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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217화 (217/401)

우물가의 토끼처럼 (10)

누구나 성공하고 싶다. 하지만,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승리자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나를 향한 대중들의 찬사도 없는 것이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면 된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그게 맞으니까. 적어도 실력이 있다면 인정은 해 주는 체육계가 아니던가.

"우리 팀 시설 열악한데..."

같이 운동하는 건 찬성했지만, 그럼에도 넘을 산이 많아 보인다.

어떤 환경인지는 내일 가서 보면 알겠지. 일단 먹고 들어가서 자자고 했다.

"너 그럼 지내는 거는?"

"근처에 방 하나 구하지 뭐."

"..."

"왜? 아 걱정 마. 내 돈 써서 할 거야."

"그런 게 아니라..."

"동민아. 진짜 강해지고 싶어?"

"응."

단호한 대답을 들었다.

상택이 형 때와 똑같은 경우다.

그렇다면 나도 물러서지 않겠다.

"나 진짜 독하게 운동한다. 알지?"

"야. 나도 만만하게 하는 건 아니야."

"새끼. 뒤져 봐 한번."

"미친놈. 바라던 바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전주 시청 체육과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놀랍다는 반응을 먼저 보여 주시는데.

"구마하 선수가 여기서 운동하겠다고요?"

"네. 맞습니다."

"이동민 씨. 아니 둘이 친구라고 듣긴 했지만..."

"저. 어떻게 안 될까요?"

"...안 될 건 없지만."

시설이나 환경. 특히 시에서 운영되는 팀인만큼 선수들의 훈련시스템은 시 예산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단다.

"괜찮습니다. 저 따로 돈 투자 하실 거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올림픽 영웅을 데리고 오는데."

"저. 실업 팀에 소속되는 건 아니고요. 육상 선수 선발전 열릴 때까지 잠깐 머무는 건데 안 될까요?"

그런 식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 말았다.

면전에서 거절을 당한 것이다.

쉽게 될 줄 알았는데, 역시나... 세상은 만만치 않구나.

"...안 되나요?"

"저기... 아니, 그러니까. 우리도 구마하 선수가 우리 시에서 활약해 주면 너무 좋죠. 좋은데."

"..."

"근데, 그렇게 잠깐 들어오는 건 역시나. 형평성에 문제도 있고."

어떤 형평성에 어긋나는지를 여쭤보고 싶었지만, 여기서 더 괜한 소리를 꺼냈다간 이분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 입장만 난처해질 거 같아 일단 물러섰다.

"그러시군요."

"차라리 우리 시에 들어오는 건 어떨까요? 대학 선수도 실업 팀에서 뛸 수는 있잖아요?"

근데, 그렇게 되면 이번엔 내가 내 연봉을 안 물을 수가 없는데...

그래. 한번 물어는 봐 볼까?

"그럼 저도 연봉으로 계약되나요?"

"하하. 그럼 물론 드려야죠."

"어... 얼마나...?"

6,000만원이란다.

작은 돈은 아니지만 연봉이었다. 월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광고 단가가 2억씩 매겨지고, NICE에서 지원되는 훈련 금액이 연봉의 두 배가 넘는 상황에서 받아들이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까...?

* * *

"재능 기부해라 이거네."

"현실이 그렇지 뭐."

"와. 뭔가... 하하... 뭐라고 해야 되는지..."

"그래도 우리 시에서 6,000이면 큰돈이다. 최고 액수 부른 거야."

"음... 그 점은 감사드리는데."

뭔가 철썩같이 내가 가면 될 거라고 믿고 있었던 걸 부정할 수 없다.

난 구마하니까.

세계 신기록 보유자고 올림픽 메달도 동계 하계 4개나 가지고 있는데.

역시, 현실은 녹록치 않구나...

이런 느낌이구나. 실업 팀이라는게.

근데 이게 보통적인 삶이니까...

와 뭔가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진짜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구나.

"정말 몰랐어..."

"모르지. 잘 모를 거야."

쇼트 트랙 같은 효자 종목도 실업 팀 선수가 1억 연봉을 받기 어렵단다.

양궁도 그렇고, 유도나 태권도 등등.

그나마 올림픽 나가 메달을 따오면, 메달 포상금이나 후원 기업상금 거기다 연금이 있어 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할 수는 있지만.

나만큼 벌고 나만큼 인지도를 갖는 삶은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었구나.

"그런 걸 메달 하나라고 했으니..."

