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192화 (192/401)

< 챔피언의 무게 (2) >

오랜만에 혜정이 목소리 들으니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다음 날 서로 화상채팅를 준비해 만났다.

"연결했어?"

"아직. 뭐 까는 중."

"난 그냥 USB만 연결하면 되던데?"

"야. 최신 노트북 쓰는 너랑 나랑 같냐..."

"윈도우는 똑같지."

"나 아직 윈도우 ME야..."

"어우. 하필 그 최악의..."

"나도 다음에 알바비 나오면 노트북 새로 살 거야."

"혜정아. 그거 안 되면 우리집 거실에 있는 컴퓨터"

아차. 그건 안돼!!

"는 건드리지 말고. 어. 천천히 잘 해 봐."

"걱정마 안 켰어."

그래. 건들지 마. 아무리 너랑 내가 특별한 사이라도 그건 아니야... 남자 컴퓨터는 함부로 손 대면 위험한 거라고.

"됐다. 너 아이디 뭐야?"

"잠깐만."

여차저차 꿈지럭 꿈지럭. 버튼 클릭, 마우스 스르륵 드래그. 키보드 입력. 등등의 과정을 거쳐 혜정이와 화상통화가 연결 됐다.

"하하!"

-안녕~

"와 신기하다."

모니터 작은 화면에 흐릿한 이혜정이 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잔상이 남긴하게. 그렇게 영상이 깔끔하진 않다."

-난 괜찮은데. 너 어디야?

"토리노. 오늘 쇼트트랙 보려고 넘어왔어."

-그래. 누구 잘하는 사람 있다더라. 뉴스에서 봤어. 그 사람이 너보다 메달 많이 딸 거 같다고 그러던데?

"하하! 누구든 메달 많이 따면 국가 순위 오르고 좋지 뭐."

-야. 외국도 순위 신경쓰고 그래?

"장난 아니야! 얘네가 우리나라보다 더 심해. 그래도 우리는 다른 나라 선수들이라도 경기 뛰면 다 보여주잖아. 얘네는 지들 나라 경기 아니면 다 유료 채널 가서 봐야 돼."

-진짜? 엄청 매정하네.

"혜정아. 집은 별 일 없지?"

-어. 보여줄까?

혜정이가 노트북을 들고 여기저기 두리번 두리번 집 상태를 보여주는데. 청소도 잘 하고 집에 누구 부른 적도 없다며, 혼자 잘 살고 있다고는 한다만.

"하하하!"

근데 화질이 너무 지저분해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냥 얘가 자기 잘했지? 칭찬해줘.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게 좋아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쓰레기도 꼭 날짜 맞춰 버리고 있고.

"바쁘네. 집에서 살림만 하냐?"

-아니. 공부하고. 그리고 알바가고. 가끔 욕조에 누워서 책도 보고 그래.

"우리 집 욕조 좋지? 그거 일부러 처음에 그렇게 공사했던 거야."

-좋긴 한데, 전세 집에 뭐하러?

"성남이 욕조가 작았잖아. 피곤할 때 몸 푹 담그고 싶어서."

-하긴, 나한테도 좁은데, 넌 오죽했을까.

어른들은 잘 지내시냐. 아픈 데는 없냐. 그런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다 잠깐 얼굴을 보고 있었다.

신기하다. 난 왜 이렇게 얘만 보면 좋지?

목소리 톤이 바뀌고 행동이 방방 뜬다.

내가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섹스를 못 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딱히 이혜정이 나한테 막 뭘 잘해주거나 욕망을 채워주는 것도 아니잖아. 왜 이러지?

특별할 것 없어도 이렇게 서로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누는 게 좋다.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 그렇지, 이런 친구가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옆에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커다란 축복이 아닐까 싶다.

-끊겼나? 마하야?

"어. 아냐. 잠깐 화면 좀 보고있었어."

-거긴 낮 아니야? 왜 이렇게 어두워?

"아 호텔인데, 커튼 좀 쳐놔가지고."

-호텔? 왜 호텔에 있어? 넌 선수촌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토리노로 왔잖아. 선수촌 들어가도 되는데 빙상팀에 양해 부탁해야 돼서. 그냥 호텔 잡았어."

-원래 토리노 아녔어?

"알파인 스키는 다른 데서 하고. 여기는 실내스포츠. 서울이랑 강릉 거리 된다고 보면 돼."

-그렇구나. 돈 많아서 좋겠다. 호텔도 눈치 볼 것 없이 들어가고.

"하하하! 너도 올래? 침대 하나 더 있는데. 비행기 표 보내줘?"

-됐거든. 가서 무슨 고생을 하라고...

"뭔 고생을 해. 너 오면 내가 호강시켜주지."

혜정이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뚫어지게 쳐다본다.

-이게 진짜... 틈만 나면...

"뭔 생각을 하는거야? 크하하하!! 말 그대로 호강이라고 호강."

-됐어. 유럽은 내가 벌어서 갈 거야.

"배낭여행?"

