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자와 패자 (7) >
성남 아파트 단지의 큰 길가.
이도형이 차에 앉아 문자를 확인해보고 있다.
[오빠. 내일 마하가 집으로 간데. 며칠 있다 올 건 가 봐.]
[내일 하자. 나머진 내가 다 준비해 줄게.]
[오늘 걔 만나는 거 맞지? 몇 시에 와? 저녁쯤 될까?]
무표정한 얼굴로 한수빈의 문자를 확인한 이도형이 다음엔 이혜정에게서 들어온 메시지를 눌러본다.
[내일요? 약속은 없어요.]
[차 가져오신다고요? 제가 올라가도 되는데.]
[도형이 오빠 우리 오늘 몇 시에 만나요?]
[집까지 오지 마세요. 번거롭게 그러지 마세요.]
[그럼 거기서 봐요. 제가 나갈게요.]
이도형은 혜정이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어. 나 여기 도착했는데."
"네. 저도 거진 다. 어? 저건가?"
핸드폰을 정리한 이도형이 웃으며 다가오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가 간다니까."
"하하. 데이튼데. 잠깐만 나 이거 친구한테 문자 하나만 보내고."
"네."
얌전하게 안전벨트를 묶는 혜정이를 보면서 이도형이 문자를 보냈다. 수신자는 한수빈이었다.
[만났다. 호텔은 아닌 거 같고. 그냥 원석이네 집으로 가자. 비밀번호 알려줄게.]
상황을 공유하자 한수빈에게서 바로 답장이 돌아온다.
[나도 거기 비밀번호 알어. 근데 내가 가서 뭐하라고?]
"이거 바로 답장이"
"급한 일인가 보네요. 이야기 먼저 끝내세요."
"그래. 잠깐만."
차에 올라 탄 혜정이를 놔두고 이도형이 밖으로 가 전화를 걸었다.
"어 오빠."
"알면 거기 가있어."
"왜? 내가 뭐하라고?"
"지저분하지 않게 청소 좀 해놔. 와인이랑 간단하게 즐길 안주도 몇 개 사다놓고."
"...그냥 호텔로 가. 내가 예약해줄게. 술도 준비해주면 되잖아."
"싫어. 그리고 너도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보고 싶지 않어?"
"나... 나더러 보라는 거야?"
"난 니가 우리한테 시켰던 짓이 뭐였는가 어느정도는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
"..."
"그정도 책임감도 없이 너무 혼자만 편하려고 하는 건 그렇지 않나?"
"...마주치기 싫은데."
"그럼 옆 방에 들어가 있든가. 원석이네 집 넓으니까."
"그... 그래도"
"싫으면 데이트 끝내고 얘 데려다 준다. 그리고 그냥 끝내겠어."
핸드폰 건너 한수빈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알았어... 몇 시에 올 건데..."
"나중에 알려줄게. 데이트가 언제 끝날지 모르잖아. 기다려."
"오늘 확실히 하는 건 맞지?"
"그래 맞어."
"알았어. 갈게. 전화 해."
오늘 확실히 끝낸다.
그러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도형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차에 올라탔다.
"미안. 갑자기 일이 생겨서."
"괜찮아요."
"예쁘게 하고 나왔네."
"아... 그냥 분위기 좀 내보고 싶어서..."
"왜? 내 마음 받아주려고?"
"..."
"하하. 가자. 옷 잘 어울린다."
"오빠가 준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거 비싼 거야. 십만원 넘어."
"아하하하~ 오빠? 무슨 뜻이죠."
"가자. 우리 맛있는 거 먹자."
* * *
같은 시각. 성대 주차장.
구마하도 정승우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좀 바빴어. 취업 준비하느라. 야 미안하다. 연락도 못 해서."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전화해야죠. 제가 후밴데."
"괜찮아. 너 바쁘게 사는 거 전 국민이 다 알잖아. 스캔들도 있고 사건도 있고."
"하하하..."
"그쪽 문제는 잘 정리된 거지?"
"네. 어느정도는요."
"음. 마하야. 형도 정신 없다 보니까 니 소식을 최근에 들었는데. 너 혹시... 한수빈 만나냐?"
"네."
"..."
"왜요?"
"그럼 니가 만난다는 포르쉐가 한수빈이었구나..."
"네. 맞아요."
뭐야 이 형? 소식이 너무 늦는 거 아닌가 싶지만 구마하는 일단 통화를 이어간다.
"형 수빈이요 그렇게 이상한 애."
