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13화 (213/401)

< 우물가의 토끼처럼 (6) >

다음 날.

정오가 지나서야 눈을 떴는데 천병욱 사부님께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네. 사부님."

"그래. 푹 잤니? 시차는 적응했어?"

"괜찮아요. 근데요 사부님..."

"목소리가 많이 상해있구나. 피곤한가 보다. 더 쉬어라. 컨디션 조절해야지."

"후우..."

"하고 싶은 말이 많지?"

"아 그냥...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다보니 불만스런 마음을 토로하게 되었다.

연맹 상황도 알겠다. 박문기의 초조한 입장도 이해해 줄 게. 그래도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

이런저런 불편한 의견을 전해드리니 사부님이 달래듯 말씀해 주셨다.

"마하야. 상률이랑은 얘기해 봤니?"

"감독님 신혼여행 가셨잖아요..."

"감독직 말이야."

"안 하신다고 그러셨어요..."

"녀석... 누구든 맡아야 한다니까."

신혼이기도 하고 나 때문에 회사 일도 많고. 무엇보다 감독님이야말로 나보다 더 박문기 밑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양반이었다.

"회장님 때문에 미치겠어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솔직히 그분이 왜 이렇게 큰소리 치는지 모르겠어요. 육상에 도움 준 것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왜 없어. 많지."

"뭐가 있는데요?"

한국에서 야구나 축구같은 거대 프로 스포츠 아니고, 자생할 수 있는 종목이란 흔치 않다.

특히 우리같은 비인기 종목은 기업의 후원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박문기 같은 큰 연줄을 가진 사람의 영향력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경제가 스포츠를 잠식하는 거야 세계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라지만...

내가 희생하는 것이 한국 육상의 발전이라면 상관없어.

나를 보면서 꿈을 키우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래 좋아. 얼마든지 고생해줄 수 있어.

근데 이건 누가봐도 박문기의 발전이 목적이잖아.

선수가 자립심이 있어야지. 끌려다니는 건 싫다고.

이래선 내가 꿈꾸는 통합체육의 그림은 둘째치고 내 삶이 사라질 지경인데.

"저희는 계속 이렇게 박문기란 사람한테 끌려다녀야 되는 건 아니죠?"

"인석아. 누가 끌려다닌다고 그러냐.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다."

"저. 회장님 정치쪽으로 나가려고 그러시는 거 다 알아요..."

"마하야. 너는 그런 거 신경쓰지말고.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된다."

"..."

그런 저자세가 결국 벗어날 수 없는 족쇄를 만들고 있는 것 아닙니까... 대 사부님...

"제가 사부님 위해서라든가 감독님 위해서라면 진짜 피를 흘려가며 뛸 수 있어요."

"하하하 이 녀석..."

"근데, 열심히 할 이유가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건..."

"마하야."

"아. 진짜 그건 아닌 거 같아요. 그렇게 운동하고 싶진 않아요..."

말씀을 드리면서도 죄책감에 심장이 두근두근거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분께 내가 이래도 되는 거냐...?

천병욱 대 사부님이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위해주신 분인데 내가 어떻게 이분께 이런 감정 섞인 이야기를...

"죄송해요..."

"후후후. 녀석. 주변에 불만도 가지고. 우리 마하가 크긴 컸구나."

대 사부님은 과연 대인다운 면모를 보여주셨다.

"마하야. 나도 너가 우승하는 걸 보고싶다."

"...사부님."

"나를 위해서 뛰어주면 안 되겠니?"

"사부님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뛸 게요."

"그리고 앞으론 대 사부님이라 부르지 말고."

"네?"

"아버지라 해라."

큰 울림이 전해지는 한 마디였다.

"아... 아버지요?"

"그래. 녀석아. 여행은 잘 했어?"

평생 불러보지 못 한 한 마디가 방금까지 있던 박문기에 대한 불만을 눌러버렸다.

"네."

"어디 어디 다녀왔어?"

