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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210화 (210/401)

< 우물가의 토끼처럼 (3) >

작년 2005 세계육상선수권에선 이동민도 국가대표의 일원으로 태릉에서 훈련받고 생활했었다.

그것은 운동경력 처음으로 가장 안정되고 고양감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국가가 나의 꿈을 지원해준다는 것.

그렇기에 태극마크는 메달 여부를 떠나 선수들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전주시청 소속 이동민은 분명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지도한 이주영이나 한상률은 물론, 실업팀 감독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비교 대상이 너무 컸다.

실업팀 2년 차 이동민에게 주변은 구마하 정도는 아니어도 어느정도 주목할만한 성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선수는 압박을 받아왔다.

더군다나 그는 전년도 세계선수권을 대표팀 선발전 없이 차출되어 다녀왔다.

구마하가 없으면 자신도 없다.

그것이 이동민의 생각이었다.

3월. 신학기와 더불어 봄기운이 새롭게 피어나는 시간. 한상률은 길일을 맞이해 장가를 갔다.

"정석아!"

"아 씨발. 일찍일찍 좀 나오라니까..."

"하하! 미안 미안. 태윤이는?"

"몰라. 병신새끼 어제 밴드부 신입생 환영회 있었다고 오늘 새벽에 문자왔어."

"뻗었네. 그냥 우리끼리 가자."

"야 잠깐만. 동민이도 온다고 했었는데."

"동민이? 마하 친구? 너 걔랑 연락해?"

"나랑 친해."

"오 그래?"

"동민이는 니들과 다르게 가게에서 돈 주고 밥 먹거든."

"아 미친 새끼. 또 지랄이네..."

두 사람은 예식이 열리는 서울 종로의 호텔로 향했다.

5성 호텔의 풍경은 스물 한 살 청년들의 시각에도 위엄이 넘쳐 보였다.

"와... 정석아. 한상률이 이런 데서 결혼할 정도냐?"

"왜? 여기 비싸?"

"존나 비싸지. 연예인들이나 이런데서 결혼할 걸?"

"구마가 한상률 집안 존나 빵빵하다고 그러긴 했어."

"그래? 몰랐네."

"아무튼. 동민이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안 와."

전화를 걸어보았다. 지방에서 오고 있는데 도로가 막혀 예식에 늦을 것 같단다.

"그러니까 일찍 일찍 좀 다니라니까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진짜... 뭐 씨발! 어제 우리 집 와서 자도 됐잖아. 알았어. 야. 나 남수랑 먼저 들어가 있을거니까. 도착하면 전화해."

통화를 마치는 이정석을 보며 박남수가 묻는다.

"너 방금 동민이한테 욕했냐?"

"말했잖아. 우리 친하다고."

"허... 사교성 좋은 건 알아줘야 돼요."

두 사람은 북적거리는 인파를 지나쳐 예식이 열리는 연회장을 찾았다.

"오~ 화환이 무슨..."

"정석아. 마하 안 왔지?"

"안 왔어. 어제 전화하니까 네덜란드 있다나 뭐라나."

"휴가라더니 진짜 휴가를 보내는구나... 하여간 부러운 인생 살아요."

행사장에 있는 화환들을 보는데 하나같이 이름있는 스포츠 메이커나 기업에서 온 것들이 많았다.

집안을 통한 선물이라기 보다는 한구스포츠 대표에게 들어온 선물인 것 같았다.

"흠..."

"집안이 빵빵하다고...?"

"재단 있다고 그러던데. 우리 학교도 따지고 보면 한상률네 집안 학교고."

"근데 어째 여기 있는 꽃들은 다 마하가 광고하는 메이커들이냐?"

구마하의 힘이구나.

이만한 행사장이나 손님이나 한상률네 집안이 아니야. 우리가 아는 놈의 힘이다.

이정석과 박남수는 곁에 없는 친구의 커다란 존재감을 느낀다.

"선생님."

"어! 너희들 왔구나!!"

"와 선생님. 오늘 멋있으신데요?"

"하하! 그래. 와줘서 고맙다."

"사장님이, 아니. 마윤이 형도 오고 싶었는데 점심 장사가 있어서. 수정이 누나랑 같이 오려고 했는데, 누나도 갑자기 회사 일이 생겼다고."

"알어 알어. 형님이랑 연락 했어."

"선생님. 마하 이 자식 없어도 되는 거에요?"

"마하도 바쁘지. 지금 일하고 있어."

