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79화 (179/401)

< 이곳에 열정이 살아 숨쉬네 (8) >

"거 봐. 내 말대로 힘 빼니까 더 부드럽게 되잖아."

상택이 형이 합류하고 처음엔 많이 다퉜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씨발 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라고!!"

"..."

성격이 이지랄인데... 이런 인간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힘주면 에지가 깊게 들어가. 그러다 튕겨 나가는 거야. 힘 빼고 중심을 잡어."

"아니 어떻게 힘을 빼고 중심을 잡아요...?"

"감각을 키워야지! 딱 이만큼이다 하는 파워 밸런스 조절을 해야 레일 밟듯 스키가 방향을 꺾어 들어간다고."

"후우..."

하지만 실력과 인성은 반비례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시키는대로 하니 확실히 실력은 는다. 겪으면 겪을수록 이 사람의 능력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박상택의 운동에 대한 진심은 거짓이 아니었다. 괜히 사람이 내공의 빛을 내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선배. 그럼 코너에서 업 앤 다운도 속도를 높일 수 있어요?"

"당연하지!!"

"음. 한번 해봐야지."

"일단 내가 하는 걸 잘 봐 봐."

상택 선배와 훈련하면서 나는 더욱더 정교한 자세와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

덕분에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 줄어들어 훈련 시간이 길어지고. 실력이 커갈수록 싸우는 날은 줄어들고 대화를 나누는 일들이 늘어났다.

"야. 넌 어떻게 그렇게 계속 탈 수 있냐? 무릎 안 아퍼?"

"근육이 있잖아요."

"새끼야 근육은 나도 있어."

"선배랑 저랑 근질이 같습니까. 나는 상급. 선배는 흠. 음..."

"아 이 씨발... 진짜 존나 빡치게 만드네."

"고기 먹어요. 먹고 계속 운동하세요. 그럼 돼요."

"소화력에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지. 나도 많이 먹는 편이야."

"기초 대사량을 더 늘리시면 괜찮습니다."

"여기서 기초 대사량을 얼마나 더 늘리라고?"

"그러니까 근육을 키워야죠. 근력이 식욕을 넘어서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요."

"흠. 결국 운동량이라는 건가..."

"스쿼트는 계속 하고 계시죠?"

"..."

"아 빼먹지 마시라니까."

"야. 나도 하고 있다고!!"

어느 순간 우리는 선후배를 떠나 형 동생이 됐고. 다나까 같은 문화를 벗어나 반말에 욕설을 섞어 말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이제는 우리끼리 싸우는 게 아닌, 구석에서 정준이 형을 욕하며 친해지고 있었다.

"저 형은 원래 저렇게 답답해요?"

"몰랐냐? 오죽하면 부모랑 의절까지 하겠어."

"하긴... 그것만 봐도 성격이 보통은 아니지."

"그동안 본성 숨기고 있던 거라니까."

"아... 예전엔 편하게 타라고 했는데..."

"고대 출신이 다 그렇지."

"하하하!!"

"인간들 꽉 막혀가지고."

우리는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참가하여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남반부에서 열린 대회가 아닌 올림픽을 앞두고 유럽에서 열린 시합이었다.

이곳의 성적이 올림픽의 성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상택이 형은 대회전 8위. 나는 활강 20위를 기록했다.

시합을 마치고 동료들과 호텔에서 맥주와 치즈 안주를 펼치고 밤을 보내고 있었다.

"다들 고생했다."

"아니 잠깐 놀러왔다가 대회까지 치루는 건 뭐야."

"좋지 뭘. 체류비 훈련비 회사가 다 내주고."

"형. 나 이 새끼한테 강습비 안 받고 있어."

"상택이 형. 형이 쓰는 돈이 내가 벌어온 돈이야."

"야. 따지지 마 새끼야."

"싸우는 건 나중에 하고. 상택이 몸은 좀 어떠냐?"

"무릎이 아슬아슬해... 허리는 끊어지기 직전이고..."

"내가 이따가 마사지 해줄게."

"꺼져. 어디 손을 대려고."

"그래. 마하가 상택이 안마 좀 해줘라."

"아 됐다니까!"