-응. 올 여름에 애들이랑 가려고 계획하고 있어.

"애들 누구? 선아 민혜?"

-걔네도 괜찮고, 대학 친구들도 있고. 시간 상황 맞는 애들 봐야지.

나랑 오는 건 어떠냐고 물으려다, 그냥 웃어 넘기며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바꿔버렸다.

"선아 대학 어떻게 됐냐?"

-붙었어. 용인 쪽. 서울도 전문대 하나 붙었는데 전망도 그렇고 취업도 그렇고. 용인으로 간다고 그러데.

"정석이랑 가까이 있고 싶은가 보지."

-몰라. 걔네들 일이니까.

정석이와 선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우리도 겸사겸사 서로의 연애 상황을 점검해 보는데, 이혜정이가 먼저 물었다.

-그래서? 넌 이번에 누구 만났어?

"하하하! 내가 누굴 만나."

-거짓말. 딱 보면 누구 있는데.

"잠깐. 친구야 친구.

-것 봐. 또 누구 만났지...

"야. 어차피 여긴 올림픽 선수촌이잖아. 돌아가면 끝나."

-여자 진짜 좋아해...

"아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 넌 남자 안 좋아하냐!!"

-나 남자친구 없어.

"웃기지 마. 니가 무슨 남자친구가 없어..."

-진짜야. 나 너네 집 살면서 아무도 만난 사람 없어.

"야. 됐어. 뭔 되도 않는 구라를... 아니 왜 이제와서 이미지 관리를 하고있지?"

-진짜라니까!!

알바하며 쪽지도 많이 받고, 같이 일하는 애들이나 매니저 오빠들이 연락처 물어보지만 딱히 성에 차는 남자들도 없고. 무엇보다 서울 생활이 즐겁다 보니 굳이 남자친구를 사귈 마음이 들지 않더란다.

"그래? 신기하네."

-뭐. 남자친구 없어도 할 수 있는 게 많으니까.

"...서울에서 뭘 그렇게 할 게 많다고 그러냐?"

-쇼핑이라든지. 학교 생활도 있고. 아르바이트. 배우고 싶은 거나 서점. 강연. 친구들 만나서 여기저기 구경하고 전시 다니고.

"섹스는?"

이혜정이 화상캠에 주먹을 질러 화면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번쩍번쩍 거린다.

-넌 어떻게 머리에 그 생각 밖에 없냐!!

"하하하! 왜? 그건 맞잖아? 남자 없이 섹스 어떻게 해."

-후우... 아 스트레스 받어...

"음. 으음~ 오오~ 그래. 그런 것도."

-야. 꺼. 짜증나게 하지말고...

"그렇지. 으음. 음~~ 흐음"

-아 진짜 짜증나...

"혜정아. 근데 너무 혼자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외로움의 반증이니까."

-시끄럽다고!!!

말 실수 했다고 또 혼자 버럭버럭 혼내고 있다.

-먼저 그런 일 있고서 내가 남자를 만나고 싶겠냐!!

"그런 일...?"

-나한테도 상처야. 내가 뭐 얼마나 지저분하게 살았다고...

"잠깐만. 너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이도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새끼가 아니라. 먼저, 혜정이가 잠깐 대학에서 만났던 그 처녀예찬론 친구를 말하는 거 같다.

"그건 걔가 찌질한 거지."

-아무튼... 또 그렇게 비춰지는 거 싫어...

"괜찮아. 넌 충분히 매력적이니까. 그런 거 안 따지는 사람 만나면 돼."

혜정이도 뭔가 우울한 얼굴로 쳐다본다.

"진짜라니까. 야 천하의 이혜정이 왜 그런 이상한 놈 이야기에 주눅 들고 그러냐."

어라? 이거 생각보다 반응이 좀 큰 걸?

진짜 큰 상처로 받았나 보구나.

"혜정아?"

-걔가 이상했던 걸까?

"그럼. 당연하지."

-넌 솔직히 우리가 동갑들 보다 너무 빨랐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우리라고 하기보다는. 음...

뭐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니까.

"글쎄다. 나는 그 친구도 만약 너랑 둘이 더 깊은 관계가 됐다면 누군가보단 빠른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걔도 스무살이었잖아."

-그래?

"당연하지. 애초에 이런 건 상대적인 문제지. 옳고 그르다고 할 이야긴 아니야. 너가 한 사람한테 안 좋은 이야기 들었다고, 다른 남자 친구 사귀는데 주저하고 그럴 이유 없다고 봐 나는."

-주저하는 거 없어. 나도 괜찮은 사람 있으면 만날 마음 있고.

이도형같은 인간은 빼고...

아무튼. 지민이 형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비난받고 미움받는 데 익숙하지 못한 나머지 애가 움츠러든 것 같다.

작은 가시가 아프지. 하지만, 작은 가시를 두려워하느라 더 좋은 걸 놓치는 실수를 범하진 말아야 하지 않을까?

사랑과 섹스에 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해봤기에 이 말을 해줄 수 있었다.

