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음을 녹이는 땀과 눈물의 이야기. (8) >
폴리아모리들과 나눈 색다른 사랑(?)이 끝났다.
수잔과 마이클은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었고. 데보라와 모레노 커플은 샤워실에 있었다.
"쿠. 내가 할게."
"내가 하면 돼. 난 엄밀히 스케쥴 다 끝났어. 쟈스민 쉬어. 내일 시합 있잖아."
사람이 여섯이라 치울 것도 산더미였다.
다 정리하고 쟈스민과 소파에 앉아 있으니 모레노가 뿌연 김을 가르며 걸어나왔다.
"뭐야? 다 치웠어? 같이하자니까."
"쿠가 다 했어. 시합 남은 사람들 쉬라면서."
"역시 챔피언은 다르구나. 그란데 쿠."
"모레노. 그란데가 뭐야?"
"그레이트."
"오오~ 그란데. 멋있다. 나도 써먹어야지."
겸사겸사 모레노 선생의 이태리어 시간에 질문을 던졌다.
"배고프다는?"
"파메."
"예쁘다는 그럼 뭐라고 그래?"
"벨라."
인사를 의미하는 챠오. 침대를 뜻하는 레토. 함께 가자는 안디아모. 배고프다는 파메. 그리고 멋지다를 뜻하는 그란데와 예쁘다를 의미하는 벨라.
이태리 말을 배웠으니 다음엔 이탈리아 친구들을 사겨볼까.
안녕 예쁜이. 배고프지? 나는 그란데야. 침대로 갈까?
모레노도 팬티 한 장 안 걸치고 아무렇지 않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축 늘어진 고추를 드러내고 있는데, 흉측하거나 역겹다기 보단 그냥 자연의 일부같다.
지저분한 애벌래 하나가 어쩌다 저기 붙어있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외국애들도 노발기 상태는 저렇구나. 인체의 신비다 진짜.
"데보라는 무슨 양치질을 저렇게 강하게 해?"
쟈스민이 화장실서 아르르르~!! 거품 무는 소리를 가리켜 물었다.
뭔가 찔리는 게 있어 모레노한테 사과를 건넸다.
"모레노. 아까는 내가 조금..."
"쿠. 괜찮아. 신경쓰지 마. 지금 데비가 입을 행구는 건 나 때문이니까."
씻으면서 입으로 해주고 결국 입안에다 하고 나왔단다.
어쩐지 아무리 둘이 들어갔다 해도 너무 오래 씻는 것 같더라니, 이 친구도 은근히 승부욕 있네.
두 사람의 오럴섹스를 떠올리다 쟈스민이 괜히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피한다.
얜 또 왜 이러지? 방금까지 자기가 하던 건 기억에서 지웠나??
"헤이 쿠. 넌 대체 누구를 만났길래. 그런 섹스를 하는 거야?"
"하하하! 왜? 이상했어?"
모레노의 질문에, 쟈스민도 호기심 강한 얼굴로 돌아본다.
"정말. 우리 말고 다른 유럽 여자도 만나봤었어?"
"응. 먼저 아테네에서."
"헤이 쿠. 데비도 있잖아. 잘츠부르크 여자들도 있고."
"하하! 아 그렇게 따지니까 은근 많은데?"
쟈스민이 나한테 플레이보이냐는 식으로 묻는데, 모레노가 그는 챔피언이라고 두둔해준다.
두 사람을 보면서 웃고 있으니, 샤워를 마친 데보라도 모락모락 흰 가운을 걸치며 나왔다.
"으어어..."
피곤해 죽겠는가 데보라가 터덜터덜 수잔과 마이클 옆에 털썩 엎어져 버린다.
"오늘 쿠까지 만나서 너무 좋았지만. 진짜 너무 힘들다. 차라리 운동이 편하겠어..."
쟈스민도 눈그늘이 짙게 내려앉고, 나도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마이클과 수잔을 생각해서라도 둘에게 인사를 남기며 일어섰다.
