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챔피언의 무게 (7) >
"마하야. 올림픽은 결국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한 거야."
"그렇죠."
"선수나 국민들. 다들 이기면 기뻐하는 건 좋지만... 너무 깊이 의미부여를 하거나 생각에 잠기지 마. 알겠지?"
"네."
한상률 감독님은 처음부터 스포츠 선수는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늘 연예인이 팬 대하듯 감사하게 여기고, 그들이 있어 우리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다고 하셨다.
지금도 감독님은 스스로를 스포츠 감독보단, 매니저임을 강조하고 계신다.
그래서도 나는 광고나 잡지 토크쇼 등. 팬과 접할 수 있는 매체를 많이 활용할 수 있었다.
반면 대다수의 운동선수에게 나같은 행보는 어찌보면 흉이다.
다들 인기를 얻고 싶지만, 그럴 자격을 얻었음에도 묵묵히 운동에 집중한다.
그것을 선수의 자세라 여기며 웃음을 팔거나 자기 홍보를 하지 않는다.
뭐가 좋고 나쁘다곤 할 수 없다.
저것도 옳은 것이고, 우리도 우리대로 그럴 의미가 있으니까.
나도 드러내는 게 싫다면, 싫다고 했겠지. 억지로 광대 놀음 하고 다니는 건 힘들게 운동하는 것보다 곱절로 힘든 이야기니까.
"마하도 슬슬 연맹에 불만이 생기나 보구나."
"연맹은 불만 없어요. 고마운 존재죠."
"후후후. 연맹이란 해석을 과연 어디까지 봐주느냐 하는 문제겠지."
"뭐... 제가... 불만을 가질 수 있나요."
연맹의 범위. 더 나아가 팬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름도 모르고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부터.
정치인 기업인. 그리고 연맹 고위 관계자들.
그들 모두가 나의 팬이라면.
끌려다니고 불려 다니는 것도 팬을 위한 스타의 자세라고 한다면...
그건 맞는데.
그건 우리 한구스포츠의 정신과도 다르지 않은데.
자꾸 동메달을 땄음에도 덤덤하게 미소짓고 다니던 안규진 선수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기자님. 당장은 잘 한다고 칭찬해주고 하나하나 제가 하는 행동들 다 기뻐해줘도, 언젠간 그런 순간이 오겠죠?"
"어떤 순간들?"
"기량이 떨어지고 지는 경기도 나오고."
"마하야. 너무 멀리 본다. 그리고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상택이 형은 지금 동메달 하나라도 따려고 진짜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는데."
회전에서 9위. 대회전에서 5위.
반드시 메달 3개를 따겠다던 상택이 형도 이제 슈퍼대회전 한 종목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래서도 난 선수촌을 나와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다.
혹여나 옆에 있는 게 형한테 부담이 되지나 않을까 싶어서.
메달은 그냥 색을 떠나 다 의미가 있는데...
내가 너무 어리게만 생각하는 건가...
한국 쇼트트랙의 분노로 반드시 오노데라를 이기고 싶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사람들은 구마하가 뭘 하든 응원해 줄 거야."
"고마운 일이죠."
챔피언이 가지는 긍정적인 효과가 부와 명예 인기라면, 부정적인 건 역시나 사람들의 기대. 압박. 당연하게 생각하는 성적이 되겠다.
쇼트트랙 경기를 관전하면서 조금 먼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언젠간 나도 비난을 듣는다.
사람들이 실망하며 구마하도 이제 갔네. 소리가 나올 것이다.
언제 어느 때 그 순간이 오더라도. 아파하지 않을 내면을 가지고 싶다.
젊은 날의 영광을 돌아보며, 크 나도 그땐 잘 나갔지 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임 기자님한테도 그런 뜻을 전해드렸다.
"마하야. 너 좀 성장한 거 같다?"
"하하... 최근에 여자친구랑 사귀다 헤어졌거든요."
"으음. 아픔이 인간을 성숙시키지. 좋은 경험 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더는 사랑에 방황하지 않고, 혜정이든 누구든 옆에 평생을 같이 즐겁게 사랑하고 나이 먹을 아내를 얻고 싶어졌다.
* * *
"네. 감독님. 기자님 만나서 이야기 나눴어요."
"다른 소리는 안 했지?"
"연맹이야기 조금 하긴 했는데... 그냥 기사 내지 말아달라고 부탁 드렸어요."
"잘했어. 우리도 그정도 이야기는 해야지."
그날 밤. 호텔에 돌아와 감독님과 통화시간을 가졌다.
상택이 형은 좀 어떠냐고 여쭤보니, 멘탈이 하루에도 열 두 번 씩 오고가고 있단다.
