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라. (2) >
"다들 어디 갔어? 기껏 줄 서서 햄버거 사 왔더니."
"돌아오겠죠 뭐. 고맙습니다 감독님. 스테판 이거 먹어."
"Thank you. Mr. HAN."
"맛있게들 들어. 근데 진짜 오래한다. 마하야 얼마나 남았냐?"
"중반 넘었어요. 스테판이 곧 상위랭크 선수들 나올 거래요."
"끝까지 보고 갈 거야?"
"그럼요."
감독님 목소리가 영 달갑지 않게 들리길래, 우걱우걱 햄버거를 먹으며 사모님과 통화는 잘하셨냐 물어보았다.
"통화 뭐 별 거 있나..."
"싸우셨어요?"
"언제 오냐고. 혼자 결혼 준비 힘들다고..."
"결혼이 그렇게 할 게 많아요?"
"하하하! 너도 나중에 경험해 봐라."
"가방이라도 하나 선물해 드리세요."
"안 그래도 이탈리아까지 갔는데 센스 좀 발휘하라고 그러더라."
"역시. 뭐 사드릴거에요?"
"몰라. 유명한 데 들어가서 비싼 거 하나 달라고 하면 되겠지."
"괜히 돈 쓰고 욕먹지 마시고 사모님한테 골라놓은 거 있냐고 물어보세요."
감독님이 낯선 사람 보듯 쳐다보신다.
"니가 뭘 안다고..."
"감독님. 여자한테 가방은 남자의 차랑 똑같은 거예요."
"오~ 이 자식."
"제가 골라드릴까요?"
"너 명품 잘 알어?"
"수빈이 만나면서 이것저것 많이 봤잖아요. 웬만한 메이커는 다 알죠."
"오~! 오~!!"
감독님이 기쁜 듯이 어깨를 두드리셨다.
"아 왜요?"
"이야~!! 니 입에서 그 친구 이름이 나오다니. 이제 진짜로 이겨낸 거야?"
"그럼요.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했어요."
"썩을 놈. 여자를 그렇게 만나고 다니더니..."
"아. 그걸 왜 또 그렇게..."
"너 인마 덴마크 감독들이 정준이한테 찾아와서 항의하고 간 거 알어?"
모르겠다. 불리한 이야기는 입 꾹 닫고 햄버거나 쑤셔 넣었야지.
"잘했어. 그럼 되는 거야. 지나간 인연 뭐하러 붙잡고 있냐."
"맞다. 감독님. 얘가 감독님한테 궁금한 거 있다고 했었는데."
"이 자식 지금 말 돌린 거지?"
"아 그냥 제가 알아서 할 게요. 진짜..."
"망할놈. 다 컸다고 개기기나 하고. 스테판은 뭔데? 나한테 궁금한 게 뭐야?"
스테판도 자기 이름이 호명되자 돌아본다.
"마하. 무슨 얘기하는데 내 이름이 나와?"
"너 아까 감독님한테 코칭 물어보고 싶다며."
"맞다. 미스터 한? 익스큐즈 미."
편하게 이야기 하라고 둘이 자리를 바꿔 앉았다.
나는 다시 경기장을 둘러본다.
사쿠라는 언제 나올까. 지루하긴 해도 사쿠라 경기는 보고 싶은데.
오글거리는 이야기 듣기싫어 후다닥 말을 피한 것도 있지만, 감독님 말씀대로 아픔을 뒤로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기로 했다.
수빈이랑 있었다면 동계올림픽의 뜨거운 밤은 존재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건 그거대로 나쁜 게 아니지만, 원인과 결과가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잖아.
아무튼, 다음 사랑은 누굴까?
내가 선택하면 되는 건가? 상대방은 내가 사귀자면 다 받아줄까?
뭔가 아는 것보다 더 큰 유명세가 있다보니 진지한 연애를 하는데 조금 부담이 느껴진다.
