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80화 (180/401)

< 이곳에 열정이 살아 숨쉬네 (9) >

구마하 박상택 그리고 젊은 지도자 김정준을 중심으로 뭉친 대한민국 신생 설상팀.

오스트리아에서 막바지 훈련을 마친 설상팀도 이탈리아로 넘어와 선수촌에 입촌했다.

토리노에서 백여 킬로 떨어진 작은 도시 세스트리에네.

프랑스와도 가까워 많은 스키어들이 즐겨찾는 이곳에서 알파인스키 경기가 열린다.

선수는 선수끼리 코치는 코치끼리 짐을 풀고 있었다.

한상률이 김정준과 이영호 지도자를 보며 말했다.

"근데 나까지 들어올 필요있나? 난 그냥 호텔에서 지내도 됐는데."

"무슨 소리세요 형님. 한 배를 탔으면 끝까지 가야죠."

"아니.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한 대표가 왜 한 게 없어. 이번에 연맹보다 한구 스포츠가 스키에 더 많은 투자를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야말로 여기 왜 와 있나? 훈련은 애들끼리 알아서 했는데."

"선생님은 기술고문이시잖아요."

"한 대표도 우리한테 희망 고문이 돼주고 있잖아."

"하하하! 희망 고문은 나쁜 거잖아요."

"부적 같은 존재다 이거야. 어쨌든 금메달 코치니까."

"전 그냥 토템입니까?"

한상률과 이영호의 대화를 들으며 김정준이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리조트와 알프스의 하얀 풍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진다.

"어쨌든 또 올림픽을 왔네요 선생님."

"그러게 말이다. 올해는 어려울 거 같았는데."

"내가 감독이라..."

이영호 지도자가 김정준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두 사람이 창문 밖 커다랗게 장식 된 오륜기 동상을 보며 말했다.

"저 동그라미 다섯 개가 뭐라고 참. 그치?"

"올림픽이 그런 거죠."

"한 대표. 한 대표는 아테네 때 어땠어?"

"신났죠 뭐. 저도 그냥 올림픽 왔다는 게 좋았어요."

"거기다 메달에 세계신기록에. 하하하. 아이고 우리도 좀 그렇게 되면 좋겠다. 그치 정준아?"

"...애들을 믿어야죠 뭐."

이영호 지도자가 가족과 통화를 하겠다며 방에서 나갔다.

그러자 김정준이 한상률을 보며 다시한번 물어본다.

"형님. 진짜로 형님은 마하 메달 딸 때 어떠셨어요?"

"얼떨떨했지. 보면서도 이게 진짠가 싶기도 하고... 100m, 200m 때까진 서로들 좀 믿기지가 않는 상황이었어."

"후우..."

"왜? 걱정 돼?"

"...솔직히 아주 가능성이 없다면 기대도 안 하겠는데."

결과보다 도전에 의미를 두는 상황이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 설상팀은 어딘가 메달을 기대할 만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애들 앞에선 태연하게 굴려고 하는데. 뭔가 자꾸 제가 조바심을 내는 거 같기도 하고..."

"아까 선생님한테 멋진 말 하더만."

"뭐요?"

"선수들을 믿어. 그럼 돼."

한상률도 김정준의 어깨를 다독여준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선수촌에 왔으면 살 좀 찌우고 가야지."

"네. 그래야죠."

* * *

팀이 그렇고 멤버가 그렇다보니, 나는 여기서도 상택이 형이랑 한 방을 쓰게 됐다.

올림픽이 처음인 형을 데리고 식당은 어디고, 뭐는 뭘 해야 하고 하나하나 알려주고 있었다.

근데, 잠깐만. 나도 동계올림픽은 처음이잖아?

왜 내가 이 형 시중을 들고 있어야 되는 거지??

"왜겠냐. 니가 후배고 내가 선배니까지. 억울하면 일찍 태어나든가."

"저 소리 왜 안 나오나 했다..."

"그리고. 이게 뭐야 새끼야. 니가 말한 거랑 완전 다르잖아. 이게 무슨 축제야?"

"뭐. 내가 이렇게 조용할 줄 알았냐고. 나도 동계 올림픽 처음이라니까?"

"클럽 저리가라라며!!"

웬수같은 인간. 진짜 괜한 소리를 했지.

