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81화 (181/401)

< 이곳에 열정이 살아 숨쉬네 (10) >

"어. 엄마."

"혜정아. 밥 먹었어?"

"아니. 알바 가서 먹으려고."

"마하한테선 연락 없니?"

"없어. 걔 나한테 전화 안 한다니까."

"마하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엄마는 무슨 생각인데!?"

"개회식은 나온데?"

"몰라! 뉴스 봐. 구마하 소식은 나보다 뉴스가 빠르다니까!"

작년 10월. 난데없이 서울에 거주지가 생겨버린 이혜정.

자취 생활도 어느덧 석달이 지났다.

* * *

구마하가 훌쩍 오스트리아로 떠나며 집을 떠안은 이혜정은 답을 찾지 못해 구마윤을 찾아갔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됐는데. 오빠 저 어떻게 해야돼요?"

"하하하하!"

"왜요? 왜 웃으세요?"

"아니야."

바로 며칠 전 수빈이가 울며불며 찾아왔길래 어르고 달래 올려보내니 이번엔 혜정이 차례라...

연애는 동생이 하는데 왜 뒤치다꺼리는 내가 하고 있을까...?

웃음으로 현상황을 받아들인 구마윤이 혜정이에게 말해준다.

"지가 그런다고 했으면 내가 할 말 있나. 내가 집주인도 아니고."

"그럼... 저 진짜로 그 집에서 살라고요?"

"그렇게 해. 어쨌든 빈집으로 놔두는 것도 그러니까. 오빠도 부탁할게."

보호자의 허락까지 받은 이상 이혜정이 주저할 이유는 없다.

아빠에겐 비밀로 하고 엄마와 상의 후 바로 짐을 싸 마하네 집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잠깐만 있는 거야. 빈집 봐주는 거니까. 경비 아저씨 같은 거지."

처음은 어색하고 남의 집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그럭저럭 몇 주 지내보니 적응되어갔다.

그러자 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많은 것이 나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생겼고, 그동안 누리지 못한 대학생활이나 학점과 교우관계를 단단히 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아르바이트를 구해 스스로 용돈벌이도 하고 있다.

그렇게 혼자 잘 지내던 어느날. 구마하가 한국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여름 뜨거운 감동을 선사해준 구마하 선수가 이번엔 동계스포츠에 도전합니다. 오늘 평창에서 스키 선수 선발전이]

마하는 선발전을 끝내자 또 말도 없이 해외로 훈련을 떠나버렸다.

이혜정은 그의 모든 이야기를 뉴스를 통해 접했다.

아쉬울 건 없다. 그런 관계라고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마하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내가 아닌 아마도 그 예쁘고 하얗던 전 여자친구일 것이다.

혼자 잘 먹고 잘 자고 관리비 잘 내고 잘 사는 식으로 1월을 보내고 2월을 맞이했다.

제주도에 매화가 핀다는 소식과 함께 동계 올림픽 개막이 다가왔다.

"넌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니?"

"올림픽 끝나고 얘 돌아오면 나가야지."

"집으로 와?"

"아니. 알바비 모은 걸로 학교 근처에 원룸 구할 건데."

"혼자 있으면 위험하지 않겠어...?"

"그럼 친구랑 같이 살지 뭐. 안되면 기숙사 다시 도전해보고."

"하여간, 어떻게든 집 밖으로 나가려고..."

성남 소식을 전해듣은 이혜정은 외출 준비를 마치며 현관문을 열었다.

"어? 안녕하세요."

"알바 가요?"

"네. 안녕."

"안녕하세요 누나."

"그래."

주민 모두를 알고 지낼 필요는 없지만, 맞은편 이웃과는 안면을 텄다.

일곱 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신혼부부였다.

이혜정은 자신을 구마하의 이종사촌으로 소개했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해의 눈길을 피할 수 없어 둘러댄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누나."

"응?"

"마하 형 친척 없다고 그러던데. 누나는 뭐예요?"

"..."

"어머 어머! 애가 이상한 소리를... 미안해요!"

"아하하... 저도 신경 안 써요. 마하야 뭐. 원체 유명하니까."

"너 빨리 누나한테 사과 해!"

"맞다니까. 마하 형 가족은 친형밖에 없다고 그랬어."

"시끄러워!! 너 조용히 안 해!"

"하하...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네. 들어가세요..."

"누나. 누나 마하 형 세컨드지?"

"얘! 이게 진짜...! 미안해 혜정 씨. 내가 따끔하게 혼내놓을게."

"하하... 하하하... 아. 전 가볼게요."

엄마가 이걸 봤어야 했는데... 이런 애랑 뭐를 하라고...?

이혜정은 털털한 웃음으로 잠깐의 헤프닝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음?"

주차장에 멋진 포르쉐 한 대가 서 있었다.

우와 차 좋다. 멋있다. 그렇게 쉽게 지나치는 이혜정에게 문이 열리며 멋진 여성이 내려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

한수빈이었다.

이혜정은 그녀를 보며 괜히 당황하고 있었다.

"아! 어! 아... 안녕하세요."

"갑자기 나타나서 놀랬니?"