"알았다고 새끼야. 아 씨 뒤늦게 존나 지랄이네. 따지고 있어."

"미친놈. 왜 이렇게 재수 없어졌냐?"

"너는? 넌 왜 이렇게 빈정거리는데?"

둘이 괜히 기분이 버거워 툴툴거리는데.

이상하게 짜증은 나도 서로가 전보다 더 편해진 기분을 느꼈다.

"원래 우리가 이렇게 서로한테 욕 막 했었나?"

"정석이 때문에 그래."

"정석이가 왜?"

"나랑 친구들도 원래 그렇게들 욕 안 했는데, 정석이 새끼랑 친해지다 보니까 다들 입이 거칠어 졌어."

"하하하! 그래도 난 정석이 좋더라."

"좋지. 애는 좋아. 정신병이 있어서 그렇지."

"니네 동창인가 누구 만난다며?"

"어. 선아라고 있어. 아 진짜 선아 불쌍해서 어떡하냐... 왜 하필 이정석 같은 놈이랑..."

동민이는 정석이와 친해지면서 어딘가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고 해 준다.

"믿음직하더라."

"...아 니가 자꾸 그러니까 나만 이상한 놈 되잖아."

"니네는 멋진 애들끼리 잘 뭉쳤어. 애들이 의리가 있어."

"꺼져. 너도 이제 우리 패밀리야."

"후후. 나도 껴 주는 거냐?"

"이정석이랑 욕 텄다며. 그럼 끝난 거지."

훈훈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문득 현실적인 문제가 닥쳐온다.

"연맹에서 따로 연락은 없고?"

"응."

"...돌아가라 마하야. 괜히 여기서 너까지 힘들어지지 말고."

"난 생각보다 책임감이 강해."

"..."

"물러설 수 없어. 선발전은 꼭 열 거야."

박문기는 몰라도 천병욱 아버지는 내 뜻을 들어주시리라 믿는다.

물론, 거기서 오는 불이익이 어떤 것일지 아직 상상이 안 가지만...

"운동은 왜 운동밖에 할 수 없을까?"

"무슨 소리야?"

"니가 자꾸 엘리트 체육이니 뭐니 다 깨부수겠다고 하니까. 나도 고민을 해 봤는데."

우리 앞에 닥친 현실적인 수많은 문제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결국 운동해서 먹고살 길이 막막하단 뜻이었다.

만약, 운동하는 사람들이 올림픽이나 코치, 실업 팀 같은 직업이 아니어도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도 보다 더 여유로운 생각을 해 볼 수 있지 않겠냐란 말을 해 준다.

"그러게. 좋은 접근법이네. 뭐가 있을까?"

"글쎄. 당장 떠오르는 건 헬스장 개업밖에 없는데..."

"고깃집은 어때?"

"하하하! 니가 하면 손님은 많이 오겠다."

"정석이 매니저 시키고. 우리가 자금 대고."

"이 새끼는 친구를 부려먹으려고..."

"아 씨발. 그 새낀 좀 부려먹어도 돼."

"그리고 난 너같이 투자할 돈 없어."

"결국 또 돈인가..."

"돈이지. 그래도 넌 돈 많이 벌었잖아."

"..."

"진짜 얼마나 벌었냐?"

"몰라. 꽤 되긴 해."

"넌 집 샀어?"

"어. 잠실에 신축 올리는 거 분양받아 놨어."

"오오~ 이 새끼."

"메달 따면 자격이 주어져.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어."

동민이가 묻는다.

"근데 내가 뭐로 메달을 따?"

"일단, 아시안 게임. 다음은 다음으로 지켜보고."

"...그러니까 아신안 게임 뭐?"

"계주 어떠냐?"

작년 세계 선수권 때도 느꼈지만, 남자 4X100 계주라면 우리도 단체 메달을 노려볼 만하다.

"야. 난 허들 선수라고."

"너 원래 단거리 선수였잖아."

"바꿨잖아..."

"실업 팀 와서지. 넌 원래 계속 단거리 선수였어."

일단 아시안 게임 먼저 노리고. 다음을 노려 보는 거다.

이미 한국 계주는 나, 김진수 그리고 권지성이라는 세 사람의 스프린터가 준비되어 있다.

"형님 한 분 계시잖아."

"그 형. 아테네 때도 부상 있어서 출전 어려웠어. 그리고 이제는 은퇴하실 나이 되셨고."

"...그래서?"