선수촌에 오자마자 상택이 형이 심심하다고 난리였다...

"이런데서 해? 진짜? 아니 어떻게? 누구랑? 언제 만나서?"

"자. 상택이 형... 진정하고. 우리 경기하러 왔지 여자 만나러 온 거 아니잖아."

피겨나 쇼트트랙 하키 같은 실내 스포츠는 토리노 도시에서 열리지만. 우리는 종목 특성상 외각으로 빠질 수밖에 없어 더 뭔가 조용하고 잠잠하고 그런 상태다.

하계는 종목도 많고 사람도 많으니까. 그냥 매일 밤이 축제라 시끄러워 잠도 잘 못 자는데.

여기는 뭔가... 진짜 뭔가... 아니, 여기도 물론 외국인 선수들 있고, 기자, 관광객 같은 사람들도 더러 보이지만. 내가 느낀 아테네의 그 폭발적인 분위기에 비교하면 진짜 동계올림픽은...

정말 할 게 없어서들 방에서 섹스만 하는건가?

"상택이 형. 내가 말했지. 동계 스포츠가 콘돔 소비량이 더 많다고."

"근데?"

"주변을 봐 봐. 여기 할 게 뭐 있어. 실용적으로 따지면 이게 낫다니까?"

"야. 나 예선까지 여섯 경기 뛰어야 돼. 대회 내내 운동만 하는데 내가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딨어."

"나도 그랬어! 나도 하루 걸러 맨날 시합인데 만나고 다 했어!"

"Hi~ Mr. KOO?"

"어 예스. 헤이. 화 와 유?"

그래도 올림픽은 올림픽이다.

각지에서 참가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인연이 펼쳐지는 기회가 있다.

"봤지? 이렇게 인사하고 뭐하고 하라니까?"

"야. 방금 뭐냐? 설마 자기네 방 놀러오라고 한 거야?"

"그냥 인사만 한 거야. 제발 오버 좀 하지 마."

"너한테 싸인 받아갔잖아?"

"형 왜 이래? 스트레스 받어?"

"...야. 그럼 너가 여자 데리고 오면 내가 나가줘야 되는 거냐? 아님 그냥 모르는 척 등 돌리고 있으면 돼?"

"으아아! 상택이 형!! 제발 정신차려!!"

기자들을 만나 뻔한 질문에 뻔한 답을 들려주기도 하고, 어렵게 먼 곳까지 찾아온 한국 기자분들을 만나 성실한 답변을 들려드리기도 했다.

작은 관심 하나하나가 나를 떠나 설상종목에 응원이 되는 만큼 진심으로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오오... 너 생각보다 영어 잘한다..."

"내가 딴 건 몰라도 영어는 진짜 빡시게 공부했어."

"여자 때문에?"

"선배님. 우리 그냥 옛날같이 돌아가죠. 서로 쌩까고 무시하고. 제발 그렇게 지내자고요."

삼일간의 연습게임을 끝으로 단판 승부로 메달이 결정되는 활강.

반면, 상택이 형은 세 종목에 참가하는 만큼 예선과 본선. 총 여섯 게임을 치러야 했다.

부담되는 것 같다.

자꾸 부정적인 상황을 염두 하는 것 같은데.

잘 할 거 같은데. 왜 이렇게 혼자 지레 겁을 먹는지...

"그냥 편하게 생각하라니까."

"아 씨발! 그게 안 된다고!!"

메달 압박감. 육상도 장난 아니긴 했었지.

나는 감독님이 있으니까 커버 됐지. 아니면 진짜 피 말렸을 거야.

효자종목인 빙상과 도전자의 위치에 놓인 설상의 대우가 다를 수밖에 없는 건 인정하지만.

상택이 형은 괜히 혼자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 같아 보기에 안쓰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감독님."

"어. 들어와."

"혹시 상택이 형 좀 만나보셨어요?"

"아니. 왜."

"메달 때문에 사람이 미친 거 같아요."

"놔 둬. 널 의식해온 만큼, 더 그런 부담감이 들겠지."

"감독님이 좋은 이야기 좀 해주시면 안 돼요?"

"내가 왜? 상택이가 우리 소속 선수도 아니고. 난 이미 그 녀석한테 해줄 만큼 해줬어."

"어우 냉정하셔라..."

"하하하! 장난이고."

