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라. (3) >
나는 늘 올림픽의 꽃은 리듬체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기회만 된다면 꼭 한번 만나고 싶은 스포츠 선수도 리듬체조를 꿈꿔왔었다.
피겨는 별로 나와는 관계가 없을 종목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다른 누구보다 피겨 선수를 응원하고 있었다.
"스테판. 저런 점프도 이름이 있어?"
"트리플 러츠."
"아까 그거는?"
"그건 트리플 토룹."
"어쩐지 자세가 다르더라니. 기술 하나하나 이름이 있구나."
사쿠라를 만날 걸 대비해서 스테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여리여리 인형 같은 선수들이 휘리릭 점프 뛰고 한 발로 곡예를 펼치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피겨 스케이팅도 알고 보면 엄청 세분되어있고 각각의 기술마다 난도와 점수체계가 달랐다.
"감점이다. 맞지?"
"그렇지. 자세가 흔들렸으니까."
우리는 1층 동쪽 스탠드에 위치하고 있어 선수들의 얼굴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는데, 선수들은 대다수가 지방이 없는 삐쩍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애들은 볼이 핼쑥한게 아픈 게 아닐까 싶었다.
"저런 몸에도 근육이 붙는구나..."
"음? 무슨 소리야?"
"그냥 다들 엄청들 노력했구나 싶어서."
오늘 데보라와 사쿠라 두 사람의 몸을 보았다.
데보라는 강한 퍼포먼스를 보여야 하는 스키 선수답게 몸에 살집이 있었다.
반면 사쿠라는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몸이 가늘었다.
그런 깡마른 몸에도 근육이 붙어 있었어.
그렇게 몸을 만들기도 어려운데, 그런 몸을 가지고 올곧은 자세와 기술을 연마했다니...
존경스럽다. 부상이라도 입으면 회복이 더딜 건데, 선수들 하나하나 웃는 얼굴 이면에 지독한 근성을 가지고 있구나 싶어진다.
얼마나 많은 땀과 부상을 이겨냈을까?
사쿠라의 상처 투성이 다리가 마음이 쓰인다.
이따 만나면 더 사근사근 마사지 해줘야지.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넘어져? 원래 이래?"
"이정도는 아닌데... 아이스 상태가 별론가..."
"우리 스키 탈 때도 그러더니, 이 나라 조직위는 전 세계 사람들을 초대해놓고 일을 뭐 이따위로 하냐..."
"이탈리아 행정력 나쁜 건 유럽에서도 유명해."
아까는 하위권 선수들이라 그런가 했더니 상위권으로 와도 넘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넘어지는 것도 그냥 쿵이 아니라 점프 뛰다 발목이 돌아가거나 막 이런 식이다.
"어우... 그걸 일어나?"
"와. 이 친구 의지 강하네 이름이 뭐지?"
"그래도 한다고? 부상아냐?"
한 선수가 점프를 뛰다 착지하며 발목이 비틀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일어난다. 다시 웃는 얼굴로 빙판을 가로지르며 자신이 연습한 기술과 무대를 끝까지 마쳤다.
그녀의 경기가 끝나자, 관중석에선 큰 박수와 꽃다발 인형이 쏟아져 내렸다.
"대단하네. 솔직히 이미지가 여린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무릎이 깨져도 시합은 마칠 거야."
"왜?"
"올림픽이잖아."
올림픽이 지닌 무게. 올림픽이란 도전의 가치.
새삼 내가 어디서 메달을 얻었는지 관중석에 앉아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구나.
사쿠라도 좋은 결과 있으면 좋겠다.
감독님 말씀 들어보니까 카에데란 사람이랑 많이 비교되는 거 같던데.
"감독님."
"음?"
"일본은 선수 대우가 우리랑 좀 다르죠? 실력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고 그렇죠?"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다를 게 있겠냐."
선입견이라고 할 문제기도 하지만, 일본 사람 특성이 그렇단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민족들.
