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챔피언의 무게 (6) >
"마하야 여기야 여기!"
"기자님! 어우 사람들이..."
"하하하! 녀석. 야 왜 혼자야?"
토리노 빙상경기장에 도착했다.
늘 우리에게 호감 있는 기사를 써주는 K 일보 임한기 기자님을 만났는데, 어떻게 주변에서들 알아보고 악수나 사진 요청을 하느라 갈 수가 없다.
"어 정신 없어..."
"혼자니까 더 그러지. 감독님은 어디계셔?"
"아직 스키 경기 안 끝났잖아요. 일단은 코치님인데, 저만 휴가에요."
"한 감독은 유명 인사를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게 놔둬도 돼?"
"어차피 선수촌 버스 타고 다니고 별로 위험할 것도 없었어요. 여기 와서나 좀 이렇게 시끌시끌 한 거지."
"하긴, 어느 누가 이 덩치를 건드리냐 죽을라고."
"하하하!"
기자님한테 축하인사를 받았다.
설마 진짜로 메달 딸 줄 몰랐다며 경기장을 찾지 못한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괜찮아요. 우리도 다 그랬었어요 운이 좋았죠."
"그니까 경기장을 왜 이렇게 멀리 지어놔. 야. 100킬로가 무슨 애들 장난이냐? 서울 일산도 그것보다 가까워."
"정준이 형이 알파인 스키는 슬로프 때문에 원래 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밴쿠버는 아마 더 멀 거라고 그러던데요?"
"그래서? 인터뷰 언제 할래? 다른 선수들한테 부담될까 봐 피하고 있다고 듣긴 들었는데."
"네. 상택이 형도 아직 안 끝났고. 제가 스키 종목 포커스 가져가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그게 메달의 힘이지. 첫 메달인데."
"무엇보다 육상연맹이 있어서..."
"음? 연맹은 왜?"
기자님도 박상택 선수는 그렇다 쳐도. 연맹은 왜? 스키에 육상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보신다.
"모르겠어요. 회장님이 당장 들어오라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어어... 뭔가 사정이 있구나."
"기자님. 저 경기 보고 싶어요. 오늘 대표팀 응원해주러 온 거라."
"그래. 끝나고 이야기하자."
오전 오후 예선전을 마친 쇼트트랙 경기장.
남자 500m 단거리 시합 결승전을 앞두고 있었다.
"저분이 안규진이구나. 생각보단 키가 작네요."
"안규진도 금메달 3개. 빙상의 구마하지."
"한국 가면 엄청나겠다."
"뭐가?"
"그렇잖아요. 광고에 뭐에. 여기저기 막 부르고. 끌려다니고."
"안 그럴걸."
"네? 메달 휩쓸고 있는데요?"
임한기 기자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씀하셨다.
"마하야. 여긴 쇼트트랙이잖아."
"무슨 차이가... 오히려 인기 종목이잖아요? 양궁 쇼트트랙은 최고 인기 종목 아닌가?"
"그러니까. 인기 종목이니까 육상과 다르게 쇼트트랙은 다들 당연히 이겨야 한다 생각하거든."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다른 나라 선수들이 애들도 아니고."
"국민들의 인식이 그래."
하나 둘 시합을 앞 둔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파란 운동복의 한국 선수를 지켜보는데, 남색 경기복을 입고있는 미국 선수가 등장했다.
관중석에 성조기가 펄럭이며 엄청난 응원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어우. 누군데 이렇게 응원이..."
"오노데라."
"네? 그 안소니 오노데라?"
"어."
"또 나왔어요?!!"
"하하하! 아주 그냥 민족의 원수지."
"허허... 이 망할 인간. 안규진 파이팅~~!!!"
목이 찢어져라 응원을 해주지만 함성에 묻혀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는다.
4년 전 헐리웃 액션으로 우리나라의 금메달을 뺏어간 안소니 오노데라.
당시 쇼트트랙의 간판스타 김성동 선수는 세리모니를 돌다 실격처리 된 충격에 태극기를 집어 던지고 말았다.
하지만, 국민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만큼 대한민국 스포츠계에 있어 억울하고 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하도 그런 걸 따지는구나."
"안 따지는 게 이상하죠. 한국 사람인데."
