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물가의 토끼처럼 (9) >
생각이라는 건 선입견에 좌우될 때가 많다.
좋은 면을 보여줘도 아니라고 자꾸 부정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나도 그렇고, 남들도 그럴 것이다.
엘리트 체육이고 뭐고 젠장 더는 생각하지 않겠어.
당장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이미 말은 뱉었어. 사건은 벌어졌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연맹 전무이사님한테 선전포고를 날렸으니. 내가 말한 바를 끝까지 책임져야지.
"어. 형. 나 오늘 밖에서 잔다."
"서울로 가냐?"
"아니. 전주. 동민이 보러 가려고."
"뭐. 니가 어떻게 살아도 상관은 없다만. 수정이가 옆에서 좀 툴툴 거리네."
"누나는 왜?"
"하하하! 메달만 던져놓고 그냥 나갔다고."
"아... 맞다. 아직 누나랑 제대로 이야기를 못 했구나."
"아무튼, 알겠다. 가서 둘이 이야기 잘 해보고."
"어."
미안해요 누나. 지금은 내가 할 게 너무 많아요.
당장 내가 좋아하는 여자도 못 보는데, 형 여자친구야 뭐 중요하다고.
아무튼, 동민아 기다려라. 형이 간다.
X를 타고 어두운 밤길을 달리는데. 기분이 꼭 지금 내 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가야된다.
그게 맞으니까.
아닌 걸 따를 순 없어. 난 그래야 된다고 본다.
세상 사람 모두가. 적어도 육상계의 자라나는 새싹들이 지금 나를 목표로 고된 시간을 이겨내고 있다면. 난 어떤 역경이 오더라도 바른 모습을 보여 줄 책임이 있다.
"어. 난데."
"...뭐야?"
대전을 지나면서 동민이 놈한테 전화를 걸었다.
지난 술자리 이후 불쑥 전화를 걸어 그런가, 조금 어색한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역시 반가운 기분이 먼저 들었다.
"동민아. 너 지금 어디냐?"
"숙소지 어디야."
"주소 불러 봐. 네비에 주소 나오지?"
"뭐야...? 너 오려고?"
"응. 나 오늘 재워 줘. 나 거기서 잘 수 있지?"
"뭔 소리야. 여기 전주야..."
"그래서? 나 벌써 대전왔어 새끼야."
"..."
"아 씨발 빨리. 너 앞으로 나 안 보고 살 거야?"
따지고 보면, 성남 놈들도 내 기준 이해되지 않는 놈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자기에게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냥 태윤인 그런 놈이고, 정석이 이런 정신병이 있고, 남수는 이렇게 생겨서 저렇게 노는 놈이라고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였다.
동민이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면. 생각을 버리고 공동의 목표를 바라보자 친구야.
강해지는 거다.
휴게소에서 나와 다시 운전을 시작했는데, 이현석 교수님에게 전화가 들어왔다.
감독님이 안 계시니 당연히 이 교수님이 먼저 연락이 오겠지.
"네. 교수님."
"...지금 어디냐?"
"친구 보러 가고 있어요."
"방금. 선생님에게 연락 받았는데"
"교수님. 저 진짜. 저 하나 잘 되자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흐음... 선발전은 우리도 많이 고민하는 문제긴 하지만."
"교수님. 아닌 말로 제가 선발전에서 떨어진다면, 그건 저보다 더 뛰어난 선수가 나왔다는 말도 되는 거잖아요."
"이놈아. 어른들은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운동하는 사람들은 부상이라든지 생활이라든지, 주변의 철저한 케어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특히, 나같이 이른 나이에 큰 성과를 달성한 젊은 선수들은 중심을 못 잡고 어긋날 일들이 많이 벌어진단다.
예전에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배님이 그러셨고, 우리 육상 선배님 말고도 수많은 젊은 메달리스트들이 안타깝게 재능을 썩혀버린 일이 많다고 해주신다.
"어른들은 그런 걸 걱정하고 있는 거지."
"제가 그렇게까지 절제없이 날뛰는 놈은 아니잖아요."
"니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한 감독이 널 원체 자유롭게 풀어놓는 것도 있고..."
"교수님. 저 믿으시죠? 저 열심히 하는 거 아시잖아요."
"아. 당연히 믿지. 넌 누구보다 열심히 잘 하고 있고."
"강해져서 돌아갈게요."
교수님의 목소리가 또 한번 냉랭하게 바뀌셨다.
"...무슨 소리냐. 그럼 학교로도 안 오겠다는 소리야?"
"죄송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은 이게 맞는 것 같아요."
이현석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마하야... 올해 우리 학교에 육상으로 들어온 선수가 열 명이 넘는다. 다들 니 후배들이다."
"네. 저도 친구들한테 들었어요..."
"그런데, 너 자꾸 이렇게 개인행동하면, 나도 널 보호해줄 수가 없어. 그건 아니?"
