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74화 (174/401)

< 이곳에 열정이 살아 숨쉬네 (3) >

구마하가 스키에서 무언가를 해낸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힘들어진다.

친구의 말이 박상택의 뇌리에 박혀버렸다.

애당초 놈과의 승부에서 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만일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

박상택은 친구와 헤어져 홀로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오후 5시. 강의를 마치며 삼삼오오 모여든 학생들의 숫자가 스무명을 넘어서는 것 같다.

체대생들도 있고, 타과생들도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육상팀엔 농구부나 야구부원 같은 이들도 간혹 보였다.

사람들은 런지를 하며 다리 근육을 풀고 트랙 한쪽에 모여앉아 신발끈을 묶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웃음 소리도 들리고 놀림을 받는 누군가는 흥분해서 허공에 발길질을 하기도 했다.

하나같이 운동을 좋아하는 체대생들의 모습 같았다.

"반 년이... 짧은 시간이 아니구나."

녀석은 세계챔피언이자 올림픽 메달리스트였다.

스포츠 선수를 꿈 꾸는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있단 말인가.

그것도 한 종목이 아닌 단거리 중거리라는 두 종목에서 거둔 성과.

이미 승리자는 구마하다.

그 자식이 스키에서 국가대표가 못 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의 도전 자체를 응원하고 축복해주겠지.

그것이 싫었다...

애먼 놈이 남의 집에 와서 주인행세를 하는 게 가잖게 느껴졌다.

그래서 노력했는데... 나도 우승했는데... 상금도 몇 천달러나 받았는데...

정녕 녀석을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일까...

"어? 상택이."

"양민구..."

벤치에 앉아있는 박상택의 곁으로 동기 양민구가 다가왔다.

원래 양민구는 체구가 있는 체형이었다.

헌데, 반년이란 시간이 지나며 몸이 많이 빠져있었다.

지금 그는 누가봐도 신체 건장한 운동선수 같아 보였다.

"오 양민구. 살 많이 뺐다?"

"...너 여기서 뭐하냐?"

"뭐 새끼야. 난 대학생 아냐?"

"흠..."

"가."

"그래."

변화된 그를 보면서, 박상택은 노력은 나만 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야. 민구야."

"왜? 가라며?"

"아 씨발..."

"보자마자 시비야 미친놈아."

"니가 먼저 와서 말 걸었잖아."

"누군가 해서 봤던 거지."

"..."

"뭐. 말 해."

양민구의 흔들림 없는 시선을 박상택이 무심하게 피해버리며 물었다.

"이 새낀 언제 오냐?"

"누구?"

"구마하."

"내가 어떻게 알어. 걔 지금 휴학중인데."

"..."

"왜? 또 마하 만나면 지랄하게?"

"아 이 새끼가..."

"후우... 상택아... 내가 이런 말 하면 너 또 열 받을 거 아는데..."

마하가 그렇게 한가한 애가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건네려다 양민구가 그의 자존심을 생각해 말을 삼켜 버렸다.

"마하는 왜? 뭐 할 말 있으면 얘기해. 전해줄게."

"왜 나냐?"

"뭐가?"

"왜 날 얘기했냐고."

"..."

양민구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러니까 뭐가 너야?"

"니가 애들한테 그랬다며. 이 새끼한테 선배 대우 받을 놈은 나밖에 없다며."

"..."

"왜?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겠냐. 마하가 지금 스키 초보니까 그러지."

"야 씨발. 그게 날 빡치게 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박상택의 날선 반응에 양민구가 한숨을 길게 쉬며 말했다.

"상택아. 넌. 그 생각이 잘못된 거야."

"뭐가. 맞잖아. 그 새끼는 육상선수잖아."

"뭐든. 육상선수든 수영선수든. 니네 종목 누구라도 관심 갖고 찾아오면 좋은 거 아냐?"

분노에 감춰두었던 냉혹한 현실.

국민들이 스키라는 종목에 관심이 없다...

박상택도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새끼는 스키를 진지하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니가 봤어?"

"뭐?"

"마하가 스키를 좆으로 보는지. 장난으로 하는지. 봤냐고."

"그럼 넌 봤냐?"

"그래. 봤다. 난 이 자식이 세계선수권 우승하고 쉬지않고 체단실에서 운동하는 걸 봤다."

한 발 데드리프트나, 제자리 밸런스 훈련 등. 양민구는 구마하가 스키어들의 기본 체력훈련을 거르지 안고 해왔다는 걸 알려주었다.

"마하 운동하는 거 보면 애들이 다 그래. 저렇게 운동해야 금메달이 되는구나. 진짜 인간으로써 존경하게 된다고."

"..."

"노력하는 놈 옆에서 뭐라도 하나 알려주고 싶어도 뭐 우리가 아는 게 있냐. 그래서 한 말이야. 별로 널 치켜세워주거나 그런 의미에서 한 말 아냐. 나 너 싫어."

"이 새끼가... 내가 내 적을 왜 키우는데?"

