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20화 (220/401)

꿈과 의지 (3)

"진짜로 하자고?"

"넌 왜 내가 뭐만 하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냐?"

"아니. 지금 체력이 바닥인데... 뭔..."

"나도 그래. 야 난 작년 가을 이후로 달리기 자체를 안 했어."

"넌 동계 올림픽 갔다 왔잖아! 어디다 비교를 하고 있어!"

뚜벅뚜벅 출발 지점으로 돌아갔다.

팀이 무너졌어도 동민이는 꾸준한 육상 훈련을 했고, 난 반년간 스키 선수로 살았다.

"지금은 나도 9초 안 나올걸?"

"그래도 기본이 어디 가냐..."

"내기할까?"

"무슨 내기."

"내가 9초 안 넘는다 내기."

"꺼져. 그런 걸 뭐 하러 해."

출발 지점에 도착.

슬렁슬렁 어깨와 허벅지를 당기며 근육을 풀었다.

"그럼 상품 걸까?"

"무슨 상품...?"

"이기면 차 사 줄게."

무슨 방법이든 쓰고 싶었다.

빡치면 이기고 싶어지지 않을까? 열 받으면 없던 힘도 생기잖아.

실제로 동민이는 공격성이 생겨야 제 실력이 발휘된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은근 부드러운 녀석이었다.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다른 학교 출신 육상 새내기를 동갑이라고 챙겨 주고 데리고 다녀서 한주고 육상부에 안착시켜 주었다.

가끔 욕을 하지만 성질부리는 것도 없고 땡깡 피우거나 하는 것도 없다.

힘들고 지친다고 후배들 기합 주고 하는 것도 없었지.

두 분 감독님들도 우릴 그렇게 지도하지 않았지만, 당사자가 그런 성향이 없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 있다.

그런 놈이 정반대의 상황에서 제 실력을 낼 수 있다니.

이놈의 투쟁심을 대체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진심이냐?"

"응. 완전."

"..."

"왜?"

"너 조금 재수 없는 거 알지?"

"내가 그럴 능력이 있는 것도 알지?"

"이 새끼가..."

사람의 내공을 읽는다는 게 마냥 좋은 게 아니구나.

이 자식 분노하는 것 같더니 또 바로 기운이 식고 있어...

화를 자제하는 동민이. 내가 왜 이런 재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지, 바다 같은 이해심으로 납득하고 지나간다.

새끼야. 날 이해하지 말고 니 감정에 집중하라고...

빡쳐. 열 받어. 그래서 박살 낼 거야.

제발 그런 투기를 뿜으라니까.

"정수야~!!"

"네! 형."

"준비해!"

일단 출발 자세를 갖추자 동민이도 옆에서 몸을 낮췄다.

"3시리즈 얼마 안 한다."

"..."

"진심이야. 날 이겨 봐."

몇천만 원 차 한 대로 친구의 잠자는 실력을 깨워 낼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지.

진심으로 달릴 생각이다.

동수가 준비 땅! 이라는 원초적인 출발 신호를 외쳤다.

스키를 타며 익숙해진 속도감과 바람이 있어 그럴까? 첫발부터 몸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훅! 후욱!"

그런 면에 있어선 확실히 육상 훈련을 계속해 온 동민이가 몸이 가벼웠다.

출발 30미터까진 녀석이 왼쪽 눈언저리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50미터, 60미터를 지나며 가속도가 달라졌다.

단단해진 허벅지와 복근이 탄력을 내며 몸이 치고 나갔다.

"마하 형 골인! 동민이 형도!!"

"하하! 야. 우리가 공이냐?"

"어... 어.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 거예요...?"

"후욱! 일단 기록은?"

내가 10.34 동민이는 11.03이 나왔다.

"후욱. 후우. 역시 9초 안 되네."

"헉! 허억! 헉...!"

"오케이. 라스트 아홉 바퀴. 가자 동민아!"

"미친놈아 정말로 끝까지 하려고?"

"그럼. 어서 끝내고 집에 가자!"

터덜터덜 먼저 출발 지점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동민이가 정수한테 기록을 물었다.

"나 얼마 나왔어?"

"11초 03이요."

"후우 후우... 마하는?"

내 기록을 듣더니 동민이 놈이 달려온다.

"야!"

"어우 힘 많이 남았네. 잘 뛴다?"

"너 일부러 천천히 뛰었냐?"

"미쳤냐! 내가 뭐하러 그딴 짓을 해."

겨우내 누구보다 운동을 했지만 그건 어쨌든 스키였으니까.

무엇보다 올림픽 끝나고 두 달 간 휴가를 다녀오지 않았던가.

지금은 나보다 동민이가 더 트랙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뭐 설마 내가 니 자존심 살려 주려고 일부러 천천히 뛰었을까봐?"

"..."

"승부 앞에서 그 정도로 호인은 아니지."

"하긴. 너 승부욕 강했지..."

"후우~ 자. 다시. 라운드 투."

클라우팅 출발 자세를 갖추며 몸을 낮추고, 동민이도 옆에 와서 앉았다.

"동민아. 우리 둘이 뛰는 게 얼마만이냐?"

