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에 열정이 살아 숨쉬네 (1) >
잔잔한 클래식 분위기가 어울렸던 레스토랑. 값 비싼 와인.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나눈다고는 믿기지 않는 아슬아슬한 대화들.
술은 달았고 절제력은 빠르게 소모되었다.
차편 때문에 긴 자리를 가져보지 못한 이혜정은 MT나 다른 여러 순간들도 늘 사람들이 있어 술을 자제해 왔었다.
어느순간 갑자기 기억이 멈춘 그녀가 마침내 눈을 떴다.
"어으... 머리야... 엄마..."
가족을 불러도 답이 없다.
오늘은 토요일. 쉬는 날인데 어디 가셨나?
"엄마... 나 물 좀...?"
물은 커녕 뭔가 짤그락 거리는 소리만 들려온다.
그러고보니 이불의 촉감이 좀 낯선 거 같은데?
이혜정이 부스스한 머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야...? 여기 어디야?"
처음 보는 공간이다.
가지런하고 깔끔한 분위기에 심플한 가구들이 있었다.
꿈벅꿈벅 기억을 더듬다 깜짝 놀란 그녀가 온 몸을 살펴보았다.
'설마 이 오빠가 날?!' 걱정스레 주섬주섬 여기저기 확인해 보지만.
블라우스는 단추 하나 풀려있지 않고 치마나 속옷도 말끔했다.
어딘가 구겨진 곳이 있다면 그것은 남이 아닌 그녀의 잠버릇이 원인이다.
"뭐야. 나 왜 여깄어...?"
어딜까? 이도형네 집인가? 뭐지? 무슨 일이 있었지? 이래서 필름이 끊기면 안 된다고 그러는구나...
불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쉽게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혜정이 문밖에서 들려오는 유리그릇 소리에 집중했다.
"오... 오빠?"
철썩같이 이도형이라 생각하며 조심히 문을 열고 나가보는데.
앞에 있는 건 샤프한 이도형이 아닌 우락부락한 구마하.
그가 큰 박스에 컵이니 접시니 하는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일어났냐."
"너... 여기서 뭐해?"
"뭐하긴. 여기 우리 집이야."
"어?"
이혜정이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본다.
빈집일 때 와보고 처음인데, 창밖 풍경이나 집안 구조가 엄마가 구해준 마하네 전셋집이 맞는 것 같다.
"야... 나 왜 여깄어?"
"어제 그형이 데려다 줬다."
"아. 어... 어?"
"이도형이 데리고 왔다고."
"아아~ 어어~"
설명이 필요한 구절을 생략하고 구마하는 다시 정리를 이어간다.
이혜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가와 물어보았다.
"물 마시려면 뜨거운 물 마셔. 속 버려."
"아니... 근데 왜?"
"뭐가 왜야?"
"오빠가 너한테 왜?"
"왜겠냐. 애는 취해서 인사불성이지. 집은 어딘지 모르지. 부모님 연락처는 모르지."
"핸드폰에 있는데..."
"그래서? 그 형이 아줌마 연락처 알아서. 어머님 따님이 취했으니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러라고?"
"..."
"그나마 나한테 온 것도 내가 전화 걸어서야."
"어? 그러네. 넌 왜 이렇게 나한테 전화를 많이 했어?"
"..."
"왜? 뭐 있었어?"
"아 있긴 뭐가 있어! 술을 못 먹으면 마시질 말든가. 뭐하고 다니는 거야 여자애가!!"
"왜 짜증을 내고 그래..."
이혜정은 처음 겪는 일에 머쓱하게 후회와 반성이 밀려온다.
그녀를 보며 구마하가 힘 없이 말했다.
"아줌마한텐 내가 전화했어."
"...엄마가 뭐라고 안 해?"
"친구들 다 모이는 일 있어서 우리 집에서 놀기로 했다고. 별 말씀 없으셨어."
"후우. 설마... 와인 한 병에 필름이 끊길 줄이야..."
"와인은 술 아니냐! 그게 무슨 포도주슨 줄 알어!! 세상에서 젤 오래 된 술이 와인이야!!"
"아 알았다고... 되게 뭐라 그러네..."
불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혜정은 주제를 바꿨다.
"그래서 오빠는?"
"갔어.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그래..."
"너도 괜히 쪽팔리기 싫으면 전화하지 마."
"..."
이랬느니 저랬느니. 모르겠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별 얘기 다 했는데... 취한 상태에선 무슨 말을 못 했을까...
이혜정도 그냥 마음 속에서 이도형에 대한 호감을 지워버린다.
"나도 그 오빠 좀 별로긴 했어..."
"후우... 아니 다행이다."
"나 뭐 다른 짓은 안 했지?"
