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01화 (201/401)

<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라. (1) >

의도한 건 아니지만, 짧고 불같은 사랑을 나눴다.

사쿠라는 경기장으로 향하고, 나도 어물쩍 다시 일행들에게 돌아왔다.

감독님이 보자마자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니냐고 캐물으시는데, 임한기 기자님이 와 계셔서 그런가 말을 아끼신다.

"기자님 오셨어요?"

"어. 감독님 여기 계신다고 그래서. 어디 다녀오냐?"

"아. 잠깐. 누구 좀 보려고요."

기자님과 인사를 나누는데, 감독님 눈빛이 '적당히 좀 해라...' 라는 것 같다. 여러모로 뻘쭘하구만.

"쿠? 갑자기 어디 갔었어?"

스테판과 모레노는 축구 이야기에 빠져있고, 감독님과 기자님은 잘 모르는 외국인이었다.

멍하니 경기장만 지켜보던 데보라가 내가 오니 얼굴에 화색이 돈다.

"시합하고 있었구나. 어쩐지 뭔가 계속 음악이 바뀌더라니."

"..."

"왜?"

대충 에두르면서 나도 프로그램이 진행중인 경기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쇼트 프로그램이 시작되어 선수들이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하위권이라 그런가 생각만큼 현란한 기술이나 높은 테크닉은 잘 안 보이는.

퍽!

"뭐야? 왜 때려?"

"으이구..."

"뭐...? 마... 말을 해."

"Again? who??"

후후. 후후후...

데보라가 난데없이 어깨를 세게 때리더니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다.

흠. 크흠. 뭐지? 티 나나? 어떻게 알았지...?

끔벅끔벅 뻘쭘 거리고 있으니 데보라가 잠바 깃을 슥슥 끌어올려 목을 가려준다.

"뭐 묻었어...? 립스틱?"

"어후... 이 플레이보이..."

"..."

뭐지? 아무것도 없는데. 묻는 것도 없구만.

아까 사쿠라가 끌어안을 때 키스 마크라도 남겼나? 허허. 얌전하게 생겨서 과감한지고.

"제정신이야? 저분 마스터라며? 예의 있게 행동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

"마스터는 무슨. 내가 노예냐? 그냥 코치님이지."

"한국 사람이 영어로 말장난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 모르게 데보라랑 속닥거렸다.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까..."

"누구랑? 관중석에서 누가 시그널이라도 보냈어?"

"아니. 아까 그분. 오해 좀 풀다가 그렇게 됐어..."

"그분이라니...? 혹시 토일렛?"

"어."

"그럼... 토일렛 어게인?"

"야. 사람들이 다 니 같은 줄 아냐..."

투닥투닥 몇 대 더 맞고 설명해줬다.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 좀 하다가 부상이 보이길래 마사지 해주는데. 내가 또 마사지 잘 하잖아. 근데 여자가 먼저 원해서 그렇게 됐다고 하니.

또 몇 대 퍽퍽 때리면서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을 왜 마사지를 해주냐는데.

"아파 보이길래. 시합 앞두고 신경 쓰일까 봐."

"넌 스윗한 거야 스투핏 한 거야..."

때리고 혼내던 데보라가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물어본다.

"쿠. 혹시 협박받았어?"

"내가 무슨 협박을 받어. 그런 거 없어."

"근데 왜??"

"몰라. 하고 싶었데. 갑자기 성욕이 땡긴 거 아닐까? 시합 앞두고 그럴 때 많잖아."

"...넌 괜찮아?"

"뭐가?"

"처음보는 사람이잖아."

"저기 데보라... 기억을 조금만 더듬어 보면, 우리도 그때 처음 만난 사람 아니었나?"

"난 쿠를 알고 있었지. 스테파노가 온다고 말도 해줬고. 어른들도 다 있는 자리에서 소개받았는데."

"여기도 날 알고는 있었어."

"셀럽이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그런 셀럽을 금단의 구역으로 끌어들여 따먹은 건 누군지 한번 물어보고 싶구만...

"셀럽은 무슨... 내가 무슨 셀러브리티라고."

"쿠는 슈퍼스타잖아."

그 정도는 아니야 라고 하자니. 저 앞 관중석에서 돌아보는 분들도 있고, 주변 여기저기 외국인들이 경기장이 아닌 나를 기념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흠..."

어느 정도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내가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나?

어떻게 하다보니, 분위기도 있고 예쁘기도 하고. 어이구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덥썩 넙죽 그렇게(?) 되고 말았지만.

그러게. 아까 얘도 그렇고 지금 사쿠라도 그렇고. 나 꽤 조심성 없긴 하구나...

"그래서?"

"그래서 뭐?"

"어땠어??"

누가 폴리아모리 아니랄까봐... 바로 싱글벙글 남의 사생활 캐묻는 데보라 발트베르거.

"좋았어."

"역시 쿠는 우리랑 잘 맞아."

"아니야. 나 그런 거 싫어."

"거짓말. 말과 행동이 완전 다르잖아."

"난 내 걸프렌드가 나만 사랑해주길 원해."

