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07화 (207/401)

<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라. (7) >

알파인 스키 슈퍼대회전 결승전 아침.

김정준과 박상택이 선수촌 식당서 조식을 들고 있었다.

"잠은 잘 잤냐?"

"어..."

"상택아?"

"잘 잤어. 형은."

"뭐 마실 것 좀 갖다줄까...?"

"됐어."

대회 초반과 달리, 박상택의 긴장감이 사라졌다.

시합을 부담없이 즐기는 게 아닌, 모든 게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포기한 모습에 가까웠다.

앞선 회전과 대회전 두 시합서 필사의 노력을 했지만, 메달 진입권에 도달하지 못한 결과가 의욕을 꺾은 것이다.

"형. 마하는?"

"어제 대표님이랑 토리노 도심에 있다고 들었어."

"새끼. 존나 잘 나가네... 아 나도 밀라노 가서 쇼핑이나 하고싶다."

"상택아. 마하 신경 쓰지 말고."

"형. 마하. 생각해보면 진짜 대단한 놈 아니냐...?"

"..."

"어떻게 보면 그 새끼가 날 상대해준 게 고맙게 느껴져..."

대학 동기. 양민구의 말이 이해된다.

마하의 선배가 되주어라. 내가 뛰는 종목에 이런 선수가 있다는 건 질투할 게 아닌 축복에 가깝다.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 세계무대에 나오니 그 말을 실감한다.

구마하는 다르다.

세계의 벽은 높고. 클래스란 분명히 존재하는데 녀석은 그 위에서 노는 놈이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충분히 넘을 것 같던 벽.

이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벽을 넘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우승이란 역시 하는 놈들이 따로 있는 이야기고, 자신은 들러리만 서주는 기분이었다.

박상택은 그냥 남은 경기를 포기할까 싶은 좌절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어차피 못 이길 거. 뭐하러 나가 부딪혀 깨진단 말인가.

"상택아. 너도 잘 했어."

"됐어."

"마지막까지 힘내서... 어? 마하야."

구마하란 소리에 박상택도 반가운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인물이 훤칠한 녀석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 두 사람의 곁에 자리를 잡는다.

"이 새끼. 너 어디서 뭐하다 이제 나타나냐?"

"뭐. 왜? 나 할 거 있어?"

"미친놈아. 너 지금 대회 이틀 날 방 나가서 폐막 이틀 앞두고 돌아왔어."

"옆에 있어봐야 형 수발이나 들 거. 편하게 쉬는 게 낫지."

"아주 그냥 금메달 땄다고..."

김정준도 구마하를 보며 웃어보인다.

"그래서 푹 쉬었냐?"

"네."

"너 인마. 형 덴마크 감독님한테 항의 들은 건 알어?"

"하하! 죄송해요..."

"어이고 이놈아..."

구마하가 박상택을 슥 돌아보며 말했다.

"형은 좀 어때?"

"누구세요? 왜 친한척이세요? 죽여버릴라."

"내가 형 옆에 있으면 부담될 거 같았어. 그래서 나갔던 거야. 나라고 떠돌이 생활 하고 싶었나."

"지랄한다. 정준이 형한테 다 말해?"

"나는 뭐 할 말 없는 줄 알어."

"하하! 이 새끼가?"

김정준은 동생들의 관계에 나서지 않는다. 웃으며 자리를 비켜줄 뿐이다.

"상택이 늦지않게 나오고. 마하는 또 나갈거냐?"

"아니요. 이제 폐막때까지 팀이랑 같이 있을래요."

"그래. 상택아. 이따 보자."

"어."

김정준이 사라지자 구마하와 박상택의 대화도 리미트를 벗어던진다.

"어디있었냐?"

"그냥 여기저기."

"덴마크 여자 숙소에서 쫓겨나서 토리노 간 거야?"

"아냐. 쇼트트랙 응원하러 갔었어."

"그지랄하고 가서도 여자 만났지?"

"응."

"미친 새끼. 너 진짜... 하하!"

"형은? 수잔 또 봤어?"

"수잔은 됐고. 야 그 덴마크 걔 뭐야. 맨날 찾아오잖아."

"쟈스민이랑도 했어?"