가급적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새로운 연인을 만나고 싶은데. 누가 좋으려나.
혜정이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 새로운 사람을 찾아봐야지.
당장은 토리노에서 만난 인연들을 생각해 보았다.
데보라나 수잔은 일단 아니고. 외적인 요소를 떠나 서로의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럼 쟈스민 아니면 사쿠라인가?
쟈스민도 귀엽고 좋지.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날 우러러봐주는 여자기도 하고 또 나한테 큰 관심이 있고. 꽉 막힌 덴마크를 떠나고 싶다고 했으니, 잘하면 한국으로 가자고 해도 따라올 거야.
어? 근데 잠깐. 그렇게 되면 인생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 쟈스민과 결혼? 흠...
그럼 사쿠라는 어떤가.
사람은 잘 몰라.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하지만 몸을 보면 그녀의 성실함과 도전 정신을 알 수 있어.
조용조용한 성격 이면에 불같은 뜨거움을 가지고 있었던 사쿠라 아야.
이름 그대로 벚꽃이 어울리는 풍경 속에 기모노를 입은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고싶다.
근데 또 모르지. 수빈이도 그랬지만, 여자 속은 정말 알 수가 없으니까.
일단 첫 만남에 다짜고짜 하고싶다고 하는 것도 평범하다고 보긴 어려우니까.
으아아. 그냥 모르겠다.
다들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는 거 같애.
살 수만 있다면 다 데리고 살고싶다.
혜정이도 있고, 수빈이도 화해해서 다시 만나고. 아테네의 비너스 빅토리아도 보고 싶고. 쟈스민이나 사쿠라도 놓치긴 아쉬운 존재다.
가끔 데보라랑 모레노 커플도 놀러오고 그래서 다 같이 행복하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그런 날들이 이어진다면.
"..."
잠깐만. 그러고보니 최다빈도 있었구나.
다빈아 이 친구야. 너 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니? 살아는 있는 거야?
승부욕이라면 상택이 형 못지 않게 강한 애였는데, 그대로 육상계에서 종적을 감췄다는 게 영 납득이 가질 않는다.
어떻게 된 걸까. 어디서 뭘하고 있으려나. 다빈이도 보고싶다.
"야. 마하야."
"Hey MAHA!"
"네? 어? 왜 그래요?"
"몇 번을 불렀는데. 눈 뜨고 자냐?"
"아. 그냥 뭐 좀 생각하느라."
"여자?"
"Girl?"
"감독님은 그렇다쳐도, 넌 뭘 안다고..."
대충 둘러대느라 피겨에 집중하고 있었다고 해줬다.
두 사람 다 안 믿는다며 웃는데. 생각보다 시합도 진지하게 보고 있던지라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신기하잖아. 다들 저런 몸으로 어떻게 과격한 운동을 하는지."
"뭐가 과격한데?"
"감독님. 왜 이러세요. 딱 보면 보이죠. 저 점프나 균형감각. 보통 근력으로 되는 게 아닌데."
실제로 선수들을 보고 있자면, 하위랭크 선수들이도 점프 모션에 들어가기 전 기를 모으듯 몸에 빛이 감돈다.
클래식 음악과 반짝이 드레스가 눈과 귀를 가리고 있지만 여기도 스포츠란 것이다.
"그런 거 보고 있었어요."
"알겠으니까. 마하야. 너가 이 친구한테 얘기 좀 해줘라."
"뭐요?"
"나 훈련 프로그램 잘 못 짜서 작년 세계선수권 준비할 때도 주영이한테 전화하고 그랬었잖아."
"아 뭐 그런 국가적 기밀사항까지 밝히고 그러세요... 부끄럽게..."
"얘가 날 안 믿어. 뭔가 자꾸 특별한 훈련 비법이 있다고 알고있어."
"스테판. 히 즈 라이트. 낫 라잉."