"조. 조금은..."

"잠깐 시간 있으면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어. 저 알바 가는 길인데...?"

"어딘데?"

"홍대요."

"내가 태워줄게."

"..."

뭐야 생각해보면 내가 꿀릴 거 없잖아. 나는 정당한 부탁을 받아 집을 위탁 관리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혜정은 그렇게 자신을 당당하게 내세우며 한수빈을 마주 보았다.

무엇보다 이혜정도 그녀에게 볼 일이 있었다.

"저도 언니 한번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시간을 봐야 알겠지만, 조금의 여유는 있는 것 같다.

"잠깐 들어오세요."

이혜정의 안내를 받아 한수빈이 오랜만에 그의 집을 찾았다.

둘이 함께 장난치던 소파. 밥을 먹던 식탁. 그리고 사랑을 나누던 침대.

그 외 다른 것들은 모조리 정리되어 있었다.

"..."

한수빈이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이혜정이 박스들을 하나 씩 들고와 건네준다.

"이거 돌려드려야 하는데 연락처를 몰라서."

"...너가 치웠니?"

"아니요. 얘가 다 치워놓고 갔어요."

"..."

"아 일단 제가 여기 왜 있는지부터 설명을 드리자면."

"들었어."

"누구한테요?"

"마윤이 오빠."

이혜정이 그들의 관계성에 대해 연상하는 가운데, 한수빈이 그녀가 건네준 박스를 살며시 열어본다.

"이게 여기 있었구나."

"얘가 막 마구잡이로 던져놔서 제가 다시 한번 정리하긴 했어요."

"그래."

한수빈이 박스들을 슥 밀며 말했다.

"괜찮아. 버려도 돼."

"..."

"내가 오늘 여기 온 건 다른 게 아니라"

"저기요!?"

이혜정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한수빈이 깜짝 놀란 모습으로 그녀를 본다.

"이거 다 비싼 것들 아닌가요?"

"어... 뭐... 그렇겠지?"

딱 봐도 사놓고 쓰지도 않은 명품 화장품과 세면용품들.

평범한 일상복 같으나 하나하나 값 비싼 유명 의류들.

그 외 기상천외한 장식이나 그릇 소품들까지.

이혜정이 다시 한번 박스들을 한수빈 앞으로 슥-. 들이밀며 말했다.

"버릴 거면 직접 버리세요. 남한테 시키지 말고."

"..."

단호한 모습에 한수빈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 멋있다. 마하가 왜 좋아하는지 알 거 같애."

"그리고. 저랑 걔랑 아무 관계 없으니까!"

"그래. 그렇다고 하자."

"..."

어떻든 별 상관 없다는 듯 한수빈이 피식 웃어버린다.

이혜정도 차분하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보았다.

"저 여기 사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말했잖아. 마윤이 오빠 찾아갔다가 들었다고."

"오빠는 왜 만나셨는데요...?"

"그냥. 고마운게 있어서. 잘 지내고 있다고. 걱정마시라고."

선아 정석이를 만나던 날 이혜정도 그녀를 처음 보았다.

성격 장난 아니겠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혹시나 마하한테 소식 들어온 거 없나 물어보러 갔었어."

"저... 언니."

"응?"

"둘이 진짜 헤어진 거 맞으세요?"

"..."

한수빈은 의미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

"뭐가요?"

"그냥 다."

이혜정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도 둘 만의 문제가 벌어졌다고 알고 있다.

애시당초 그들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알아봐야 속만 시끄러울 거 뭐하러 나선단 말인가.

그리고 한수빈도 사과하러 찾아온 자리에서 굳이 긁어 불편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저한테 뭐가 미안한데요?"

"있어. 그냥 얼굴 보고 그 얘기 해주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러지?

이혜정은 한수빈을 이해 못 할 존재로 받아들였다.

"마하랑 연락하니?"

"아니요. 저 걔 소식 뉴스로만 보는데요."

"집에 있는데... 둘이 연락 안 해?"

"안 해요. 전화도 안 오고."

"..."

"못 믿겠으면 핸드폰 보여드려요?"

"아니야. 됐어."

한수빈은 가방을 챙겨 일어선다.

"가자. 홍대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잖아."

"시간 있어요. 버스타고 가도 돼요."

"그래. 그럼."

뭐야. 진짜 왜 온 거야?

괜히 시비라도 걸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던 이혜정. 한수빈이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에 마음의 안식을 찾는다.

"마하 돌아오면 언니 왔었다고 전해줄게요."

"그래. 고마워."

"그리고 이거 진짜 가져가세요."

끝까지 짐을 떠넘기는 이혜정을 보며 한수빈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너 가져. 보니까 나랑 사이즈도 맞는 거 같은데."

"나 남이 입던 옷 안 입는데."

"그럼 팔든가."

그래? 그래도 된다면 뭐.

안 그래도 목돈이 필요했는데 고맙게 받아들여야지.

"혜정 씨."

"네?"

"...나 정말 너무 궁금한 게 있는데."

"뭐요?"

"마하가 너 좋아했던 건 알고있어?"