"난 상대 안 해주지. 걘 그날도 나 쳐다도 안 봤어."

"하하하! 아 진짜."

"어이고. 미친놈아... 넌 니 이미진 생각 안 하냐?"

"뭐 어때. 올림픽인데."

누구보다 올림픽을 즐기는 구마하를 보자니, 박상택은 자신의 고민이 하찮아지는 기분이다.

"나는 됐고. 형은 좀 어때."

"몰라 씨발. 다 망했어."

"내가 응원해줄게. 오늘 꼭 이길 거야."

"꺼져 새끼야."

"크하하하!"

제멋대로 구는 놈이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마하는 자신의 성과를 달성하고 주어진 자유를 누렸을 뿐인데. 오히려 옆에 있어 주니 든든해지는 기분이다.

구마하도 박상택의 식판에 놓인 과일을 주워 먹으며 말했다.

"우걱우걱. 상택이 형."

"아. 니가 갖다 먹어."

"형 들어 봐."

"뭐?"

"오늘 컨디션은 좀 어때?"

"나쁘진 않어..."

"근데 왜 이렇게 의욕이 없어보여."

"...그러니까 망했다고."

"진짜 메달 따고 싶어?"

"이 새끼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

"화내지 말고 진짜로. 진심으로 말해 봐."

"..."

인기에 편승에 여자나 후리고 다니는 놈의 눈빛이 아니었다.

구마하는 더 없이 진지한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박상택에게도 구마하는 후배나 친한 동생이 아닌 한 사람의 메달리스트로 비춰진다.

"왜? 무슨 작전이라도 있어...?"

"코스가 어떻게 돼? 우리랑 비슷한가?"

활강과 회전종목을 합친 슈퍼대회전.

활강보다는 기문이 늘어나고 일반 회전 종목보다는 속도감이 있다.

박상택의 이야기를 듣는 구마하가 머릿속으로 경기코스를 그렸다.

"오케이. 그럼 내가 뛴 거랑 비슷하네."

"비슷하지. 그래서 대신 시합이라도 뛰어주게?"

"농담하지 말고. 형. 진짜 우승하고 싶어?"

"새끼야. 무슨 소리를 하려고."

"팁을 줄게. 응용은 형이 알아서 해."

"뭔 팁?"

구마하는 자신이 활강 때 느낀 코스의 이점을 설명했다.

"우리 땐 마지막 점프였는데, 지금은 2번 점프지? 착지하면서 브레이크 잡지 마."

"미쳤냐!? 거기 바로 커브 들어간다고!?"

"알어. 근데 경사가 코너를 따라 돌잖아."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난 그냥 브레이크를 못 잡았던 건데. 거기서 가속도 확 붙었어. 승패는 그 지점에서 갈린 게 아닐까 싶어."

"미친놈아 그게 무슨 팁이라고... 목숨 걸어라 이거 아냐."

"맞아. 이기고 싶으면 목숨 걸어야 돼."

"..."

"남은 건 그 수 밖에 없어."

올림픽 결승까지 오른 선수들의 실력은 백중지세를 이룬다.

하물며 상위 10위 랭크는 초 단위로 순위를 따지고 메달은 0.00초로 결정된다.

실력이 아니다. 담력이다.

누가 얼마나 더 위험에 다다르느냐에 메달이 갈리는 것이다.

박상택도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튀어 나가면...?"

"말했잖아. 경사가 코너를 따라 파여 있었다고. 속도 안 줄여도 그대로 코스로 몸이 빨려 들어갔었다니까?"

"그게 니 힘이니까 됐지. 난 그만한 근력이 없는데..."

"이기고 싶다며."

"..."

"도전은 해봐야 될 거 아냐. 경기 영상 보니까 이미 노르웨이 애들은 예선 때 각 보더만."

"아 씨발새끼. 간만에 나타나서 존나 스팀 받게 만드네..."

거친 욕을 뱉어내지만, 이 친구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박상택이었다.

이미 북유럽이나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같은 스키 강국들은 예선부터 2번 코스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남은 시합은 없다. 더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정말로 이기고 싶으면 이제 목숨을 거는 수 밖에...

구마하가 다시한번 그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인다.