"2년 됐겠지."

"2년이라..."

용인에서 전주로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이놈은 한 번도 나랑 뛰면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

"훅! 훅!"

"허억 헉...!"

"기록은?"

"형. 10초 50 나왔고요. 동민이 형 11초 60이요."

"후우. 계속 처지네."

"하아 하아. 야 구마하. 이제 그만하자... 심장 터질 거 같아."

"아직! 8바퀴 남았어! 가자!!"

"미친놈 저거 진짜..."

다시 돌아간다.

아직은 견딜 만하지만, 전력 질주 10회를 뛰고 나면 마지막엔 걷는 것도 힘들어지겠지.

그래도 그런 벽을 만나야 진정한 힘이 깨어난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그때. 내 안에 잠자는 저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내공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거기까지 가기가 어려울 뿐이지.

물론 동민이의 경우엔 한 가지 더 투쟁심이란 과제가 있지만...

"후우. 후우."

"왜 이렇게 숨을 몰아쉬어. 너도 힘드냐?"

"당연하지. 난 인간 아니냐."

"그럼 관두자... 오늘만 뛰고 그만할 거 아니잖아. 어?"

"닥쳐. 약한 소리 하지 마."

세 번째 정수의 준비 땅. 이번엔 나도 10초 후반으로 기록이 줄었다.

"훅! 후우!"

"마하 형. 물 좀 드세요."

"괜찮아. 이따가."

동민이는 바닥에 무릎을 짚고 엎어졌다.

"뭐 해. 일어나."

"허억 허억... 새끼야 넌 씨발 800을 뛰니까 이게 되겠지만..."

"나 800 더 뛰는데. 800 뛰려면 1,500 훈련해야 돼."

"후욱... 후우... 잘나서 좋겠다 씨발놈아."

"가자. 일어나. 어서!"

팔을 잡고 일으켜 주고 먼저 출발 지점으로 돌아갔다.

"다섯 번 뛰고 잠깐 쉬자."

"후우 후우... 큰 배려심 존나 감사하다..."

"빈정거릴 기운으로 니 몸에 집중해."

"허억 허억..."

"느끼라고. 몸속 저 안쪽에 꿈틀거리는 그 힘을 느껴 봐."

"꺼져 뭐가 있다고."

본인이 깨닫지 못하면 모르는 일이지.

네 번째 다섯 번째. 우리는 또 달렸다.

운동장을 설렁설렁 걷던 분들도 멈춰서 구경하신다.

"헉! 헉! 정수야 기록은?"

"어... 이제는 형도 11초로 내려왔어요."

"쟤는?"

"...11초 96이요."

"오 그래? 동민아 들었냐? 같은 11초란다."

"헉 헉...! 말 시키지 마... 숨차..."

바닥에 땀으로 그림자를 만드는 동민이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마주 보았다.

"너 오늘 처음에 10초 93 나왔어. 그 속도면 이제 나 이긴다."

"하아 하아. 너 일부러 이러는 거 내가 모를 거 같아...?"

"..."

"그만해라. 진짜. 나도 슬슬 빡친다..."

온다. 오고 있다.

"그럼 이겨 보든가."

"이... 새끼가"

그거야. 그 마음이다.

눈빛에 불길이 살아나고 있어.

투쟁심을 가져. 날 제끼겠다는 그 일념에 집중하고 처음의 힘을 발휘하라고.

"안 되겠네. 원래 다섯 바퀴 뛰고 쉬려고 했는데, 쉬면 나도 체력 돌아올 거니까. 다시 가자!"

"헉 헉..."

헐떡이는 놈을 놓고 출발 지점으로 돌아갔다.

동민이도 욕 한 바가지 던지며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야. 3시리즈 아직 유효하냐?"

"하하하..."

"쳐 웃지 말고. 대답하라고. 유효해?"

허리를 짚고 돌아서며 말해 줬다.

"물론이지."

"후우. 후욱..."

"왜? 이기고 싶냐?"

"...에이 씨발."

"동민아."

"후우... 후우. 왜?"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날 이기고 싶었던 적은 있었어?"

"..."

땀과 열기가 붉은 기운과 함께 동민이의 전신에서 피어오른다.

됐어. 왔어. 이 반응이야.

잘하면 몇천 깨지겠는데? 중고차로 사 준다고 할 걸 그랬나?

저 멀리 정수가 형! 준비됐어요!! 라고 물어본다.

잠깐 손 들어 호흡 고를 시간을 가지며 다시 동민이를 보았다.

"헉. 허억 야. 우리 처음 포항으로 전지훈련 갔을 때."

"후욱 후우 그때 왜...?"

"난 그때 니네 학교 사람들 보면서 다 이기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어. 지고 싶지 않다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새끼..."

"원수는 무슨."

출발 자세를 갖추자 동민이의 열기가 피부에 닿는 거 같다.

"후우. 후우."

"헉. 허억."

이겨라 친구야.

나도 진심으로 달릴 테니까.

정수도 뭔가 분위기를 느끼는지 한동안 침묵 속에 출발 신호를 끌었다.

"준비!"