"어제는 또 막 무너지는데, 무슨 여자 선수랑 잠깐 인사하더니 바로 또 일어나고."
"여자 선수요?"
"영군 바이에슬론 이라는데, 글쎄 난 잘 모르겠더라."
"수잔 블레이크?"
"어? 니가 그 분을 어떻게 아냐?"
"네? 아 하하. 먼저 인사 했었어요."
진한 인사를 했었지. 아주 진하고 진한...
"감독님 저 여기서 이틀만 더 있다 갈게요."
"야. 그럼 폐막이야. 내일 돌아와라."
"상택이 형 경기도 있고."
"야 인마. 너무 그렇게 신경 써주는 것도 상택이한테 부담이라니까."
"그리고 피겨 보고 싶어요."
임한기 기자님이 토리노까지 직접 오신 것도, 동계올림픽의 꽃 여자 싱글 피겨 경기를 관전하고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아니 또 피겨가 눈앞에서 하는데."
"와 피겨라. 나도 가보고 싶다."
"오세요. 우리 입장 되잖아요. 이럴 때 봐야죠. 피겨 표 비싸요."
모든 올림픽 종목에서 가장 인기좋고 표값이 비싼 경기가 바로 동계의 피겨와 하계의 리듬체조다.
개인적으론 아직도 힘들 때마다 우크라이나를 부르짖으며 리듬체조를 찾고 있는데.
동계의 꽃이라는 피겨도 뭐. 아무튼.
"정준이 있으니까 나는 없어도 되겠지...? 그치?"
"하하하! 감독님."
"나도 이거 참. 곁다리로 와서 이쯤이면 해줄 만큼 해줬다고 봐야하고?"
"오세요. 정준이 형이랑 상택이 형이 해낼 수 있게 비켜주자고요."
통화를 마치고 자기전에 이메일을 체크해 보는데.
오스트리아 스테판도 피겨 보려고 토리노로 넘어온단다.
저쪽은 여자 싱글이 아닌 페어라는데, 뭐든 어때. 오면 좋지.
"컴 히어 브라더. 나도 지금 토리노에 있음. 오면 연락하자."
전화번호를 찍어주니, 이메일이 넘어가고 바로 전화가 온다.
"헤이 마하!"
"여. 스테파노."
"아하하! 이탈리아에 있다 이건가?"
스테판도 오고 감독님도 오신다.
재밌겠다. 둘 다 서로 보고 싶어 했는데. 셋이서 경기 끝나고 나가서 맥주집이라도 찾아봐야지.
"내일 몇 시에 와? 나 호텔 방 있어 여기서 자면 돼."
"음. 근데 난 데보라랑 모레노네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어? 데보라도 이리로 와?"
"같이 경기 보려고 했어. 두 사람도 선수니까 입장 가능하잖아."
와우. 생각보다 규모가 커지는데?
* * *
다음 날.
세스트리에네 올림픽 선수촌 버스가 도착하는 정류장 앞에 나가있었다.
감독님과 데보라 그리고 모레노가 활짝 웃으며 등장한다.
"쿠!!!"
"헤이 쿠!"
데보라가 보자마자 안기고, 모레노와도 유럽식 볼인사를 했다.
감독님이 곁에서 보시며 조금 떨떠름해 하고 계셨다.
"뭐 얼마나 있었다고 벌써부터 그런 흉내를 내고 그러냐?"
"하하하... 감독님..."
그런 흉내가 아니라... 그러니까... 크흠. 큼! 으흠!! 흠.
"스테판은 경기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가자."
데보라가 옆에 붙어 재잘거리고, 의외로 감독님과 모레노가 서로 쿵짝이 맞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 무슨 얘기들 하는 거야?"
"F1. 쿠. 저분이 쿠 코치님이셔?"
"응. 우리 고등학교 선생님."
"어려 보인다... 동양인은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워."
데보라가 슬쩍 다가와 귓속말로 묻는다.
"한번 자보자고 하면 안 되겠지?"
"제발... 참아 줘. 그렇게는 좀..."
감독님은 감독님대로 언질을 주신다.
"뭐하는 거냐? 남자친구도 있다는데. 행동 조심해 이놈아."
"하하하... 하하하하..."
모레노랑 저랑 뭐... 데보라랑 저도 뭐... 크흠 흠! 으흠!!
빙상경기장 앞에서 오스트리아의 친구. 스테판과도 만났다.
보자마자 잘츠부르크에서 연락도 없이 운동만 했다고 화부터 내고 때리고 지랄을 하는데,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 미안하다니까..."
"어쨌든. 코치님.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그럼요. 축하드립니다. 또 메달을 따셨네요."
"저기. 메달은 내가 땄지..."
"시끄러!!!"