"교수님. 저는 지금 후배들한테 부끄럽지 않을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간다. 어쩔 수 없어. 후배들이 있다면 더더욱 선발전을 열어줘야 한다.
"그래. 알겠다. 운전중인 거 같은데 조심하고."
"네."
"학교에서 보자. 돌아온다면 말이지."
"..."
놀랍네. 당장 이현석 교수님부터 돌아서는구나.
한편으론 좀 무섭다.
아직 박문기 귀에는 안 들어갔을 건데. 그 인간이 알면 얼마나 큰 반발이 올지...
밤 9시. 전주에 도착. 동민이가 있다는 숙소에 닿았는데.
"젠장. 주차할 자리가"
애한테 전화를 걸어서 나와보라고 했다.
동민이 놈이 터덜터덜 원룸촌에서 나와 힐긋 쳐다본다.
"아 씨... 왜 차를 끌고 왔어 새끼야."
"뭐 씨발. 그럼 걸어오리?"
"..."
"그만 좀 쳐다보고 차 어디다 세울지나 말해 봐."
지도 잘 모르겠다면서 차라리 멀리 세울데다 세우고 걸어오잔다.
"알았어. 타."
"새끼. 차 좋다?"
"너 내 차 안 봤냐?"
"작년에 봤어. 실업팀 대회 상금으로 할부 때우는 것도 봤고."
아 이 새끼 진짜 사람 쪽팔린 이야기를...
"뭐 씨발! 내가 도박을 했어 뭘 했어!!"
"왜 소리를 치고 지랄이야? 병신이."
"니가 새끼야 사람 불편한 소리를 하잖아!"
"아 누가 뭐라고 했냐고. 잘했다고. 상금 지가 얼마를 쓰든 뭔 상관이야."
하이고. 이래서 사람이 있을수록 겸손해야 한다고... 제기랄...
"야. 술이나 한 잔 할래? 나 저기 잘 아는 전 집 있는데."
"전 집? 뭐. 부침개 파는 덴가?"
"막걸리에 파전이나 한 잔 하자. 내가 살 게."
어차피 차도 멀리 세울 거. 동민이와 둘이 술집에 들어갔다.
다들 한 잔 거하체 걸치셔서 그런가, 아저씨들도 있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데 딱히 날 알아보는 시선은 없는 것 같다.
"오. 분위기 좋다. 전주 같은 느낌이네."
"전주같은 느낌이 뭔데?"
"뭔가 토속적이랄까."
"하하! 너 지금 전주 무시하는 거야?"
"무시는 미친놈아. 아 이 새끼 왜 이렇게 삐딱해졌지?"
그래도 진수나 지성이가 있을 때보단 단 둘이 있으니 애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인다.
"오늘 운동했냐?"
"어."
"너희 감독님은 누구셔?"
"없어."
"없어?"
"응."
"...실업팀에 감독님이 없을 수 있어?"
"올해 예산이 깎이는 바람에, 계셨는데, 다른 데로 옮기셨어."
"...그럼 너는?"
"난 올해까진 계약이 되어 있으니 여기 남아 있어야지."
코치님은 계시는데, 육상만 관리하는 건 아니라, 다른 종목들도 같이 두루두루 보고 있단다.
생각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놀라고 말았다.
돈 받고 운동하는 실업팀 선수가 전속 코치도 없이 혼자 운동한다는 말인가?
"그게 실업팀이야."
"...그럴거면 그냥 대학이 낫지 않냐?"
"대학은 돈을 못 받잖아."
뭐가 됐든 운동은 돈이 든다.
부모님은 계셔도 여유롭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한 동민이는 당장 실력보다 벌이가 더 급한 상황이었다.
"미안하다."
"니가 뭐가 미안해?"
"그냥... 다."
"좆까고 있네 씨발. 동정하냐?"
"동정은 아니고... 그냥. 그런 상황인 줄 몰랐어..."
"..."
부침개보다 술이 먼저 도착했다.
서로 대접 가득 막걸리를 가득 채우고 건배를 했다.
"갈 수 있으면 대한 체대 가고 싶었어. 운동선수는 대한 체대니까."
"갈 수 있었어."
"그리고 대한 체고 가고 싶었고. 지성이같이 살고 싶었지."
"한주 고도 이제 육상 명문이야."
"하하하! 그게 나 때문에 된 거냐? 너 때문에 된 거지."
"동민아.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한주 고 선배는 너야 내가 아니라."
"됐어. 마셔라."
둘 다 운동선수다 보니 막걸리 한동이 금새 바닥을 보인다.
바로 리필을 받아두었다.
동민이가 한 주걱 또 술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왜 왔냐?"
"사과 받으려고."
"미친놈. 내가 사과할 게 뭔데?"
"왜 없는데. 보자마자 지랄하고. 소리치고."
