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라. (4) >
"말이 돼? 사쿠라가 젤 잘했는데 왜 3위야?"
"누가 젤 잘해. 알레시아도 클린으로 끝냈어."
쇼트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오는 길.
결과에 따라 스테판과 열띤 토론을 벌리고 있었다.
클린으로 경기를 마친 알레시아 홀트가 1위.
실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기술 점수가 높았던 러시아 카트린느가 2위.
마지막으로 내가 응원하는 사쿠라 아야가 3위를 기록했다.
사쿠라의 라이벌 하야카와 카에데도 4위로 일단은 메달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과가 재밌게 나왔네."
"이대로만 가면 사쿠라가 동메달인데."
"그러게. 그녀도 잘했어. 훌륭한 퍼포먼스였지."
"정말 다르긴 하더라. 사쿠라란 그 선수 메달 따면 이번 동계 올림픽 일본 최초 메달일 걸?"
"네? 감독님. 일본 메달 없어요?"
"없어. 하나도 못 땄어."
"하하하! 아. 이렇게 크게 웃을 일은 아닌가...?"
"어이구 이놈아..."
근데, 감독님이나 스테판이나 어디까지 같이 갈 생각인 거지?
"감독님 우리 어디가요?"
"니네 호텔."
"아... 어. 네."
"그 전에 뭐 좀 먹을까? 그래도 여기는 도심이라고 문 연 식당들이 조금 보이는데."
경기관람을 마치고 데보라 커플은 알파인스키장과 선수촌 숙소가 있는 세스트리에네로 돌아갔는데, 감독님과 스테판이 졸졸졸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알어. 내가 오라고 했어. 스테판도 감독님도 나 호텔방 잡아놨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라고 하긴 했는데.
근데 그때는 사쿠라 아야라는 변수가 없었잖아...
"왜? 너 뭐 할 거 있어?"
"아니요. 없는데요."
"표정이 우리가 같이 있는 걸 싫어하는 것 같은데?"
"에이 무슨 소리세요... 제가 감독님을 왜 싫어한다고. 스테판도 오랜만에 봐서 얼마나 반가운데."
"너 설마 누구랑 약속 잡았냐?"
"감독님. 맥도날드 어딨는지 아세요? 아니면 스테판 옆 나라 사니까 우리 모르는 이탈리아 음식 추천해달라고 할까요?"
아 진짜 오면 어떡하지...? 이제라도 두 사람 머물 방을 하나 예약하는게 낫지 않을까?
"진짜 자고 가실거죠?"
"뭔데 이놈아. 그냥 빨리 말을 해."
"...아니요. 오랜만에 나오셨는데. 편하게 호텔 방 쓰고 싶지 않으시나 해서."
"돈 없다."
"제가 예약해드릴게요."
"아서라. 아무렴 제자한테 그런 거 받겠냐."
"감독님! 아 서운하게... 우리 사이에 그런 거 따지십니까?"
내내 한국말로 떠들고 있으니, 스테판이 왜 싸우냐고 물어본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가자... 낫씽. 돈 워리 스테판."
"흠."
미치겠네... 사랑이냐 우정이냐...
살다보니 내가 이런 난관에 처할 줄이야...
아무튼, 사쿠라가 반드시 온다는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내가 초대한 친구랑 감독님인데 어떻게 내 입장만 챙겨. 어떻게든 되겠지...
경기장 근처 레스토랑을 찾아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올동안 감독님과 스테판은 아까 관중석에서 나누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이들 가르치는 건 어디서 하는 거야?"
"그냥 마을에 있는 시민 스포츠 센터요."
"코치를 할 생각을 다 했어."
"플레이어가 은퇴하면 코치가 되는 건 당연하잖아요."
감독님은 오스트리아에서 어떻게 육상을 할 생각을 했느냐 물으셨다.
나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스테판은 어릴 때 호주에서 공부를 했었다.
"하하! 오스트리아라고 하면 다들 오스트레일이라를 언급하니까. 재미삼아 갔는데 그때 육상을 배웠죠."
"재미난 이유로 유학을 결정했네."
"더 재미난 이유로 스포츠 선수가 된 사람도 있잖아요."
"누구?"
스테판이 어깨를 툭 치며 웃는다.
감독님도 끄덕끄덕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리셨다.
"어이구 이놈아... 국제적으로 망신을..."
"아니. 그냥... 얘네 집 있을 때 이야기 하다보니까. 마이 브라덜. 플리즈 셧업."
"HAHAHA!!!"
그때는 언어가 딸려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이야기를 확실히 전해준다.
난 그냥 인기를 얻고 싶은 게 아니라 사랑을 찾아 다니는 중이다.
나를 단지 여자에 미친 놈으로 보지마라.
"파인드 러브는 무슨... 되도 않는 이야기를..."
"감독님... 같은 한국사람끼리 이러시깁니까?"
아무튼, 내 이야기를 떠나서 다시 주제로 돌아갔다.
