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자와 패자 (8) >
"좋아했던 사람들이었어요. 전 제 과거에 후회는 없어요."
"멋있다. 세상에 그런 거 안 따지는 사람들도 많어."
한 잔 두 잔. 테이블 위에 놓여진 와인병이 투명한 빈 속을 보여주고 있다.
"마하도 그랬죠."
"자긴 잤네."
"네. 많이 잤어요. 정말 내가 이렇게 절제가 없는 애였나 싶을 정도로."
"..."
이혜정은 니가 물었으니 니가 들으라는 식으로 태연하게 말한다.
이도형은 쓴웃음을 삼키며 생각했다.
수빈이에 이어서 눈앞의 혜정이까지... 놈한테 여자를 매혹시키는 뭔가가 있긴 있구나.
"둘이 있는데, 어느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구마하를 보고 있으면 내가 좋아하는 건 사람인가 아니면 그 행위인가.
내가 끌리는 건 그와의 시간인가 그와의 접촉인가.
이것을 애정으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단지 욕구를 분출할 수 있으면 그만인 건가.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마하가 다른 애랑 있는 걸 보는 것도 싫고. 그런데 또 그걸 그냥... 으음. 이건 말 안 할래."
"너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해."
"아무튼, 걔랑 있으면 그냥 두렵더라고요. 여러 의미로."
"음. 글쎄다. 난 남녀 간엔 그런 끌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근데, 그러다보면 결국 끝에가서 상처 입는 건 저겠죠. 걔가 아니라."
"왜...?"
"내가 여자니까. 이런 식의 감정 다툼에 불리한 건 늘 여자잖아요."
"꼭 그렇지도 않어."
이도형이 분위기를 바꾸어 물어보았다.
"여자 쉽게 보는 사람 싫다더니, 그게 마하였구나."
"모르겠어요. 걘 상대를 좋아하는 건지. 그냥 할 수 있으면 다 좋은 건지. 여자라면 그만인 건지. 지 감정은 있는 건지."
"수빈이는 어떤 거 같애? 수빈이 봤어?"
"한번 봤어요.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더라고요."
"후후후. 잘 어울린다라..."
이도형은 구마하와 있는 한수빈을 떠올리며 묵묵하 이야기를 들어준다.
이혜정도 지나간 시간을 토로하는데 의연하다.
두 사람의 대화엔 진솔함이 담겨있었다.
"니 나름대로는 사랑이었네."
"사랑이어도. 걔는요. 평범한 애들이 좋아하기 조금 어려운 애에요."
"마하가 자기 여자친구한테는 진지한 거 같던데. 수빈이를 봐도 그렇고."
"전 그냥 걔가 원하는 대로, 자기 좋아해 주는 사람 만나서 사랑하고 좋아하고 행복해지고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너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말했잖아요. 내가 걔를 좋아하는 마음이 뭔지 모르겠다고."
이혜정이 연거푸 와인을 들이붓는다.
술기운이 올라 두 볼이 발그레해진 그녀는 더 없이 자극적이고 또한 청순해 보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욕망을 자극하는 외모였다.
"천천히 마셔라. 왜 그래. 즐겁게 얘기해놓고 마치 속상하단 사람처럼."
"제가 언제 즐겁게 얘기했다고..."
"아니고서야 왜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했어."
"오빠가 물어봤잖아요."
"그런 거 치고는 너무 남자친구 흉보듯 말이 많았다고 생각하지 않어?"
"모르겠어요 저도.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마하한테 정 땔려고 그러는 거 아닌가."
"반대로 오빠한테 내가 이런 애인에도 좋아할 수 있냐 묻는 걸 수도 있죠."
이도형도 생각하는 표정으로 건배를 권했다.
"그래도 진짜로 좋아한다면?"
"감점이에요."
"하하! 왜?"
"어쨌든 이상한 질문을 했으니까. 솔직히 지금도 기분 별로 안 좋아요."
"스무살 주제에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냐."
"스무살이니까 복잡하죠. 스무살이 어른인가요."
"하하하! 그래. 그렇지."
달달한 알콜 기운을 느끼며 이도형도 입을 열었다.
"어른이면서 어른은 아니고. 그렇다고 애도 아니고. 건배하자."
이혜정도 작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마음에 공감하듯 잔을 부딫힌다.
"감정은 그 어떤 때보다 뜨겁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모르겠고. 근데 나이먹어도 사랑은 똑같애."
"오빠도 누구 막 진지하게 좋아해 본 적 있으세요?"
"당연하지. 나도 지울 수 없는 아픈 사랑을 해봤어."
"하하하. 누가요? 오빠가요? 왜요?"
"웃지 마라 나도 속상해진다. 나 진짜 오래오래 짝사랑한 애한테 완전 난도질당했어."
"얼마나 짝사랑을 오래 했길래 그러세요?"
"한 십 년?"
십년이란 말에 이혜정이 큰웃음을 터트린다.
"진짜야. 왜 안 믿어?"
