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의지 (1)
"평수 상관없고요. 단기 임대요. 주차장 꼭 있어야 하고. 아파 트도 상관없어요."
전주에서 머물 곳을 구하고 생활 집기를 마련했다.
동민이는 생돈 쓰지 말고 자기랑 있어도 된다는데, 정수까지 오는 마당에 남자 셋 꼬추 털 날리며 북적거리고 어떻게 지내나. 거절할 건 깔끔하게 거절해 준다.
"넌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실업 팀이나 잘해 봐."
"왜?"
"우리가 니네 시설을 이용할 순 없잖아. 그렇다고 니가 그냥 우리랑 움직이면 소속 팀 이탈이니 뭐니 할 건데."
"뭐 그건 크게 상관은 없는데. 어디서 훈련하려고?"
내 발로 안정된 환경을 벗어났으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큰 걱정은 없다. 세상에 육상만큼 단순한 운동이 또 있을까.
의지만 있다면 그곳이 초등학교 운동장이든 골목길이든 상관없다.
잔디밭만 있어도 훌륭한 환경이 된다.
더군다나 전주는 익산 김제 군산과 차로 한 시간 거리고 각 시모두 멋진 종합 운동장과 육상 트랙이 깔려 있었다.
"헬스장도 있고 주변에 산들도 많고. 그리고 너 전북대 육상부랑 훈련해 봤어?"
"어. 가끔."
"잘됐네. 실력 평가 차원에서 전북대랑 한 번씩 겨뤄 보는 것도 괜찮겠어. 거기 잘하잖아."
"하하... 내가 다시 너랑 운동하게 될 줄이야..."
"프로그램은 내가 짠다. 괜찮지?"
"응. 그건 상관없어."
"근력 강화랑 트랙으로 나누는데, 빡시게 갈 거야."
"여기서 근육이 더 붙어?"
"물론이지! 할아버지들도 운동하면 몸이 커지는데. 선수가 안되는 게 어딨어."
동민이는 어떤 식이든 상관은 없다만 다시 단거리로 돌아가는 걸 꺼려 하고 있었다.
"왜?"
"...잘해 봐야 4등할 거 뭐 하러 해."
나를 포함해서 김진수 권지성은 시니어에서도 금은동 순위를 석권하고 있다.
이 녀석이 허들로 전향한 건 스스로의 목표보단 상대적인 이유가 컸구나.
"동민아. 개소리다. 알지?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꺼내고 있어..."
"세계 신기록 가진 놈은 이 마음 몰라 새끼야."
"아 몰라 씨발 알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나 아니어도 누군가는 기록 가지고 있을 건데 그런 걸 왜 따지고 자빠졌어?"
운동은 단순하고 직관적이어야 된다.
하고자 하는 일념을 가슴에 품고 숨이 넘어가라 뛰는 것이다.
고생하면 실력이 늘고, 따지고 재면 그만큼 성과는 늦어진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거면 그냥 운동을 관둬. 시작도 전에 왜 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병신같이..."
"그럼 내가 널 이길 수 있다고...?"
"당연히 이길 수 있지!! 내가 뭔데? 나 좆밥이야."
"하하... 미친놈."
"이래서 문제다 저래서 문제다. 이게 걸린다 저게 걸린다. 내가 볼 땐 넌 지금 핑계를 찾고 있는 거 같아."
어릴 때 나도 그랬다.
기대감에 다가갔다간 나만 상처 입으니까, 상처받지 않으려고 자기변명을 꺼내며 움츠러들고 피해 다녔었다.
자신감도 없고 뭘 해도 안 될 것만 같던 시절, 갑자기 꿈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꿈 하나만 보고 달렸다.
물론, 중간에 형이 막힌 기혈을 뚫어 주며 환골탈태를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지만, 이 자식은 굳이 새롭게 몸을 바꿀 필요도 없어. 나같이 죽을 고생 하면서 몸을 뜯어고치지 않아도 된다고.
내 눈엔 보인다.