거짓말이 아닌 진심을 듣고 싶다는 한수빈. 이혜정도 피하지 않고 답했다.

"당연히 알죠."

"근데 왜 둘이 안 있어?"

"좋아해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잖아요."

"마하가 부담 돼?"

"아까도 나가는데 앞집 꼬마애가 저한테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세컨드네요."

"아하하하! 진짜?"

"웃지 마세요. 기분 나쁜 소리니까."

"후후후. 그러게. 갈게."

우두커니 그녀가 머물다 간 흔적을 지켜보는 이혜정.

"...진짜 왜 온 거야?"

* * *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지나는 동안 한수빈도 많은 것을 바꾸었다.

우선 의미 없는 가족의 시간을 없앴다.

대신, 밥만 먹고 끝내는 자리가 아닌 등산모임을 만들었다.

"등산?"

"네. 다 같이 산에가요."

"수빈아. 나도...?"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나도. 우리 세 가족 다 같이."

집에서 가까운 인왕산을 기점으로 한동그룹 사주 일가의 변화가 시작됐다.

"허억! 허억...!"

"넌 체력도 없는 게 무슨 산을 가자고..."

"엄마. 나 물 좀."

"없어. 아빠한테 물어 봐."

"아빠~~!"

막상 산에 오르니 무대 습관이 배어 있는 엄마 마코토 여사나 경영을 위해서라도 체력관리를 유지해온 아버지 한권석 회장이 젊은 20대 한수빈보다 더 빠르게 산을 올랐다.

한 회장이 지쳐있는 딸에게 보온 물병을 건네준다.

한수빈은 벌컥벌컥 격식 없게 수분을 흡수하며 체력을 되찾았다.

"후아!"

"천천히 마셔라. 그러다 탈 난다."

"헉. 허억. 아빠 더 없어?"

"이따가 줄게. 그래도 이렇게 딸이랑 같이 산에 오니까 아빠는 좋다."

"엄마는?"

"..."

"엄마도 좋아해주면 안돼?"

한 회장은 머쓱하게 대답을 피하고, 마코토 여사도 무표정하게 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 세월 묵혀버린 감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수빈은 포기하지 않고 한발 한발 걸음을 디뎠다.

실패에서 배웠다. 서두르면 안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익혔다.

천천히 나아갔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자 그녀도 북악산 정도는 가볍게 올라설 체력을 가지기 시작하며.

가족간에도 작은 변화가 찾아온다.

"이거 드세요."

"뭐야?"

"간식."

언젠가 산을 오르는 가운데, 마코토 여사가 한 회장에게 작은 초코바를 건네주는 모습을 보며 한수빈은 용기를 가졌다.

"엄마."

"왜?"

"엄마. 제주도 가봤어?"

"가봤지... 십년 전 호텔 오픈 행사 있을 때."

"이제 곧 연말이잖아. 우리 다 같이 제주도 가서 해돋이 보고올까?"

마코토 여사도 이제 딸의 노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 좋지."

12월 말. 한수빈과 가족들은 제주도를 찾아 백록담을 정복하고 단체 사진을 남겼다.

처음으로 세 가족이 함께하는 휴가를 즐겼다.

그런데, 하필 구마하가 이때 한국을 찾아왔단다.

미칠 노릇이었다. 하필 왜 지금...

구마하를 생각하자 다시금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지만.

"후우..."

산에서 배운 인내와 평점심을 떠올리며 감정을 누르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무엇보다 사랑은 놓쳤지만. 가족을 얻지 않았던가.

"당신. 파스 가져온 거 있어?"

"파스요? 그거 수빈이가 챙겼던 걸로 아는데."

"수빈아. 아빠 여기 파스 좀 붙여줘 봐."

"가방이 무거웠나...? 수빈 뭐하니. 빨리 아빠한테 파스 가져다 드려."

한수빈은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은은한 미소가 지어졌다.

"당신 우리 말 잘하는구먼."

"수빈이 태어날 때부터 잘했거든요."

제주도에서 돌아온 뒤부터 한 회장과 마코토 여사는 딸 없이 다른 경제인이나 정치가들과 따로 등산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다.

목적이 비즈니스든 뭐든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는 게 중요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한수빈은 스스로의 힘으로 가족의 유대를 만들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구마윤을 만나러갔다.

"후후... 자기야. 자기도 참 지독하다..."

그리고 이혜정을 만나 사과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혼자 조용히 운전대를 잡은 그녀가 억지로라도 웃어보지만, 눈에선 또르륵 몇 방울의 눈물이 흘려내렸다.

처음으로 이별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

정말 너무한다.

어떻게 이렇게 매몰차게 돌아설 수 있니...

그래도 강해졌기 때문에 사과할 수 있었어.

더 강해지자. 그러다보면 또 웃을 날이 돌아오겠지.

"힘내 자기야."

구마하와 박상택이 선수 선발전을 통과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상택 선배가 큰 도움이 됐다는 그의 발언도 들었다.

그럼 됐다. 응원이나 하자. 시합은 언제 하는 걸까?

2006년 2월 10일. 현지시각 밤 8시.

눈과 얼음의 대축제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이 화려한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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