힘 있고 인기 있는 사람에겐 굽신거리지만, 아닌 사람들에겐 매몰찬 나라가 일본이란다.
역시, 사쿠라의 운동환경도 그렇게 밝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흐음."
"그런 건 왜 물어?"
"아니요. 그냥요."
아까 짧게 대화를 나눌 때 사쿠라는 이곳을 은퇴무대로 여기고 있었다.
정말 후회없는 경기가 되기를. 다치지 말기를...
넘어지는 선수는 그 뒤로도 계속 나왔다.
아니 이쯤이면 넘어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스테판이 잘 아는 유명하단 선수들도 다들 한두 번씩 엉덩방아를 찍거나 바닥에 손을 짚고 있었다.
"이거 위로 가도 변수가 클 거 같은데..."
"그래?"
"어. 방금 나온 이탈리아 선수도 잘하는 앤데. 모레노 넌 알지?"
"알지. 쟤 나름 유명해. 인터뷰 봤어."
"주최국 참가 선수라 동메달은 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저 친구가 지금 이 순위면..."
피겨는 선수 컨디션 외 다른 많은 것들이 작용하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이 멘탈리티였다.
멘탈이야 모든 경기에서 중요하지만, 여긴 혼자 경기를 펼치다 보니 상대방 없이 모든 경기의 책임을 스스로 지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확실히, 내 경험에 비춰봐도, 육상은 경쟁이 있지만, 스키는 경쟁이라기보단 혼자 시합을 마쳐야 하는 게 어렵긴 했었지.
"뭔가 피겨는 보면 볼수록 이겼을 때 얻어가는 게 많은 경기네."
"그러니까 선수들이 계속해서 도전을 하는 거겠지."
성공을 향한 길목에 발을 들인 이상 그만둘 수가 없는 거구나.
모두들 파이팅. 응원이나 해주자.
사쿠라도 곧 나올 거야. 방금 화면에 얼굴이 비쳤다.
랭크별로 조 편성이 나뉜다곤 해도, 막상 상위권 조에 와선 무작위 추첨으로 무대 순서가 나뉘는데, 사쿠라는 카에데란 일본 선수 뒤. 스테판이 말하는 우승 후보 알레시아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그 와중에 또 다른 우승 후보 러시아의 카트린느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호응이 다르네..."
"다르지. 이제부턴 진짜 메달 싸움이니까."
러시아 응원단이 들썩거리니 반대급부로 미국 응원석이 반발한다.
우리 주변에 앉은 성조기를 든 중년의 부부도 자리에서 일어나 알레시아 홀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하하하~"
"알레시아!! 헤이!! 알레시아!!!"
스테판도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를 외친다.
역시 올림픽은 올림픽이구나.
주변을 아련하게 둘러보고 있으니 감독님이 물어보신다.
"왜 그러냐 마하야?"
"아니요 그냥 재밌어서요."
"분위기가 뜨겁네."
"그러니까요."
친구들도 지적하지만, 난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마음이 바뀌는 우유부단한 놈인지라. 이런 관중들의 함성을 들으면 역시 트랙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번에 스키에서 메달을 땄다곤 하지만,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이나 헬싱키 세계 선수권에서 들었던 뜨거운 관중들의 함성을 잊을 수가 없으니까.
에이 아무튼, 오늘은 관객으로 왔어.
내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돼.
지금은 경기 보자.
머리를 비우기 위해 빠르게 관심을 경기장으로 돌렸다.
마침 카트린느의 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러시아 선수답게 아주 힘찬 클래식 음악을 들고 나왔는데.
어이구야... 여기도 넘어지네. 아주 첫 점프부터 대차게 넘어지는구나.
"와... 부담 장난 아닌가 보다 어떻게 시작부터..."
"너가 대단한 거야 이 녀석아."
"제가 뭐요?"
감독님이 조용히 어깨를 끌어당기며 말씀하셨다.
