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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199화 (199/401)

< 챔피언의 무게 (9) >

추위와 얼음을 이겨내는 열정의 축제 토리노 동계올림픽도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알파인스키 활강과 쇼트트랙에서 메달을 석권해 역대 최고 종합순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후우..."

반면, 이웃 나라 일본은 아직 단 한 종목에서도 메달을 따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의 여자 싱글 피겨스케이터 사쿠라 아야는 인적 드문 화장실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올해로 스물넷. 피겨 선수로선 은퇴 시기를 넘긴 고령에 올림픽을 찾아왔다.

사쿠라 아야가 지갑을 펼쳐본다.

2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던 사진이었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부모님과 다정하게 꽃을 들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올림픽에서 우승하면 어떤 기분일까...

중국계 미국인으로 피겨 계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슈퍼스타 미셸 콴.

90년대 세계선수권을 휩쓸고 98 나가노와 2002 솔트레이크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건 그녀도 금메달은 얻지 못했다.

오죽 우승에 미련이 남았으면 이번 토리노까지 찾아왔을까. 물론 부상과 체력 저하를 어쩌지 못해 결국 돌아가긴 했지만.

"카에데는 해내겠지..."

하야카와 카에데는 사쿠라 아야의 라이벌로 일본 사회가 주목하는 피겨 기대주였다.

1년 후배로 시작했지만, 하야카와는 주니어시절부터 세계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시니어에 올라와서도 우승을 차지하는 등. 아마도 일본 최초의 피겨 메달리스트가 될 거라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지금도. 일본은 마지막 종목. 피겨에서의 메달을 얻기 위해 모든 시민과 언론이 하야카와 카에데만 보고 있다.

사쿠라 아야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그녀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사쿠라는 떨어지는 자존감과 무관심에 기죽기 싫어 혼자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언제는 안 그랬어... 그냥 무사히 경기만 마치자."

클린을 목표로 사쿠라 아야가 조용히 다짐을 가지며 마음을 다독이며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Hey KOO! come here!"

어? 사람이...

정신없는 순간을 보내야 했다...

외국이고 올림픽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얇은 벽 하나를 두고 그럴 줄은...

어찌나 격렬하게 쿵쾅거리는지 사쿠라의 마음에 시합에 대한 긴장감이 사라지고 말았다.

성진국의(?) 나라 일본이란 소리를 듣지만, 그녀는 어려서부터 운동에 집중해온 터라 성에 대해 그렇게 개방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KOO! fuck me! AH~~!"

"헤이 데비. 플리즈. 비 콰이어트!"

발음이 동양인 같은데...? 동양인이 밖에서 이런 짓을 한다고??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격렬한 사랑은 파괴력만큼이나 빠르게 끝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서둘러 옷을 입고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사쿠라는 그제야 간신히 숨소리를 낼 수 있었다.

"후우 후우..."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AV 같은 일들은 경험하다니 심장이 괜히 불안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찾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안돼! 이대로 있다간 내 시합이 영향을 받어!!

윤리를 어긴 사람은 저쪽인데 왜 내가...!!

"쏘... 쏘리..."

그렇게 후다닥 대기실로 돌아간 사쿠라 아야.

대기실로 돌아와서도 그녀의 감정은 쉽사리 진정되질 않았다.

* * *

정말 뭐하던 사람들일까. 페어 선수들인가? 그쪽은 연인들이 많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근데, 동양인 서양인 혼성팀은 들어본 적이 없어.

무엇보다 복장이 선수 복장이 아닌 일상복이었다.

여자도 화장이나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질 않았다.

선수니까 선수 구역을 왔을 거 아냐...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거지...?

다른 그 어느 때보다 시합에 신경 써야 하는 이때, 뇌리에 깊이 박힌 다른 이들의 사생활이 잊히질 않는다.

"아. 다 망했어..."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원체 인상이 강렬한지라 짧게나마 두 사람의 얼굴이 눈앞을 아른거린다.

금발의 백인 여성은 누군지 몰라.

하지만, 남자는... 남자는 기억이 있어.

그래도 설마 아니겠지... 한국 사람들은 예절 바르다고 들었는데...

의심이 가는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서양 여자들조차 굴복시키는 엄청난 매력을 가진 동양인이 또 얼마나 있겠는가.

큰 키에 다부진 몸. 'KOO'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결정적으로 어린 외국인 선수들이 경기장에 몸을 풀고 들어오면 호들갑스레 연예인이라도 본 듯 수다스럽게 변했다.