"받아 봐. 이 녀석 마사지 잘 해. 나도 몸 아플 때 도움 많이 됐어."

"...남자가 만지는 건 싫은데."

"뭐래. 안 하면 나야 좋지. 내가 무슨 대딸이라도 해줄 줄 아나."

"하하하! 정준이 형 들었어? 아 이런 걸 좀 뭐라고 하라고!!"

"몰라. 신촌 문화가 그런가 보지. 나도 가서 정리 할 것 정리하고 쉴 테니까. 적당히들 놀아."

사랑하던 여자에게 받은 상처를 싸워야 하는 맞수에게 치유받을 줄이야.

인생 정말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다.

"아. 아! 야! 살살 좀 해!"

"살살 하는 거야. 지금 이렇게 눌렀어."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아프냐..."

"형은 이런 몸으로 어떻게 운동을 했어?"

"해야지 그럼. 니 새끼는 실력이 쭉쭉 느는데, 나만 혼자 죽치고 있으면 어쩌라고."

"하여튼간 집념. 승부욕 하나는 진짜..."

"닥치고 마사지나 계속 해. 어우. 등이 왜 이렇게 아프냐."

아직 우리 형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내공을 담아 건네줄 수 있었다.

상택이 형도 빠르게 피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제는 좀 시원하네."

"그래서 꼴려?"

"하하하! 미친놈아! 넌 진짜 사람들이 너 이런 놈인 거 아냐?"

"내가 상택이 형 전신 마사지를 해주고 있다니... 진짜 우리 학교 사람들이 본다면 뭐라고 할지..."

"민구가 보면 존나 놀라긴 하겠다. 니가 나한테 말 놓고 형 동생하고 있고."

"그러게 말이야."

주물주물 상택이 형의 켠디션이 회복되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참 고마워."

"뭐가?"

"형한테 배워서 좀 더 발전할 수 있었으니까. 그건 팩트잖아."

"...새끼. 아 좀 시원하게 눌러 봐."

"오 진짜? 이렇게?"

"아! 아퍼 미친놈아!!"

"엄살은."

다시 조용히 안마나 해주고 있는데, 이것도 스킨십이라고 뭔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상택이 형."

"왜?"

"형은 왜 그렇게 내가 싫었어?"

"..."

"이렇게 될 거. 처음부터 좋게좋게 지냈으면 좋았잖아."

"병신이냐? 좆같은 걸 물어보고 있어 짜증나게 미친놈이."

그냥. 갑자기 사람이 왜 바뀌었는가 그게 궁금했다.

난 그냥 하던대로 하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날 찾아와서 형이 되고 친해지고 욕하고 마사지 받고.

어째서 먼 길을 돌아왔을까?

대체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쪽팔리니까 그랬지."

"뭐가?"

쌓여있던 피로가 풀려서 그랬던 거 같다.

아니면 마사지가 생각보다 더 시원한 게 고마웠다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인간이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고백할리 없으니까.

"난 나보다 잘난 놈 없는 줄 알고 살았거든."

"음."

"근데, 사회 나가보니 그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스키는 정말 내 세상인데. 나보다 더 잘나고 뛰어난 새끼가 나타나니까 그런 게 무섭고."

"..."

"근데 이 새낀 후배잖아. 누르지 않으면 나만 좆되겠구나 싶었던 거지."

"형이 개새끼라는 건 인정했네 그럼."

"하하하! 그래. 내가 개새끼다. 그렇다고 니가 개념있는 건 아니야."

"개념은 무슨... 그런 걸 따지니까 사람이 삐뚤어지는 거야."

"어이고. 너도 딱 너 같은 후배 만나라. 제발..."

마사지를 끝내고 소파에 앉았다.

상택이 형도 여전히 엎드린 자세로 있었다.

"야. 마하야."

"뭐. 아 끝났어. 나도 힘들어."

"수빈이는 어떻게 할 거냐?"

"후우 몰라. 끝난 이야기 뭐하러 해..."

"듣자하니 먼저 대회로 너나 나나 한국에서 스포트라이트 좀 받는 거 같던데. 얘도 니 소식 알고있지 않을까?"

"언론 뭐. 어쩔 수 없지."