"마하야..."
"괜찮아요. 우리 잘 지내고 있으니까."
"후우..."
"저도 형이 뭘 걱정하시는지 잘 아는데."
"마하야. 나 그때 내 친구. 무용한다는 애."
"네."
"걔를 지난 번에 만났거든..."
"그분도 잘 지내신데요?"
"잠깐 그 전에 선택해라. 이야기를 들을 것인지 아닌지."
"형. 지금 형이 저한테 전화 하셨어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아는데. 나도 지금... 무엇보다 너한테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서 그래..."
"..."
끊을까. 끊는 게 낫지 않을까. 좋은 이야기가 아닐 것 같다.
그러나 구마하는 일단 이야기를 듣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적어도 아직은 의혹이 해결됐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네. 수빈이가 그분한테 뭘 어쨌는데요?"
"듣기로 한 거냐..."
"말씀하세요."
저 앞 건물 밖으로 김태윤과 밴드부 친구들이 나타났다.
구마하도 일단 밖으로 나와 친구에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만요. 제가 지금 친구 만나러 와서."
"어. 그래."
구마하가 나서자 친구 김태윤과 그의 밴드부 멤버 서너명이 놀라며 반겨준다.
"우오오! 진짜 구마하!!"
"와 씨! 진짜였어?"
"내가 구라치는 거 봤어!! 하하하!"
구마하도 김태윤과 만나 인사를 건네주며 말했다.
"야. 미안. 나 지금 뭔가 중요한 전화가 와가지고."
"어! 그래. 그런 전화는 받아야지."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와... 우와~ 키 진짜 크다..."
"몸도 뭔가 다르다... 와 무슨 군인 같애?"
"하하. 전화가. 금방 올게요. 형 말씀하세요."
"후우... 걔네들이랑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말을 안 해줬어. 대신 그놈들이랑 무슨 일이 있었느지는 말을 해줬는데..."
구마하는 강세준과 김원석. 그리고 이도형 세 사람이 정승우의 친구라는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알게 된다.
"형... 그럼 경찰한테 가셔야죠... 저한테 얘기한다고."
"강간은 아니야. 그건 여자애도 자기 입으로 인정했어. 합의된 만남이지만 정도가 지나쳤다고 봐야지."
"...그래서요? 그럼 아무 문제 없다는 거잖아요."
"문제가 없으면 사람을 가지고 놀아도 된다고 생각하냐?"
"저한테 무슨 얘길 하고 싶으신 건데요..."
"한수빈이 그 집을 왔었다고 그러더라."
"..."
"얘네는 안에서 굴욕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지가 경찰 불러줄까 가볍게 농담을 걸고 갔다고 그랬어."
구마하는 현실을 부정하며 연인의 변명을 꺼내들었다.
"형. 끊을게요. 수빈이도 무서워서 그랬겠죠..."
"그날 한수빈이 그 자리를 찾아온 용건은 널 언제 불러줄 거냐는 이야기였다고 그래."
"..."
"얘도 지금 그래서 니가 그놈들이랑 어울린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거 같애. 너네들 이대에서도 유명하다며..."
그럴 리가... 우리 착한 수빈이가... 그럴 리가...
"B 방송국 아들 김원석. 기자하는 선배한테 들었는데, 그놈 앞으로 들어간 성폭행 신고가 얼만지 모른다고 그러더라."
김원석... 팔 힘 좋다고 덤벼들던 신체 건장한 인간...
"국회의원 아들 강세준. 이놈은 대놓고 유명한 약쟁이란 말이 있고."
"형... 그만하세요. 끊을게요."
"그리고 이런 놈들의 사건을 무마시켜 주는게, 구속영장을 각하시키는 이도형의 아버지 판사 이정욱이고, 걔네들이 거리낌 없이 뭉칠 수 있게 만드는 중심이 바로 한동그룹 딸 한수빈이야."
한수빈이 돈으로 환심을 사고 돈으로 자신의 입지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구마하도 알고 있었다.
"이런 얘기 꺼내서 미안하다. 근데 널 거기까지 데리고 간 우리들 책임이 있어서... 꼭 알려줘야겠다 싶었어."
"..."
"마하야 걘 진짜 아니야. 형이 말했잖아. 너한테는 지켜보는 눈들이 있다고."
남들 시선까지 따질 것 없다.
구마하도 그날 클럽에서 불편한 소리를 들었었다.
그게 진짜였구나...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 여자를 씨발... 무슨...