"진짜로 왔어? 진짜?"

"응! 동쪽 스탠드에 앉아있다니까!"

"정말! 나도 가볼래!"

구마하다.

그는 스포츠 선수들 가운데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2년 전 아테네에 이어 이번 토리노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건 한국의 슈퍼스타.

일본 빙상 선수들도 왜 하필 경기장이 멀어 만나질 못하는 거냐고 귀여운 불만을 품고 있던 지라 사쿠라도 그에게 관심이 있었다.

구마하는 같은 인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운동신경을 가진 선수였다.

애초에 하계 동계, 연속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성과였다.

그런 사람이 그런 짓을...

종목은 다르지만, 나도 선수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노력과 성과를 존경하고 있었는데...

쇼트 프로그램 개막 3시간 전.

사쿠라 아야도 몸을 풀러 빙판으로 나섰다.

어린 선수들이 말한 대로 동쪽 스탠드가 복잡해 보인다.

다들 구마하 얼굴 한번 보려고 운동하는 척 그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쿠라 아야도 슬쩍 가본다.

맞어. 그 사람이야. 그 여자도 같이 있어...

눈이 마주치자, 사쿠라는 마치 자신이 구마하와 화장실에서 밀담이라도 나눈 듯한 감정에 황급히 고개를 피해버렸다.

큰일이야. 프로그램이 생각 안 나...

자꾸 저 사람만... 아까의 그 분위기만... 머릿속을 맴돌고 있어.

"아야? 방금 나왔는데 왜 벌써 들어가요?"

"코치님. 컨디션이 조금..."

"어떤데요? 부상입니까?"

외국인 코치가 의무실에 가 있으란다.

바로 하야카와의 순서가 오니까 그녀를 지켜보고 가서 체크해 주겠다고 말했다.

사쿠라 아야는 의무실에 들어와 앉아 있었다.

"..."

속상하고 화가 난다.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옆에서 그런 행동을 해서...

하긴,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니까 그런 짓을 하겠지...

똑똑 똑.

"네?"

코치가 벌써 왔나? 카에데 방금 들어갔을 건데.

"익스큐즈 미..."

헉! 구마하다!!

"왜. 왜 그러세요?"

"아. 그게...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

"사과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발음은 어색하지만, 그래도 유창한 영어 실력이었다.

사쿠라도 어렵지 않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시. 신경 안 써요!"

"..."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죠?"

"저. 사과하려고 오는데, 의무실로 들어가시길래..."

사쿠라는 불편한 속내를 꾹 눌러 참으며 시선을 피했다.

구마하가 조심히 물어본다.

"혹시, 이것도 저희 때문에..."

"원래 부상이 있었어요..."

"아. 그러세요? 정말 실례를..."

"유명한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세요?"

"...죄송합니다."

"그것도 올림픽에 와서. 하필 경기장에서! 그것도 내 시합이 있는 날에!!"

실망과 속상한 마음이 있어 더 크게 쏘아 붙이는 사쿠라 아야의 목소리에 구마하가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히 비난을 감수한다.

그가 말하길, 올림픽에서 만난 여자친군데, 폐막이 다가오고 헤어지는 날이 가까워지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단다.

"..."

선수로서 존경스러운. 스포츠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

뛰어난 성과만큼이나 완전무결한 도덕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챔피언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고 말았다.

"그런 상황인 줄 몰랐어요..."

"알기 어렵죠. 하하..."

구마하의 머쓱한 웃음에 사쿠라 아야도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경제력이 좋은 일본이라고 딱히 선수들이 더 나은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피겨 같은 경우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후원이 없다면 운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종목이었다.

그런 세계에서 챔피언은 차원이 다른 대우를 받는다.

특히, 가까운 라이벌 하야카와 카에데 같은 경우는 저 혼자만 먼 세상에 사는 사람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수많은 코치를 거느리고. 빙판에서 몸을 풀 때도 다른 선수들을 배려하지 않으며. 민감하고 수틀리면 가감 없이 싫은 감정을 표출한다.

그렇기에 똑같은 일본 국가대표로 올림픽을 찾았음에도, 코치들은 사쿠라보다 하야카와의 컨디션과 분위기를 살필 수밖에 없는데.

구마하는 다르다.

상상하던 슈퍼스타의 독선과 거만이 느껴지질 않는다.

도리어 자기 실수를 반성하고, 평판이 떨어지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인간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어도 이미 얇은 화장실 벽 너머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지 않았던가...