"음. 나는 직업윤리도 있어서, 되도록 스포츠는 민족주의 없이 보자는 주의라."
"..."
"지켜보자고. 저 선수가 4년 전 행동이 요행인지 실력인지는 이번에 판가름 나겠지."
"안규진 파이팅! 네 개 가자!!"
이미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안규진 선수는 현존하는 최고의 스케이터였다.
실력과 센스가 뛰어나고 월드컵에서도 몇 번의 우승을 해냈다고 들었다.
반면, 오노데라는 나이를 먹어 기량이 떨어진 상태다.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하고 오직 500m 단거리 한 종목만 보고 출전했다는데, 안규진이 이기겠지. 실력이 있는데. 울분을 갚아줘.
"노년이라 단거리만 출전이라니. 육상이랑 다르네요. 여기선 지구력이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하구나."
"젊을수록 더 오래 달릴 수 있는 거겠지."
"음."
다시한번 유심히 선수들의 내공을 보았다.
난 인간의 기력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오노데라... 보기와 달리 꽤 강해보인다.
안규진이나 다른 선수들도 찬란하게 빛나는 내공을 가지고 있지만, 저 사람의 실력도 거짓은 아니야.
아 씨. 한국이 이기면 좋겠는데...
하나씩 소개를 마친 선수들이 출발지점에 멈춰 자세를 잡았다.
관중석도 조용해지고 곧바로 익숙한 가슴 설레게 하는 출발 총성이 울렸다.
10초 내외 승부가 결정되는 남자 육상 100m 못지않게 쇼트트랙 500m도 박진감 넘치는 시합 내용을 보여준다.
"우와!!"
빙속의 사나이들. 다섯 선수가 경기를 펼치고 있다.
말 그대로 '쇼트'트랙. 다들 시작부터 전력으로 속도를 올리며 날쌘돌이같이 튀어 나간다.
넘어지면 실격 처리되는 규정이 있어, 선수들이 최고 속도로 트랙을 돌 때마다 뛰는 이의 긴장감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안규진도 틈틈이 빈틈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시작이 늦었고, 오노데라는 처음부터 선두를 잡은 상태로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지금은 역전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사람이 많아. 무리하다 부딪히면 실격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규진은 특유의 센스로 두 선수를 젖히며 3위에 올라선다.
마지막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이런 건 육상이랑 똑같구나.
"아! 제발!!"
그러나 시작부터 벌어진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안규진은 동메달. 1위는 이변 없이 미국의 오노데라가 가져갔다.
안소니 오노데라도 결승선을 돌파하며 두 팔을 활짝 펼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과거의 울분을 뒤로하고 기뻐하는 선수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웃음이 지어졌다.
코치에게 달려가 서로 부둥켜 안고 기쁨을 만끽하는 오노데라를 보며 말했다.
"엄청 좋아하네요."
"저 친구도 속상한 게 많았겠지."
"그럼 4년전에도 실력이었다...?"
"모르는 거야. 그건 지난 일이니까. 단지, 이번 올림픽의 500m 우승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저 친구란 소리지."
민족주의라...
내 나라, 내가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니 올림픽이 흥행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너도 잘하고 나도 잘한다. 우리 같이 고생했다. 얼싸안고 리스펙 하는 건 선수들이 가질 스포츠 정신이지 관중들한테까지 그런 걸 강요하는 건 너무 무리 아닌가?
아무튼 경기는 끝났고. 충분히 즐거운 게임이었다.
"그래도 잘했네요. 금메달 3개 동메달 하나라니. 대단하다!!"
"잘했지. 잘했는데..."
기자님과 안규진 선수를 돌아보았다.
안 선수는 덤덤하게 한국 코치님과 인사를 나누고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을 돌았다.
그렇게 기뻐하는 건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우승하고 싶었나...?"
"뭐 성향적으로 표현이 적은 친구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음... 그래도 메달 4개를 땄는데..."
"마하야.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그때 1500m때 동메달이라도 땄다면?"
"좋죠. 동메달이 절대 못한 게 아니에요. 4위 7위 해도 상장 나와요."
"후후. 우리야 알지만."
기자님 말씀대로 개인의 성향일 수 있고, 영광을 챔피언에게 돌리느라 그럴 수도 있지만.