쟈스민도 패딩과 털모자를 갖춰입으며 따라 나선다.
"가려고?"
"가야지. 여기 이제 빈 침대도 없잖아."
"이렇게 저렇게 여섯이 뭉쳐 잘 수 있어. 어제 상택도 그랬었는데."
"하하하! 피곤해. 가서 편하게 잘래."
데보라가 쟈스민한테 우리 방으로 가는 거냐 묻길래, 반대로 내가 쟈스민네 숙소에 가서 잘 거라고 해줬다.
"쿠. 잘 데가 없어?"
"그게 아니라, 어제 상택이 형이 나 생각해서 자리 비워줬으니까. 나도 오늘 내일 상택이 형 첫 시합 잘 하라고 나가서 잔다고 했거든."
"흠. 코리아 선수들은 서로를 위해 양보하는구나."
"아하하! 그건 아니고."
쟈스민이 나를 가만히 보면서 말했다.
"오늘 내일까지라고...?"
"어. 좀 불편하려나?"
"아아! 아니! 절대! 네버. 좋아. 너무 좋아!! 나랑 있어!!"
"싫으면 나도 그냥 우리 방으로 가도 돼. 괜찮아."
"싫어! No!! 나도 올림픽 끝날 때까지 쿠랑 있고 싶었어!"
"하하! 그럼 다행이고."
그녀의 절박한 반응에 데보라와 모레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헤이 쿠. 그란데. 포르띠시모."
"그란데는 알고. 포르 그건 또 뭐야?"
"스트롱 맨."
포르 뭐라길래 포르노 찍냐 이러는 줄 알았는데 좋은 뜻이었구나. 역시 언어란 배워야 오해를 사지 않는다.
모레노가 또 한 번 엄지를 척 치켜세우길래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데보라도 물개같이 뒹굴뒹굴거리며 쟈스민에게 말한다.
"힘내. 알지?"
"안 한다니까. 나도 피곤해."
"넌 매력적이고 쿠는 강하니까. 아까 나한테 하는 거 봤지? 힘내. 쟈스민."
"하하하! 잘 자 데보라. 불 끄고 갈게."
두 사람에게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조용한 복도로 나오니 차원이 바뀐 듯 공기부터 달라진다.
쟈스민도 벽에 기댄 채 잠깐 숨을 몰아쉬고 있다.
둘 다 말끔하게 옷을 갖춰 입고 정상인 같이 서 있는 게 어딘가 어색하다.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웃고, 뻘쭘함에 시선을 피하고. 한참을 정상적인 분위기에 적응하며 방금 전 격정적인 모습을 기억에서 덮어 버렸다.
"후우."
"하하하."
"휴우~~"
벗고 흔들고 박고 쑤시고. 핥고 빨고 싸고 난리를 부리던 모습이 자꾸 겹쳐보이면서도 다시 평범한 쟈스민이 눈앞에 있다.
그녀의 시각에서도 마찬가지겠지.
데보라를 괴롭히고 수잔을 굴복시키고 자신의 가슴과 입에서 끅끅거리던 놈이 정상인인척 굴고 있으니 어색하겠지.
"덴마크 숙소는 어디야?"
"옆 건물."
"나가야 되는구나. 가자."
"코리아는?"
"여기서 멀지. 일단 나가자. 배고프지 않어?"
덴마크 스키선수. 회전과 대회전에 출전하는 쟈스민 크리스텐센.
서로를 알기도 전에 일단 섹스부터 했지만 아직 마스터 과정(?)은 치루지 않았다.
"네 번쨰네."
"뭐가?"
"골드메달."
"그러게. 이번이 네 개째라. 우와~ 허허허."
"멋있다. 대단해."
"하하! 메달은 그냥 메달일 뿐이지. 나한테도 올림픽은 그 자체로 의미가 깊어."