동민이 몸속 깨어나지 못한 내공이 저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결국 의지의 문제라고 본다.
스스로 벽을 넘어서야지, 닫힌 문은 본인이 열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왜냐면 이건 말 그대로 내공(內功)이니까.
"할 거지?"
"..."
"아 빨리! 아니면 나도 시간 안 버리고 돌아가고!!"
새끼야 나라고 너한테 독한 소리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잖아.
근데 이기고 싶다며.
우승 메달을 목에 걸려면 그만한 과정을 거쳐야지 어쩔 수 없어 이건.
적어도 김진수나 권지성은 내가 세계 신기록을 세웠든 금메달을 몇 개 가지고 있든 신경 쓰지 않고 운동을 하고 있어.
오히려 더 이기려고 발악을 하고 있다고.
800m 진운이는 어떤데. 그 새낀 이미 국내에서 날 한 번 이겼어.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
마음만 있다면.
"허들 한 게 아까워서 그래?"
"뭐... 그런 것도 있는데..."
"자. 봐 봐 동민아. 난 너가 1년간 허들을 했으니까 단거리를 다시 하면 좋겠다는 거야."
"왜? 무슨 의미가 있다고?"
"허들 하면서 너 점프 많이 했지?"
"존나 많이 했지. 가랑이 찢어지게 뛰었지."
"그래! 그러니까 그만큼 지금 넌 옛날보다 관절을 더 크게 벌릴 수 있게 됐다고."
다리가 넓게 벌어진다는 건 그만큼 넓은 보폭으로 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100미터에서 보폭은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스키를 타면서 느낀 건 모든 운동은 다 이어진다는 거였다.
우리 몸의 모든 근육은 상호 작용을 한다.
육상 선수라고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다. 역도 선수 못지않게 무게를 들고, 반대로 역도 선수들도 전신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운동장을 뛰어다닌다. 덩치 우락부락해 보이는 역도 선수들도 100미터를 11초 내지 12초에 주파하는 선수들이 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종목이 서로 간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토리노에서 짧고 강렬한 사랑을 나눴던 사쿠라 아야도 매력적인 몸 안에 탄탄한 복근과 대퇴근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운동을 했냐고 물으니 그녀도 육상 훈련을 병행했었단다.
그렇게 사쿠라 아야는 어린 선수들이 유리한 피겨 종목에서 20대 중반이란 나이로 현역을 유지해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나 스키 타면서 허벅지 더 단단해졌어. 아마 지금 뛰면 기록조금 더 줄었을 거야."
"우와... 그럼 신기록이 또 바뀌는 거네."
"어쨌든, 너 1년 동안 허들 한 거 절대 마이너스 아냐. 대신 그만큼 넓은 보폭을 받쳐 줄 근력은 빡세게 키워야지."
"근력... 나도 한다고 했는데..."
"어려운 거 생각하지 마. 이거 해내면 지금 가지고 있는 기록에서 1초 줄어. 그것만 봐. 그럼 너도 9초대 선수 되는 거야!"
"말 참 쉽게 한다."
"쉽게 봐. 운동 단순해. 너 고3 마지막에 10초 후반 됐었잖아.
1초만 줄이자고. 딱 1초만."
진수와 지성이는 오직 육상만 보고 있었다.
물론, 두 녀석도 열심히 하지만 기록은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다.
어떻게 보면 돌아가는 길이 더 빠를 수도 있다.
허들을 경험한 동민이가 확실히 실력이 늘 수 있다고 본다.
"아무튼 해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피하지는 말라고. 내가 됐든 누가 됐든 그냥 씨발 다 발라 버린다 생각해. 알았어?"
"하하... 이 새끼."
세계 신기록이 뭐? 금메달이 뭐 어쨌는데? 그게 있으니까 넘어설 길이 있는 거잖아.
새끼. 조금만 더 강한 투쟁심을 보여 주면 좋겠는데...
이럴 땐 상택이 형같이 사람 질리게 만드는 욕심이 한편으론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근데, 나 그렇게 챙기다가 넌 어떻게 운동하려고?"
