랬어.
하기 싫은 거 하다보니까 강해져 있던 거잖아.
"그래서. 어제 자기도 봤듯이. 지금 내 상황이 그래..."
"응... 나도 아는데... 그냥 어제는 너무 답답해서."
"우리 최대한 자주 보게 노력해보자."
"그래."
"자기야?"
"...응?"
"미안해. 잘할게."
"나도. 나도 더 잘할게."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무서워서 달래주는 게 더 크다는 생각이다.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까지 변화할 수 있다니...
그 행동. 폭발하는 감정들.
그만큼 나를 향한 애정이 깊다는 것인가.
아니면. 뭐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 모습 또한 그녀의 모습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여야 하는가...
진짜 가까워지니 멀어지는 게 연애라는 건가.
* * *
"네. 저도 봤습니다. 그래서 스키 훈련중에 바로 돌아와 지금 이렇게 국민 여러분 앞에 나서는 거고요."
"도핑의혹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생각하고요."
"음."
"저에게 약물이 검출 됐다면 메달도 반납하고 연금도 토해내고 세상 모든 질타와 비난을 받겠습니다. 돌을 던져도 맞을게요. 의혹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증거를 내밀어야 한다고 봅니다. 억울한 제가 아니라."
여기저기 행사장을 다니다보니 기자들이 찾아와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나는 당당하다. 꿀릴 것 없다. 내 안에 내공이 있지만, 그건 너희에게도 있다.
다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꺼내는 순간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거 같아 묵묵히 참아야 했다.
형도 얘기해줬다.
"그건 너가 목숨을 걸고 얻어낸 힘이야. 훈련을 통해 개발시킨 너의 능력이라고. 형이 전에도 말해줬잖아. 부정한 게 아니라고."
"후우... 그걸 몰라 줘. 스포츠 선수들은 다들 저마다의 내공이 발달하는데, 이걸 아무도 안 믿어 줘."
"기다려. 진심을 알아주는 날이 올 거야."
"알았어. 형 나 또 가봐야 돼..."
"힘들면 수빈이랑 둘이 한번 와서 쉬다 가. 수정이랑 넷이서 집에서 보드게임이라도 하든가."
"하하하 그럴 시간이 없어..."
* * *
"마하야. 언제 기자들한테 개소리 좀 하지 말라고 했었냐?"
"후우... 자꾸 아니라고 하는데 물어보잔아요."
"조금 쎄다. 감정 줄여라."
"..."
"며칠 뒤에 임 기자님 오시기로 했으니까. 그때 더 자세한 이야기 나눠 봐."
"바로 오시면 안된데요?"
"기자님도 취재를 하고 오셔야 다채로운 질문을 하실 수 있으니까."
"...임 기자님이라면 믿을 수 있죠."
"그래. 우리 목소리를 실어주는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기다려."
"감독님. 그런데요. 내공은 진짜 약이 아니에요..."
"알아."
"정말로 그렇게 믿어주시는 거죠?"
"마하야. 안다고. 내가 널 의심할 거라 생각하는 거냐?"
"..."
"힘든 거 알지만, 이럴 때일수록 적과 아군을 오해해선 안 된다. 침착해라."
"...죄송해요."
"괜찮아. 화풀이 해도 돼. 넌 그 이상의 것들을 해내줬어."
결국 올 가을로 잡혀있던 감독님 결혼도 늦춰지고 말았다.
여러모로 주변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모습을 드러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비난여론도 거세지고 있었다.
언론이 냄새를 맡고 찾아와 귀찮게 할수록 소문이 가라앉는 게 아니라 더 커지는 거 같아 나중엔 피하고 다니고 싶었다.
물론, 내가 피한다고 해도, 우리 위대한 박문기 한국육상연맹 회장님의 입까지 막을 수는 없지만...
"여러분. 우리 육상연맹은 절대 비겁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
"특히, 구마하 선수는! 피나는 노력으로. 성실과 근면한 생활의 모범을 보이면서!"
박문기는 성실과 근면의 모범이라는 말로 나의 이미지를 살리려고 했던 거 같은데.
그게 또 하나의 악수가 되었다.
"이건 또 씨발 뭐야..."
약물의혹에 이어 또 하나의 믿을 수 없는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와... 이제는 뭔가 화도 안 나네."
비행기에서 수빈이와 나눴던 사랑 이야기를 누군가 인터넷에 올리고 있었다.