"그냥 잘 지내 봐. 솔직히 세상에 그런 애 또 없어."

"뭐야. 선 넘지마."

"하하하! 저 새끼가. 야 너 일로 와. 진짜 죽여버릴라. 뭐? 선 넘지 마?"

"형. 수빈이는..."

나의 사랑이자 연인. 그리고 나의 아픔...

그녀는 잘못을 반성하고 나는 그걸 용서해준다. 그렇게 끝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좀 버거워."

"너 같은 놈도 그런 걸 따지냐?"

"너무 안 따지고 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수빈이 생각하면 이제는 화난다기보다도 두렵다는 게 본심 같애."

"좋은 감정은 놔두고 말하는 거지?"

"그렇지. 좋은 걸 따지면 한도 끝도 없지..."

"..."

"근데, 그 좋은 감정을 넘어서는 두려움이 생긴 거야."

좋은 게 있어도 두려움을 느낀다면. 과연 그런 상대를 얼마나 사랑할 수...

"..."

어라? 근데. 이런 말을 어디서 들었던 거 같기도 한데. 누구지? 누가 그랬었는데?

"야."

"어? 왜?"

"그럼 너네 둘이..."

"우리 뭐?"

"했냐?"

"진짜 이 형도 알면 알수록 제정신 아니야..."

아무튼,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중요하다.

사랑이 두려움에 밀리지 않을 만큼 내가 더 강한 사람이 된다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다.

지금 그녀를 다시 만나도, 나는 이 사람이 언제 어떻게 무슨 짓을 저질러 주변에 폐를 끼칠까 그것을 염두해야만 한다.

그런 사랑은 하고싶지 않다. 더는 그렇게 상처입고 싶지 않다.

한수빈이 두렵다는 말에 상택이 형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전에 클럽에서 그런 일이 한번 있었어. 수빈이 그때 아직 고3인가 그랬는데."

"고3이 클럽이라... 나한텐 공부만 했다고 했으면서..."

"한수빈이잖아. 어쨌든."

그녀가 댄스 플로워에 나와 신나게 놀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사람이 원체 인물이 좋다보니 어떤 그녀의 손을 그냥 확 잡아 끌고갔단다.

"하하하... 누군지 모르고?"

"당연하지. 모르니까 그랬겠지. 그 새끼 입장에선 뭔가 사나이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 같은데."

한수빈을 바(BAR)로 데리고 간 정체불명의 남자.

조용히 따라나선 그녀는 그가 웨이터에게 맥주 두 병을 달라는 걸 보며 씩 웃고는.

"그대로 두 병 다 그 새끼 대가리 깨버렸지."

"하하하... 하하하하..."

"더 웃긴 건 뭔지 아냐? 얘가 아니라, 그 새끼가 경찰한테 잡혀갔어. 그 뒤로 진짜 아무도 수빈이 못 건드렸고."

"이런 게 남이니까 웃고 떠들지. 난 실제로 내 주변에 그러는 걸 봤다고."

"살다보면 안 맞는 사람들이 있어."

"있지. 그러니까 말했잖아. 형같은 사람들이 그런 인간들 보다 백배 낫다고."

며칠 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와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뤘다.

혹시나 그녀가 찾아오지 않을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기자들이 먼저 공항이나 경기장 이곳저곳 따라다니는 바람에 왔어도 다가오진 못한 거 같다.

시합은 무사히 치뤘고, 결과는 예상대로.

"아 젠장."

"왜 욕이야. 경기 잘 끝내놓고서."

"아... 이 새끼 은퇴시켜야 되는데..."

"후후후. 이렇게 되면 내기는 내가 이긴 건가?"

"닥쳐 새끼야. 재수없으니까."

나는 스키로 국가대표가 되었다.

다른 한국선수들과 정당하게 겨루어 활강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물론, 상택이 형도 선수 선발전 종합 우승을 거두며 한국 스키의 첫 메달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회전, 대회전 그리고 슈퍼대회전까지 세 종목 도전이다.

"후우..."

"아 왜 한숨이야?"

"모르겠다. 올림픽이라니..."

"올림픽 나가고 싶어했잖아. 좋아해야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그게 좀 다르다고..."