"걱정 마. 너 운동하는 그 이상으로 나도 할 거니까."
"어떻게?"
"내가 하는 운동이 니 운동이 될 거야."
동민이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돌아본다.
"미친놈아... 지금 니 프로그램에 나를 맞추라고?"
"응."
"야. 안 돼! 부상 와."
"돼. 할 수 있어."
"아... 새끼야 나는."
"친구야. 잘 들어. 넌 나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어."
진짜다. 내가 의미 없는 우쭈쭈하는 위로나 하자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내 눈엔 보인다. 진짜 그걸 어떻게 말을 해 줘야 하는지.
"그 힘은 너 스스로 믿어야 다가갈 수 있어. 나도 그랬어. 진짜 이건 날 믿어 봐. 미리 힘들 걸 겁먹고 주저하지 말고. 한계를 넘고, 숨이 끊어지게 운동을 해 손에 쥐라고."
"그러니까 그게 쉬운 게 아니라고..."
"쉽다곤 안 했어. 해야 된다는 거지."
적어도 내가 만나 본 우승권 선수들은 다들 그런 과정을 넘어 포디움에 올라섰다.
사람을 지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막연히 운동할래 같은 게 아닌. 어떤 성과를 내고 싶은 사람에겐 동기 부여를 해 줘도 그 이상의 의지는 대체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일까.
이거 아니면 결국 엘리트 체육에 맡겨야 하는데...
가야 돼. 해내야 해. 우린 할 수 있어.
"해 보자. 더 나은 퍼포먼스를 위해서."
브라운 제임스가 NBA의 전설 마이클 조던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조던이 그렇게 동료들을 괴롭혔었단다.
몰아붙이고. 더 강하게 연습하라고 화내고. 소리치고 심지어 어떨 때는 주먹으로 때리기도 했단다.
슈퍼스타라곤 상상도 안 되는 끔찍한 인성질을 보여 줬는데. 그 럼에도 선수들이 조던을 따른 건, 그는 자신이 하지 않는 운동을 주변에 강요하지 않았단다.
그 역시 사람들에게 원하는 만큼 스스로가 보여 주었다.
나도 그래야 돼.
내가 먼저 뛰고 동민이에게 그만한 역량을 요구해야지.
* * *
늦은 시각. 또 하나의 도전을 부르짖는 청년이 전주에 도착했다.
"마하 형!"
"어. 정수야."
"우와~ 하하하! 혀엉~!!"
늘 엄선된 컬렉션으로 우리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던 친구의 동생.
정석이와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정석이보단 키도 크고 허우대도 멀쩡한 이정수.
설마 춤을 추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어떻게 자기 길을 찾았나 보다.
"우와! 이거 형 차예요?!"
"응. 타라. 정수야 인사해. 우리랑 같이 운동할 동민이 형이야."
"아. 네. 형. 안녕하세요."
"어. 정석이가 여기 온다고 뭐라고 안 해?"
"우리 형 아세요?"
"알지. 형들 다 친해."
"뭐라고 안 했어요. 잘하고 오라고 하던데요."
"그래?"
말하는 게 어딘가 구라가 좀 섞인 거 같은데... 이따가 애한테 전화 한번 해 봐야겠다.
"정수야. 숙소는 아직 못 구해서. 그때까지는 나랑 모텔에서 지내자."
"어... 우와. 모텔..."
"왜?"
"뭔가 야해서요..."
하하하! 역시 이놈은 우리랑 코드가 맞을 거 같더라니.
셋이서 저녁을 먹고 동민이와 헤어졌다.
당장 내일부터 운동이니 일찍 자고 내일 보자면서 정수와 맥주한 캔씩 사서 모텔에 도착했는데.
"너 술 먹지?"
"형. 근데 형 이러고 돌아다녀도 괜찮아요?"
"뭐 어때. 오히려 여기 오니까 사람들이 잘 못 알아보고 좀 편해."
"우와..."
"아무튼, 먼저 올라가 있어라. 나 전화 한 통만 하고 갈게."