이렇게 생겨서, 이런 몸을 가지고. 이런 성과를 냈으면서. 이런 남자가.

어떻게 이렇게 소박할 수가...

"힘내세요. 응원하겠습니다."

"네."

"저 그럼..."

"우승 축하드려요."

"고맙습니다."

대화를 마친 두 사람.

사쿠라도 작별 인사를 건네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 구마하도 방에서 나가려는데.

그의 내공을 읽는 눈에 사쿠라 아야의 신체 이상이 보인다.

"어..."

"왜 그러시죠?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요. 그게..."

밸런스가 어긋나 있다. 좌우 기의 순환이 기묘하게 흐른다.

강한 내력을 가지고 있는데, 외력의 손상이 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인가?

이대로 과연 정상적인 경기가 가능할까?

"저 혹시, 다리가 안 좋으세요?"

"어떻게 아세요?"

"몸이 불편해 보이셔서."

"후후후. 피겨 선수는 다들 아파요."

"음. 그럼 제가 마사지 좀 해드려도 될까요?"

"네? 아. 아니요! 안 그러셔도!!"

구마하는 실례를 끼친 것도 있고, 특히 자기는 마사지나 안마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며 다짜고짜 의자를 가져와 앉는다.

"이렇게 시합 나가시면 진짜 다쳐요."

"그렇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고. 저 진짜 안마 잘하거든요? 미안한 것도 있으니까. 맡겨 보세요."

구마하가 외투를 벗어 던지며 사쿠라의 다리를 잡았다.

멋진 몸이다. 옷으로 가려졌는데도 건강함이 느껴져.

그나저나, 처음 보는 여자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다니...

구마하의 과감함에 도리어 사쿠라 아야가 압도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음."

과감하게 덤벼드는 것과 달리, 그의 손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가녀린 것을 만지듯 세심했다.

주물주물 구마하의 손길이 사쿠라의 발바닥부터 종아리와 정강이뼈를 주물러 본다.

저 큰 몸으로, 저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이런 손놀림이라니... 여자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있구나.

구마하의 손길에 사쿠라의 경계심과 긴장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 이런 몸으로 어떻게 운동을 계속했어요? 이쪽 다리도 줘보세요."

그는 마치 의사라도 된 듯 여인의 몸을 점검했다.

회전과 점프 축이 되는 오른 다리는 너무 심각하고, 왼쪽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쪽도 만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해준다.

"쿠 상은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느껴지죠. 사람 몸엔 기가 흐르거든요."

"...그런 게 느껴진다고요?"

"그럼요."

구마하가 사쿠라의 피겨 슈즈를 벗겼다.

상처투성이의 맨다리가 검은 스타킹 아래 드러난다.

"저...! 저기!! 조또마떼!!"

"괜찮아요. 긴장 푸세요."

어쨌든 운동하고 왔는데...

발 냄새라도 나면 어쩌나 싶은 여자의 걱정은 완전히 무시하고 그가 발가락부터 발바닥 발목. 참으로 세심하고 꼼꼼하게 마사지를 시작한다.

사쿠라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감이 오질 않는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 내 몸을 만지고 있다.

그것도 아까 은밀한 사생활을 들킨 사람이...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올림픽의 전설과도 같은 젊고 매력 있는 청년이...

그런데, 확실히 구마하가 마사지를 시작하자 다리에 뭉친 피로와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진다.

온몸에 이완되는 기분이 그녀의 뇌리까지 타고 오르는 것 같다.

"시원하시죠?"

"으음. 음."

아까까지 다른 여자를 만지던 손이라는 것이 어딘가 불쾌하지만. 그런 가운데 몸에 흐르는 안락과 편안함은 사쿠라의 몸속에 그동안 억눌리던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어떠세요?"

"..."

"사쿠라 씨?"

"네? 아."

어라? 잠깐 졸았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편한 나머지 꾸벅꾸벅 잠이 들었는가 보다.

사쿠라가 허겁지겁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정말로 잘하시네요?"

"형한테 배웠거든요."

"형..."

"우리 형이 이런 걸 진짜 잘해요."

뉴스와 기사에서만 봤던 존재가, 바로 눈앞에 앉아 아픈 몸을 치료해주며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쿠 상."

"네?"

"금메달을 따면 어떤 기분인가요...?"

"하핫! 금메달요? 별거 없어요."

"왜요? 기쁘지 않으세요?"