"믿어 봐. 브레이크 잡는다고 밸런스 틀어지는 것보다 안전 해. 너무 무모하니까 다들 시도를 못 할 뿐이지."

"닥쳐 봐 좀..."

"마지막 점프 코스만 잡으면 결승점까지 속도가 붙을 거야. 남은 코스는 형 기술로 잘 처리하면 되잖아."

"아 닥치라고."

"상택이 형. 우리 같이 메달 걸고 돌아가자."

"후우..."

* * *

삑삑삑 삐-!

경기장. 선수들의 시합이 진행되고 있었다.

알파인스키 마지막 경기인만큼 관중석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구마하는 김정준과 함께 코치석 인근에서 전광판을 보고 있었다.

"마하야. 아까 상택이한테 뭐라고 했냐?"

"별말 안 했어요."

"근데 왜 내내 긴장감 없던 놈이 갑자기 신인 데뷔전 치르는 것 마냥 긴장해서 그래?"

"마지막 시합이라 그러겠죠."

이기는 것도 습관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 기술과 육체가 완성되어 있는 스포츠 선수들에게 승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퍼즐은 언제나 멘탈리티였다.

이겨보지 못한 선수는 자신의 실력을 의심한다.

내가 승리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아니냐. 구마하는 목숨을 걸어 승부를 결정지을 키워드를 알려주었다.

"상택이 형한테 이겨서 같이 메달 걸고 돌아가자고 했어요."

"잘했다."

"이길 거에요. 전 그렇게 믿어요."

"...꼭 그러면 좋겠다."

구마하는 박상택의 실력을 믿는다.

그는 경험도 테크닉도 있는 선수였다.

실제 내공도 다른 뛰어난 스키어들에 뒤처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해내지 못하고 있는 건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오네요."

"후우. 다치지만 마라."

박상택의 시합이 시작되었다.

테크니션답게 전반적으로 안정된 스타일의 시합운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

김정준은 물론이거니와 그를 지켜보는 구마하의 심장도 초조해진다.

답은 알려줬지만, 만약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박상택이 내 말을 믿었다 실수로 다치기라도 하면 그땐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상택이 형..."

"불안해 하지마라."

"...형?"

"니가 저놈한테 뭐라고 했든, 믿어. 믿는 거다. 상택이도 해낼 수 있어."

"..."

구마하는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었다.

지면 어쩌나? 만족할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혹여나 다치면 어떻게 되나...

그런 부담을 함께 나누며 응원을 건네는 것이 바로 진심이란 것이다.

정준이 형은. 한상률 감독님은 다들 이런 근심을 안고 내 시합을 지켜보고 있었구나.

나도 마음을 건네는 수 밖에 없다. 상택이 형은 할 수 있어.

대한민국 설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박상택이다.

구마하가 고개를 들어 코스를 지켜본다.

저 멀리 검은 점 하나가 산을 스쳐지나가고, 전광판에서도 박상택의 몸이 첫 번 째 점프를 뛰는 장면이 나왔다.

"역시 잘하네요."

"니가 와서 그런가, 오늘따라 과감하게 타는 거 같다."

"..."

* * *

박상택도 눈발을 휘날리며 기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마하를 만나서 그런가 꺼져가던 승부욕이 살아난 기분이다.

아니어도 이제 마지막 올림픽 경기니까, 후회없는 시간이 되기를.

이왕이면 이기자고! 잘못되어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박상택이 문제의 2번 점프로 돌입한다.

고민하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자존심은 안전보다 도전을 택했다.

그 결과.

"크으... 이 자식!"

"와. 상택이 형..."

그가 해냈다.

구마하가 일러준대로 마지막 점프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과감하게 코스로 진입.

기록을 크게 단축시켜 종합순위 2위로 올라섰다.

시합 운영방식은 피겨나 스키나 같다. 남은 선수들에 따라서 현재 순위가 엎치락뒤치락 바뀌는 식이다.

이제 남은 선수는 세 사람이었다.

셋 중 박상택보다 더 좋은 기량을 보이는 사람이 나온다면, 그의 메달을 향한 꿈은 여기서 마치는 것이고, 아니라면 그는 슈퍼대회전 경기의 은메달리스트가 된다.