"니가 하자. 같이 뛰어. 계주는 호흡이 중요하니까. 우리 넷이라면 원래도 친했고, 분명 큰일 한번 치를 수 있어."

동민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편다.

"아. 좋은 이야기였다."

"왜? 싫어?"

"결국 니네가 떠먹여 준다 이거 아냐."

"아. 이 씨발년이 진짜..."

"뭐? 왜 욕지랄인데."

"또 삐딱하게 들을래? 계주가 새끼야 한 사람 잘 한다고 되는 운동이냐!!"

다빈이가 고등학교 때 계주 선수로 활약했기에 알고 있다.

계주란 하나가 아닌 팀워크가 중요한 게임이었다.

한 사람이 조금 늦더라도 같이 훈련하면서 키워지는 실력이 있다.

"멀리 보지 말고 일단 가까운 것만 생각하자고. 아시안 게임이라고 쉬운 거 아니야. 우리는 아직 중국이나 일본을 이겨 본 적이 없어."

"..."

"우리 넷이야. 난 그렇게 믿어."

"그렇게 베이징까지 가자고?"

"모르지. 그 다음은 다음이니까."

"그러다 나보다 더 잘하는 놈이 나오면?"

"너도 계속 훈련해야지. 누구보다 약해지지 않게. 나도 마찬가지고."

진수 지성이는 10초 초반에 도착했다.

두 녀석이라면 베이징까지 9초의 벽을 뚫을 것이다.

"너도 고등학교 때 10초는 만들었잖아."

"마하야. 너는 몰라도, 남들은 0.1초 줄이기가 진짜 어려워..."

"나도 어려워. 그래도 해야 되는 건 맞잖아."

소매와 바짓단을 걷어붙이며 보여 줬다.

"너 내 팔 보여? 이 종아리랑 허벅지 보여?"

"..."

"니 옷 올려 봐. 니 몸 좀 보자."

"비교를 하고 있어..."

"이번에 애들 보니까 걔네는 운동 빡세게 했더만. 넌 뭐 했는데?"

먼저 두 녀석을 만났을 때. 진수 지성이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운이도 마찬가지였지. 그 녀석은 이미 작년에 800미터에서 나를 이겼었으니까.

반면 동민이는 고등학교 때 체격에서 크게 변화가 없었다.

"솔직한 말로. 너 삐딱거리지 말고. 우리 고등학교 때 운동할 때도 내가 너한테 같이 헬스장 가자고 했냐 안 했냐."

"다 지난 이야기를..."

"너 지금 웨이트 얼마나 하고 있어. 그런데 뭐가 걱정인데? 넌 아직 니 실력의 최고점을 못 찍었어. 그건 다른 말로."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기고 있다는 말이었다.

"야. 말 꺼낸 김에 나 그냥 툭 까놓고 독하게 얘기할게."

"..."

"해 보지도 않고 먼저 안 된다는 소리 할 거면 나 그냥 돌아갈게. 진짜로."

"..."

"할 거지? 메달 딸 거지?"

"할 거야."

"그럼 믿어! 너한텐 나 못지않은 힘이 있으니까. 그 힘만 믿으면 돼."

버럭버럭 말을 끝내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다행이다. 후우. 또 아니라고 지는 안 된다고 이러면 입 아프게 떠들어야 하는데 아우 전화나 받아야지.

근데 누구지? 처음 보는 전화번혼데. 뭐야? 차 빼 달라는 건가?

"네. 여보세요."

"어. 마하 형."

"누구?"

"저 정순데요."

"정수?"

"정석이 형 동생이요."

"아~~ 그래! 정수!!"

"와. 마하 형이 내 전화를 받아 주고."

"하하하! 야 반갑다."

뭐지? 연락 오기 좀 애매한 사이지만, 그렇다고 멀리 외면할 녀석은 아니야.

정수는 우리도 고등학교 때 많은 신세를 졌었지.

녀석의 엄선된 컬렉션은 늘 형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정석이의 또 다른 자랑이 되어 줬으니까.

"어. 그래 정수야. 왜 전화했어?"

"형. 저... 운동 좀 시켜 주시면 안 돼요?"

"어?"

동민이도 옆에서 누구냐? 라는 듯 관심을 가지는데, 잠깐만.

"운동? 왜? 너 뭐 체대 가?"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정석이네 집안 사정도 동민이네 못지않게 어려운 실정이다.

