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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177화 (177/401)

< 이곳에 열정이 살아 숨쉬네 (6) >

두 사람은 산을 내려오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너가 생각하는 거랑 다르게 나랑 마하도 그렇게 서로 죽고 못 사는 정도는 아니야. 세상에 그런 가족 잘 없어."

"그래요?"

"그럼. 사람이 다 똑같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이 컸던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다른 삶을 겪으면 시각이 넓어진다.

한수빈은 후회를 배움으로 얻어가고 있었다.

"먹고 가."

"괜찮은데..."

"후후후. 운동하고 와서 배고플 걸?"

"조금 그렇긴 하지만..."

"먹어. 체면차리지 말고."

어쩌면 이런 호의도 마지막이 될 수 있다.

한수빈은 웃으며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을 말했다.

"계란찜? 에이 고기 먹지."

"괜찮아요. 저 늘 그거 먹고 싶어서 여기 오자고 했던 거였어요."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봐."

"네."

저녁 장사 전 돌아온 두 사람.

구마윤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한수빈이 조용히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이정석을 다가온다.

"..."

"저기 그..."

"네. 얘기해요."

"구마 찾다가 태윤이랑 통화를 했는데요."

한수빈은 무슨 말이 나올지 조용히 기다린다. 이정석도 긴 설명을 하진 않았다.

"어떻게 둘이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다고 그러더라고요..."

"네..."

"다른 말은 안 했고요. 그냥 이 새끼도 지금 마하 어딨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요."

"저 누나."

이미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이정석의 달라진 분위기가 모든 걸 설명해준다.

한수빈도 체념하듯 웃어 보였다.

한 사람과의 관계가 정리되자 주변과의 이야기도 멀어진다.

누굴 탓하리. 그또한 자신이 자초한 일인 것을.

"구마가. 이 새끼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요..."

"괜찮아. 내가 잘못한 거 나도 알어. 신경쓰지 않아도 돼."

"후우... 혜정이는요. 마하한테 그냥 좋아하는 애가 아니라..."

"알어. 아무 얘기 안 해줘도 돼."

구마윤이 주방에서 나오자 이정석도 자리를 피했다.

"정석이가 뭐라고 했어?"

"아니요. 별 얘기 안 했어요."

"그래. 먹자."

손님과 다르게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식사는 간략하게 차려진다.

구마윤이 한수빈과 마주보고 앉아 이른 저녁을 들었다.

마침내 맛을 본 계란 찜은 기대한 만큼의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따뜻하고 부드럽고 달고 간이 맞는 그것은, 한수빈의 허해진 기력을 든든하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었다.

"어때?"

"좋아요. 오빠 바쁘시면 먼저 일어나세요. 저 원래 혼자 밥 잘 먹어요."

"음. 오늘 혼자 온 거야?"

"아니요. 기사님 같이 오셨어요."

"기사?"

"아. 운전해주시는 분이요."

구마윤이 가게 밖을 두리번 거리며 물었다.

"그럼. 그분은 오늘 하루종일 어디 계셨어?"

"..."

변하자고 마음먹었는데.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한참 부족하다는 걸 깨닫는다.

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수빈은 올 때와 다르게 마음이 안정되어 있음을 알았다.

도로 위 남한산성이란 표지판이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아저씨."

"네."

"오늘 많이 기다리셨죠?"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저씨는 가족들이랑 친하세요?"

"가족요? 하하 어려운 이야기네요."

이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지점은 없다.

돈이 있고 없고 사람들은 다들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걸어 나의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째서 소중한 것을 잃어야 알게 되는 것일까.

실수하지 않고 배울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연희동이 가까워질수록 한수빈의 마음은 다시 우울한 상태로 돌아가는데.

"아저씨 잠깐 차 좀 세워주세요."

"네? 네."

연희동 본가 앞. 박상택이 서 있었다.

"어? 수빈아."

"..."

너무 오랜만이라 순간적으로 그의 이름이 떠오르진 않지만, 인연이 없는 사람은 아닌지라 한수빈이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오빠 여기서 뭐해?"

"아... 너 뭐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우리가 그럴 사이였던가?"

"아니. 그러니까... 나도 저기..."

이도형이 보내서 왔단다.

연락도 없고 어떻게 지내나 그냥 걱정이 되어 안부나 알아보라고 보냈단다.

"이도형..."

"저기. 이야기 들었어."

"...무슨 얘기?"

"마하랑 사귀다 헤어졌다면서."

한수빈이 차갑게 그를 보자 박상택이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그 새끼 그렇게 좋은 놈 아니라니까."

"맞다. 기억나. 오빠는 그때도 마하를 나쁘게 이야기 했었어."

"야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내는게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통해 한수빈의 머릿속에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마하는 피할 수 없는 승부가 있다고 말했었다.

지금도 그는 힘든 상황에 자기같이 주저앉아 슬퍼만 하지않고 멀리 훈련을 떠났다.