"하하하! 아니요. 그냥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어본 거 같아서."
"그래?"
"남자들은 다 그래요?"
"뭐가?"
"원래 그렇게 오래 누구를 좋아할 수 있어요?"
"비슷할걸. 누구나 첫사랑은 있는 법이니까."
"으음... 첫사랑이라."
"그러니까 그렇게 오래 담아두지."
"그럼 오빠는 그 사람이랑"
"응?"
"후후후. 잤어요?"
"하하하! 야. 복수하냐?"
"말해봐요. 뭐 어때요. 난 다 얘기했는데."
"못 잤어. 아니 손도 못 잡아봤어."
"거짓말! 설마 죽었어요?"
"하하하하. 야. 혜정아. 너무한다 너 진짜."
"오빠가 왜? 왜? 뭐가 부족해서."
오가는 대화속에 계속해 술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혜정의 눈이 점점 풀려간다.
* * *
"야! 새끼야 너 왜 이래?"
승우 형과 통화한 뒤로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빈이보다 일단 혜정이... 얘한테 빨리 전화를 해야하는데... 혜정이한테 그 새끼 멀리 하라고 해야 하는데... 근데 왜 수빈이가 이도형한테 우리 혜정이를...
어. 뭐지... 어어... 대체 왜... 아니 우리 혜정이가 뭘 어쨌다고...
손이 떨려서 전화번호를 찾을 수가 없다. 태윤이가 옆에서 흔들지 않았다면 아무 그대로 정신이 미쳐 달아났을 것이다.
"야! 정신차려 너 왜 이래!!"
"태... 태윤아..."
"이 씨발 왜? 누가 전화 한 건데?! 뭐야??"
일단 다른 걸 다 버리고, 지금 당장 나랑 서울 좀 가자고.
"너 면허 있지...?"
"어."
"운전 좀 해줘. 지금 당장 서울로 가야 돼..."
서울인가? 아니 어디지? 어디로 간 거지?
태윤이와 둘이 차에 올라탔다.
"야. 기석아. 뭔진 몰라도 너도 같이 가자."
"어? 어."
태윤이 친구가 말했다.
"왜... 왜 그러세요?"
"..."
"기석아 괜찮아. 우리 다 동갑이야. 마하야 이 새끼 내 친구다. 말 편하게 한다."
"어... 그래. 미안. 오늘 재밌게 놀려고 왔는데..."
"아니야. 괜찮아."
"아니. 나보다 얘가 운전을 잘 하니까. 얘는 부모님 차 끌고 다니거든. 혹시 모르니까."
"어 그래... 기석아. 진짜 미안."
"아냐. 괜찮아. 근데 무슨 일인데?"
일단 우리는 성대를 빠져나와 서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애들한테 내가 아는 이야기를 건네줬다.
"혜정이. 혜정이가..."
태윤이도 핸드폰을 들어 혜정이한테 전화를 걸어본다.
"야. 신호는 가는데 전화는 안 받어."
"..."
만약. 혜정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땐 이도형이고 누구고 다 죽인다.
나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후우... 문자. 문자 남기면 보지 않을까?"
"그래. 기석아. 너가 내 대신 문자 좀 써주라."
"어? 어. 핸드폰 줘 봐."
"마하야 니가 얘기해. 뭐라고 해야 돼?"
"..."
"야! 정신 차리고 씨발놈아!!"
"피해. 피하라고. 이도형 개새끼라고."
"어. 어... 보냈어."
"아니 씨발 혜정이는 그런 새끼를 왜 만나고 있는 거야!!"
"...태윤아. 너도 아는 애야?"
"당연하지! 우리 친구야!!"
그래. 우리 친구다.
좋아했던 감정을 떠나 혜정이는 우리의 소중한 친구였다.
그런 사람을 왜 수빈이랑 이도형이...
"아 모르겠어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되는지..."
그래서 수빈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다.
다른 날 같았으면 별 상관 안 하겠지만, 오늘 같은 순간이다보니 이것도 괜한 의심이 들었다.
남은 건 이도형... 이 인간 연락처만 알면 조금 이야기가 수월하겠는데...
"에이 씨발 남태령..."
"왜? 여기 뭔데?"
"여기 차 존나 막혀."
"..."
그 가운데 서울로 진입하는 차는 막히고 혜정이는 연락도 없고. 수빈이는 전화기를 꺼놓았다.
절망이다...
대체 내가 뭘 잘못 했기로서니 이런 문제가 내 주변에...
다시한번 혜정이 번호를 눌러보는데 신호음은 가도 통화가 연결되지 않는다.
"아 씨발! 전화를 받으라고!!!"
"야. 야! 좀 진정하고! 새끼야!"
"씨발 지금 진정할 상황이 아니잖아!!"
그때 통화음이 연결된다.
"혜정아!!"
"어이. 이게 누구야?"
남자 목소리...?
"설마. 이도형이냐?"
"하하. 야. 내가 너보다 형 아니었냐?"