베이징 때 또 나올거냐니, 모르겠단다.
오스트리아 환경은 육상이 그렇게 발전하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이제는 가업을 이어가고 있기에 운동은 그만이라는 생각이 있단다.
"그럼. 은퇴를 결정한 거야?"
"거의 그렇지 뭐."
"으음."
"왜? 은퇴 하려고?"
"아니. 아직은 아니지. 난 더 뛸 수 있어."
다 같이 모여 경기장 매점으로 이동해 점심을 들었다.
감독님도 여기까지 오니, 과거 운동하던 인연이 빙상쪽에서 근무중이라고 인사를 가셨고, 우리는 젊은 애들끼리 모여앉았다.
"데보라. 스테판이랑 모레노는 이탈리아어로 대화한다."
"가깝잖아. 나도 조금의 회화는 할 수 있어."
"으음. 옆나라라는 게 또 이런 장점이 있구나."
"쿠랑도 옆 나라에 있으면 좋은데."
"..."
데보라가 테이블 아래로 발을 슥 밀어 가랑이 사이를 누른다.
"헤이. 알 유 크레이지?"
"쟈스민한테 들었어... 이틀 동안 난리도 아니었다며?"
"그건 또 뭔 소리야."
"룸메이트랑 셋이서 했다고."
"아니. 하하하..."
그 사이 스테판이 밥 더 먹겠다고 접시를 들고 일어난다.
데보라가 모레노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넨다.
모레노도 듣자마자 깔깔 웃으며 나를 돌아본다.
"쿠! 유 원트?"
"..."
"난 괜찮아. 둘이 갔다 와."
와... 폴리아모리...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니야. 스테판도 있는데. 그리고 이따가 감독님도 오실 거고."
"쿠는 이제 멀리 가잖아."
"..."
"데비가 그리워하지 않게 둘이 시간 보내. 난 좋아.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스테판이랑 다 같이."
"모리!!"
"하하하! 미안 미안."
오오~ 그건 또 아니구나. 쟤들도 선은 있네.
"데보라. 진짜 하고 싶어?"
"응."
"흠."
주변을 둘러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감독님도 어쨌든 오시면 연락 하실 테고. 스테판도 모레노랑 둘이 친해 보이고.
"한 시간이라면. 뭐 어떻게든..."
그래서 데보라랑 둘이 서둘서둘 빈 공간을 찾아 다녔다.
"쿠네 호텔로 가자니까?"
"아니... 거기는 그래도 거리가 있는데, 한 시간에 어떻게 거길 갔다가 돌아와."
미치겠네. 아무리 섹스가 좋아도 그렇지... 근데 또 진짜 모레노 말대로 지금 아니면 데보라 언제 볼지도 모르겠고. 얘도 쟈스민한테 들은 게 있는지 아까부터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고.
하지만, 가장 관람객이 많은 피겨 경기가 열리는 날. 빙상 경기장 구석이든 어디든 빈공간이 있을 소냐.
또 돌아다니다 보니까 아는 사람들도 많고, 사진 요청도 해오고 그러는데.
"안 되는 건가..."
"으음. 쿠랑 있고 싶었는데..."
헤매다 보니 어느덧 20여분이 흘러가 있었다.
안되겠다. 이럴수록 과감하게 밀고 나가야 돼.
"따라 와."
"어디 가는데?"
경기장에서 가장 발길 뜸하고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
바로 선수 휴게실이다.
물론, 나나 데보라가 피겨 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 아니면 공간이 어딨어.
"쿠. 진짜 들여보내 줄까?"
"젠장. 한번 해보고 아니면 포기하는 거지."
아직 시합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선수 대기실 앞으로 가니 역시나 시큐리티 직원들이 막아세운다.
"어. 친구가 있어서 잠깐 응원 한 마디만."
"저희도 선수에요! 이거 ID 카드 보세요."
형광조끼를 입은 직원이 보면서 안된다고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날 알아보고 말해줬다.
"오 마이 갓. 당신 구마하 아니에요?? 맞죠!!"
어디까지 윤리의식을 어기는 행위가 되는지 몰라도, 일단 인기를 바탕으로 어려운 선수 대기실의 문을 통과했다.
"너무 팬을 기만하는 거 아니야?"
"야!! 니가 메달리지만 않았어도!"
선수들만 입장 가능한 공간에 들어오니 과연 복작복작한 밖과 다르게 조용하고 빈 공간이 드문드문 드러나고 있다.
"쿠. 어디로 가?"
"방은 다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여기저기 둘러보다 한 층을 내려가 보았다.
조용하다. 그래도 문들은 역시나 잠겨 있었다.
"쿠."
"응?"
데보라가 슥 옆에 있는 화장실을 가리킨다.
오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