"아 몰라..."
툭. 툭. 구마하는 박스를 가득 채우고 테이프를 입으로 뜯어 봉인한다.
이혜정도 멍하니 그를 보며 물었다.
"근데 넌 아침부터 뭐해?"
"정리."
"무슨 정리? 어디 이사 가?"
"..."
한수빈과의 추억을 정리중이었다.
딱히 필요해서 샀다기 보단, 지나가다 보이는 작고 예쁜 것들. 그냥 사고 싶은 것들. 그녀는 그런 것들을 나갈 때마다 줄줄이 사서 집에 두었다.
"그냥. 치울 것들 정리하는 거야."
"흠."
구마하는 부엌을 끝내고 욕실로 가 세면용품을 치웠다.
거실에서도 뭔가 작은 박스가 두 어개 있는게 이혜정이 그의 행동에서 무언가 분위기를 읽었다.
"야...?"
"..."
"너 그 언니랑 싸웠어?"
구마하는 대답 없이 묵묵히 짐을 정리한다.
얼마 쓰지도 않은 비싼 바디샴푸. 처음 보는 세면용품.
이것저것 정리를 마친 그가 말했다.
"혜정아. 나 오늘 떠나거든."
"어디로?"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선발전 때나 돌아올 거야. 집 비니까 너 여기 있어."
"어...?"
아직도 술기운에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구마하는 방으로 가서도 화장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지도 않고 주르륵 큰 봉투에 담아버렸다.
이혜정도 머리를 털며 정신을 차리며 물어본다.
"그걸 다 어쩌려고?"
"버려야지."
"왜 버려. 가져가라고 그래. 보니까 다 새 거 같은데."
"..."
"설마. 헤어진거야...?"
"후우..."
"왜? 아니 잘 지내는 거 같더만..."
구마하는 고개를 들어 힘 없이 숨을 몰아 쉬었다.
"끝내는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둘이 안 맞으니까 그러지."
"아무튼 막 그렇게 버리지 마. 가져가라고 해. 원래 그러는 거야."
"싫어."
"왜?"
"보기 싫으니까."
"..."
그렇게 여자 좋아하던 애가 이렇게 나올 정도면 저쪽이 뭔가 큰 실수를 하긴 했나 보구나.
이혜정은 일단 그를 달래본다.
"화내지 말고 잘 이야기 해보든가..."
"뭘 얘기해. 이미 끝났는데."
"그래도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도 하고..."
"실수가 아니야."
"..."
"니가 상관할 문제 아니야. 그만 얘기 해."
"알았어..."
옷방으로 간 구마하.
여기도 한수빈이 두고 간 셔츠며 치마며 그녀의 흔적들이 즐비하다.
"에이 씨..."
퍽! 퍽!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옷가지를 한쪽에 집어 던진 구마하가 자신의 운동복을 챙겼다.
속옷이며 양말. 옷. 신발 등. 이것저것 담던 그가 마지막으로 스키부츠와 장비들을 꺼내는데.
"아 이 씨발 진짜!"
"야?"
"이건 또 왜 안 빠져!!"
침착하게 살살 꺼내들면 충분히 나올 것들이 화가 난 상태에서 생각이 닿질 않는다.
결국 이혜정이 다가와 자기가 꺼내주겠다며 그를 진정시켰다.
"이렇게 하면 되잖아! 무식하게 왜 이래!"
"후우. 우우..."
"..."
"아 진짜 다 좆같애... 후우... 으으..."
주저앉아 괴롭다는 듯 얼굴을 감싸쥐고 우는 구마하를 이혜정이 달래주었다.
"하지 마."
"불쌍해서 안아주는 거 아니야..."
"진짜 괜찮아. 나 만지지 마. 이러면 너까지 싫어져..."
"..."
그녀는 자신들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가장 불행한 피해자가 될 뻔 했었다.
끝까지 몰라야만 한다. 지금 혜정이의 위로를 받아선 안 된다.
구마하가 이혜정을 멀리하며 말했다.
"괜찮아... 나 진짜 괜찮아. 운동하면 돼..."
"이런 상태로 무슨 운동을 한다고..."
"해야 돼. 이럴수록 더 운동만 해야 돼."
"..."
"안 그럼 자꾸 수빈이가 생각나. 그게 더 미칠 거 같애..."
최다빈과는 전혀 다르게 이번엔 진짜 사랑했던 누군가와의 맥이 끊겨버렸다.
구마하는 인생이 박살나는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다시 불러다 잘 타일러 볼까...
혜정이한테 사과하고 얼마든지 보상해주겠다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려볼까...
그런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에 빠져봐도 결론은 헤어져야 한다는 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남은 것들을 생각했다.