"메달이 가진 프레셔가 그만큰 무겁다는 뜻이니까."
"흠."
"여기 선수들이 절대 못 하는 게 아니야. 혹시나 비난하거나 실망하는 말은 하지마라. 알겠지?"
"네."
메달. 메달. 그리고 또 메달...
스포츠는 메달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걸까...?
와 진짜 모르겠네. 운동은 운동으로 가치가 있다고 믿는 내가 잘못 된 건가??
러시아 카트린느는 초반의 실수가 있지만, 남은 경기에서 깔끔하게 준비한 것을 선보여 66.80. 일단 1위로 시합을 마쳤다.
하지만 그녀의 뒤로 하야카와 카에데와 사쿠라 아야 그리고 피겨 세계 선수권 챔피언인 알리시아 홀트가 남아있었다.
"얘구나. 하야카와가."
"어떠냐? 잘 할 거 같애?"
"글쎄요. 피겨를 제대로 보는 게 오늘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요."
강한 사람이긴 하다.
방금 전 카트린느나 여기 카에데나 기운이 달라. 알레시아 홀트도 마찬가지겠지.
내공은 읽히지만, 내가 선수들의 실력을 평가할 순 없다.
다만, 이 카에데란 선수를 보고 있자니. 난 여자들을 볼 때 전해지는 느낌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편인데.
"흠."
하야카와 카에데는 예쁜 꽃이지만 향기가 없는 그런 인상을 준다.
이건 딱히 내가 사쿠라랑 깊은 관계가 됐다고 일부러 박한 평가를 주거나 하는 건 아니다.
하야카와의 경기가 시작됐다.
실력 있는 사람이 우승하는 것도 좋지만, 개인적으론 모든 스포츠에서 극적인 장면이 펼쳐지길 원한다. 나름 언더독의 반란이라는 거지.
카에데는 일본 피겨계의 공주라니까, 얘보단. 사쿠라가 좀 잘 되는 것이.
아니어도 나는 그녀를 응원할 테지만.
얼굴도 내 눈에는 사쿠라가 더 예쁜 거 같기도 하고.
으아아. 다치지만 말고 넘어져. 제발 점수를 깎으란 말이야.
어이고? 기도가 통했나?
카에데가 점프에서 착지 동작에 들어갈 때 자세가 깔끔하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내색할 수 없게 주먹을 불끈 쥐며 손을 떨었다.
"어려운 기술을 쓰네."
"그래? 그런 거야?"
"응. 이길 거란 각오를 담은 연기를 펼치고 있어."
스테판은 왜 육상을 했을까? 이렇게 피겨를 잘 알면 그냥 피겨스케이팅을 하지. 눈도 많은 나라 살면서.
하야카와 카에데는 카트린느와 다르게 실수에서 오는 멘탈리티를 회복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연기에서도 몇 차례 실수를 거듭해서 66.10.
"그렇게 실수를 했는데, 점수가 저렇게 나온다고?"
"말했잖아 마하야. 공정성이 어려운 경기라고."
로비가 있다더니, 대놓고 일본기업의 후원을 받는 카에데에겐 좀 후한 점수인 것 같다.
아무튼, 앞선 카트린느에 이어 카에데가 2위가 됐다.
이제 남은 건 사쿠라와 알레시아 홀트 뿐.
"후우. 허우우."
"야 이놈아 뭐 숨까지 몰아쉬냐?"
"글쎄요. 그냥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사쿠라 아야의 차례다.
그녀가 경기장에 나와 슥 빙판을 훑어보고 다녔다.
일본 선수에 이어 일본 선수의 등장인데 일본 관객들의 반응이 썰렁하다.
"어우 박수 좀 쳐주지. 사람이 나왔는데."
그래서 혼자 막 큰 박수를 쳐주고 있으니, 주변에서 한번씩들 돌아본다.
왜요? 뭐요? 나 아까 저 경기복 내가 벗겼어. 남자가 의리가 있지.
"음?"