내가 여기저기 메달도 따고 성적도 좋다보니 스테판은 우리가 뭔가 엄청난 훈련 비법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시리어스?"
"진짜야 널 왜 속여. 우리도 그냥 남들이랑 똑같이 훈련해. 자메이카나 미국 훈련 프로그램 따라하고, 연구도 해보고."
"흠... 그럼 미스터 한. 얘는 왜 이렇게 실력이 좋아요?"
"그거야 쟨 구마하잖아."
스테판은 메달리스트를 키우고 싶어하고 있었다.
친구가 가진 목표에 대해 감독님은 냉정하게 말씀하신다.
"스테판. 마하를 봐도 그렇지만, 메달리스트가 단지 훈련과 시스템으로 되는 건 아닌 거 같애."
"정말 노력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걸까요...?"
"글쎄... 모두가 해낼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감독님이 내공에 대해 말해줄까 물어보시는데, 이해도 안 될뿐더러 나도 단지 내공만 가지고 운동하는 건 아닌지라, 내가 설명해주겠다고 말했다.
"메달 따고 싶어?"
"왜 이래. 넌 알잖아."
"...아쉬워?"
"당연히 아쉽지."
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단다.
만약 그때 아테네에서 넘어지지만 않았다면, 나도 메달리스트가 되어 올림픽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까...?
"그럼 애들 쪼을라말고 너가 다시 도전해 봐."
"생각은 하는데.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판단이 내려져. 모든 면에 있어 그때가 내 최고 전성기였거든. 몸이나 체력이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제는 그때 이상의 실력이 발휘되기란 어려워."
"그런 게 어딨어. 체력은 선수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발전할 수 있지."
"후후후. 마하. 나도 20대 초반이면 그런 이야기 하겠지만."
스테판은 20대 후반. 확실히 운동선수로는 컨디션이 떨어질 나이긴 했다.
"시합 보자. 스테판."
"오케이. 땡큐 미스터 한."
감독님이 스테판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나도 주제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피겨 이야기를 꺼냈다.
마침 이 친구는 처음부터 피겨 팬이라서 빠르게 경기장에 몰입할 수 있었다.
다만, 나에겐 또 하나의 생각할 거리가 주어진다.
나도 메달이 좋다. 있어서 나쁠 건 없어.
환골탈태보다 메달을 따고 난 뒤 더 많은 상황들이 변했으니까.
다만, 마냥 그렇게 긍정적인 건 아닌데, 그만한 책임과 과제가 따르는데.
내가 너무 단편적으로 보나? 원래 생각하는 쪽이 더 부각돼서 보이는 거니까.
내가 여러 가지 부담을 보는 만큼, 메달이 없는 사람들은 장점만 보는 거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서도 눈앞에서 새로운 시합이 펼쳐지고 있었다.
많은 선수들이 빙판의 여왕이 되기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스테판."
"음?"
"그래서 넌 누구 응원하는 거야?"
오늘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관객들이니, 부담을 덜고 보고싶다.
스테판도 책자를 뒤적거려 출전 선수 가운데 한 사람을 꼽는다.
"알레시아 홀트."
"누군데? 유명한 선수야?"
"미쉘 콴 다음으로 명성을 떨치는 차세대 빙판의 여왕이지."
감독님도 들은 이름인가 부연 설명을 해주신다.
"세계선수권 챔피언이야."
"오 그래요? 잘하는 선수네."
"스테판은 알레시아 팬이구나."
"미스터 한은요?"
"난 민족적인 감정을 덜고. 모든 올림픽 무대에서 동양 선수들이 조금 더 드러나면 좋겠단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라, 카에데란 일본 선수."
하야카와 카에데. 사쿠라 아야 말고 또 다른 일본 대표선수다.
일장기를 든 관중들 가운데서도 몇 몇 카에데란 응원카드를 들고 있는 걸 봐서 인기와 명성이 있는 사람 같다.