"네덜란드랑 독일... 영국도 가보고. 프랑스나 덴마크도 들려봤어요."

"유명한 곳 많이 가봤구나."

"...관광지 보다는, 미팅하고 일하고요."

"상률이한테 들었다. 사람들이 많이들 좋아해줬지?"

"그리고 여기저기 스포츠 센터를 다녀왔어요."

"스포츠 센터라. 좋은 경험 했구나."

말씀드리고 싶다.

프로 선수 아니어도 올림픽을 나갈 수 있는 환경이 있었어요.

그 나라는 엘리트 선수들도 있지만 스스로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메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자기 직업을 가지고 체육에 몰입하고 응원해주는 문화가 있었어요...

그게 진짜 스포츠 선진국 이라고...

우리도 그렇 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네. 좋은 경험 하고 왔어요. 사부님."

"아버지라고 하라니까."

"아... 아버지."

"후후. 그래. 우리 아들. 다시 한번 축하하고. 일주일 뒤 꼭 좋은 기분으로 얼굴 보자."

"...네."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천병욱 대 사부님... 나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신 이분을 외면할 순 없다.

나까지 피하면 이분이 더 힘들어지셔. 사람이 은혜를 잊어선 안되지.

진짜 남수 말대로 전국체전의 그 찌질하던 녀석이 금메달을 네 개나 목에 걸고 해외에 나가 인기를 누리고 여자들과 뒹굴수 있게 된 건. 천병욱 아버지의 통 큰 결단과 지원 없이는 불가능 했었으니까.

"후우..."

박문기가 연맹의 모든 것이 아니야.

육상연맹은 선수들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세상에 어떻게 좋은 것만 누릴 수 있겠는가...

"어. 형."

"일어났냐?"

"응. 가게야?"

"그래. 배고프면 나와 밥 먹고 들어가라."

"됐어. 내가 집에서 챙겨먹으면 돼."

"너 계속 여기 있을 거지? 서울로 갈 거야?"

"당분간은. 아 그리고. 형 나 이따가 애들 보러 갈 건데. 괜찮지?"

"무슨 애들? 어제 봤잖아."

"운동하는 애들."

* * *

오랜만에 X를 타고 도심을 달리고 있다.

혜정이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안 그래도 어제 방송 나온 거 봤다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냥 끌려간 거라고?"

"그렇다니까..."

"흠. 진짜 정신 없구나."

"2월에 바로 들어왔으면, 원래는 더 시끌시끌 했겠지."

"그래서 휴가는 잘 다녀왔어?"

"어. 선물 사왔는데, 직접 줄까? 아니면 뭐. 니가 와서 가져갈래?"

"선물? 무슨 선물?"

"가방이랑 지갑이랑 좀 사왔어. 지갑은 너 안 쓸 거면 아줌마 드리고."

가방 지갑 이러니 혜정이 목소리가 확 바뀐다.

"뭐야. 그런 걸 왜 사와."

"하하. 이혜정. 좋냐?"

"뭐? 메이커 뭔데?"

"오 너 뭐야. 그런 거 좋아해?"

"아니. 나도 나이도 먹고 주변에서들 하나 둘 들고 다니니까."

"명품이다. 몰라. 그냥 내가 골랐어."

"야. 아 왜 그런 걸 사와~~"

좋으면서 앙탈은...

"남수랑 정석이가 좀 사다달라고 하는데, 겸사겸사 같이 골랐어."

"하하. 너도 참..."

아. 혜정이 보고싶다...

집에만 가면 보는데, 일주일 그냥 마포 집에 눌러 앉을까...

"그래서 지금은 어디가? 운전하는 거 같은데?"

"애들 보러."

"어제 봤다며?"

"걔들 말고 운동하는 애들."

"어차피 일주일 뒤 선수촌 가면 만날 애들 피곤하게 미리 그래."

"하하! 혜정아. 선수촌이 어디 수련회 같은 곳이 아니야."