"네? 걔 휴가 간 거 아니었어요?"

한상률의 말에 의하면 구마하는 현재 유럽에서 인터뷰와 화보 및 광고촬영을 주로 돌고 있단다.

"우리한텐 휴가라고 했는데..."

"휴식 겸해서 돌고 있는 거니까."

"와 이 새낀 노는 게 일이야? 하하하..."

"정석아. 그만하고 우리도 들어가자."

"어. 그래. 선생님 축하드려요."

"그래. 들어가서 쉬고. 나중에 보자 얘들아."

"네!"

친척이 아닌 성인으로는 처음 접해보는 결혼식이었다.

특히 호텔 예식 같은 건 쉽게 접하기 어려운만큼 이정석과 박남수는 친하고 가까운 한상률이라 하더라도 조금 거리감을 느낀다.

"여기 멋있다. 이럴 거 은정이도 같이 오자고 할 걸."

"나도 선아가 자기도 가도 되냐고 물었는데..."

"아마도 마하 있었으면 선생님 못지않게 시끌시끌 했겠지?"

"어떻게 보면 생각해서 자리 피해준 걸 수도 있겠네."

박남수의 시선에 하객석 저 멀리 이주영 감독과 육상 연맹 관계자들의 모습이 비췄다.

"어? 정석아. 저분 그분 아니냐? 한주 고 선생님."

"어디? 맞네."

"가서 인사할까?"

"뭐하러 그래. 우리가 아는 분도 아닌데. 그냥 있어."

이정석은 동민이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날은 대충 속얘기나 들어주고 말았지만, 이렇게 사회적인 영향력을 접해보니 구마하의 친구로서 동민이가 느껴왔을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된다.

"대단하네..."

"뭐가?"

"그냥. 다. 구마나 선생님이나."

"뜬금 뭔 소리야?"

"있어 새끼야. 넌 요즘 은정이랑 어떻냐?"

"글쎄다. 뭐 그냥 우리야 조용조용하지."

"싸웠냐?"

"싸우긴 미친놈아. 그냥 1년 되니까 익숙해지는거지."

"그래? 난 선아 보면 좋은데."

"선아는 학교 잘 다녀?"

두런두런 여자친구들 이야기나 나누고 있는데, 헐레벌떡 이동민이 찾아왔다.

"어. 여기 있었네. 후욱 후우."

"왔어. 동민아."

"어. 남수. 오랜만이다."

"아 좀 일찍일찍 다니라니까... 새끼가 진짜..."

"하하하. 미안. 야 니네는 한 감독님 인사했냐?"

"했지. 돈 받는데 있잖아."

"안 계시던데."

"그래? 그럼 뭐 어디 사진이라도 찍으러 갔겠지."

"잠깐만. 나 축의금 좀 내고."

"축의금을 내?"

"너네 안 냈어?"

"사장님 것만 전해드렸지. 우리가 한상률이랑 친구도 아니고."

"하하. 야. 너네랑 나는 입장이 다르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입장이 다르다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이정석이다.

축의금을 내고 자리로 돌아온 이동민에게 박남수가 물었다.

"잘 지냈지?"

"그럼. 남수 너는?"

"나야 뭐 학생이 다를 거 있나. 야 근데 너 그날 왜 안 왔냐."

"언제?"

"마하 시합 하던 날. 그때 마윤이 형네 완전 장난 아니었는데."

"어? 어..."

이정석이 주변을 슥 둘러보며 동민의 주의를 끌었다.

"그날 이 새끼가 사람 불러모은 거까지 해서, 가게에 사람 진짜 많았"

"야. 박남수 닥쳐 봐. 동민아 저기."

"어? 어. 왜?"

"저쪽에 한주 고 선생님 있던데. 너 고등학교 선생님 아니냐?"

"맞다. 얘들아 잠깐만. 나 가서 인사 좀 하고 올게."

이동민이 멀어지자 박남수가 정석이를 돌아본다.

"뭐야. 사람 말하고 있는데."

"남수야."

이정석은 무게감 있는 얼굴로 남수에게 전한다.

"동민이 앞에서 가급적 구마 이야기 하지 마."

"...왜?"

"형이 하지 말라면 그냥 하지 마. 뭘 따지고 있어 뒤질라고."

"미친놈. 뭔데 지금?"

"암튼, 하지 마. 그냥 니 얘기 해. 내 이야기 하고. 구마는 꺼내지 마."