구마하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 가운데.
"..."
모든 이성이 마비된 듯 한 사람의 이름만이 떠오르고 있다.
혜정이... 혜정이가 이도형을 만나고 있잖아...
혜정이는 자신들이 이도형에게 그녀를 소개해 준 걸로 알고 있었다.
구마하의 가슴엔 한수빈에 대한 사랑보다, 혜정이에 대한 걱정이 먼저 떠올랐다.
"혀... 형. 이거 다 진짠가요?"
"어..."
"형은 그런 거 대체 어떻게 아셨어요...?"
"나도 이 친구 이야기 듣고 놀라서. 주변 건너건너 물어봤어. 강남쪽에선 유명한 악질들이더라고..."
혜정이. 우리 혜정이... 얘 어제 이도형이랑...
구마하의 무릎이 꺾인다.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이는 기분이었다.
* * *
"우와."
"왜?"
"오빠. 용돈 받아 쓴다면서 이런 거 먹어도 돼요?"
"내가 사? 나 오늘 더치페이 할 건데."
"네?"
"하하하! 나 과외도 하고. 내 용돈은 내가 벌어 쓰고있어."
이혜정과 이도형은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값비싼 식사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으음... 흠."
"농담이지. 아무렴 내가 만나는 애한테 돈 쓰라고 하겠냐."
"참. 이상한 농담 좋아해..."
"맛은 어때? 먹을만 해?"
"네. 오빠도 완전 데이트 코스로 오니까 다르긴 하네요."
"넌 이런 데이트 해봤어?"
"아니요. 제가 돈이 어딨다고... 솔직히 오빠랑 다니는데 다 저나 제 주변 친구들은 가기 어려운 곳이에요."
"마하는 갈 걸?"
"걔는 뭐..."
"마하 돈 엄청 벌더만. 차도 BMW 타잖아."
"그래요? 그건 몰랐네... 흠. 외제차 모는구나."
"너네 둘이 친하다면서? 몰랐어?"
"요즘 연락 잘 안 해서 몰라요."
이혜정은 전날 밤 놀이터에서 구마하를 만난 사실을 태연히 숨기며 잔을 들었다.
"혜정아."
"네. 오빠."
"너네는 무슨 관계야?"
"..."
"걔가 너 되게 좋아했다고 하던데 맞어?"
"지가 그래요?"
"아니.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까 이야기를 좀 들었지."
"뭐. 뭐 그냥. 워낙 어릴 때부터 알던 친구죠."
"둘이 잤어?"
"..."
이혜정이 불편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잔을 내려놓는다.
"오빠. 뭐에요 지금?"
"하하하! 뭐지? 이 반응은."
"왜 그런 걸 물어봐요...? 사람 앞에 놓고."
"마하 멋있잖아. 안기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
이혜정이 가만히 고개를 돌리며 숨을 몰아쉰다.
"후우..."
"걱정마. 그런다고 너가 싫어지는 건 아니니까."
"저는 오빠가 싫어졌거든요."
"쿨하게 가자. 뭐 어때. 서로 남녀 경험 있다고 앞으로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 말이 이혜정에게 얼마 전 받았던 작은 상처와 대비되어 다가온다.
"오빠는 그런 거 상관 안 하나 보네요."
"당연하지. 지나간 시간을 뭐하러 신경 써."
"마하 멋있죠... 재밌고. 애도 착해요."
"거기다 돈도 잘 벌고. 운동도 잘하고. 스포츠 영웅에. 여자들이 좋아할 조건은 다 갖추고 있지."
"..."
"너도 좋아했구나."
"모르겠어요."
이혜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먼저 잠깐 만났다는 애 있잖아요."
"응."
"왜 헤어졌는지 아세요?"
"글쎄. 그 친구가 바람이라도 폈나."
"둘이 멀리 놀러갔었어요. 일박으로 잡고 갔는데."
"어우... 수위가 쎈 걸..."
"먼저 이상한 질문 한 건 그쪽이죠."
"하하하! 그래서?"
"그 친구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처음이 아니냐고..."
"음. 처음이 마하야?"
"대답 안 할래요."
"너도 보기와는 다르구나."
"훗."
이도형의 반응을 살피며 이혜정이 말했다.
"실망이세요?"
"아니. 너 정도 매력있는 친구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해."
"..."
적어도 이 사람은 과거를 문제 삼진 않겠구나... 그런 마음이 이혜정에게 위로가 되었다.
혜정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도형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