"연애 해. 혜정아. 너 그래야 먼저 그랬던 상처가 지워져."

-음...

"왜?"

-뭔가. 음... 아니야.

"뭐? 말 해."

혜정이도 모니터 속 내 얼굴을 빤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시야와 초첨이 캠과 어긋나고 있었다.

-마하야. 너는 나 좋아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연애하라고 딱 잘라서 얘기할 수 있어?

"어?"

뭐야 이건 또? 지도 나한테 그러면서 이건 또 뭐지?

하여간 얘랑 이야기 하다보면 내가 이상하게 꼬인다니까.

"뭐래? 너도 먼저 나한테 그랬었잖아."

-아니... 그땐 일부러 정 때려고 그랬던 거고.

"지금은? 지금은 뭐 정 붙이려고 그러고 있냐?"

-야. 오늘 니가 화상채팅하자고 그랬거든.

뭔데? 지가 말하는 건 되고, 내가 말하는 건 불법인가? 자기는 설득이고 나는 선동이야 뭐야?

-아니. 그렇잖아... 보통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은 사람 만나라고 하는 건

"혜정아. 지금 나한테 떡밥 뿌리고 그러는 거 아니지?"

-무슨 떡밥?

"어장. 다 잡은 물고기. 조금 더 쉽게 표현하면 남주긴 싫고 내가 갖긴 아깝고. 그렇다고 나한테서 멀리 떠나가는 건 안 돼고. 뭐 이런 거."

깔깔깔 웃는 소리에 노트북 스피커가 찢어져라 울린다.

-야. 그건 내가 할 소리지.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

"내가 뭘?"

-니 말대로. 남주긴 싫고. 니 옆에 놔두고 싶진 않고. 너도 나한테 그러잖아.

"난 너 좋아하는데?"

-그런 애가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니냐...

"아니 이야기 잘 하다가 갑자기 왜 짜증이야. 그걸 문제 삼을 순 없지. 난 니가 그때 크리스마스 이쁘 때 내 마음만 받아줬으면 딴 여자 안 만났다니까."

-됐어. 지난 얘기 뭐하러 꺼내.

"..."

허~ 거 참. 오랜만에 얼굴 봐서 너무 좋았는데, 왜 또 분위기가 이렇게 됐냐.

"혜정아."

-뭐.

"야. 이혜정?"

-왜?

"진지하게 답해 봐. 넌 나 어떻게 생각해?"

혜정이도 물어본다.

-그러는 넌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좋아하지."

-나도 너 좋아.

"그럼 내 마음을 받아주든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뭔 소리야 방금 내가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걸 왜 니가 아니라고 그래."

혜정이도 목소리가 바뀐다.

-근데 왜 그렇게 행동을 해?

"너 지금 나한테 믿음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뭐... 그건 니가 더 잘 알겠지.

수빈이 때도 한번 느꼈던 문제였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전달해 주는 게 좋겠다.

"혜정아. 난 그냥 날 사랑해주는 사람을 찾을 뿐이야. 그건 너도 알잖아."

-음...

"내가 마음을 줘도 안 받아주는 사람이. 나한테 믿음이 없네 뭐네 할 수는 없는 거 아닐까??"

-마찬가지 지. 마음을 주고 싶어도, 이미 너무 많은 여자가 있고 그렇다면. 그걸 옆에서 어떻게 견디라고.

"아. 다 끊을 수 있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이야길 이렇게 싸우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거 싫어.

돌겠다 진짜... 뭐 어쩌라는 거냐?

자기가 사람 미치게 만들면서 행동들 다 지적하고 꼬집고 비틀면 난 할 말 없지.

"알았어. 오늘 그냥 얼굴 보고 싶었어... 들어가."

-야. 내 말 이상하게 듣지말고... 나도 너 싫은 건 아니라니까?

"그래. 안다고."

-...넌 몰라.

"하하하하~ 그럼 이 마당에 내가 아는 게 뭐가 있다고 그러냐?"

-넌 여자 마음을 너무 몰라.

몰라. 모르니까 좀 알려주라고!

내가 여자 마음 알면 심리학자가 됐지 운동을 왜 하냐!!

내가 지금 아는 건 하나였다.

애가 욕구불만이 쌓였다. 그러니까 자꾸 이렇게 말을 꼬고 비틀고 사람을 괴롭히는 게 아닐까?

"혜정아. 너 혹시..."

-혹시 뭐?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야?"

화상 채팅은 소리가 커지면 음질이 깨지는 구나. 하나 알았네.

-미쳤나봐 진짜... 뭐라는 거야.

"아니 솔직히. 너 나랑 민서 그때가 마지막이지?"

화려한 서울 생활에 콩깍지가 껴서 모를 뿐.

스트레스가 쌓이지. 새로운 환경 새로운 도전이 마냥 즐거운 일만 있는 건 아니야.

얘도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나 못지않게 섹스 좋아하는 앤데.

"혜정아. 소파로 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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