"형 같은 소리하고 이 개새끼가! 너 어디야! 니가 왜 혜정이 전화를 받어!! 혜정이 어딨어!!!"
쩌렁쩌렁 눈동자가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이도형이 답했다.
"얘 지금 취해서 누워있는데."
"이 씨발! 너 이 개새끼! 내가 니 새끼 산채로 사지육신 다 찢어버릴 줄 알어!!!"
"하하하... 진정 좀 하고."
"도형이 형... 형 제발요... 제발 우리 혜정이 좀 아무 일도 없게 해주세요... 네...?"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왜 벌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얘가 무사하게 돌아오는 것만이 우선이었다.
"마하야."
"형. 왜 이래요... 혜정이한테 왜 그러세요..."
"내가 얘한테 뭔 짓을 했다고 그래?"
"...내가 모를 거 같애?"
"후후. 뭐? 니가 뭘 아는데."
"이 씨발놈아. 니들이 여자애들 데리고 하는 짓을 내가 모를 거 같냐고!!!"
"그 짓을 우리가 좋아서 한 거 같냐?"
"뭐?"
"후후. 어디냐."
"지옥에 있다 이 개새끼야!!!"
"이야~ 여자의 감이란 정말... 수빈이 말이 맞구나. 너 얘 엄청 좋아하는구나."
"개소리 그만하고! 니 새끼들 어딨는지나 말해!! 죽여버릴 테니까!!"
"됐고. 지옥의 주소가 어떻게 되는지나 말해라."
"뭐?"
"지옥으로 갈 테니까 말하라고. 혜정이 데려다줄게."
"..."
"어디서 만날까?"
마포에 있는 우리 집으로 오라고 했다.
"야. 뭐래..."
"태윤아... 나 혜정이 잘못되면..."
"아 씨발 년! 아직 걔가 잘못됐는지 아닌지도 모르잖아!!"
"그래. 마하야. 니네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는데, 저쪽이 너한테 온다는 거 보면 나쁜 상황은 아닌 거 같애."
"미안하다 기석아.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런 모습 보여서..."
"아니야. 괜찮아."
"후우. 대체 뭔 일이냐..."
수빈이 말이 맞다니. 내가 혜정이를 좋아한다니... 그건 또 뭐였을까...
어벙하게 심장만 부여잡고 있는데 또 한번 전화가 들어온다.
"네..."
"마하야. 아무래도 아까 이야기 한 건."
"이 씨발! 이게 다 형 때문이에요!!"
승우 형이었다. 누구라도 원망을 해야만 했기에 별 소리가 다 터지고 있었다.
"형이 그날 거기만 안 데리고 갔어도!!"
"...침착하고 무슨 일인데."
"형... 지금 내 친구가 그 새끼들한테 잡혀있어요..."
"이런 미친 개새끼들..."
"나 진짜 어떻게 해야되는지..."
"니네 집으로 오라고 했다고? 알겠어. 나도 갈 게."
밤 7시 정말 지옥같은 두 시간을 보낸 뒤에야,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에 마포 아파트에 도착했다.
"여기였지?"
"..."
"기석아. 나 주차 못 하는데. 니가 대신 주차 좀"
"태윤아. 차 세워."
"어?"
"멈춰. 당장."
태윤이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저 앞에 이도형과 승우 형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마하야!! 야!"
차 문을 열고 튀어나가 이도형에게 달려들었다.
"그래서. 어? 너."
"이 개새끼가!!"
녀석의 멱살을 붙들고 놈의 차로 밀어붙였다.
콰장창! 유리창이 박살나고 어느새 따라 온 태윤이와 옆에 있던 승우형이 들러붙어 뜯어 말린다.
"미친놈아!! 좀 진정해!!"
"마하야! 하지 마!"
"이 씨발년아. 내가 말했지. 내 눈에 띄면 찢어 죽인다고."
"컥-! 커. 크억!!"
"개새끼야 우리 혜정이 어딨어. 어딨냐고!!"
옆에서 승우형이 말했다.
"마하야! 니 친구 아무 일도 없어! 다 이 새끼가 대가리 쓴 거야! 빨리 그 손 놔!!!"
"뭐라고요?"
"봐 봐. 니 친구 안에 있잖아. 지금 술취해서 자고 있다고. 이 새끼가 지금 혼자 개지랄 떤 거야."
그 말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박살난 창문 안에 소곤소곤 잠들어 있는 혜정이가 보인다.
"..."
"쿨럭! 컥 컥 컥!!"
혜정이. 우리 혜정이... 무사한 거 맞나...?
문을 열어보니 술 냄새를 풍기며 코를 색색거리는 혜정이가 있었다.
다치지도 않고 무슨 일을 당한 거 같지도 않다.
차 유리가 박살이 나도 잠에 취해있다니... 하여간 둔감한 녀석...
이도형을 돌아보았다.
녀석이 목을 부여잡고 기침을 하며 말했다.
"큭큭! 쿨럭 쿨럭! 씨발. 대단한 사랑이다... 그래도 이 싸움은 내가 이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