"그래?"

"그럼. 거기가면 진짜 목숨걸고 운동해야 돼."

"뭘 그렇게까지 해?"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데니까. 엄격한 분위기가 있지."

약속 장소인 서울 강남에 도착.

애들은 어디쯤 왔으려나?

연락을 돌려봤는데 진운이는 훈련 때문에 나오기 어렵다 그러고, 동민이와 진수 그리고 지성이가 오고 있단다.

잘 됐다. 2차 3차 천천히 가면서 동민이랑도 진지하게 이야기 해보면 되겠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떤 힘겨움이 있는지. 뭐 대충 짐작은 가. 연맹에서 내 문제로 동민이한테 이래저래 압박 좀 했겠지. 어제 박문기를 봐도 그렇고, 안 봐도 뻔해.

작년 전국체전 때도 연락 오고 했었으니까.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진수와 지성이가 찾아왔다.

"여~!!"

"왔어."

"이야~ 스키 챔피언."

"시끄러 인마. 앉아라. 배고프지?"

진수와 지성이도 오랜만이었다.

서로간에 쌓인 이야기가 많다보니 물 한잔 먹기도 전에 근황부터 나누고 있었다.

"지성이 너 대학갔어?"

"네. 대한체대 갔어요."

"왜? 너라면 오라고 하는 실업팀 많았을 건데."

"나중에 지도자 되려면 아무래도 학위가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래. 잘했네."

"우리 팀에서도 연락 했는데, 억대 연봉을 거절하더라고."

"내가 무슨 억이에요. 마하 형 있는데."

"뭔 소리야? 실업팀에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어차피 형 올해 국내경기 다 나올 거라면서요."

"안 그래. 내가 뭐하러."

"어? 야. 너 그거 무슨 뜻이냐? 설마 지금 국내대회 무시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야 내가 언제 국내대회 다 나가고 그랬어."

"하하! 너 작년에 그랬잖아. 대회 나와서 우승상금 다 가져가 놓고."

"아니 그때는... 그때는 새끼들아 내가 돈이 필요한 상황이 있었다니까..."

실업팀 상금은 선수들을 위한 자금으로 쓰여야 한다.

내가 받아도 문제는 없지만 역설적으로 내가 나가 상금 다 쓸어버리면 아무도 대회를 안 오려 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선수들의 지지기반이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른다.

나 한 사람 배부르자고 남 밥그릇까지 뺏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동민이는?"

"올라오고 있을 걸."

"동민이 형..."

음? 지성이 반응이 조금 이상한데?

"왜? 너네 동민이 안 봤어?"

"우리도 오랜만이죠."

"어. 나도 동민이 안 본지 꽤 됐어."

"좀 챙겨. 니네도 알다시피 동민이 그 새끼 친구 몇 없단 말이야."

진수가 웃으며 오늘은 나를 위해 모인 자리니 동민이 걱정하지 말고 즐기자고 말한다.

그래. 나도 뭐 당사자 없는데서 이런 말 함부로 할 거 아니지.

셋이서 적당히 밥을 먹고 있는데, 동민이가 찾아왔다.

"아 이 새끼들 의리없게 지들끼리 먼저 쳐먹고!!"

"하하하! 그러니까 누가 늦으래!"

"닥쳐. 넌 스키선수잖아!!"

봤을 땐 크게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밝고 건강해 보이는데.

아니구나. 내공이 좀 흐려진 것 같긴하다. 요즘 운동이 잘 안 되나?

"왔냐."

"응. 너네는 언제 왔어?"

"진수형네 회사에서 있다가 같이 왔어요."

"어. 그랬어."

"동민아. 뭐 더 시키자."

"니가 사는 거냐?"

"아니. 난 학생이고 니네는 직장인인데, 내가 왜?"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지랄이라고... 너 상금 나오잖아!"

뭐가 됐든 이야긴 나중이다.

처음 얼굴 보자마자 힘든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니까.

"자. 먹자! 건배!"

