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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212화 (212/401)

< 우물가의 토끼처럼 (5) >

토리노 올림픽을 끝내며 맞이한 휴가도 마칠 때가 다가온다.

감독님은 사모님과 행복한 결혼식을 치르며 신혼여행을 떠났고, 나도 충분한 회복과 배움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친구, 가족. 그리고 혜정이 선물만 신경쓰고 있었는데, 정석이한테 연락이 들어왔다.

동민이가 힘들단다.

왜? 어떤 이유로? 그건 말해주지 않았다.

질투심은 아니라는데, 상택이 형 같은 문제를 동민이와 느끼고 싶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홀로 유럽일정을 돌기는 조금 버겁고 외로울 것 같아, 폐막 직전 쟈스민에게 물었는데 흔쾌히 함께 휴가를 즐겨주었다.

그녀를 통해 네덜란드나 독일의 선진 스포츠를 직접 목격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역시, 답이 있었다.

나는 유럽에서 엘리트 체육 없이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해답을 보았다.

그것은 '통합체육'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야기였다.

예전에 감독님이 스포츠는 건강한 삶을 위한 생활습관을 벗어나 엔터테인먼트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들은 스포츠가 가진 협동심. 자기발전. 사회통합에 이르는 과정을 시스템으로 발전하여 실천하고 있던 것이다.

운동이 오락이 된다면 충분히 즐기면서도 우리는 강해질 수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그런 건강한 환경에 속하기를 바란다고 믿는다.

4월 벚꽃이 만발하는 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 딴에는 조용히 들어오는 자리였는데, 어떻게들 알고 인천공항에 기자와 팬분들이 찾아와 주셨다.

"구마하 선수! 우승 축하드려요!"

"아...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일정요...?"

어떻게 알고 왔을까. 감독님은 신혼여행중인데.

친구나 형이 기자들을 불렀을리는 없고. 대체 어디서 정보가...

아...

"마하야~!!"

입국장에 모여든 인파 가운데, 천병욱 대사부님과 박문기 회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응답은 나보다 저분들이 해야 되는 것 아닐까 싶은데...

"사부님."

"고생 많았다. 어서 와라."

"...회장님도 나와계셨네요."

"우리 선수가 귀국하는 자린데, 우리가 나와줘야지."

"고맙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정준이 형이나 설상 연맹 관계자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메달 땄다고 설상팀이 나를 버린 게 아니겠지. 그냥 육상연맹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을 뿐...

반갑기 그지없어야 하는 분들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버겁게 느껴지는지...

"가자. 고생했다."

"네? 어 사부님 제가 들게요."

"아니다. 카트 좀 끄는 건데 뭐."

"고맙습니다..."

박문기가 있어 그런가 대 사부님의 위엄이 느껴지질 않았다.

우리는 멋진 승합차에 올라타 고속도로에 올랐다.

어디로 가는 거지? 성남이 아닌 서울로 가는 거 같은데.

설마 마포 집에 데려다 주시려고 그러나? 싶어 여쭤보았다.

"저. 회장님. 저희 지금 어디 가는 거죠?"

"음. 일이 있어서."

"설마... 바로 선수촌으로 가나요...?"

"하하하! 그럴리가. 서울에 행사가 잡혀있어."

"행사요...?"

"전무님. 설명 안 해주셨나요?"

"한 감독에게 전달은 해뒀는데..."

주례를 맡아주신분이 감독님 상황을 모를리 없을 터...

그렇다고 여기서 내가 괜한 소리라도 했다간 대 사부님 입지가 더 곤란해 지시겠지.

에이 씨발... 대충 넘어가자.

"아. 죄송해요. 들었는데, 제가 휴가중이라 까먹었던 거 같아요."

"후후. 그랬어? 정신 차리고 있어야지."

"...어디 행사죠?"

올 여름 월드컵 진출을 앞두고 상암에서 대표팀 평가경기가 열리고 있단다.

시축을 한다는데... 하하하... 만약 날짜 안 맞았으면 어쩌려고 대책없이 지르냐...

오늘 나 안 왔으면 그 비난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아닌가? 그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지른 건가?

약속을 어긴 비난은 연맹이 아닌, 회사나 나한테 쏟아질테니까.

"마하야. 좋은 자리다 생각하고."

"그럼요. 축구 대표팀 저도 좋아해요. 고맙습니다."

"후후후. 마하는 왜 전무님한테 대 사부님이라고 부르는 겁니까?"

"제가 한 감독 지도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래요? 좋은 사제지간이네요."

박문기가 능청을 떨며 허벅지를 두드렸다.

"마하는 육상과 인연이 깊구나."

"네..."

"오늘도 가서 멋진 모습 보여주자."

"...그럼요."

대표팀 평가전은 밤 7시에나 시작되는데, 우리가 상암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였다.