스테판은 은퇴 이후에 닥쳐오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일단 뭐라도 시작을 해봤단다. 그것이 코치였고 생각보단 운동에 대한 그리움을 많이 희석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테네에서 이야기가 있어서, 마을 부모들이 저한테 지도를 맡겼죠."
"다행이라니. 올림픽 결승무대는 아무나 가나."
"스테판. 보통 유럽에선 은퇴하면 뭐해?"
"딱히 뭐 없어."
"...유럽인데?"
"마하. 유럽은 오리엔트가 생각하는만큼 이상적인 국가가 아니야."
그나마 호주에서 처음 스포츠를 접했던 스테판이기에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단다.
감독님도 "왜? 거긴 무슨 시스템이 있는데?" 라고 관심있게 물어보셨다.
"호주나 미국. 이런 데선, 처음부터 스포츠 선수를 육성할 때 은퇴 이후의 삶을 설계하도록 교육해줘요."
"좋은 시스템이다. 그럼 선수들도 부담이 적겠지."
"저도 장단점은 있다고 봐요."
"이것 봐. 역시 유럽이네. 감독님 우린 그런 거 없죠?"
"없지 뭐. 그렇다고 아주 없다고 하기도 어렵지만... 체계화되어있다고 보긴 어렵지."
하지만, 막상 그런 시스템에서 운동을 시작한 스테판도 기대한 것과 실제 맞이하는 은퇴 이후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단다.
"작년 세계선수권도 봤어요. 늘 마하 소식 듣는데 부러움이 있었죠."
"메달이 있으면 뭔가 달랐겠구나 싶었나?"
"그렇죠."
스테판은 자신이 해내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바라는 게 아니었다.
역으로 자신이 겪은 어려운 길을 학생들이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었다.
잘츠부르크 작은 마을의.
거기서도 더 마이너한 스포츠 센터에서 만난 인연이라 하더라도 내 제자들이니까.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하지 못한 스포츠 선수는 노력한 만큼의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질 않는다. 그게 제 결론이었어요."
감독님도 나도 이 친구가 겪은 현실에 대해선 다른 논평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경험이었으니까. 묵묵히 들어줄 뿐이다.
"그럼 수익은 어떻게 되는 거야?"
"거의 봉사활동이고. 제 생계는 그냥 가업을 이어서 벌고 있어요."
"그렇구나."
"어? 감독님 음식 나와요."
"그래. 먹자. 여긴 내가 살게."
얇디 얇은 이탈리안 피자와 막상 기대에 못 미치는 스파게티가 주르륵 깔렸다.
포크를 들어 면발을 둘둘 말고 있으니 감독님이 와인을 따라주시며 말씀하셨다.
"MAHA."
"..."
"WHY?"
갑자기 나한테 영어를 하시길래, 어색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스테판도 있는데 서로 대화하려면 그렇게 하는 게 예의라며 말씀하신다.
그런 감독님의 배려에 스테판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감사함을 표시했다.
"나랑 똑같네."
"미스터 한은 왜요?"
"나도 내가 겪은 아픈 이야기를 이놈한테 되물림 되지 않게끔 많은 신경을 썼었거든."
감독님이 당신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난 선수로선 실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나라는 놈을 만나게 되었다.
나를 알게 되면서 다시 육상계로 돌아왔지만, 변하지 않은 현실에 많은 실망을 안고 있었다.
"그래도 잘 되셨잖아요."
"잘 됐지. 당사자를 앞에 놓고 말하긴 쑥스럽지만, 이놈덕에 꿈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기분이야."
"크~ 듣기 좋네요. 더 칭찬해 주시죠. 영어로 들으니까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은데."
"물론, 한 해 한 해 갈수록 마하가 예전과 다르게 건방져지는 건 속이 쓰리지만..."
"하하! 마하. 마스터에게 리스펙트를 가지라고."
감독님은 그렇게 생각하신단다.
코치는 코치고 선수는 선수다. 너무 한 데 묶어서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은퇴한 후의 삶이라 해도 너무 부담 가질 거 없다.
"그걸 알면서도 실행하기가 어려워요..."
"목표가 흐려지지?"
"네."
선수는 목표가 있다. 우승이든 기록 갱신이든 나름의 결승점이 있는 것이다.
목적을 보고 달려가는 삶은 몸은 고될지언정 살아가는데 크게 고민하진 않는다.
반면,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고민을 가진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 미래를 어찌 설계할 것인가.
어려서부터 차곡차곡 만들어지는 일상을 20대 중후반이 되면 그래도 나름 쳬계가 갖춰지는데.
스포츠 선수는 이 과정을 남들 쳬계를 잡는 그 나이 때 새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거의 대다수의 모든 스포츠 선수가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된단다.
"미스터 한. 저는 어떤 목표를 잡아야 할까요?"
"행복은 어때?"
"...어려운 대답이네요."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은데. 시간 괜찮아?"
"괜찮습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좋아. 남은 건 내 영어실력이로군."