감독님은 그 또한 정준이 형과 상택이 형이 넘어서야 하는 문제라고 나설 수 없다고 하셨다.

"마하 너가 두 사람이랑 동료 의식을 강하게 느끼는 건 좋지만. 나서지 마."

"그래야 될까요...?"

"그럼. 잘 할 거야. 우리도 아테네에서 그랬었잖아."

"흠."

"너는 좀 어떠냐?"

"저요? 저 뭐. 컨디션 좋아요."

오랜만에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감독님도 시합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으셨는가, 사소한 이야기들을 건네셨다.

"너 토리노가 유벤투스 연고지라는 거 알고 있었어?"

"당연하죠. 유벤투스도 있고, 피아트도 있고. 토리노 잘 알죠."

"오~ 뭐 많이 아는데."

"감독님. 저 이래 보여도 유럽에서 훈련했어요. 독일어도 조금은 해요."

"하하! 여자는?"

"네?"

"여자는 안 만났어? 너 먼저 오스트리아 왔을 땐 여자들 많이 만났었다며."

"...그걸 감독님이 어떻게 아세요?"

"오기 전에 형님네 들려서 애들 만나고 왔지."

하여간 진성 또라이들... 그래도 이렇게라도 소식 들으니 반갑구만.

"애들은 잘 지내요?"

"잘 있지. 응원 전해달라고 하더라."

"지들 얼굴도 안 보고 제 스케쥴만 다닌다고 서운하다고 안 해요...?"

"안 그래. 친구들이 너 운동하는 거 다 아는데."

"..."

보아하니, 감독님도 얼핏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으신 거 같다.

태윤이가 있었으니 대충은 아시겠지.

친구들은 이제 다들 알고 있다고 봐야 하겠구나.

"정말 괜찮아진 거 맞지?"

"뭐. 그럼요."

"마하야.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사람 만나다 보면 원래 별꼴 다 보는 셈이다."

"덕분에 운동에 최대로 집중할 수 있었어요."

"그래. 그럼 된 거야."

"감독님."

"음?"

"그냥 여자친구 사귀었다 헤어졌을 뿐이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하! 그러자고."

임팩트가 강해서 그렇지 수빈이와의 시간이 그렇게 길었던 것도 아니다.

감독님 말씀대로 사람은 얼마든지 만나고 헤어질 수 있다.

결혼이 아니니까. 연애잖아.

* * *

2월 첫째 주. 여독과 피로가 회복됨과 동시에 장비를 챙겨 훈련 코스로 나가보았다.

정준이 형 상택이 형 두 사람이 함께 있었는데, 상택이 형은 아직은 더 쉬고 싶다고 숙소로 돌아갔다.

"아직도 그러나...?"

"저 녀석 신경쓰지 말고, 너 가서 즐겁게 타고 와."

"다녀올게요."

"그래."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며 생각했다.

스키도 시작한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별 거 안 한 거 같은데,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대학생이 되었고. 동료가 생겼고. 적이 생겼고. 선배가 생겼다.

"..."

그리고 여자를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다시 일어나 운동을 계속했다.

그 결과 나는 지금 태극마크를 달고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다.

"오케이 스톱."

"후우. 어떠세요?"

"뭘 어때. 보기엔 편하게 타는 거 같지."

"그럼. 활강 코스로 가볼까요?"

"개막식 날 하자. 본시합은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게 좋아."

정준이 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 스키는 모를 때가 더 잘 탔던 거 같애요."

"그렇지.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두려워지는 법이야."

"..."

모를 땐 즐거워도 알면 괴롭다.

뭔가 연애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피곤하면 너도 들어가서 쉬든가."

"정준이 형. 일본말로 좋아한다를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아이시떼루?"

大好きだよ.

다이스키다요.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

"왜? 뭐라고 하는데?"

"그냥요. 저도 잘 몰라서 물어봤어요."

스키. 처음엔 그냥 재미로 하다가 어느 순간, 뭔가 진지한 도전과제가 되어버린 운동.

생각해보면 수빈이와의 사랑도 비슷했던 거 같다.

내가 원해서라기보다 그녀가 원해서. 단순한 원나잇이 스노우 볼이 구르듯 서로에게 커다란 존재감이 되어 가슴에 남았다.

"흐음."

한 감독님 앞에선 강한 척했지만 역시 그녀를 생각하면 아련한 느낌이 있다.

