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음을 녹이는 땀과 눈물의 이야기. (1) >
[다음으로 우리 대한민국 대표 선수단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남북한 공동입장이네요. 쇼트트랙의 안규인 선수와 북한 대표선수가 나란히 한반도기를 들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단은 이번 올림픽에서 종합순위 10위권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설상에 구마하 선수를 비롯하여 다양한 종목에 도전하는 만큼 멋진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으음. 마윤 씨... 안 나갔네...?"
"어. 개막식 보고 가려고.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소리 줄이고 있었는데."
"으음. 졸려..."
한국 시각 새벽 5시.
올림픽 행사를 즐기는 구마윤의 곁으로 연인 원수정이 다가와 눕는다.
"뭐야... 눈 비비다 보니 벌써 끝났어? 누가 마하야? 깃발 든 사람?"
"아니야. 마하 없어. 안 나왔데."
"왜? 북한 사람들 있어서 피하라고 했나...?"
"하하하! 낼 모레 시합이라 안 온 거야. 그런 거 없어."
"그래? 이번엔 빨리하네."
"그렇게 됐나 봐. 그래서 지금 정석이 비상이잖아."
"정석이는 왜?"
"애들 부른다고. 거의 뭐 동창회 분위기를 내고있어."
"후후후. 그러다 마하 메달이라도 따면 마윤 씨 돈 많이 깨지겠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근데 메달 딸까. 육상도 아니고."
"모르지. 마하니까."
스키는 육상같이 내공을 소모하는 경기가 아니었다.
내공보단 외력이 더 주가 되는 스포츠라 구마윤도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런데도 구마하는 형에게 자신감 넘치는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잘 봐. 이번에 멋진 거 준비했으니까 형 진짜 잘 봐야 돼.]
녀석이 또 어떤 감동을 주려고 벌써부터 이럴까 그의 가슴이 두근 거린다.
두 사람은 다시 개막식 행사로 눈을 돌렸다.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무대연출과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마지막 목소리가 스타디움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 * *
이탈리아 토리노 세스트리에네.
활강 경기 오픈 연습에 맞춰 각지에서 모여든 보도진이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다.
구마하도 김정준과 함께 선수들의 훈련장면을 지켜보았다.
"오~ 이 선수도 잘 타네요."
"베테랑이지. 오래 했어. 이번에도 전 종목 참가한다더라."
"와... 전 종목."
"마하야. 상택이는 어제도 잠 설쳤냐?"
"조금 끙끙거리는 거 같았는데. 그래도 새벽엔 잠든 거 같았어요."
"자식 긴장하지 말라니까..."
"오오~ 이 사람도. 형 이 사람도 잘 하네요."
"기량이 있는 선수지."
"확실히 올림픽 오니까 능력치가 달라지는구나."
그런 올림픽에 첫 출전임에도 하나 겁먹은 표정 없이 시합을 즐기는 구마하.
김정준이 그의 대범함에 작은 위안을 얻는다.
"우리도 슬슬 올라가자."
"네."
구마하가 움직이자 기자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김정준이 주변으로 시선을 옮긴다.
"나는 좀 빼고 찍지..."
"왜요! 형이 제 코치님이신데. 더 붙어 있어야지. 형 저 어깨동무 한번만 해주세요."
"됐어. 하지 마. 장난치지 말고 저리 가라고"
"그럼 제가 형 앞에서 무릎 꿇고 있을까요? 제 머리 한 번만 기특하다고 쓰다듬어 주시면 안 돼요? 아니면 외국식 볼 뽀뽀라도?"
"하하하! 이게 진짜 혼날려고."
이놈은 긴장도 안 되나? 지금 자기한테 얼마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모이는지 모르는 걸까?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일본을 제외하고 아시아 국가 스키선수에게 이만한 카메라가 집중된 적이 있었던가...
"마하야."
"네."
"...아니다."
과연 아테네에 이어 토리노에서도 기적의 금빛 레이스를 이어갈 수 있을까...
주변의 관심과 기대가 그에게 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구마하는 느긋하게 슬로프를 둘러보며 말했다.
"형. 연습경기니까 천천히 타도 되는 거죠."
"그럼. 서두를 필요 없어. 코스 잘 살피고. 위험지점들 꼼꼼하게 파악해. 알았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밑에서 봐요."
"그래. 어서 가 봐."
과연 챔피언은 뭐가 달라도 다른 놈이구나...
연습경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이 내일 시합을 준비했다.
"이런 얘기 많이 들었겠지만, 연습대로만 타면 된다. 알겠지?"
"점프 전에 가속도가 붙으면 좋은데."
"욕심부리지 말고. 밥 먹으러 가자."
"네. 상택이 형 불러올게요."
"먼저 가서 줄 서 있어. 내가 가서 데려올게."
선수들 방을 찾아온 김정준.
박상택이 멍하니 꺼져있는 TV를 보고 있었다.
"뭐하냐 밥 먹으러 가자."