내 친구는 그래서 대학도 못 가고 우리 형 밑에서 사회인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정수도 지금 취업을 꿈꾸고 있단다.

"운동 선수 하려고?"

"아니요. 제가 춤을 추는데요."

"춤?"

"네. 근데, 힘이 딸려서 고난이도 기술이 어려워 가지고."

"춤? 춤이라고? 뭐 댄서 이런 거 말하는 거야?"

B-BOY가 되려고 하고 있단다.

작년부터 친구들과 재미로 했는데 이제는 직업으로 생각하게 됐다는데.

"형 도전하는 거 보면서 저도 시작했거든요."

내가 사랑을 찾아 떠난 여정이... 생각지도 못한 여러 꿈을 만드는구나.

부끄럽다고 해야 되는지... 뿌듯하다고 해야 되는지...

실용 음악이나 기타 전문 대학도 있지만, 어차피 나와도 답도 없을 거, 바로 현장에서 뛸 수 있는 크루가 되고 싶단다.

그러기 위한 체력이 떨어지길래 몸을 키우고 싶었는데.

마침 나도 가까이 있고, 멋진 몸도 가지고 싶고. 그래서 정석이 찬스로 연락을 걸어 봤다는데.

"좋아."

"네?"

"좋다고. 정수야 당장 내려와라."

"어... 형 어디 계시는데요?"

"나 지금 전주."

"저... 학교 가야 하는데요?"

"꿈을 이루고 싶다며?"

"네."

"대학 갈 거 아니라면서. 그럼 학교 무슨 상관이야?"

정수의 목소리에 환한 기쁨이 묻어 나온다.

"역시 마하 형. 전 형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졸업장만 따자고. 알잖아. 나도 고3 때 학교 거의 안 갔어."

"그쵸! 그래서 나도 우리 형한테 그렇게 얘기했는데, 형이 마하형이랑 나랑 같냐면서!"

하하. 어느 집이나 형제들은 다들 비슷비슷한가 보구나.

"누구냐?"

"정석이 동생."

"왜? 지 형 욕하지 말래?"

"하하하~ 그게 아니라."

이러저러 사정을 설명해 줬다.

한 사람보다는 둘이 낫지.

어차피 둘 다 체력과 근력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라 그래서 같이 운동을 하자고 해 주니.

"걔가 할 수 있을까?"

"너보다 잘할걸."

"새끼야. 난 그래도 운동선순데."

"얘는 꿈을 믿는 놈이야. 그리고 난 그런 꿈을 믿는 놈이 실력은 있어도 의지가 없는 놈보단 낫다고 보고."

"..."

"넌 꿈이 뭐냐? 운동해서 대체 어디까지 가고 싶은 거야?"

올림픽 금메달? 아니면 구마하에 버금가는 이동민이란 존재감?

동민이는 그에 대한 답을 그리 거창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냥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만 갖추고 싶어."

"그럼 올림픽 안 가도 상관없는 거야?"

"야. 넌 새끼야. 올림픽이 그렇게 쉬운 무대가 아니라니까?"

상택이 형은 메달에 대한 욕망이 엄청났는데, 이번엔 그와는 또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친구를 만나게 됐구나.

쉬운 길은 아닐 것 같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거 가 보는 수밖에.

"그러고 보니까 넌 어떻게 할래?"

"나...? 나 뭐?"

"여기선 내가 할 수 없고. 반대로 넌 실업 팀에 묶여 있어야 되는데."

"..."

"같이 갈래?"

인생에 배수진을 친 나와 정수. 그리고 실업 팀이란 가느다란 울타리 안에서 고민하고 있는 동민이.

"고깃집..."

"어?"

"안 되면 나 고깃집이라도 취직시켜 줄 수 있지?"

"물론이지."

안정적인 환경을 벗어난 세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우물가를 찾아왔지만, 우리는 개구쟁이 토끼 새끼들처럼 천방지축 날뛰며 새로운 길을 열기로 했다.

"근데, 당장 운동할 수 있는 환경도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우리 형이 가게 열 때 그랬는데. 뭐가 됐든 일단 사람이 모이면 길이 열리는 법이라고 그랬어."

"하하... 형님도 진짜..."

좋은 이야기가 될 거 같다.

무엇보다 당장 우리는 운동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정수를 통해 확인했으니까.

댄서. 몸을 쓰는 일.

그런 것도 운동으로 할 수 있구나.

접해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다.

이 도전을 끝까지 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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