"헤이. 가이즈. 무슨 얘기들 하고있어?"
그때 데보라와 모레노 커플이 돌아왔다.
역시나, 밥만 먹고 온 게 아니라 단백질도 빼고 왔는가, 데보라는 싱글벙글이고 멀쩡하던 모레노 눈동자에 다크서클이 연하게 내려와 있었다.
"아. 누구 응원하냐고."
두 사람한테도 너흰 누구 응원하느냐 물어보았다.
데보라나 모레노는 유럽인의 한 사람으로서 유럽에서 챔피언이 나오면 좋겠다며 러시아의 카트린느 선수를 언급했다.
"미국 러시아 일본 삼파전이구나."
"실제로도 세 사람 가운데 금은동이 나올 거야."
"마하야 너는?"
"저요? 저는."
나야 당연히 사쿠라 아야지.
랭킹 9위의 일본 선수.
선두 그룹에 소속은 되어 있으나, 우승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녀의 이름에 스테판이 말했다.
"사쿠라 아야. 잘하긴 하는데 조금 아쉬운 선수지."
"왜? 너도 알어?"
"알지 그럼."
사쿠라 아야와 하야카와 카에데는 일본을 떠나 피겨계에 유명한 라이벌이란다.
"어. 그래?"
"국제대회는 비슷비슷한 실력인데, 아무래도 카에데가 더 우위라는 평가가 있지."
"그것도 그건데. 카에데는 후원하는 기업이 많지. 일본 피겨계의 공주야."
"오 그래요?"
감독님은 메달도 메달인데 시합 운영에 관심이 많아 보이셨다.
"운영요?"
"이번 올림픽은 무엇보다 공정한 경기가 될 예정이라."
공정한 경기는 또 무슨 의미인가 여쭤보니, 4년 전 솔트레이크 때 엄청난 스캔들이 벌어졌었단다.
"스캔들? 뭐?"
"러시아랑 프랑스가."
"쿠! 지금 미스터 한 코치랑 무슨 얘기 하는 거야?"
감독님과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었는데, 스캔들 솔트레이크 두 단어만 가지고도 데보라가 대화내용을 유추하고 있다.
모레노도 뭐라뭐라 독일어로 스테판과 이야기를 나눈다.
얘들까지 떠들 정도면 엄청 핫했던 이야기 같다.
"감독님.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래요?"
"심판들이 딜을 했어."
"...올림픽에 그런 게 돼요?"
"그러니까 스캔들이지. 정확하게 드러난 건 없는데"
러시아와 프랑스가 각 각 피겨 페어와 아이스 댄스에서 서로가 금메달을 따갈 수 있게 점수를 밀어주기로 했단다.
그런 내용이 시합 중간에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실제로 결과가 껄끄럽게 드러나자
"항의가 인정되고, 피겨 페어 금메달은 두 나라가 같이 받았지."
"단상에 넷이 올라갔다고요?"
"음."
"뭐야 그런 게 다 있어. 메달이 뭐라고..."
"아름다움을 스포츠로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인간의 판단은 늘 오해의 여지를 불러일으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갔지. 아직도 조사중인 내용이 있을 거야."
어이고 존나 빠르게 뛰면 우승하는 우리는 양반이구만.
피겨는 알면 알수록 아름다움 그 이상의 추악함이 있구나.
로비도 엄청나고 섹스 스캔들도 있고. 어떤 선수는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동료 선수 무릎에 쇠파이프로 내리치는 일도 있었단다.
"허허허허..."
사쿠라는 이런 데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구나...
역시, 사람은 조용해 보여도 속에 불같은 뜨거움을 담고 있더라니.
"나온다."
그런 스캔들과 드러나지 않는 야욕들을 감추고. 밝게 웃는 화려한 인형같은 선수들이 등장했다.
상위권 선수들의 시합이 시작된다.
사쿠라 화이팅!
간바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