"본인은 안 그러면서?"

"나도 그럴 거야. 내 여자만 사랑할 거야. 지금은 오피셜한 관계가 없을 뿐이지."

계속 둘이서 속닥속닥거리자 감독님이 툭 치면서 물어보신다.

"야. 마하야. 기자님이 여자친구냔다."

"아니요. 그냥 '친구'고요. 여기 옆에 곱슬머리가 얘 남자친구요."

"하하! 마하야. 그냥 친구랑 뭘 그렇게 귓속말을 하고 있어. 너 스캔들 나 그러다."

"기자님. 올드하게 왜 이러세요. 요즘애들 다 이러죠."

"좋네. 멋있다. 젊은 친구들이 국제적으로 우정도 나누고."

크흠 기자님. 우리 셋에 다른 셋 포함 올림픽 정신이 가득한 친구들입니다...

감독님 기자님과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니, 외국애들도 무슨 얘기하냐고 물어본다.

"아니. 여기도 다들 영어하고, 너희도 영어 하는데 왜 나한테 그래? 직접들 물어 봐."

감독님한테도 똑같은 이야기를 전해드렸다.

궁금하면 직접 물어들 보셔라. 어차피 다들 인사는 나누지 않았느냐. 그러자 감독님 말씀이.

"마하야. 너를 통해서 모이게 된 사람들이잖아."

"제가 뭐라고..."

"니가 이 모임의 중심이 되는 거지."

어떻게 하다 보니 내가 또 중심까지 돼? 허허. 번거로운지고.

말이 나온 김에, 임한기 기자님이 우리를 사진 찍어주시겠단다.

그냥 기념사진이라 생각하고 애들과 자세를 갖추는데, 기자님이 가방에서 렌즈를 바꿔 끼신다.

"기자님. 뭐 렌즈까지 바꾸세요?"

"기사용 사진을 찍어야 하니까."

"네? 저희 그냥 경기 구경하고 있는데요?"

"스테판이 있잖아. 한국 팬들한테 좋은 이야기가 될 거 같애. 2004 아테네의 감동을 선사한 두 선수의 우정은 계속되고 있다."

"...사람들이 그런 걸 궁금해할까요?"

"그럼. 좋은 이야기가 되지."

애들도 무슨 얘기냐고 물어보는데, 이러저러 지금 우리 사진으로 뉴스페이퍼 리포트를 쓰겠다는데 너희도 동의하느냐 확인해본다.

"난 좋아!"

"나도!!"

"잠깐만. 너희는 올림픽 참가 선수라 그렇다 치지만 나는 왜?"

"스테판 너가 있어서 기사가 된대."

"흠. 오케이."

스테판이 팔을 넓게 벌려 세 사람을 끌어 모았다.

넷이 쪼르륵 겹쳐 앉아 사진을 찍었다.

"기자님. 애들이 기사 언제 나오냐고 그러는데요. 자기들도 찾아보겠다고."

"오늘 밤 작성해서 보내야지. 내일쯤 올라올 거다. 링크랑 사진 니 메일로 보내줄게."

아테네에서 아메리카인 유진 볼트와 브라운 제임스. 유럽인인 스테판과 빅토리아를 알았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새로운 인연이 생겼다.

사람이 늘어가는구나. 그것도 국제적으로.

머저리 삼총사와 맨날 헛소리만 하던 내가 언제 이렇게 됐을까.

"헤이 마하."

"쟤들은 어디가?"

"매점. 심심하다고 한 바퀴 돌고 온다고 그랬어."

"흠."

"미스터 한 코치는 어디갔어?"

"아. 한국 저녁시간이라, 약혼자 분이랑 통화한다고."

프로그램이 계속되고 있었다.

피겨는 한 사람씩 연기를 펼치고 평가를 받기에 적은 인원도 시간이 제법 흐른다.

두 시간쯤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데보라가 모레노랑 매점인지 여자화장실(?)인지 가버리고, 감독님도 한국에 계신 사모님과 통화하느라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임한기 기자님은 경기 취재하러 기자석으로 내려가셨고 스테판과 둘이 있었다.

"왜? 나랑만 있으려니 싫어?"

"그런 게 어딨어."

"하하! 내 가족이지만 데보라 성격이 스페셜하지?"

"괜찮아. 나도 데보라 좋아. 모레노도 좋고."

불편한 이야기가 나올까, 친구의 허벅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운동 계속 하나 봐?"

"계속해야지. 애들 지도하려면 나도 체력이 있어야 하는데."

"스테판. 너도 할 수만 있으면 계속 운동만 하고 싶어?"

"당연하지. 안 그런 선수가 있을까?"

"흠."

"왜?"

"아니야. 우리 감독님이랑 얘기 해봤어? 세계선수권 때 국가대표 맡으셨는데."

"아까 너 없을 때 이야기 했는데 모레노가 자꾸 축구 이야기 물어봐서 깊게는 못 했어."

먼저, 덴마크의 쟈스민도 그랬지만, 나라마다 상황 따라 사람들은 원하는 게 다른 것 같다.