근데, 이거야말로 진짜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이번엔 진짜 사랑했으니까. 뜨겁게 불타오르지 않았던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며 그녀를 생각했다.

スキー. 好き. 아무리 생각해봐도 똑같은 발음이야.

둘 다 스키야. 둘 다 내가 좋아했던 것들이야.

"후우."

어느새 다시 정상.

리프트에서 내려 천천히 폴대를 찍으며 이동했다.

슬로프 끝에 닿으니 눈바람이 날아와 얼굴을 때린다.

"..."

생각하면 할수록 스키나 연애의 유사점이 많구나.

할 땐 정말 재밌고 신나고 아드레날린 폭발하지만, 한순간의 실수가 목숨과도 직결되는 위험이 있다.

연애도 그랬어. 너무 좋았는데, 아주 사소한 오해가 우리를 파탄으로 몰아 넣었다.

스키? 연애? 나는 처음과 다르게, 그것들의 두려움을 알고 있다.

아는데도 왜 이렇게 하고 싶을까.

상처를 알면서도 왜 다시 사랑을 하고 싶은 걸까.

"아 맞다. 운룡대팔식."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처음 스키를 배울 때 잡았던 목표가 이제야 떠올랐다.

원래는 그거 하려고 스키를 시작했었는데. 하하하!! 맞다! 그랬었지! 와 진짜 까마득히 잊어먹고 있었네.

"후후후. 다 그런 거지 뭐."

커다란 목표도 나 살기 바쁘다 보면 까먹듯이.

그녀도 지금이니까 그러지 내 안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잊을만하면 생각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존재가 될 거다.

그래. 마침 생각난 김에 운룡대팔식이나 시험해 볼까?

둘러보니 마침 슬로프에 사람들이 비켜서고 있었다.

1분 남짓, 이곳은 나의 독무대가 된다.

해보자. 예전에 비하면 실력도 많이 늘었고 내공도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런 마음이면 세상 못 할 게 없는 것 같애.

운룡대팔식은 용이 비상하듯 허공을 날아오르는 기술로 내공과 경공이 신급에 달했을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나는 용이 하늘을 나는 게 아닌 구름을 달려 내려가듯 스킹을 시작했다.

쏴아아아악-!!!

스키는 정말 위험한 종목이다. 처음이나 스피드가 좋고 바람이 시원했지. 배울수록 속도감을 넘어서는 두려움을 알게 된다.

잘 타니까 위험한 것이다.

방심하니까. 나의 실력을 믿으니까.

연애도 그랬던 거 아닐까?

"후욱!"

몰라. 정답은 없어.

그냥 너무 좋았어. 좋으니까 하는 거야.

애시당초 다칠 게 두렵다면 시작도 안 해.

지금도 마찬가지야.

절정의 속도감에서 빠르게 커브를 잡아야 돼.

그것을 운룡대팔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1초식의 움직임이라 하더라도 현대 스포츠에 있어선 커다란 기술이 되는 건 맞어.

"훅! 후욱!!"

"Hey! stop!!"

할 수 있을 거 같애. 방법이 보여.

힘을 빼는 거다. 힘을 빼면서도 중심을 잡아.

잘 하려고 하지 마.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거야. 거기에 아주 조금만 의지를 내공에 실으면 돼.

나는 준비되어 있으니까.

힘을 빼고 몸을 부드럽게 커브에 맞춰 눕혔다.

그러자. 쏴아아악!! 발 끝에 진동도 못 느끼게 스키 끝이 레일을 타고 돌 듯 방향을 틀어 버렸다.

이것을 운룡대팔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카빙턴을 존나 아슬아슬한 각도에서 꺾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나에겐 확실한 무기가 생겼다.

촤아악!

"후욱~!"

"..."

"형 왜요?"

"야. 너 방금 저기서 뭐한 거야?"

"네? 아 사람들 없어서 그냥 좀 쏴봤어요."

"...미쳤어? 너 그러다 부상입으면 어쩌려고!!"

힘을 뺐으면 됐는데.

그걸 알았으면 참 좋았었는데.

수빈이도 이렇게 힘을 빼고 부드럽게 나에게 의지했었다면.

그래도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고 서로에게 녹아들 수 있었을 거다.

정말 아쉽다.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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