그런데 혼자 큰 박수를 치고 있어 그런가, 워밍업을 돌던 사쿠라가 우리 앞을 지나가며 씩 미소를 지었다.
와. 뭐지? 지금 나 보고 지나간 건가? 큰 소리로 파이팅이라고 외쳐줄까?
그때 데보라가 툭 치면서 인상을 구긴다.
"뭐? 왜?"
"으이구..."
데보라의 짧은 반응이나, 내가 한 격렬한 응원 속에. 스테판이나 감독님까지 눈치를 채고 말았다.
"마하. 너 설마..."
"어...?"
"야. 마하야... 너 설마... 저 친구랑?"
"아 시합봐요! 스테판. 룩 앳 더 아이스 필드!"
사쿠라 잘해. 잘해야 돼.
몸이 풀린 사쿠라 아야가 경기장 중앙에 멈춰 자세를 갖춘다.
그녀를 처음 볼 때 느꼈던 차가운 느낌 그대로 정적인 포즈와 표정이었다.
"음?"
어라? 이건 또 뭐지?
종목을 막론하고 꾸준히 단련하고 한계를 넘어선 선수는 내공이 전해주는 특유의 그 번쩍번쩍한 빛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데, 가만히 멈춰있는 사쿠라의 몸에서 빛이 사라진다.
내가 열심히 마사지 해줬는데. 기묘하게 흐르던 기운도 안정세를 갖추는 걸 봤는데.
섹스까지 해서 그녀 나름 음양의 조화도 잘 어우러졌을 건데 근데 왜 이러지?
"어. 어어..."
"마하야 진정해. 둘이 사귀기라도 했냐?"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마하. 진짜로? 진짜? 니가 만났다는 사람이 그녀야??"
"아 다들 좀 조용히 해 봐."
만에 하나 사쿠라의 몸에 힘이 빠지는 게 내 탓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약한 건 아니다. 하위 랭크의 그런 힘없는 모습도 아닌 이건 대체 뭐지?
커다란 스피커에 음악이 흐르며 사쿠라의 몸이 스윽~ 빙판 위에 미끄러진다.
아~ 움직이니까 알겠다.
예전에 형한테 한번 들었던 적이 있어.
이게 자연체구나. 초절정의 고수가 오를 수 있는 경지.
힘을 숨긴다고 힘을 못 쓰는 게 아니다.
내공을 의식하지 않고, 강물에 낙옆이 떠내려가듯 모든 것에 완전한 평화와 자유로움을 얻은 상태.
사쿠라 아야는 자연체의 경지에 올라 시합을 펼치고 있었다.
피겨 싱글 쇼트 프로그램은 짧은 시간 안에 정해진 동작을 연기해야 했었다.
2분50초 안으로 8가지 동작을 펼쳐야 하는데, 점프 셋 스핀 셋 스파이럴 시퀀스와 스텝 시퀀스가 필수로 들어간다.
전체적인 프로그램은 선수의 개성과 음악이 어우러져 하나의 공연이 된다.
실제로 피겨 메달리스트들은 갈라쇼라는 마지막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사쿠라 아야는 쇼트 프로그램부터 갈라쇼를 펼치고 있었다.
고혹적인 음악과 어우러지는 그녀의 표정과 가녀린 손끝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쿠라는 아픈 사람같이 흐느적거리다가 힘 있는 점프를 뛰고, 다시 위태롭게 경기장을 가로지르는 스파이럴을 보여주다가 발을 바꿔 또 멋진 점프를 보여주었다.
"와..."
"Wow... beautiful"
"Che bella... fantastico..."
"きれい."
아름답다. 환상적이다.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피겨 팬들이 각나라의 언어로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표현해주고 있다.
내가 봐도 사쿠라 아야는 그동안 나온 사람들과 차원이 달랐다.
오늘밤 그녀가 정말 올까...?
확실한 건 내일이 지나면 아마 서로 만나기 정말 어려워 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