선수 선발전을 마치고 스키연맹 사람들과 가진 회식자리에서 상택이 형이 말했다.

"진짜 어릴 때부터 꿈이었단 말이야."

"축하해. 꿈을 이뤘네. 잘했구만."

"근데, 그냥 얻어낸 게 아니라 올 한 해 존나 고생해서 겨우 이뤄냈어. 그리고도 아직 더 가야 할 길이 있고."

올림픽 가면 대체 얼마나 괴물들이 몰려올까. 내가 과연 정말로 메달을 딸 수 있을까... 상택이 형은 그런 걱정과 두려움이 밀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뭘 그런 걸 따지고 있어. 남들이 뭔 상관이라고. 형만 잘하면 그만이지."

"야. 넌 니가 이미 메달을 가졌으니까 별 거 아닌 줄 아는데. 이건 모든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자 두려움이야."

단 한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그 기회를 날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내 인생의 황금기가 다시 돌아올 것인가.

올림픽은 4년마다 돌아오는 국제적인 잔치다.

나의 경우 어떻게, 하계 동계 2년만에 다시 찾는 자리지만. 보통 선수들에게 있어선 평생에 한 번을 가기가 어려운 무대인 것이다.

상택이 형이 요즘 그런 걱정이 들어 밤 잠을 설치고 있단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니까? 안 하면 되네."

"후우. 이 새끼 진짜 말이 쉽지. 넌 아테네 갈 때 무슨 생각하고 있었냐?"

"..."

"긴장같은 거 안 했어?"

"섹스."

"어?"

겸사겸사 올림픽 선배로써 상택이 형에게 그곳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었다.

"형. 올림픽 가면. 아니 선수촌 들어가면."

무료콘돔을 시작으로 선수촌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랑과 우정. 파티와 만남.

그리고 섹스까지...

"꺼져 구라치지 마..."

"진짜야. 그렇게 다 친해진다니까."

"야 이 씨발. 개소리 하지 말라고."

"아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클럽이니 뭐니 상대도 안 돼. 형 선수촌이야 말로."

보름간 지구상에서 가장 힘 좋고 건강한 사람들이 모이는. 지상 최대의 축제와 낭만이 피어오르는 곳이다.

"진짜로?"

"그래. 그동안 사람들이 다 모르는 척 하고 있었을 뿐이지."

"정준이 형!! 형!!"

"아 정준이 형은 또 왜 불러..."

"가만있어 봐. 저 형도 올림픽 나갔었잖아."

긴장풀라고 해준 이야기가 생각보다 상택이 형한테 크게 다가가는 것 같다.

정준이 형한테도 내 말이 진짜냐고 묻는 상택이 형.

"어... 확실히 그런 소문이 있긴 하지만..."

"진짜로...? 진짜 그냥 막... 그렇게? 클럽도 어느정도 와꾸를 따지는데?"

"몰라. 난 코치님이랑 붙어 있느라 여자 만날 시간은 없었어..."

정준이 형까지 물어본다.

"마하야. 하계는 그러냐?"

"형... 동계가 콘돔 소비량은 더 많아요."

"..."

"사람은 적은데 소비량은 많다. 그만한 수요가 벌어진다는 뜻이겠죠?"

"그럼 넌 아테네에서 해봤어?"

"아. 저도 감독님이랑 단 둘이 있었잖아요."

"꺼져 새끼야! 너 아까 나한테 한 말이랑 다르잖아!!"

"상택아 잠깐만. 마하야. 너 그럼 스키 도전 한 게 설마..."

"에이. 아니죠. 아니라고요. 아 진짜 오해하지 마시고. 도전은 도전이고. 이건 그냥 올림픽 선수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뿐이고."

2006년 1월. 우리는 대회를 앞두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이번엔 한상률 감독님. 정준이 형의 전 지도자 이영호 코치님을 비롯.

다른 스키 선수들과 대한민국 설상연맹에서 붙여준 훈련팀까지 대규모로 꾸려진 메달 원정대였다.

한 달 뒤 옆 나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대회 슬로건은 La Passione Vive Qui 이곳에 열정이 살아 숨쉬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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