그녀가 나에 대한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쟈스민은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만 나도 그녀에 대해서 알고 싶어진다.
서로를 알고자 하니 대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바로 숙소로 가지않고 설원의 풍경을 배경삼아 잠깐 산책을 즐겼다.
소복소복 눈길을 밟으며 어느순간 서로 연인 같이 손을 잡고 있다.
"근데 진짜 배고프지 않어? 뭐 좀 먹을까?"
"Okay."
은은한 버터향기와 빵냄새에 이끌려 선수촌 식당을 찾아갔다.
체력도 소모했고 단백질도 뺐으니 스크럼블 에그 먹어야지.
간단하게 음식을 담아 쟈스민과 마주보고 앉았다.
"쟈스민은 스키 잘 타겠다. 둘 다 테크닉이 중요한 종목이잖아."
"쿠야말로 챔피언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에이. 난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진짜. 어떻게 그렇게 탈 수 있었어? 안 무서웠어?"
"쟈스민. 진실을 말해줄까?"
"무슨 진실...?"
그녀에게 솔직하게 어떻게 시합을 했는지 일러주었다.
"너무 빨라서 브레이크 잡을 타이밍을 계속 놓쳤어."
"하하하! 쿠! 유 라이어!"
"진짜야. 그래서 그냥 죽지 않게 어떻게든 달렸는데 우승이더라고. 정말 운이 좋았어."
"쿠. 그런 걸 실력이라고 하는 거야."
"쟈스민은? 운동 몇 년 했어."
"나도 짧어. 그렇게 잘 못 해."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국가대표로 나왔데?"
"우리는 동계스포츠 선수층이 얇거든."
"겸손하네. 북유럽이 선수층이 얇다니..."
"나야말로 진실을 말하고 있어.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랑은 달라. 우리는 덴마크잖아."
"그래?"
같은 북유럽이라도 저쪽과 달리 덴마크의 메이저 스포츠는 축구나 핸드볼이란다.
스키나 기타 동계 올림픽에선 그동안 은메달 하나가 전부라고 해줬다.
"오~ 그래? 덴마크가??"
"코리아는 대단해. 작은 나라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니까."
"그렇게 따지면 난 네덜란드가 엄청나다고 생각했는데. 거긴 우리보다 인구도 적고 땅덩어리도 작은데, 축구, 하계올림픽, 동계올림픽 다 잘하잖아."
"홀란드 사람들이 그런 게 있긴 해. 도이치란드도 그렇고."
덴마크까지 포함. 세 나라는 생활체육이 일상화되어있는 국가들이었다.
그녀도 이번 올림픽을 마치고 돌아가면 따로 직업을 찾을 예정이란다.
"어떤 직업으로 가려고?"
"음. 20대는 유치원 선생님도 좋고. 나이들어선 카페 같은 데서 일해보고 싶어."
이것이 북유럽 감성인가. 뭐가 거창한 성공이나 야망이 아닌 소박한 모습이 굉장히 인상깊게 다가온다.
그런데 반대로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쿠는 프로 선수지?"
"어. 음. 뭐. 그런 식이지."
"좋겠다. 한국 같은 나라 선수들은 운동만 할 수 있으니까."
"..."
어딘가 인식의 차이가 있는 듯한 기분이다.
깊이 들어가면 복잡해질 거 같아 일단 이 주제는 나중에 심도깊게 나누기로 하고 넘겨버렸다.
"카페와 유치원 선생님이라. 잘 할 거 같애. 잘 어울려."
"조금 더 많이 웃을 수 있는 직업을 찾아봤어."
"자기가 무표정한 건 알고 있구나?"
"당연하지. 내가 나 자신을 모를까."
"그래서 폴리아모리가 된 거야?"
쟈스민은 고개를 흔들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데보라가 쿠를 볼 수 있다고 그랬어."
"...어?"
"후후후 진짜로."