안 선수가 아닌 코치석에 앉아계시는 분을 보자면, 그렇게 막 기뻐하는 모습이 아님을 누구라도 알 것 같았다.
"쇼트트랙은 금메달이 당연한 거라고요...?"
"그런 인식이 강하지."
"이번 대표팀이 역대 동계 올림픽 최고 성적이라고 들었는데..."
"원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바로 직전 하계 육상에서만큼 쇼트트랙의 붐을 일으키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는 거야."
"...기자님. 나중에 저한테도 그럴까요?"
"누가? 뭘?"
"그냥 뭐 여기저기. 연맹이라든지. 이기는게 당연한 거고. 은메달 동메달 따면 욕 먹고."
"한 감독님은 몰라도, 너가 다른 지도자와 함께 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지."
"..."
"구마하는 최고니까. 기대감을 갖는 건 당연하잖아."
잘 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반대로 내가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는 대화였다.
* * *
시합을 마치고 기자님과 단 둘이 저녁을 먹으러 왔다.
나가서 이탈리아 레스토랑도 가보고 그러고 싶었는데, 한국이 아니다보니 밤 9시가 되면 다 가게를 닫고 어디 갈 수도 없어 결국 또 선수촌 식당으로 향했다.
그래도 세스트리에네보다는 토리노가 종목도 다양하고 참가 국가도 많아 그런가, 훨씬 더 복작복작 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여기 오니까 동양인이 보이네요. 그쪽은 진짜 없는데."
"일본, 중국. 외국 나오면 결국 또 같은 인종이 편하긴 하다니까."
"그러니까요. 검은 머리라는게 반갑네요."
"시합은 어땠어?"
"재밌었어요. 저도 쇼트트랙 좋아했거든요."
"박진감 넘치지. 근데 마하야 그거 알어?"
"뭐요?"
"이번 올림픽에서 최고 시청률은 인기종목 쇼트트랙이 아니라 너 활강에서 나왔단다."
"그건 그냥 처음이라 그랬겠죠... 그리고 지금 시간이면 한국은 새벽이고. 전 점심 경기라 한국은 딱 저녁이었잖아요."
"대다수 사람들은 활강이란 종목이 있는 것도 잘 모르는 눈치였었다 그러던데. 아무튼 또 한번 큰일 했다."
"다 그렇죠 뭐."
"지속적인 관심이 있으면 좋을 건데..."
"그러게요."
그릇을 비우고 다시 이것저것 챙겨 앉으니 기자님이 스키는 계속 탈 거냐고 물으신다.
"모르겠어요. 솔직히 위험성이 아주 없다곤 할 수 없는지라. 이번에도 어떤 선수 다리 부러졌었잖아요."
"음. 그래 나도 기사로 봤어."
"무엇보다 연맹에서... 하하하!"
"그래. 그 얘기 좀 해 봐. 뭐야?"
말 한 마디가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어디부터 언급을 꺼내야 할 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나도 지금 한국 분위기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어서 최대한 둘러댔다.
"그냥 이두희 코치님이 감독님한테 연락했는데, 박문기 회장님이 그렇게 제가 메달 딴 거에 화가 났다고 그러더라고요."
"왜...? 잘하면 좋은 거잖아."
"그러니까요. 저도 모르겠어요. 거기까지만 전해들어서."
"너가 스키에 참가할 걸 일탈로 보는 건가?"
기자님은 선수가 스키를 타든 은퇴를 하든. 연맹이 강제할 권한은 없는 것 아니냐고 하시는데.
"잘 아시면서..."
"흠."
"말 아낄래요. 기자님을 못 믿는 건 아닌데, 괜한 이야기가 와전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게. 지금까지 들은 것만도 벌써 헤드라인 수십 개 그려진다."
"어우! 절대 그러시면 안 돼요. 상대가 상대인지라..."
"하하하! 걱정하지 마. 난 가십성 기사는 안 쓰는 사람이야."
"저는 괜찮은데, 지금 대표팀 뛰어야 할 애들이 제 친구들이라..."
"그래. 뭐. 사람이 입장이란 것도 있는 법이니까."
국가대표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분명 태극마크를 다는 건 나라를 대표해 뛰는 영광스러운 자린데.
그걸 나라나 응원해주는 국민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의미를 가져간다면...
과연 그때도 태극마크의 가치가 온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