"그러든가. 그것도 니 선택이지."

양민구가 운동장을 돌아본다.

몸풀기를 마친 육상팀이 줄을 맞춰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을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보며 말했다.

"올 가을에 다 같이 전국체전을 갔었다."

"너도 나갔냐?"

"나갔지. 1차 예선만 통과하고 바로 떨어졌지만."

"그 새끼는...?"

"마하는 당연히 우승이지. 지금 전 세계에 그놈보다 빠른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한참 약물 스캔들에 빠져 정신없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다녔던 구마하.

모두가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어 임 기자가 찾아왔을 때 그의 성실함을 변호해 주었다.

"그때도 녀석은 너무 바빠서, 잠깐 시합만 뛰고 갔지만. 그놈이 우리랑 같이 한다는 게 좋더라."

"..."

"상택아. 넌 어디에 소속감을 느끼냐."

"시끄러 새끼야..."

"너가 있을 곳. 너가 있을 팀. 이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다. 이 사람들과 더 오래 가고싶다 그런 거 느껴본 적 있어?"

"야. 나는"

"국가대표지. 보다 더 높은 곳에 자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데."

운동장을 돌아오는 육상팀원들이 양민구를 보며 손을 흔들어 준다.

그도 웃으며 후배들의 인사를 받았다.

"혼자 하지마. 너도 우리랑 같은 동문이잖아."

"후우..."

"난 평생 운동하면서 지금이 제일 좋다."

"..."

"진짜로 이 학교를 떠나는 게 싫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재밌어. 다들 잘하고 전국체전 때도 단체로 멋진 추억 만들고 왔고."

"부럽네. 좋겠다."

양민구가 돌아본다.

"상택아. 후배 좀 도와주라. 그래서 당당하게 선배 대우받아라. 마하 좋은 놈이야."

"꺼져. 가서 육상팀이랑 놀아."

"말했지. 그것도 니 선택이라고. 알아서 해라."

"..."

"다 큰 성인이 누구 말을 듣냐. 구경하다 가."

그냥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인데. 나도 녀석 못지않게 응원이 필요한데...

왜 이렇게 고립되어 가는 걸까...

박상택은 핸드폰을 꺼내 김정준의 번호를 만지작 거리며 갈등에 빠진다.

"..."

정준이 형이 알려줬겠지.

이렇게 저렇게 훈련하라고 일러줬을 것이다.

그래서 노력하는 게 뭐... 선수라면 그정도 뭐...

진심이 있다면... 정말 잘 하고 싶다면...

녀석이 진짜로 스키를 진지하게 보고 있다면...

올 여름 부단히도 노력하여 우승을 쟁취해 봤기에 느끼는 것이 있었다.

정말 땀은 배신하지 않는구나.

세상은 머리 빠르고 돈 많은 놈들이 이길지 몰라도, 스포츠에선 노력하는 자가 그만한 보상을 반드시 얻게 되어있다.

그렇게 얻은 그랑프리 우승...

그럼 과연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서 이긴 놈은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그런 놈이 지금 나와 승부를 앞두고 있다.

바쁜 시간 속에서도 짬을 내어 스키 훈련을 거르지 않고 있다.

"후우... 아 씨발 진짜... 좆같네."

약해지지 말자.

주변의 평가가 아무리 좋아도 시합은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긴다. 반드시 내가 이겨. 놈한테 질 수 없다.

"..."

정말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박상택은 살면서 힘있고 강한 사람들을 클럽에서 만났다.

엄청난 배경과 재력을 손에 쥐고 상대방을 아우르던 형들.

그런 형들에게 공주님같이 떠밭들여지며 아름다움을 뽐내던 한수빈.

녀석의 여자친구란다. 그 놈이 그런 놈이다.

내가 무서워 하던, 어딘가 마음 한 구석 잘 보이고 어울리고 싶던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구마하는 그런 놈이었다...

"어. 여보세요."

"네. 도형이 형. 안녕하세요. 저 상택인데요..."

"알어. 박 원장님 손자. 너 오랜만이다."

"형. 제가 훈련 때문에 오래 나갔다 왔는데..."

"얘기 해. 듣고있어."

"애들한테 이야기를. 조금 재미난 소식을 들어서요."

* * *

"수빈이는 어때? 오늘은 뭐 좀 먹었어?"

"죽 정도는."

"흐음. 수빈아? 아빠 왔다."

"대답 안 할 거예요. 들어오세요."

연희동 한수빈의 본가.

한동그룹을 이끄는 한권석 회장과 마코토 여사가 초유의 사태에 매일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

"그래도 우는 건 멈춰서 다행이구만."

"그보다. 당신 요즘 자주 오시네요?"

"뭔 소린가. 여기가 내 집인데."

"...저녁은요?"

"아직 일세."

한 회장과 마코토 여사가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꾸미거나 거짓 웃음이 없는 집안 분위기 그대로 우울하고 무거운 식사자리였다.