"하하! 말씀 잘 하시는데요."
한편으론 오늘 밤 사쿠라를 만나지 않고 셋이 진지한 이야기를 밤새도록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어...?"
"하하하... 마하... 플리즈..."
"어이고 이 자식아..."
호텔이 경기장 인근에 있었다.
레스토랑을 나와 셋이서 와인 두 병 사들고 바로 호텔로 걸어왔는데. 로비 중앙에 겨울 패딩을 푹 눌러 쓴 사쿠라 아야가 앉아 있었다.
그녀도 우리를 발견하고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흠. 크흠."
"하하! 마하. 나 인사 해도 돼?"
"후우우... 아 진짜 왜 내가 다 얼굴이 뜨겁냐..."
"아 감독님 왜 자꾸 한숨이세요..."
"일단 스테판 말대로 서로 인사부터 나누자."
사쿠라도 굉장히 뻘쭘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건넸다.
한 사람씩 소개해줬다.
"어. 음. 여기는 다들 알다시피 재패니스 피겨 스케이터."
"경기 잘 봤어요. 미스 사쿠라."
"하. 하이... 나이스 투 미츄."
"스테판. 나랑 같이 아테네에서 1500m 게임 한 플레이어."
설명을 해주자 사쿠라도 '아~ 그떄 그 사람이구나!' 하는 식으로 밝은 반응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분은 마이 코치."
"오늘 정말 잘 봤습니다. 훌륭한 경기였어요."
"아아... 네. 고맙습니다."
감독님은 같은 동양인이라 더 예의바르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었다.
감독님이 나를 보며 한국말로 물어보셨다.
"개념 상 우리가 비켜줘야겠지?"
"아니요. 그냥 다 같이 들어가서 이야기 나눠도."
"어이구 이 썩을놈아... 헤이 스테판."
"예스. 미스터 한."
"지금 시간이면 세스트리에네로 갈 선수단 버스가 있을 건데."
"좋죠. 같이 하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호텔 잡으라고. 내가 사겠다는데도, 감독님이나 스테판이나 내일 보자며 웃으며 돌아선다.
"어디가서 내 제자라고 하지마 망할놈의 자식아."
"굿 나잇 마하. 앤 미스 아야."
두 사람이 인사를 남기고 호텔을 나가자 사쿠라가 웃어보였다.
"아까 같이 있던 분들이죠?"
"네. 맞아요."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 설마 진짜 올 줄 몰랐어서..."
"쿠 상이 오라면서요?"
"그러긴 했는데. 오늘 성적이 좋아서 못 나올 줄 알았죠."
실제로 경기가 끝나고 코치와 주변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해서 달려드는데. 그 모습이 또 정 떨어져서 시합 마치고 바로 이쪽으로 왔단다.
"라는 건?"
사쿠라 옆에 작은 운동복 가방이 있었다.
"...선수촌 안 갔어요?"
"네. 바로 왔어요."
"..."
좋아 그럼. 일단 방으로 가자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향하며 물었다.
"저녁은요?"
"배고프긴 한데. 괜찮아요."
"지금 나가서 먹긴 번거로울테고. 룸서비스 시켜요 우리."
"으음! 괜찮아요!!"
일본은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 아니었던가?
뭔가 사쿠라의 반응이 용돈 떨어져 돈 쓰기 싫어하는 혜정이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제가 살 게요."
"아니 난 진짜 괜찮은데..."
"우리 지금 데이트 중이니까. 걱정하지말고."
방으로 들어와 불을 올렸다.
화려한 구조와 천장을 황금빛으로 수놓은 장식. 럭셔리한 이탈리안 퍼니쳐가 어우러진 공간이다.
창밖으론 빙상경기장과 토리노 도심. 그리고 이 도시를 상징하는 높다란 탑이 보였다.
사쿠라는 가방을 툭 내려두고 감탄한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와... 기레이."
"분위기 좋죠?"
"...쿠 상. 일부러 나 때문에 이런 방을 예약한 건가요?"
"하하! 그렇다고 하죠."
딱히 여자를 끌어들이려고 비싼 방을 예약한 건 아니다.
내가 호텔이나 숙소를 고를 때 중요하게 여기는 두 가지가 있는데, 편안한 숙면을 위한 안락한 침대와 지친 몸을 완전히 담가 피로를 풀어줄 커다란 욕조였다.
"올림픽 있어서, 비즈니스 호텔은 빈방도 없고. 어쨌든 보안상의 문제도 있으니까요."
"우와..."
"무엇보다 한번 와보는 이탈리안데. 에잇 까짓 거 좀 쓰자 했죠."
비싼 돈 들여 혼자 럭셔리하게 쉬려던 공간에 아리따운 일본 여인이 들어왔다.
와. 돈 잘 쓴 거 같다. 이게 바로 센스지.
"일단 씻어요. 경기 마치고 와서 피곤하잖아."
"쿠 상도 나갔다 왔잖아요."
"음?"
"같이 씻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