그 상대가 바로 눈앞의 박상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는...

"..."

"아 내가 있었으면, 좀 알려줬을 건데."

나였구나...

내가 이 사람을 움직여 그와의 인연이 닿았다.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아도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형이 오빠가 뭐라고 했어?"

"뭐 정확하게 들은 건 없어. 그냥 둘이 헤어지고, 너 많이 힘들어 하고 있다고."

"..."

"형도 지금 너 엄청 걱정하고 있고"

"오빠."

"어?"

"마하 좀 부탁할게."

박상택이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그녀를 본다.

"...내가? 뭘?"

"오빠가 마하 좀 도와주면 안돼?"

"..."

한수빈은 절박한 심정으로 그에게 다가가 말한다.

그곳엔 사람을 마음대로 움직이겠다는 그녀 특유의 우쭐거림이나 거만함이 없다.

진심으로 도움이 필요한 어느 아름다운 사람의 슬픈 표정만이 있을 뿐이다.

"걔도 지금 제정신 아닐 거야."

"야. 수. 수빈아...? 왜 이래?"

"하하하. 세상 진짜 좁다. 하하... 아니. 아~ 그래서. 오빠랑 걔랑..."

눈물이 나는데 그래도 그것이 반갑다.

어떻게 또 이렇게 이어졌을까.

어쩌면 우리도 아직 모든 것이 다 끝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오빠 제발 도와줘. 걔 그러다 잘못하면 다쳐..."

"아니... 저기... 그러니까..."

* * *

집으로 돌아온 박상택이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후우. 씨발 진짜..."

한수빈의 간절한 부탁이 뇌리에서 떠나가질 않는다.

그 친구가 인간적으로 다가온 것도 처음이었다.

양민구가 해줬던 이야기도 잊혀지질 않고 있었다.

구마하... 이 번거로운 새끼...

"..."

박상택은 핸드폰을 꺼내 깊은 숨을 누르며 김정준의 번호를 찾는다.

안 받으면 끝인 거야. 할 만큼 했어. 어찌됐든 나한테 그 새끼는 좆같은 놈일 뿐이야.

남들이 볼 때나 우리가 같은 학교 선후배일 뿐이지...

남이야. 적이다.

받지마라. 여기서 끝내자.

"어. 상택아."

에이 씨발...

"형."

"뭐야?"

"...내가 형한테 전화도 못 해?"

"어. 못 해."

"왜?"

"너 운동하다 어디 다친 거 아니지? 니가 형한테 버럭거리고 성질 내던 거 기억 안나?"

"아... 그건. 그때는..."

"왜 전화했어?"

"..."

"끊어라."

"형! 마하 어딨어?"

"...마하는 왜?"

"후우..."

"한숨을 이 자식이."

"어딨어. 그거나 좀 말해 줘."

"내가 왜?"

"아 걱정되니까!!"

김정준도 버럭거리고 다가오는 박상택의 감정에 조금 놀라며 물었다.

"니가 마하를 왜 걱정해?"

"나라고 걱정하고 싶어 하겠어! 주변에서 다들 뭐라고 하니까 그러지!!"

후후. 이 자식도 참.

김정준도 혼자 웃음지으며 말해준다.

"마하 지금 한국에 없어."

"알어. 뭐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며."

"어? 넌 그거 어떻게 아냐?"

"사겼던 애가 나랑 친한 동생이야. 얘도 지금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라서."

"흠. 그래서?"

"어디 갔는데? 형은 코치라는 사람이 선수 멘탈 박살난 상태로 스키를 타게 하냐?"

김정준이 하나씩 물었다.

"너 지금 마하가 걱정되는거냐? 아니면 그냥 중간에서 메신져 역할을 하는거냐?"

"아 몰라. 씨발. 그냥 짜증나... 번거로운 새끼."

"마하 오스트리아에 있다."

"...거긴 또 왜 갔어?"

"원래 거기서 스키를 배운 애야. 그리고 지금도 너도 뭐 알다시피 멘탈 박살날 거 같으니까 운동하러 가 있는 거고."

그래서 지금 한구스포츠도 최대한 선수 스케쥴에 맞춰 나가려고 준비중임을 전해듣는 박상택.

"같이 갈래?"

"..."

"이왕 마하 나간 거. 우리는 12월 국가대표 선발전 때나 돌아올 거야."

"그래서?"

"괜찮다면 우리랑 같이 훈련하자. 우리 거기서 해외 대회도 치르고 현지서 다 맞춰 올 거야."

"형. 하나만 물어볼 게."

"얘기해."

"진짜로 그 새끼가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을 나갈 거라고 생각해?"

"상택아. 나는 마하가 해내든, 누가 해내든. 대한민국 스키가 발전할 수 있다면 그만이야."

"..."

"너 이 녀석 출전 종목이 뭔지는 알지?"

"활강이라며..."