김정준이 결승점을 통과한 박상택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시합을 마친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긴장감에 젖어 부들부들 손을 떨고 있었다.

"야. 너 괜찮아?"

"어? 어. 형..."

"왜 이래...?"

"아. 끝났구나..."

"야 인마 너 2위야 지금!!!"

"2위라고... 내가?"

"그래!!"

박상택은 김정준의 옆에서 싱글벙글 웃고있는 구마하를 보았다.

일전에 연세대에서 녀석과 싸웠던 날이 생각난다.

이 자식이 그랬지. 지가 놀면서 메달 땄냐고. 지같이 하라면 할 수 있을 거 같냐고.

이런 거구나... 올림픽에서 이긴다는 게...

"형. 내가 스키 들어줄게."

"야..."

"왜? 욕하지 마. 지금 카메라 우리 다 찍고있어."

"됐다... 새끼야."

이놈은 진짜 죽음을 놓고 싸우고 있었구나.

무식한 새끼... 그깟 우승이 뭐라고...

"야 이 씨발놈아."

"하하! 아 카메라 찍고 있다고."

"뒤지는 줄 알았어 새끼야..."

"잘했어."

"육상도 이러냐...?"

"뭐가?"

"육상도 이렇게 목숨 걸어야 하는 순간이 있냐?"

"...운동이 다 그렇지 뭐."

구마하가 경험한 우승이란 달콤한 열매가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극한의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따르는 보상이었다.

좋은 것이 2라면 안 좋은 것이 8이다.

늘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야하고, 승리 뒤의 사회적 시선과 부담도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다들 이기고 싶어 하는데.

"상택아!!! 야 이 새끼야!!"

"..."

"형! 하하하!!!"

마지막 선수까지 시합을 마치고 슈퍼대회전 결과가 나왔다.

박상택이 3위로 시합을 마친다. 동메달이 확정되었다.

김정준은 구마하가 금메달을 땄을 때보다 더 기뻐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박상택을 끌어안아줬다.

구마하도 옆에서 김정준 코치와 함께 박상택을 얼싸안고 큰 웃음을 지었다.

막상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된 박상택은 어벙한 상태다.

이렇게 해서 동메달이라면... 금은 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내가 메달을 땄다고?"

"그렇다니까!!"

목숨을 걸어서 얻은 결과에 박상택은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앞에 주어지는 태극기를 멍하니 바라볼 뿐.

시상식을 마친 박상택이 동료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정신이 어벙벙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목에는 진한 동색의 메달이 걸려있었다.

구마하도 손뼉을 쳐주며 축하를 건넸다.

"형. 축하해."

"..."

"왜? 안 좋아?"

"마하야. 넌 어떻게 스키에 도전했냐...?"

"하하. 아 왜 이래 진짜."

승리의 영광을 누린 사람들이 공통으로 깨닫는 것이 있으니. 한계점을 넘어서는 곳은 인간이 가서는 안 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구마하는 해내고 있는 것이다.

구마하는 현대인이면서도 무림인의 생태계를 알고 있었다.

그것이 아마 그를 계속된 도전의 길로 이끄는 것이 아닐까?

* * *

그날 밤. 사쿠라 아야도 피겨스케이팅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강력한 우승후보 알레시아 홀트가 전날 카트린느와 마찬가지로 두 번의 점프에서 실수를 해 감점을 받았고. 사쿠라는 시합을 망쳐도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에 부담없이 경기를 치뤄 클린한 연기를 보였다.

그녀의 가녀린 허리와 늘씬한 다리가 돋보였던 이나바우어는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동양인 최초 일본 최초 피겨 금메달이었다.

더욱이 일본으로선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얻은 단일 메달이기에 더더욱 그녀의 가치는 끝을 모르고 폭증하고 있었다.

"..."

일장기가 높이 오르고 기미가요가 장내를 가득 채운다.

사쿠라 아야는 고개를 내려 자꾸만 동쪽 스탠드를 살펴보았다.

어디서 보고 있을까...? 설마 안 왔나...?

울컥하는 감정은 메달이 주는 가치인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아쉬움인가.

그녀는 혼자만의 비밀을 눌러 담고 성대한 기자회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