"조금 더 드시죠?"

"속이 불편한가. 밥이 안 넘어가는구만..."

"애 걱정 때문에?"

"다른 게 있겠나..."

삼 일간 연락되지 않던 아이가 걱정되어 비서와 함께 찾아갔던 딸의 집.

한수빈은 울다 기절한 듯 쓰러져 있었고, 집으로 데리고 온 뒤에도 일주일간 방에서 벗어나지 않고 엎드려 울기만 했다.

"거. 젊은 애들이 살다보면 헤어지고 만나고 할 수도 있지..."

"수빈이 그 친구를 많이 좋아했던 거 같아요."

"후우... 내 새끼가 저런다니 속상하기도 하고..."

"정말 속상하세요?"

"거. 당신은 아까부터 왜 말을 그렇게 하나!"

"..."

"내가 애한테 애정도 못 느끼는 사람인 줄 알어!!!"

마코토 여사는 한 회장의 감정을 태연하게 흘려버린다.

누가 일본인 아내가 남편에게 지고지순하다 했던가.

이럴 때마다 속이 꽉꽉 막히는 한권석 회장이었다.

"지금도 그 자식 불러다 다리 끊어버리려는 거 꾹 참고 있는데!"

"뭐 하러 그래요. 당신 말대로 젊은 애들이 만나고 헤어질 수도 있지."

"이봐. 거 엄마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매정하게 그러나? 그게 당신네 특징인가?"

"당신이야말로. 수빈이가 방에서 안 나오고 있는 건 알고 계시죠?"

"알지 그럼. 아니까 걱정 되는 거 아냐!!"

마코토 여사가 말해준다.

자세한 내막을 말하지 않지만, 이번 일은 그 친구의 잘못이 아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쟤가 저렇게 성격을 눌러담는 건 처음이잖아요."

"..."

"저렇게 울고 불고 화가나는 상황인데도. 혼자 울어요. 원래 성질나면 당신 닮아서 어디라도 히스테리를 부려야 했는데."

"후우. 이 사람이 진짜."

"이겨 낼 거에요. 내 딸이니까."

"거 참..."

식사를 마친 한 회장이 조심히 2층 방으로 올라가 본다.

창문만 멍하니 보고있는 딸의 뒷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수빈아... 아빠야..."

"..."

한 회장이 들어오자 한수빈이 조용히 말했다.

"처음이네 집에서 엄마랑 아빠 싸우는 소리 듣는 거."

"...엄마랑 싸운 게 아니라."

"나가. 아빠. 아무도 보고싶지 않어."

"수빈아. 아빠가 그 친구 불러올까?"

"하지 마. 아무짓도 하지 마."

"왜? 아빠가 잘 타일러보고..."

"아빠. 내가 잘 못 했어."

"뭘... 우리 딸이 뭘 잘못해."

"듣고싶어?"

한수빈이 고개를 돌려 쏘아보듯 말했다.

"아빠. 내가 그동안 뭐하고 살았는지 말해 줄까?"

"수빈아. 아빠는 우리 딸..."

"그래. 생각해보니까 아빠한테도 미안한 게 많다. 그동안 나 때문에 여기저기 사람들 돈 찔러주느라 힘들었을 건데..."

"훗. 걱정하지 마 이 녀석아. 아빠는 원래 비즈니스 하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아빠가 하는 걸 따라 했을 뿐인데..."

"..."

"그런데. 왜 잃었지...? 난 진짜 엄마 아빠가 하던 대로 했을 뿐인데..."

한 회장은 목구멍에 납덩이가 내려 앉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수빈은 먹먹한 심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엄마같이 살고 싶지 않았어. 차라리 아빠같이 내 걸 쥐고 살고 싶었다고. 근데 모든 것을 잃었어. 모든 걸... 처음으로 잃기 싫은 것을... 잃었어..."

딸의 독백을 멍하니 지켜보는 한 회장의 곁으로 마코토 여사도 조심히 얼굴을 비춰본다.

발소리를 들은 한수빈이 두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를 나눴다.

"わかった. 나가요..."

"그러자고... 수빈아 아빠 내려갈게."

부부 두 사람은 딸의 방문에 서서 한숨을 내쉰다.

"애가 뭐라고 한 거야?"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것보단 말이 길었던 거 같은데?"

"아빠 돈만 쓰지말고 방법 좀 알려달라고..."

한권석 회장이 부인의 어깨를 다독여준다.

"잘 달래줘 보구려..."

"그러니까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도 수빈이 저러는 거 무서워..."

"..."

부모에게 처음으로 날 선 감정을 비춘 한수빈.

창문도 부수고, 옷도 다 찢어 버리고. 골프채 하나 들고 집안 모든 것을 부셔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그가 준 선물들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져버리는 크리스탈이라서, 자칫하단 이것마져 깨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흑... 흐윽. 자기야..."

참는다. 후회하고 아파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그것 말곤 다른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간은 돌아가지 않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