우리는 나랑 감독님뿐 아니라 많은 여론이 엘리트 체육을 버리고 생활체육으로 가야 한다 주장하는데, 막상 생활체육의 나라에서 선수 생활을 한 사람들은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열망이 있다.

뭐가 정답일까. 어떻게 해야 운동이 즐거울 수 있을까.

"마하. 왜 그래? 무슨 고민있어."

"없어. 그냥 오늘 너 보니까 너무 좋다."

"그럼 진작 좀 찾아오든가. 바로 옆 동네에 있었으면서..."

"에이. 그건 미안하다니까."

그래도 영어가 많이 늘었다고 칭찬해준다.

스테판네 집에서 한달 가량 머물면서 나누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어땠어? 아테네 때랑 이번이랑 비교하면?"

"이번 올림픽은 내가 꿈꾸던 정말 딱 그대로의 올림픽이었지. 여유롭고 즐겁고. 시합도 빨리 끝나고."

"하하! 그때는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뛰어다녔잖아."

"...스테판. 내가 트랙으로 돌아가야 할까?"

"무슨 소리야. 스키 선수로 완전히 고정하려고?"

"그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스키는 1년 내내 타기 어려우니까."

"뭐야. 지금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솔직히 고민이 조금 있다고 말했다.

육상은 좋은데, 주변이 너무 들쑤시고, 은퇴를 하자니 몸은 계속 움직이고 싶다.

"흠."

"무엇보다. 사람이 조금 버겁기 시작해."

"얘기해 봐. 애들도 늦게 올 거 같은데."

나이많은 외국인 형이라 생각하고 덤덤하게 털어놓았다.

이번 대회에서 이틀 차 일찌감치 경기를 마치고 긴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며 많은 사람과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나눴다.

합축적인 시간에 땀과 눈물 열정과 사랑이 집중된 시간이 끝나는 게 너무 아쉽다.

"한국은 유럽이랑 상황이 달라."

"어떻게 다른데?"

"우리는 강압적으로 운동을 해야 돼."

"..."

"물론, 난 운동이 좋지만, 그게 나나 팬들을 위해서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운동이 되는 건 싫어."

"그 누군가가 누군데?"

"코리아 아틀레틱 페더레이션."

한국육상연맹.

무게감 있는 집단에 스테판도 진지하게 돌아본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데?"

"아직은. 근데 점점 간섭을 많이 해."

"흠..."

"감독님이랑 나는 그런 면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 그냥 이 시간이 끝나고 돌아간다는 게 버거워."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스트리아에서 한달만 아르바이트 하고 지내도 되냐고 물었다.

"너가 무슨 파트타임을 하려고?"

"너 애들 가르치는데 내가 코칭 해주면 안 될까? 숙소나 체류는 내가 알아서 할게."

"판타스틱한 이야기지만. 너도 알 듯이 우린 작은 마을이라... 데보라는 좋아하겠다."

"하하하! 데보라는 좋아하겠지."

정리되지 않은 순간의 느낌이 강한 건 있다.

그냥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진지한 대화를 하려다 툭 튀어나온 말일 수도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냥 요즘 여러모로 스트레스가 있다 정도로 말을 마쳤다.

"마하. 마이 프렌드. 넌 이미 록스타야."

"무슨 뜻이야...?"

"정상은 원래 고독한 위치라고."

"정상인가."

실력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직 인성이 그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이런 진지한 고민을 나누는 가운데서도, 피겨 선수들이 이너바우어란 자세를 취할 때 드러나는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보고 있었다.

아. 진짜 싫다... 근데 싫으면서도 어쩔 수가 없어.

그냥 눈이 가. 정신과 마음이 고민을 하는데, 몸이 그래.

"후후후 록스타라."

"그래. 웃어 넘겨. 시합이나 보자."

"맞어. 나 오늘 관중으로 왔지."

먼 나라 친구에게 속 얘기를 꺼내놓다보니 별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싶어졌다.

"다들 없으니까 하는 말인데, 아까도 우리 이야기 기사로 공개된다는 게 어떤 부담을 느꼈어."

"싫으면 쓰지 말라고 해. 너희랑 가까운 기자님인 거 같은데."

"아니야. 나도 기사는 보고싶어. 단지 그걸 보면 그런 느낌이 들 거 같더라고."

"어떤 느낌?"

"이 순간도 지나갔구나. 또 다음이 오는구나."

"하루하루가 다 그런 식이지 뭐."

"스테판. 나 실은 아까 여자 만나고 왔어."

"하하! 모레노가 그럴 거라고 하더라니."

"뭔가 나는 그냥 이런 놈인데, 주변의 기대가 버겁게 느껴지는 거 같애."

관계에 대한 허무함이 밀려드는 기분이다.

친구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니, 그가 어깨를 다독이며 말한다.

"마하."

"응?"

"잘 할 거야. 넌 베스트 오브 베스트니까."

"..."

"즐겨. 록스타라고 했잖아."

그래. 깊게 고민하지 말자.

이따가 끝나고 사쿠라랑 만나기로 했어.

그것만 생각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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