"형 먹어... 나 배 안 고파."
"상택아. 아까 마하랑 코스 돌고 왔는데."
"..."
무슨 얘길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걸까.
한 놈은 너무 태평하고 한 놈은 너무 걱정이 앞선다.
마하야 알아서 잘하니 놔둬도 괜찮지만 상택이는...
김정준이 박상택의 쾡한 시선을 보며 물었다.
"그렇게 떨려?"
"모르겠어.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어..."
"편하게 생각하라니까."
"그게 안 돼...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이 편해지지가 않어."
첫 메달 가능성을 앞두고 김정준도 긴장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보단 선수를 위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상택아. 너 그거 왜 그런지 알어?"
"왜...?"
박상택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본다.
"니가 이번에 진짜 열심히 해서 그래."
"그럼 좋아야지. 왜 이렇게 자신감이 떨어지는데..."
"보상심리가 발동하는 거야. 고생에 따른 무언가를 돌려받고 싶어 그러는 거라고."
김정준이 박상택의 허벅지를 꾹 눌러 잡는다.
"그거 버려야 된다. 상택아."
"..."
"너 이번에 마하 만나면서 열등감 질투. 많은 감정 이겨내 왔지만. 기대감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거야."
"후우..."
"비워라. 그리고 즐겨. 마하는 그러고 있잖아."
"이 새끼는 메달을 땄잖아..."
"너도 따면 되잖아."
박상택의 얼굴이 울상이 되어간다.
"아 씨발 그러니까 내가 그걸 못 할 거 같다고..."
"그리고 못 따면 어때. 주변을 봐. 여기 어디야? 올림픽이잖아."
"형 그러니까 긴장되는 거잖아... 올림픽이니까 메달도 그렇고"
"그런 기권하고 돌아가. 올림픽 와서 이렇게 힘들어 할 거 뭐하러 나왔어."
힘있는 발언에 박상택의 표정이 굳는다.
울기 일보 직전이던 그의 얼굴에 투지가 살아난다.
김정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훗. 너 기억 안 나냐? 4년 전에 나 솔트레이크 갔을 때 너 나 얼마나 귀찮게 괴롭혔어."
"내가 형을 언제 괴롭혀."
"하하하! 맨날 찾아와서 형 뭐 먹었어? 잠은 어디서 자? 시합은 어땠어? 뭐 했어? 저거 했어? 누구 봤어?"
"아 씨! 내가 무슨 유치원생이냐!!"
"한국 가봐라. 너도 이제 니 아는 애들 다 그렇게 달려들 거다."
"애 어른 친구. 너를 아는 사람들은 다들 니가 메달을 따지 않아도, 여기 온 그 자체로 인정해 줄 거야."
김정준이 박상택의 돌 같은 허벅지를 툭툭 두드린다.
"상택아. 우리 큰 욕심 부리지 말자. 마하는 마하고 우리는 우리니까. 여기 온 그 자체가 지난 시간의 보상이라 생각하자."
"정준이 형..."
"음."
"형은 누가 더 잘하는 게 좋아?"
"당연히 너지."
"됐어. 구라치지 마..."
"후후후. 새끼."
김정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밥 안 먹을거지?"
"근데 지금은 진짜 배가 안 고파."
"상택아. 나는 계속 옆에 있겠지만, 그래도 이겨내는 건 너의 몫이야."
"..."
"기대하고 있으마."
"정준이 형."
"말해."
"...나 오늘 밤 나가있어도 되겠지?"
"왜. 너도 곧 시합인데 몸 관리 해야지."
"그냥. 오늘은 이 새끼랑 따로 있고싶어."
박상택이 구마하의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정준도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준다.
그날 밤 박상택은 미리 통보한대로 저녁을 먹고 선수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본경기를 앞두고 태연한 후배녀석을 보는 것도 괴롭고, 괜한 자격지심에 또 못된 소리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 때문에 내린 선택이었다.
"왓?"
그런데. 휴게실서 멍하니 있는 그에게 한 무리의 외국인 선수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구마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면서 너도 한국 선수냐고 묻는다.
캐나다 전지훈련으로 기본회화가 가능한 박상택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어. 맞어. 마하 나랑 같은 방 써."
"그럼 지금 구 혼자 있어?"
"...왜? 너네들 무슨 일인데? 마하 내일 시합있어."
남자 선수 둘. 여자 선수 셋이 모인 그룹이었다.
다른 용건은 없단다. 그냥 혹시나 시간 있으면.
"뭐??"
같이 파티나 함께 하지 않겠냐는 뜻에서 물어보았단다.
"시합이라니까... 무슨 파티를 해."
"하긴, 그렇겠구나."
"음. 그럼. 이걸 어쩌나. 구가 제일 좋았는데."
"다른 사람을 찾아보자. 수잔 괜찮지?"
박상택에게 인사를 남기며 돌아서는 선수들.
그가 영문을 몰라 대체 무슨 일로 마하를 찾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 어. 그러니까."