"그러니까. 이 놈도 지금 자기 가진 것 다 걸고 도전하고 있는 거야."

다섯 종목 알파인스키 가운데서도 가장 부상위험이 높은 종목 활강.

김정준도 처음엔 박상택과 똑같은 마음이었다고 해줬다.

"나도 마하 아니꼽게 본 건 사실이야. 근데, 한번 더 생각해보니 무슨 상관인가 싶더라고. 스키장이 내 것도 아니고. 내가 스키를 발명한 사람도 아니고. 지가 도전하겠다는데."

"..."

양민구와 같은 이야기였다.

누구든 우리 종목을 좋아해주면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반가워야 하는 것 아닌가. 응원과 관심이 고팠던 이들에게 그런 선수가 다가와 준다는 건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그 새끼 지금은 좀 어때."

"잘 타. 잘 해."

"..."

"가능성이 보여. 무엇보다 활강은 출전 선수가 몇 없으니까."

"형... 하나만 물어볼게."

"어 얘기해."

"그 새끼가 잘 된다고. 내 노력이 폄하되는 건 아닐까?"

그의 질문에 김정준이 답해준다.

"상택아. 너 올 여름에 우승할 때 어땠어?"

"뭘?"

"너의 우승은 다른 이들의 노력을 폄하하면서 얻었다고 생각해?"

"..."

"혹시나 같이 갈 거면 빨리 얘기해라. 우리 출국 날짜 며칠 안 남았어. 감독님한테 얘기해 볼 테니까."

"갈래."

"훗. 진심이냐?"

"경비는 대주는 거지? 비행기랑 숙소랑 스키 이용권이랑."

"걱정마라. 우리 회사 돈 많다."

그날 밤 한상률과 김정준이 통화를 가졌다.

"형님. 코치 한 사람 더 뽑았습니다."

"어. 그래. 잘했어."

"근데 이 친구도 선수라. 자기 훈련 시간을 지켜달라고 하네요."

"어? 그래? 뭐하는 친군데?"

"상택이요."

기묘한 코치진이 들어오는구나. 한상률이 웃으며 물어본다.

"하하! 아니. 그 친구? 그 마하네 선배라는?"

"네 맞습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마하나 상택이나. 전 두 녀석의 승부욕이 결코 나쁜 결과가 될 거 같지는 않습니다."

"후후후. 그래? 정준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부탁드립니다. 마하를 위해서도 상택이를 위해서도."

"오케이. 알겠어. 그 친구 여권만 찍어서 보내달라고 그래."

* * *

오스트리아 젤암제. 키츠슈타인호른.

잘츠부르크 남부에 위치한 슬로프에서 김정준과 박상택은 넓은 설원을 보고 있었다.

"어딨다는거야?"

"흰 헬멧에 빨간 잠바 입은 사람 찾아 봐."

"..."

구마하가 이곳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온 두 사람.

이곳저곳 분주한 스키어들 가운데 구마하의 흔적을 찾고 있는데. 저 멀리 정상에서부터 날아오듯 내려오는 한 사람을 보았다.

"...정준이 형?"

"어?"

"혹시 저건 아니지?"

"어디. 후후후."

김정준도 미간을 집중해 시선을 모은다.

"훗. 알프스의 독수리라."

"..."

구마하였다.

마치 화살을 쏘듯이 직활강으로 냅다 쏘아 달리며 눈보라를 일으키는 그를 보며 박상택이 목소리를 높인다.

"미친새끼! 무슨 스키를 저따구로 타고있어?!!"

"활강이잖아."

"아무리 활강이라도 그렇지!! 남들은 생각도 안 하냐고!!"

알파인스키의 알파인이 이곳 알프스를 가리킨다.

기본도 없이 다짜고짜 스키를 배웠다더니 과연 본거지에 오니 그의 자유로움이 살아난다.

"저 저!! 저러다 부딪히면!!"

"괜찮아. 저 봐 피하잖아."

박상택이 두려워 하는 장면을 구마하가 커다란 카빙턴을 그리며 피해나갔다.

"미친 새끼. 씨발 기본이 없네."

"상택아. 야! 상택아? 어디 가!"

박상택이 구마하의 도착지점으로 걸어나간다.

성큼거리며 오는 그를 보며 구마하도 쏴아악 브레이크를 걸며 고글을 꺾어들었다.

"어?"

"야 이 미친놈아!!"

"...상택 선배?"

"넌 씨발 선수가 되겠다는 새끼까 스키의 기본 매너도 몰라!!"

"..."

보자마자 다짜고짜 성질부터 부리는 박상택을 무시하며 구마하가 김정준을 향해 슬슬 폴을 찍으며 미끄러져 나아간다.

"형...?"

"잘 하고 있었냐."

"..."

다른 말을 떠나 구마하가 박상택을 돌아본다.

"저 인간이 여기 왜 있어요?"

"후후. 우리랑 같이 훈련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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