"네!"
정석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이러저러 지금 정수랑 있다고 해 주니.
"뭐? 걔가 어딜 갔다고?"
"하하하. 역시... 그냥 내려왔구나."
"정수? 내 동생? 진짜로? 뭔 소리야 지금...?"
갑자기 연락이 와서 이러저러 몸 좀 키워 달라길래 내려오라고 했다 전해 주니까. 정석이가 한숨을 푹 쉰다.
"아 이 새끼... 그래도 가출해서 있는 것보단 낫네."
"왜? 정수 뭐 사고 친 거 많아?"
"장난 아니지..."
춤춘다고 가족들이랑 갈등이 컸었나 보다.
정석이는 정석이대로 애가 말을 안 들어서 속상했는데, 차라리 내가 데리고 있는 게 안심이란다.
"야 씨발 이왕 운동시키는 거 정신머리도 좀 뜯어고칠 수 있게 해 주면 안 되냐?"
"하하! 미친놈아. 내가 무슨 태권도장이냐?"
"어쩐지. 나한테 자꾸 니 전화번호 묻더라니..."
"그랬었어?"
"...부탁한다. 뭐 말린다고 걔가 내 말 듣겠냐."
"알았어. 걱정 말고."
"야 근데 학교는?"
"그냥 제끼고 오라고 했어. 우리 운동 시작할 거라고."
"씨발 내 동생 앞길 망치기만 해!"
"꺼져 새끼야."
걱정 마라 친구야. 정수도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돌려보낼게.
모텔방으로 올라오니 정수가 침대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정수야. 너 뭐해?"
"어? 형..."
"왜 이렇게 조용하게 있어?"
"여... 옆방에서 신음 소리 들려요..."
"하하하!! 야 인마!"
괜히 꼴리는 상황 만들지 않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모텔이 어쩔 수 없지 뭐."
"우와... 어우 씨..."
"춤은 언제부터 춘 거야?"
"어렸을 때부터 원래 관심이 많았어요."
"정석인 그런 얘기 한 번도 안 했는데."
"형이 뭐 저한테 관심 갖나요. 맨날 돈 벌 생각만 하고 있지."
"우리 형도 비슷해."
어떻게 하다 보니 우리 형제와 저쪽 형제들이 섞이고 말았구나.
형들은 다들 현실적인 목표를 보고 있고, 동생들은 꿈을 향해 달리고 있다.
"춤은 뭐야? 브레이크 댄스 이런 거?"
"네. 보여 드릴까요?"
"여기서?"
"잠깐인데 뭐 어때요."
그러더니 정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다리를 막 휘적휘적거렸다.
"우와..."
"아우 씨. 어우 손목아."
"와... 장난 아닌데?"
비보이였다.
내가 봐도 전신 근육을 안 쓸 수가 없어 보인다.
정수도 손목과 어깨. 복근이 엄청 땡긴다면서 자신의 한계를 절 감하고 있었다.
"그냥 헬스장 가서 운동해도 되지만, 헤헤헤. 가까운 데 운동의 스페셜리스트가 있는데."
"잘 왔어. 근데 우리는 딱히 너가 원하는 그런 운동이 아니라 전신 강화 운동을 할 거야."
"좋아요! 춤추려면 체력도 필요하거든요."
춤추는 사람들은 다들 골병을 안고 있단다.
무릎 관절 성한 사람이 없고 어깨 탈골 안 된 사람이 없단다.
방금 전 보여 준 기술도 몇 번이나 손목을 삐면서 엎어져서 얻은 기술이라고 해 줬다.
"관절은 한계가 있어. 근육으로 보호해 줘야 돼."
"역시 메달리스트."
"운동하면 다 배우는 거야."
정수도 우리들 프로그램을 따르라고 해 줬다.
전신 강화 운동을 할 거니, 뭘 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해내면 보다 더 강한 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제가 형들 운동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그럼. 다 돼."
"형들은 전문 선순데요...?"
"할 수 있어. 몸은 의지가 있으면 다 끌려오기 마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