[전 국민의 지지를 받는 스포츠 스타 K군이 지난 여름 세계선수권 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며]
어질어질해진다. 세상이 빙빙 돌고 있다는 게 이런 뜻인가?
대체 뭐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했다고 누가 이렇게 나를 흔들지...?
"내가 미안..."
"자기야. 얼굴이 왜 이래?"
"잠을 못 잤어..."
이번 스캔들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빈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으론 좀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비난을 내가 받으니 세상은 그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다행이다."
"왜?"
"자기 이름이 나오지 않아서."
"자기야. 이거 내가 아빠한테 말해서 그날 비행했던 직원들 누군지 다 파악해서!"
"하지마."
"왜! 분명 걔들이 퍼트린 건데!!"
"그럼 자기 아버지도 우리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알게 돼."
"..."
"지나가자 그냥. 상황이 이러니까 뭐든 깔려고 터지는 거 겠지. 또 알어? 구마하 알고보면 좆같이 생긴 놈이다 이런 말 나올지."
"자기 미니홈피에 그 얘기는 이미 진작부터 있었어..."
"하하하! 그래서 내가 미니홈피 안 쓰잖아."
"후후. 우리 자기는 이럴 때도 웃는구나."
"그럼. 웃어야지. 별 수 있나."
행복한 시간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상 모두가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하루는 행사인형으로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 훈련이 되겠냐고.
하다못해 돌아다니면 돈이라도 벌잖아.
"구마하 선수. 전 구마하 선수 믿어요."
"고맙습니다. 꼭 더 좋은 모습으로 보답해 드릴게요."
"힘내세요."
무엇보다 나는 이런 가운데서도 나름 어떤 수행을 할 수 있었는데.
상황이 극한으로 치달으니 좋은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이 보인다.
"..."
"응원하고 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형이 말했던 그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보이는 것 같다.
물론 대다수는 정말 힘내라고 응원을 해주시지만. 가끔 앞에선 믿는다며 위로를 건네는데, 머리는 하얗게 빛나는 사람들이 보인다.
왜 그랬냐고 실망한 듯한 눈빛과 매몰찬 모습으로 돌아서지만 그래도 가슴이 뜨겁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보인다.
세상은 웃는다고 내 편이 아니고, 화낸다고 적이 아니었다.
"..."
수련은 원래 고통스럽다.
훈련도 고통스럽다.
강해지는데 고통이란 필수불가결한 조건들이다.
내가 원해서 처해진 환경이나 사건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좀 배움을 얻어가는 시간이란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나는 언론이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하는데 있어 평정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약물에 대해선 뭐라고 하겠습니까?"
"기자님.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 언론을 상대할 땐, 난 아니다. 세상이 나를 오해한다. 그런 변명하는 듯한 워딩을 사용해 왔지만, 임한기 기자님을 만나는 자리에선 다른 말을 할 수 있었다.
"결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생활 문제에 대해선."
"마하야. 그 얘긴 안 해도 돼."
"기자님..."
"사생활을 건드리는 건 타블로이드지. 아저씬 언론이니까."
"...고맙습니다."
"그래. 아무튼 힘내라. 이 건과 별도로 난 너를 믿는다."
이렇게 가슴 뜨겁게 나를 응원해주는 분들이 있어 내가 운동을 멈출 수 없다.
내 가슴에 달린 태극기도 다시한번 뜨거워지길...
* * *
한수빈은 이도형을 만나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오빠. 이래서 사람들이 유명인이랑 사귀는 걸 피하는 건가 봐..."
"이제와서 무슨 소리야."
"어제 아빠가 말했어..."
"..."
"인터넷에 이거 너냐고... 대체 밖에서 뭐하고 다니는 거냐고... 우리 아빠가 나한테 화를 냈어."
"본가로 돌아오라고 그러셔?"
"어. 엄마는 울고... 아 모르겠어."
이도형은 속으로 쾌재를 지르지만, 겉으론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원래 위대한 사랑엔 위대한 난관이 따르는 법이라잖아."
"...그런가?"
"잘 이겨내 봐. 애들이 그러는데, 너네들 되게 잘 지내고 있었다며."
"...오빠. 걔는 어떻게 됐어?"
"누구?"
한수빈이 검은 눈동자로 쳐다보자 이도형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아~ 혜정이?"
"아직도야?"
"작업중이지. 난 원석이 세준이랑 틀려."
"...후우. 그래도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는 됐나보네."
"뭐. 가끔 만나서 차 한 잔씩은 하고있어."
"오빠. 난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지..."