"기쁘죠. 좋은데."

벌써 몇 개의 메달을 따낸 구마하가 말하길, 자기는 메달이 아닌 운동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훈련에 임한단다.

"엄청 승부욕 강하실 줄 알았는데..."

"지고 싶진 않아요. 이기고 싶죠. 그건 늘 그래요."

"음..."

"단지, 이제 와선 내가 누굴 이기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보다는, 저 자신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커요."

그는 외투를 벗은 어깨와 가슴 근육. 그리고 철근 같은 두 다리를 자랑으로 여겼다.

"멋있어지고 싶었어요."

"멋있어진다...?"

"메달보다. 고통을 이겨내고 바뀐 이 몸이 제 자랑이에요."

"흐음."

"사쿠라 씨는요?"

"저도요."

사쿠라도 자신의 상처투성이 다리를 보며 말했다.

"저도 제 몸이 좋아요. 힘든 점프를 이겨내 주는 다리라든지. 회전력을 버티게 해주는 복근이라든지."

"그렇죠? 어려운 거 해내다 보면, 막 나 스스로가 기특하고 그렇죠?"

"후후후~ 네."

"피겨는 점프가 많죠?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던데."

주물주물 사쿠라의 몸을 마사지해 주던 구마하의 손길이 종아리에서 무릎을 지나 점점 허벅지로 향했다.

"..."

"아. 원래 같이 풀어주는 게 좋아서..."

"......"

"싫으면 그만할게요. 실례했습니다."

"아니요. 더 해주세요."

그만두면 그도 갈 것 아닌가.

싫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우연히 맺어진 인연이라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 다양하게 느끼고 싶었다.

"불편하지 않으세요?"

"저요? 어. 뭐..."

"제가 침대에 누울까요?"

"..."

사쿠라가 슬쩍 의무실 침대에 올라가 눕는다.

그리곤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긴장 풀린, 경계심을 완전히 낮춘 여인의 시선을 보여준다.

상대방을 믿는 눈빛이었다.

이대로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다 받아들일 것 같은 각오를 담은 시선에 구마하는 사쿠라에게서 묘한 색기를 느꼈다.

"..."

"..."

두 사람 사이에 말 수가 줄어들며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구마하도 그럴 마음으로 찾아온 건 절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는 여인의 분위기에 끌려가고 있다.

구마하는 다시 한번 의무실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는 사쿠라를 살펴 보았다.

화려하거나 한눈에 이성을 사로잡을 스타일은 아니지만, 일본 여성 특유의 오밀조밀 정갈한 외모가 전통적인 미녀 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경기를 앞둔 쪽 찐 머리와 긴 속눈썹을 붙인 가느다란 눈동자. 하얀 피부 위에 빨간 립스틱으로 화장한 작은 입술.

잔머리가 삐져나온 긴 목과 피겨 선수 특유의 마르고 늘씬한 몸을 가지고 있는 사쿠라 아야.

동양 여성에 서양의 색채가 더해진 느낌이 그동안 겪은 상대방들과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사... 사쿠라 씨..."

"쿠 상. 계속해 주세요."

위험하다. 이제 그만해야 되는데... 그런데...

"허리도 조금 안 좋은 거 같아요."

"허... 허리요?"

"네. 점프하고 착지하면 몸에 충격이 쌓이거든요."

사쿠라가 슬쩍 돌아누우며 두 팔을 베고 누웠다.

"쿠 상?"

"네."

"...그분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인가요?"

"누... 누구요?"

"아까 그 백인 여성분. 같이 계시는 거 같던데."

"친구죠 정확하게는. 데보라 옆에 있는 이탈리아 애가 진짜 연인이고요."

"복잡한 사랑을 하고 계시네요."

"하하. 뭐 어쩌다 보니까..."

구마하가 다시 마사지를 시작했다.

주물주물 허리와 골반. 대퇴골을 주무르자 사쿠라가 미약한 신음소리를 낸다.

"으음."

역시. 일본 사람은 소리가 다르구나...

수빈이도 조금 그런 면이 없지않아 있었는데...

"그럼. 쿠 상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나요?"

구마하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답한다.

"그런 걸 왜 물어보세요?"

"..."

사쿠라는 말이 없다.

구마하도 조용히 마사지를 이어갔다.

잠시 뒤 그녀가 말했다.

"나한테도 키스해 줘요."

토리노 올림픽 피겨 대회 첫날.

쇼트 프로그램 개막까지 2시간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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