"마하. 또 한번 금메달 축하한다."

"부상 없이 잘 끝낸 걸 다행으로 생각하자고요."

"하하! 야 스키 그거 완전 미쳤더만."

"몰라. 나도 정신 없었어."

편하게 웃고 떠드는 자리가 됐다.

그래도 운동하는 놈들이라고. 어제 성남놈들은 죄 선물만 관심이더니 역시 스포츠 쪽으로 애들이 많이 물어본다.

"마하야. 하계랑 동계는 뭐가 달라?"

"날씨."

"새끼. 썰렁하게..."

"하하하! 많이 다르지. 선수들 구성도 다르고. 하계는 남반구나 흑인 이런 애들이 많지만, 동계는 아무래도 북반구 사람들이 주가 되다 보니까."

친구들 앞에서 토리노 분위기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왜인지 막 내 자랑을 하는 거 같아서 주제를 피하고 싶어졌다.

"도하가 카타르던가? 그치? 중동이면 존나 덥겠다."

"11월인데 더울까요? 일부러 더위 피해서 겨울 가까운 시간에 연다고 들었는데."

"11월에 육상이라. 처음이긴하네."

"..."

아시안 게임 이야기가 나오자 진수나 지성이도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는데, 동민이만 조용해진다.

"동민아. 뭐 더 시킬까?"

"어? 아니. 지금도 많어."

"너 운동하고 온 거 아냐? 얼마 안 먹네."

"음. 야 난 됐고. 너 휴가 어디어디 갔었냐?"

그래. 마침 질문이 나온김에 좋은 이야기를 해주자.

"실은, 그냥 휴가 간 게 아니라. 좀 여러 환경들을 보고 왔어."

"무슨 환경?"

"그냥. 생활체육이라든가. 유럽 선수들은 어떻게 자기 직업 가지고 올림픽을 나오나 이런 거."

얘네는 운동하는 친구들이니까. 내가 보고 느낀 스포츠 선진국 시스템에 많이들 공감해 줄 거라 믿었다.

"좋네."

"나도 그거 다큐에서 봤었어요. 독일이 그런 게 진짜 잘 돼 있다고."

"네덜란드가 장난 아니더라고. 인구 1500만인데. 월드컵이고 하계고 동계고 성적은 우리랑 비슷비슷하니까."

"아니지. 우리보다 낫지. 축구 우리보다 잘하잖아."

"하하! 맞어. 98년에 존나 발렸는데."

"어? 근데 네덜란드 월드컵 못 나온지 꽤 되지 않나?"

이번에도 진수 지성이랑 셋이 열심히 떠들고 있는데, 동민이는 또 조용히 술잔만 들고 있다.

"동민아."

"응?"

"안주 뭐 더 시켜 줘?"

"후후. 야. 넌 나 밥 먹이려고 왔냐."

뭔가, 무슨 말이 나오든, 운동 관련된 이야기는 애한테 반가운 주제가 아닌가 보다.

"어떻게 생각하냐?"

"뭐가?"

"방금 내가 말한 거."

"글쎄다. 그 나라 이야기지. 우리나라가 그런 게 되나."

진수가 슬쩍 눈치를 준다.

진수도 뭔가 동민이 분위기가 평상시랑 다르다는 걸 눈치챈 것 같다.

그래. 운동 얘기 그만하자. 맨날 뛰는데 밥 먹는데서까지 운동이야기를 하냐.

"마하야."

"어."

"...넌 그런 게 좋아?"

"뭐?"

"방금 니가 말한 거. 생활체육이니 통합이니."

그 와중에 동민이가 나한테 물어본다.

내 대답은 당연히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한다고 보는데.

"너무 이상적이지 않냐?"

"...이상적인게 나쁜 건 아니잖아."

"아니. 하하. 아 씨발..."

"..."

"야. 새끼야. 우린 그렇게 하기 싫어 안 하냐고. 그게 어려우니까 못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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