마포집이 바로 옆인데... 혜정이가 집에 있는데. 젠장...

일단, 형한테 전화를 걸어 대충 저녁엔 성남으로 갈 거 같다고 말을 해뒀다.

"오늘 왔는데 바로 일을 해?"

"대표팀 평가전 시축 행사... 이따 방송에도 나올 거야."

"너도 어지간히 바쁘구나."

"바쁘지. 그래도 일주일은 집에 보내주신데."

"일주일 보내주면. 그 다음부터는 뭔데?"

"태릉이지 뭐."

* * *

시축을 마치고 나왔다.

장내 아나운서는 나를 육상 세계챔피언이라고 소개했다.

나도 뭐 딱히 활강 메달을 자랑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왜인지 연맹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생각하자니 속이 뒤틀린다.

박문기는 경기 보고 가자는데, 그나마 대 사부님이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 집으로 가야 된다고 빼내주셨다.

"그렇구나. 그럼 들어가야지."

이봐요. 저 오늘 도착했거든요...?

"그나저나 마하가 다리 힘이 좋구나."

"회장님. 저 육상선수잖아요."

"하하! 그렇지. 마하는 육상선수지."

"..."

이 인간 대체 뭐하자는 건지...

너무 뻔하게 속을 드러내놓고 있어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제는 회장이고 뭐고 속이 부글거려서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어지는데. 이번에도 대 사부님이 나서서 분위기를 바꿔주셨다.

"아니 볼을 그렇게 힘차게 찰 줄 우리도 몰랐지. 마하 축구도 했었니?"

"원래 축구 좋아하고요. 운동하기 전에는 친구네 아버지 조기축구회 나가서 게임도 뛰고 그랬었어요."

"그래도 좋은 자리였지?"

"네..."

좋게 생각하자. 여기서 성질내면 뭐하냐...

어찌됐든 2002 멤버가 대거 포진 된 월드컵 대표팀을 만날 수 있었잖아.

영광이야. 내가 언제 저분들 만나서 축하 인사도 듣고 응원도 직접 건네고 하겠어.

대 사부님과 즐거운 감상을 나누고 있는데 박문기가 말했다.

"그렇다고 이번엔 축구에 관심 가지지 말고."

"..."

"앞으론 딴 짓 말고 육상에 전념하는 거다.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대 사부님과 성남으로 돌아왔다.

안 데려다 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떻게 혼자 보내냐면서 끝까지 챙겨주셨다.

시차도 있고, 도착하자마자 대중 앞에 나선 것도 그렇고. 어떻게 오는지도 모르게 차에서 골아떨어졌다.

하필 퇴근시간이 걸려서 성남에 도착했을 땐 저녁 늦은 시간이 되고 말았다.

"푹 쉬고 다음주에 보자."

"저... 사부님."

"음. 그래."

"...아시안게임은 11월에나 있는데 굳이 벌써부터 선수촌 입촌할 필요 있나요?"

"마하야... 선수촌은 널 관리해주고 도움도 주는 곳이지."

"알겠습니다."

"일단 쉬고 내일 통화하자."

"사부님. 태워다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 우승 축하한다."

대 사부님도 여러 입장 있겠지...

아 몰라. 피곤해. 빨리 집에 들어갈래.

"어서와!! 마하야."

"누나."

"아이고. 어떻게 반년 전에 보고 지금 얼굴을 보여주니?"

"하하! 그러게요."

수빈이 혜정이 사건 이후 돌아온 집이구나. 진짜 반년이 훌쩍 지났네.

형이랑 수정이 누나와 회포를 풀고 있는데, 잠시 뒤. 태윤이와 정석이 남수가 찾아왔다.

"애들 왔나보다. 수정아 잔 더 가져와야겠다."

"응."

"누나 계세요. 제가 나갈게요."

그나마 애들이 오니까 기분이 살아나는 거 같다.

어이구... 누가 머저리 삼총사 아니랄까 봐 이 시간에 시끄러운 거 봐라.

"조용히 좀 해 새끼들아! 나 성남 오는 거 사람들 모른단 말야."

"오~ 이 새끼!!"

"하하! 구마하!!"

"빨리들 들어와. 문 앞에서 시끄럽게 굴지말고."

태윤이와 남수를 반겨주는데 정석이 새끼가 띠껍게 쳐다보며 괜히 툴툴 거린다.

"이 씨발... 너 뭔가 좀 낯설다?"

"형!! 정석이가 보자마자 욕 해!"

"사장님. 저희 왔어요."

"어서들 와."

"형님. 안녕하셨어요."

"음."

"아. 얘가 나 보자마자 욕 했다니까?"

"시끄러. 빨리 앉어."

애들이 형과 수정이 누나한테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잡는데.

"마하야. 설마. 저거 진짜 사온 거야?"

그 와중에 박남수 이 망할놈의 새끼는 나보다 현관 한쪽에 줄줄이 늘어놓은 쇼핑백에 더 관심이다.