스포츠. 올림픽.
박상택과의 승부가 남아 있었다.
피할 수도 없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지금 붕괴되는 구마하의 정신을 붙잡아 주고 있었다.
떠날 채비를 마친 구마하가 지갑에서 체크카드 한 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거 받어."
"...카드는 왜?"
"나. 연금 들어오는 카드야. 100만 원씩 다달이 꽂히니까. 혹시나 집에서 돈 나갈 일 있으면 이걸로 써.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도 쓰고. 나 돈 많으니까."
"야. 뭐야. 싫어. 내가 여길 왜 있어."
"올림픽 끝날 때까지 따지면 못 해도 몇 달은 못 올 거야."
"..."
"여기 있어. 힘들게 왔다갔다 하지말고. 너 계속 자취하고 싶어 했잖아."
"너 지금 동계 올림픽 말하는 거야?"
"그럼."
"그거 뭐 잘 못 한다며?"
"해. 반드시 한다. 난 구마하야. 지지 않어."
"무리하는 거 같은데..."
구마하는 걱정스레 말하는 이혜정을 가만히 지켜보다 와락 끌어 안았다.
"야! 야!? 왜 이래???"
"무사해서 다행이다..."
"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집에서 나가버렸다.
"..."
혼자 빈집에 남은 이혜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것저것 정리된 물건들.
버린다고 하지만 차마 제 손으로 버리지는 못하는 마음들.
힘든 현실에서 피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아니. 내가 여기서 뭐하라고..."
이혜정은 전날 들어온 문자들을 확인해본다.
친구들 가족들. 김태윤도 있고, 그리고 구마하에게서 온 문자도 보인다.
"..."
[이도형은 개새끼다. 당장 피해라.]
"아. 진짜 다시는 술 안 마셔야지... 뭐야 지금..."
* * *
"흠."
"죄송해요 감독님... 쉬는 날 불러드려서..."
"괜찮아. 어차피 내가 니 매니지먼튼데."
"...가볼게요."
"혼자 가도 괜찮겠냐?"
"그럼요. 호텔 잡고 운동만 할 거에요."
"정 뭐하면 스테판이라도 찾아가 봐. 나도 정준 씨 스케쥴 봐서 빨리 보내줄게."
"그럴려고요."
공항 출국장 앞에서 구마하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대표 선발전이 12월 말이죠?"
"음. 스키장에 눈이 차야 되니까."
"선발전 마치면 어차피 유럽으로 가야하니까. 미리 간다 생각하자고요."
"훗. 마치 벌써 대표팀에 뽑힌 것처럼 말하는 구나."
"뽑히죠. 메달도 딸 거에요. 저 지금 정말 운동 생각밖에 안 들고 있어서요."
"..."
"정말 집중할 수 있을 거 같애요."
"그래. 뭐. 천재가 그런다는데."
"감독님. 이 차도 가지실래요?"
"마하야."
"네..."
"됐어. 헤어졌다고 그렇게 다 정리하려고 하지 마. 너 그러다 부상 온다. 알지? 스키는 부상의 차원이 다르다는 거."
"네... 알겠습니다."
"무엇보다 중고는 싫어. 줄 거면 새걸로 줘."
"하하하. 감독님..."
한상률이 구마하의 어깨를 다독여 준다.
"마하야. 모든 연애가 다 그런 시간이 있다. 이겨내라. 그렇게까지 모든 걸 잊으려고 할수록 더 잊혀지지 않고 니 안게 깊이 박히기 마련이야."
"네..."
"그렇게 되면 정말 떨쳐지지도 않어. 지독하다."
"알겠습니다... 가볼게요."
"그래. 일단 짐부터 좀 챙기고 비행기 표도 끊고."
"제가 할 게요."
"같이 해. 이 자식. 힘들 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원래 이런 거 해주는 거지."
트렁크에 스키나 폴대 부츠 등. 이것저것 짐을 부치고 구마하는 가벼운 가방 하나만을 짊어졌다.
"참. 감독님. 연맹 행사는요."
"가 인마.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운동하러 가는 건데. 선수가 운동이 직업이지. 연예인이 직업이야?"
"후후. 제가 꼭 다음에 감독님 새 차 사드릴게요."
"그런 것도 신경쓰지 말고. 운동만 생각하자."
"결혼 선물이에요. 사모님 드리는 거에요."
"그럼 차 고르고 있으라고 해야겠구나."
한상률이 구마하를 안아준다.
"절대 다치지 말고. 금방 정리하고 따라갈게."
"저 구마하에요. 걱정마세요."
"그래. 가 봐. 스테판한테 안부 전해주고."
구마하가 인천공항 출국장을 나서는 그때.
박상택이 한국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