"음... 그럼. 나 때문에 싫은데 모레노랑 마이클을...?"
"그건 아니고."
그녀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볼 때 선진국이고 복지가 발달한 덴마크지, 본인 기준에선 너무나도 닫혀있고 갑갑한 세상이란다.
그래서 일찌감치 고향을 벗어나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부터 자유로운 연애에 관심이 많았다고 해준다.
"확실히 미국은... 프리섹스부터 시작해서..."
"실제로 내 친구들도 그런 애들 많았거든."
"너는? 넌 아니었고?"
"난 그때 보이프렌드 하나만 두고 있어서. 내 안엔 보수적인 부분이 있거든."
"어어... 보수적. 어어..."
보수적인 사람이 막 그렇게 가슴 그러고 손 아래로 해서 자위하면서 그러고. 남자 둘 그러고...
멍하니 아까 쟈스민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녀가 웃으며 당황해 한다.
"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으음. 그냥 덴마크의 진보는 어디까지 나아가는가 하는 고민을..."
"아하하하!"
그렇게 나를 만나고 싶었단다.
과장을 섞지 않고, 올림픽에 나온 것도 나를 만나기 위해서란다.
그런 가운데 데보라의 제안은 너무 매력적이라 함께하게 됐단다.
마이클은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선생님을 보는 것 같았고, 모레노는 이탈리아 남자니까 그 자체로 스윗한 면이 있어서 좋았단다.
"마지막으로 쿠를 만나다니. 앞으로 나와 함께 지내겠다니. 이번 올림픽은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가장 뜻 깊은 일이 될 거야."
"어..."
"어제는 조금 실망했는데. 괜찮아. 오늘 진짜를 만났으니까."
흠. 과한 애정이 느껴지는 걸. 어딘가 조금 한수빈이 생각나는 유형같은 걸?
"하하. 쟈스민. 혹시 가족들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거나 그러진 않지?"
"음? 아니. 그런 건 없는데."
"근데 왜 그렇게 나를 보고 싶어했어?"
"쿠는 자기가 미국에서 얼마나 인기있는 줄 몰라?"
"그래? 난 모르지."
빨리 자기 방으로 가잔다. 뭔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단다.
"대체 뭐길래...?"
서둘서둘 식당을 나와 넘어간 덴마크 여자선수들 숙소.
쟈스민의 룸메이트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004 아테네 때와 빅토리아와 지내던 것 같이 살금살금 그녀의 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쿠. 이것 봐."
쟈스민이 NICE 신발 박스를 보여준다.
박스 표면에 달려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뭐지? 조깅화? 어? 설마 이거?
"뭐야. 내 신발이잖아?"
"그래! 쿠한테 사인 받고 싶어서 여기까지 챙겨왔다니까"
"..."
MAHA.1이다.
운동하느라 정신 없어 잊고 있었는데 제품이 여기까지 발매 됐구나.
쟈스민이 유성 사인펜을 건네주며 신발에 싸인을 해달란다.
"하하. 아 나 싸인 못 하기로 유명한데..."
"아테네 때부터 진짜 팬이었어. 그러니 지금 내가 얼마나 뜻깊은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지 알겠어?"
팬이라. 뭐 팬들 많이 만나봤지만, 아직은 팬과 자본 적은 없는데. 허허허.
"땡큐 쟈스민."
"..."
"왜?"
"뭔가 감동이라서. 쿠가 싸인을 해줬어."
"박스에도 해줄까?"
"응!!"
지구 반대편에서 나를 좋아하던 사람을 만났다.
쟈스민도 기뻐서 방방 뛰고 난리 났지만, 그녀의 존재가 나에게도 참 커다란 의미가 되어 다가온다.
팬이라. 국가대표로 한국 국민들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이어지는구나.
"근데 쟈스민은 몇 살이야?"
"나? 열 아홉."
"..."
잠깐 타임. 이건 또 뭔 소리냐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