"어? 야. 너 저거 뭐냐?"

"구마. 설마 진짜로 사왔어?"

"아 이 새끼들 진짜 존나 정 떨어지네..."

"사장님. 마하 욕하는데요?"

"마하야. 친구들한테 그러면 안 되지."

"아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

반가운 시간이었다. 수정이 누나도 그렇고, 친구들에게 준비한 선물을 전해주는데.

"명품인 건 좋은데..."

"음..."

"그래도 그렇지. 셋 다 똑같은 걸 주는 건..."

"싫으면 내놔 새끼들아!! 기껏 세금까지 다 내고 사왔구만!!"

줘도 지랄 안 줘도 지랄. 어이구 지긋지긋한 놈들.

"어? 야. 이건 뭐냐? 이건 누구거야? 쇼핑백이 좀 다른데?"

"아 좀!! 정신 산란하게 하지 말고!! 니네거나 챙겨."

"남수야. 혜정이. 혜정이 꺼."

"어? 너 걔 아직도 만나?"

아 피곤해... 이 새끼들 반가운 마음 다 끝났어... 그냥 아까 상암에서 마포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할 걸... 거기 갔으면 적어도 조용히 쉴 수 있었을 건데.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만큼, 형과 수정이 누나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안 그래도 된다고 하는데, 형이 가방을 챙겨 나온다.

"이 시간에 어딜 간다고?"

"일박 이일 여행이라도 다녀오지 뭐."

"누나 내일 출근 안 해요?"

"병가내면 돼."

"형... 가게는?"

"정석아 부탁한다."

"네. 사장님. 다녀오세요."

"허... 참... 대충대충 살어..."

오랜만에 성남 집을 독차지 했다.

애들도 형과 수정이 누나가 없으니 어색하지 않게 거실에 앉아 떠들었다.

"야. 이거 짭 아니지?"

"진이지 새끼야. 구마하가 아무렴 짭 들고 다니겠냐."

"돈 얼마 썼냐? 비쌌을 건데."

"하하하... 이 새끼들. 난 관심도 없냐?"

"근데 마하야. 뭐 이런 걸 사와. 받는사람 부담되게..."

"이 새끼들이 사오라잖아!!

"누가? 어떤 현명한 새끼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니 기분이 좀 남다르긴 하다. 여러가지 의미로...

"선아한테 뭐라고 하고 이걸 전해주나..."

"야. 그냥 니가 사다줬다고 말한다?"

"그러지 마. 미친놈들. 지들 여자친구 선물을 왜 내가 사다 줘."

"아 씨발. 애인 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다."

"근데, 니네는 내 메달은 관심도 없어?"

"어. 맞다. 너 이번에도 금메달 땄지?"

"있으면 좀 보여줘 봐."

"개새끼들... 무슨 올림픽 메달을..."

남수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선생님 결혼식에서 동민이 봤는데."

동민이 이야기에 정석이와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둘 다 별말은 하지 않고 남수 이야기에 집중해줬다.

"어. 근데?"

"걔 전주에 있다며. 너 그때 전주에서 전국체전 망치고 왔던 거 이야기 하는데 뭔가 감회가 남다르더라고."

그런 적도 있었지. 그날의 초라했던 모습을 바꾸겠다고 운동장 100바퀴도 뛰고 별 짓 다 했지.

"진짜 그게 언제냐. 몇 년 안 된 거 같은데..."

"마하야. 그것보다. 넌 괜찮은 거지?"

"어? 어. 뭐. 그렇지."

태윤이도 넌지시 그날 이후의 컨디션을 묻는다.

모든 게 오랜만이었다.

모든 것이 다 반년 만에 한국이었다.

이 집도, 사람도. 바로 어제까지도 유럽에서 쟈스민과 뒹굴고 여행다니고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 그러고 있었는데...

"내가 한국을 오긴 왔구나."

"앞으론 어떻게 할 거냐?"

"어떻게고 자시고... 당장 일주일 뒤에 태릉 들어가야 돼."

"뭐 벌써?"

"넌 복학 안 해?"

"씨발... 학교 다닐 시간도 없어."

애들이 제적 당하는 거 아니냐는데? 나도 모르겠다.

명문대를 가면 뭐하냐. 한국 최초 설상 금메달을 따면 뭐해.

선진국의 스포츠 문화를 배워오면 뭐하냐고...

친구가 힘든 상황에 놓이면 뭐하냐고. 당장 내 생활이 없는데.

이것이 국위선양에 대한 보답이라면 난 왜 그렇게 힘들게 운동하는 걸까?

"후우..."

"왜 한숨이야 새끼야? 금메달까지 따고 온 놈이."

"그냥... 여러가지 생각이 많아서."

"뭔데?"

"있어. 에이 씨 오늘은 먹고 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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