이도형도 한수빈을 보며 여러번 놀라고 있다.
얘도 이렇게 되는구나...
세상 그 무엇도 한수빈을 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빈아. 대체 왜 혜정이를 치워달라고 한 거야?"
"걔를 보고 온 날 이후로 마하가 걔한테 갈까 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구마하를 망가뜨리라고 한수빈을 보냈는데. 역으로 그녀가 망가졌다.
처음보는 약한 모습에 이도형의 가슴에 자그마한 불씨가 살아나지만.
그래도 이도형은 불씨에 장작을 던지지 않는다.
이미 그녀에겐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너가 볼 때 혜정이는 어땠는데?"
"..."
"말해 봐. 부탁받은 입장상 난 너한테 그 정도 들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
"예뻤어."
"얼굴은 너도 예뻐. 두 사람이 좀 다른 스타일이라 그렇지."
"...착하고. 친구와도 잘 지내고. 그러면서도 뭔가 중심이 있고."
"그래서. 정말 어떻게 해주길 바래? 내가 혜정이 강간이라도 해서 사진 찍고 협박이라도 해줄까?"
"말해 괜찮아."
"치워 줘. 거기까진 모르겠어."
"너. 니가 귀찮은 애들. 꼴보기 싫은 애들 니 눈앞에서 치우라고 할 때마다 원석이나 세준이나. 혹은 나나.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어?"
"..."
한수빈이 고개를 들어 이도형을 본다.
"왜 이래."
"뭘 왜 이래야. 물어보잖아. 알았냐고."
"내가 그걸 알아야 돼?"
"죽여서 묻어줄까? 아니. 같이 삽이라도 들고 가볼래?"
"오빠."
"후후. 그냥 매번 궁금했어. 치우라면 대체 우리더러 뭘 어떡하라는 건지. 납치라도 하라는 건지. 애를 어떻게 하라는 건지."
"...그건 그냥 오빠들이 알아서!"
"수빈아. 어리광 좀 그만 부려."
처음으로 서로의 입장이 역전되는 순간. 이도형은 그녀를 압박하는데 있어 물러서지 않는다.
"혜정이가 뭔가 실수한 건 없을 것이고. 왜 그렇게 걔를 싫어하는 거야?"
"마하가 좋아해."
"구마하는 널 좋아해."
"날 좋아하는 것도 맞어. 정말 다정하게 해줘."
"그럼 그냥 둘이 지내. 그만 좀 집요하게 굴고."
한수빈이 갑자기 온 몸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근데... 나한테 하는 걸 걔한테 했을 거라는 걸 생각하면..."
부드득 부드득 손톱이 부러져라 양 팔을 긁어대는 한수빈.
"..."
"그래. 오빠가 만나라."
"그게 니가 말하는 치우라는 거냐?"
"그래서 우리 넷이 같이 놀러다니자! 나 그러면 정말 걔랑 친하게 지낼 수 있고, 내 동생같이 여겨줄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럼 이렇게 옆에서 불안해 하지말고 직접 애한테 말해."
"뭐라고..."
"도형이 오빠 내가 보냈다. 오빠랑 사귈래? 라고."
"어떻게 그래..."
"왜 못하는데? 아니. 넌 니가 그렇게 바라는 게 있으면 왜 못 하냐고."
"마하가 좋아하는 애잖아. 걔 보는 거 싫어."
"후우..."
십여년을 곁에서 지켜본 수빈이였다.
얘가 이렇게 사람에 목을 매는 애였을 줄이야...
"수빈아 그 자식이 그렇게 좋아?"
"응..."
한수빈이 말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왜?"
"나한테 잘해주니까..."
"너한텐 모든 사람들이 다 잘해줬어."
"아니야. 얘는 날 좋아하고 잘해줘."
"다들 그랬어. 나도 세준이 원석이 이 쓰레기 같은 놈들도. 그리고 니 친구들도. 우리가 아는 겹치는 애들도 다들 널 좋아하고 잘해줬어."
"...그건 내가 아닌 한권석와 마코토의 딸 한수빈이지."
"..."
"마하한테 나는 그냥 평범한 한수빈이야..."
여자가 남자에 빠지면 답이 없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한편으론 구마하에게 존경심마저 느껴진다.
대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빼앗았기에 얘가 이정도까지...
"오빠. 나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했을 때 그때 어땠어?"
"잘했지. 예뻤고."
"마하는 나한테서 빛이 났었데."
"조명받고 있었잖아..."
"후후후. 그러니까... 신기한 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