"뭐가 있구나."

"나중에 설명해줄테니까. 지금은. 알겠지?"

"오케이. 알았어."

스포츠와 관계없는 자신들도 결혼식장에 들어와 마하의 영향력과 존재감을 체감하고 있다.

동민이는 오죽하겠는가...

이정석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아직은 낯선 친구를 살펴본다.

한주 고 선생님을 만난 이동민은 반갑고 열정적인 몸짓으로 활기찬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리곤 다른 육상연맹 관계자들에게 소개를 받아 허리를 굽히며 악수를 나눈다.

마치 구마윤을 통해 단골 손님들과 처음 인사를 나누는 자신을 보는 것 같다.

"정석아. 뭘 그렇게 무섭게 쳐다 봐."

"남수야. 사람은 지가 아는만큼 보인다고 그러잖아."

"어."

"아니다. 됐다."

은사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사회생활이 묻어있단 느낌을 받는 건, 내가 손님을 상대하는 일을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진짜로 동민이의 웃음과 몸짓 이면에 그만한 절박함이 담긴 걸까.

내가 틀리면 좋겠다.

그냥 못 배운 놈이 삐딱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거면 좋겠다...

* * *

한상률은 성대한 예식을 치르며 장가를 갔고, 이정석 박남수 이동민 세 사람은 호텔 연회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아 배고파. 설마 음식 다 나온 거야?"

"그러게. 호텔 가서 스테이크 먹는다고 자랑하고 왔는데... 별 거 없는데? 우리 가게가 낫지 않냐?"

"하하하! 너네들 이런 결혼 안 와 봤어?"

"처음이지. 나 열 두 살 때 우리 막내 삼촌 결혼하고 오늘이 결혼식 처음."

"나도 친척 형 결혼 했는데, 그땐 웨딩홀 뷔페 였거든. 탕수육 존나 먹었는데."

"난 팀에서 어른들 결혼 때문에 스테이크 몇 번 와봤는데. 원래 이래."

"에이 씨 배고파. 야 나가자. 중국집이라도 가. 내가 살 게."

"그래. 동민아 너는?"

"난 다시 전주 내려가 보긴 해야 되는데."

"왜? 너 오늘 쉬는 날 아냐?"

"어... 뭐 그렇긴 해."

"그럼 올라온 김에 우리랑 놀아. 표 끊은 거 아니지?"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나온 세 사람은 호텔 인근 중국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정석이 메뉴판을 골라 음식을 시키는데, 박남수가 나지막한 감탄사를 보내준다.

"오~ 이정석."

"왜? 뭐가?"

"너 지금 사장님한테 메뉴판 돌려주는데 뭔가 사회인 같았어."

"나 사회인이야 새끼야."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너답지 않게 매너있다고 해야되나?"

"요식업 대선배 아니냐. 원래 선배들한텐 매너를 지켜야지. 안 그러냐 동민아?"

"그렇지. 종목은 달라도 경력은 인정해야지."

박남수가 두 사람을 보며 묻는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

"내가 정석이네 자주 갔잖아."

"우리 단골. 진짜 돈 주고 먹는 단골."

"야. 우린 학생이잖아."

"씨발! 학생이면 학생답게 분식집이나 가든가. 고기 처먹고 싶어서 빌붙지 말고!"

"새끼 지가 사장인가. 마윤이 형이 사장님이지."

기름진 중국음식에 도수 쎈 고량주를 마시는 편안하고 즐거운 자리가 이어졌다.

박남수나 이정석은 일부러라도 동민이 앞에서 마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동민도 웃음 많고 쌓인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그런데도 떨칠 수 없는 한계란 있었다.

"그럼 니네는 낮에는 시청에서 뭐해?"

"일보지. 안내도 하고 가끔 서류 업무도 돕고."

"야. 그럼 실업팀 선수는 공무원이야?"

"아니야. 계약직이니까. 진짜 언제 여자친구들 데리고 전주 놀러 와. 전주 볼 거 많어."

"전주라. 남수야 그때도 거기 전주 아니었냐?"

"언제?"

"구마 처음 전국체전..."

"어? 어. 맞다..."

동민도 두 사람을 보며 기분좋게 미소를 지어준다.

"하하! 그때 마하 시합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존나 혼났었는데."

이정석과 박남수는 우리가 마하와 친구라는 관계를 버릴 수 없듯이, 동민이도 그렇겠구나 라는 걸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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