"..."
"지 기분 좆같다고 분이귀 씹창내고 그냥 가버리고."
"미안."
"진짜 미안하냐?"
"그래. 그냥 짜증이 좀 밀려와서..."
"미안하면 앞으로 나랑 운동하자."
녀석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마침 기다리던 부침개가 고소한 기름냄새를 풍기며 식탁에 오른다.
"오~ 진짜 맛있겠다. 야 이거 더 시키자."
"...뭔 소리야 방금?"
"부침개 더 시키자고. 내가 살 게."
"그거 말고."
"말고 뭐? 운동?"
"그래."
우적우적 부침개 절반을 젓가락으로 잘라 입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아 뜨거."
"작작 쳐먹어. 방금 나온 걸..."
"그렇게 됐어. 나 한동안 니네 팀에서 운동 좀 할게."
"야. 마하야"
"아! 전무님한테 얘기했다고. 선발전 없으면 태릉 안 간다고."
남은 절반도 우적우적 입에 쑤셔넣으며 입을 막았다.
"이모님. 저희 부침개 그냥 다섯 판 더 구워서 갖다 주세요."
"야?"
"왜? 나 그만큼 먹어."
"그건 또... 뭔 소리야...?"
크흠. 에잇 젠장. 부침개 맛 느낄 새도 없네.
"동민아. 이번에 나랑 같이 스키 메달 딴 상택이 형 있잖아."
"어. 니네 선배."
"이 인간이 진짜 처음에 존나 개새끼였는데. 선발전 치루고 나니까 나한테 뭐라고 못 해. 왜? 난 당당하게 시험을 봐서 대표팀 자격을 얻었거든."
"..."
"같이 운동하자. 그래서 같이 태릉 가자."
"하하. 아. 미친 놈..."
동민이는 현실적인 걱정을 들고 나왔다.
"난 여기 소속된 선수라고."
"나 하나 더 포함 안 될까?"
"...니가 여기서 운동한다고?"
"학교로도 못 가."
"..."
"나도 지금 배수진 치고 덤비는 거야."
아까 낮에 한주 고를 가서 이주영 감독님을 뵙고 왔다고 해줬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또 뭐가?"
"엘리트 체육은 없어질 수가 없어."
"아 이 새끼 왜 갑자기 나타나서 개소리를..."
"감독님이 그러시더라. 선수 애들이, 특히 학부형들이 다들 성공을 꿈꾸고 있는데."
그들 모두를 상대하자니, 모두가 성공할 순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알려줘야 하고.
그러자고 기대와 열망을 안고 오는 사람들을 무시할 순 없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최고의 훈련 환경과 성적을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은 건 선수들이. 학부형들이 이겨내는 길 밖에.
"근데 난 그게 싫어."
"너 방금 엘리트 체육은 없어질 수 없다며?"
"그래서. 나만의 엘리트 체육을 만들려고."
지글지글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부침개를 앞에 놓고 말했다.
"내가 너 메달 만들어 줄게."
"..."
"나랑 같이 하자. 같이 가 새끼야. 존나 강하게 해줄게."
동민이는 혼자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다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하. 아 나 씨발..."
"왜? 싫어?"
"하하하... 아니 진짜..."
"..."
당사자가 싫다면 할 수 없다. 나도 그만 물러나는 수 밖에.
"얼마 전에 정석이 봤어."
"알어. 연락 받았다. 감독님 결혼식도 같이 갔었다며."
"응... 정석이 집 산 거 들었냐?"
"어. 새끼 잘 나가데."
"...그놈이 나한테 확실한 무언가가 없다고 나도 집 한 채 장만하라고 하던데."
설마 운동은 됐고 돈 빌려달라고 그럴려나? 걱정스런 마음으로 쳐다보는데.
"나도 확실한 게 있었네."
"뭐가?"
"그냥. 나만의 확실한 무언가. 그게 있었어."
"...뭔 소리야? 야 정석이가 내 친구긴 하지만, 그 새끼 정상 아니야. 어딘가 좀 애가 아픈 구석이 있는 놈인데."
"하하하하~!"
동민이가 흔들리고 있을 때. 정석이를 만나 그런 이야길 들었단다.
사람이 확실한 무언가가 있으면 역경이 닥쳐도 흔들리질 않는다.
정석이한텐 그게 자가주택이 됐고, 동민이한테는 그게.
"나한텐 너가 있었구나."
동민이는 그게 내가 됐다.
이놈에게 있어 확실한 무언가.
그건 바로 나라는 존재.
친구...
"고맙다 마하야..."
"야. 너 왜 울어?"
"몰라 씨발놈아... 그냥. 그냥 술이 좀 그래."
"몇 잔 먹지도 않은 놈이..."
그 순간 동민이의 몸에 꺼져있던 내공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기운이 살아나다니, 이 자식 은근 기분파였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