"지금 수잔 파트너만 정해지지 않아서."
"..."
"하이."
"헤... 헬로우."
수잔 블레이크. 영국 바이에슬론 대표선수.
박상택이 검은 눈동자의 그녀와 서로 인사를 나눴다.
* * *
"그래서?"
"어. 뭐... 애들이랑 방에서 술도 먹고. 니 얘기도 좀 하고."
"..."
2월 12일. 올림픽 대회 이튿날. 오늘은 고대하던 활강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내 경기도 내 경긴지만, 우리 설상팀은 상택이 형 걱정으로 다들 고민이 많았는데.
근데. 이 인간. 어젯 밤 외박을 하면서 무슨 사람들을 만나 놀다 왔다는데.
"..."
"그래서. 그냥 뭐. 다들 어떻게 하다보니까."
"형... 그거 갱뱅이잖아..."
역시 섹스다.
스트레스와 긴장은 어딜가고 아침부터 상택이 형의 후련한 얼굴을 마주보는데 웃음을 참을수가 없다.
"하하하! 크하하! 아 뭐야? 형 뭔데? 그런 의미로 방 비울 거면 말을 해주든가."
"왜?"
"아 됐어. 하하하! 와 이 형 진짜..."
젠장. 나야말로 지금 여기저기 은근슬쩍 키 건네주고 눈인사 해주는 여자들 자기 눈치 보느라 꾹 참고 있건만.
어젯 밤 하고 올 거면, 나도 방에 사람들 불렀지.
"와 이 형 장난 아니네..."
"흠. 흐음. 큼."
"그럼 형도 막 다른 애들이랑 했어?"
"..."
"형은 한 명이랑만 했구나."
"대신 봤어. 야 보는 것도 좋긴 하더라."
"하하하! 아 씨발. 뭐야!! 나 지금 시합 가야 된다고."
미치겠다 진짜. 와 이래서 오늘 시합이나 제대로 뛸 수 있으려나?
아니 그보다 원래 나 찾아오던 애들이라는데 거길 왜 자기가 들어가서 난리지?
하하하하!
"오늘 따뜻하다."
"따뜻하겠지. 눈이 맑고 또렷하겠지. 허리는 괜찮으셔?"
"닥쳐. 죽여버릴라."
"하하하! 그래도 잘 됐네. 어쨌든 긴장은 풀린 거잖아."
"마하야 조심해라. 이런 날은 눈이 빠르게 녹아서 설질이 거칠어지니까"
"꺼져! 멋진 척 하지마. 크하하하하!!!"
상택이 형의 컨디션이 돌아왔다.
덕분에 나도 아침부터 크게 웃고 떠들며 본 게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마하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인다."
"감독님. 어제 상택이 형이 저 푹 자라고 자리 피해줬잖아요."
"..."
"오~ 그랬어? 역시 선배는 선배네. 후배 컨디션 생각해서 자리도 비켜주고."
"대신 상택이 형이 어제 무리하진 않았나 읍읍!!"
"음? 하하 뭐야?"
상택이 형이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달려들었다.
하하하! 이 형도 진짜.
"알았어. 아 알았다고."
"죽는다 진짜..."
"후후후. 상택이 누구랑 같이 있었냐?"
"네? 아니요 대표님. 그냥 혼자 산책 했어요."
당황하는 상택이 형을 보며 노래를 불러주었다.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이 새끼가 진짜 뒤질라고!!"
"아 뭐! 왜? 그냥 노래 부르는 거 잖아. 크하하하! 감독님. 상택이 형이 때려요!"
나라고 아주 긴장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첫 시합이고 그런 걸 떠나서, 활강이란 경기 자체가 긴장하지 않으면 다칠 위험이 높은 경기였다.
하지만, 내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담 받는 동료나 정준이 형을 생각하면 뭐라 힘든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아 진짜 상택이 형... 하하하 미치겠네."
"마하야."
"죄송해요. 집중 할 게요."
활강 스타트 3분 전.
앞에서 대기중이던 선수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집중하자. 집중해야지.
하하하! 근데 집중하고 싶어도 이 형만 생각하면 웃긴 걸 어쩌라고.
"후우. 큭큭큭."
"야. 너 진짜..."
"죄송해요 형. 진짜 집중할게요."
정준이 형도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다치지만 마라."
"네."
어느덧 내 앞의 선수가 사라졌다.
이제 내 차례가 온다.
후우~ 조금 떨린다.
"..."
그래. 웃자. 웃는 거야.
즐거운 것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연습대로만 달리면 돼.
"마하야 니 차례다."
"훅."
"잘 해! 파이팅이다!"
지지대에 무릎을 대고 멈췄다.
진행요원이 깃발을 들어 정지신호를 알린다.
가볍게 몸이 떨려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5,4,3"
많은 일이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마지막까지 즐겁고 웃을 일이 많은 스키였다.
"2,1. GO!!!"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