우리는 동시에 엉덩이를 들며 근육의 긴장 상태를 올린다.

"땅!!"

팍팍팍!! 트랙을 밟으며 두 팔을 흔들어 상체를 당겼다.

눈앞에 동민이의 뒤통수가 있었다.

"헉! 헉!"

스타트가 좋았어. 역시 붉은 내공의 소유자.

육상을 처음 시작했을 때. 지민이 형을 이기며 단숨에 팀에서 에이스로 부상했지만, 그래도 가끔 동민이의 뒷모습을 보며 달릴 때가 있었다.

난 그게 싫었다.

내 앞에 누가 있는 걸 허락하면 다시 움츠러들고 조용히 살던 때로 돌아갈 것 같아 나를 단련시켰다.

"허억 허억!"

"훅 훅!"

거친 숨소리와 지면을 박차는 힘찬 소리 외 다른 건 들리지 않는다.

60m 70m. 잘은 모르지만 80까지는 동민이가 나를 앞서고 있던 것 같다.

그러나 결승점은 내가 먼저 들어왔다.

"헉! 헉!"

"후욱 후욱."

정수가 기록을 말해 준다.

나 10.67 동민이 10.78.

"아슬아슬했네."

"허억 허억..."

"야. 들었냐? 너 최고 기록 냈어."

"허억. 허억..."

"오늘 처음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고."

내공을 느낀 거다. 그 힘을 끌어냈어.

난 기뻐하며 동민이한테 다가가 어깨를 잡는데, 녀석이 힘차게 뿌리친다.

"씨발. 그래서..."

"..."

"결국 또 졌는데... 최고 기록이 뭐가 중요한데..."

땀인지 눈물인지 동민이의 얼굴에서 참 많은 물들이 흘러내렸다.

"이제 네 번 남았냐?"

"어."

"가자."

나보다 동민이가 먼저 출발 지점으로 돌아갔다.

정수가 가만히 쳐다보다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해 줬다.

"형. 진짜 간발의 차였어요."

"...그랬어?"

"제가 볼 땐 거의 한발 차이였던 거 같아요."

기록을 보면 그렇겠지. 둘 다 11초에서 10초대로 들어왔는데.

"정수야. 동민이 빠르지?"

"네. 근데 제가 볼 땐 형이 훨씬 빠른 거 같아요."

"후우. 어서 끝내고 밥 먹으러 가자."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는데, 동민이에게 방금 같은 투지가 느껴지질 않는다.

"..."

"허억 허억..."

여기서 더 몰아붙이는 건 서로 감정만 상하겠지...

아니 어쩌면 이미 선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시작하자."

"헉 허억..."

승부에 일부러 져 준다는 건 없다.

어딘가는 그런 방법을 써서 선수의 자신감을 키워 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렇게 열 바퀴 훈련을 마쳤다.

역시나 몸에 진이 쭉 빠져서 걷는 것조차 기력을 써야만 했다.

"허억 허억... 수고했다."

"훅 훅..."

"형들 여기 물 마시세요!"

"어."

둘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데, 멀리서 지켜만 보던 주민들이 다가와 말씀을 건네셨다.

"구마하 선수 맞죠?"

"네? 어. 네."

"아니... 누가 이렇게 오밤중에 열심히 운동을 하나 했더니. 아무리 봐도 구마하 같은데."

"하하. 아 여기 친구랑 같이 훈련하려고요."

그 순간 동민이가 벌떡 일어나 먼저 운동장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느라 애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야~ 진짜 엄청 열심히 하는구나. 악수 한 번만."

"네. 아우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그럼 다시 육상으로 돌아온 거예요?"

"전 트랙을 떠난 적이 없었어요."

"아니 그래도. 먼저는 스키 선수가 됐다고 하길래."

"외국에선 병행하는 선수들도 많아요."

* * *

구마하가 전주에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고 있는 시각.

육상 연맹 천병욱 전무 이사는 제자 이현석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로도 안 왔다 이거냐...?"

"네. 이 녀석 지금 어딨는지도 모르겠어요. 상률이 놈은 연락도 없고..."

"한주고 이 선생이랑 전화해 봤는데. 전주로 갔다고 그러더라."

"전주는 왜요? 거기 누가 있어요?"

"동민이라고. 허들 뛰는 친구가 있는데."

"아. 네. 저도 봤었어요."

"후우..."

친구와의 의리도 있고, 선수 개인으로서의 정의도 있다.

마하도 마냥 고집을 부리는 건 아니었다.

천병욱과 이현석도 구마하의 속사정을 알게 됐다.

"그데요 선생님. 마하가 하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에요."

"선발전은 나도 동의하지만..."

"아니. 애초에 운동이 회장님이 보는 거같이 그렇게 수학적으로 떨어질 수가 없잖아요."

박문기는 경영인 출신이었다.

실적이 우선이고 합리적이고 낭비가 없어야 했다.

그 결과 장기적인 투자가 아닌, 잘하는 몇몇만 끌고 가고 싶다는 그만의 방침이 나온 것이다.

간판선수와 연맹 회장의 가운데에 낀 사람들만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일 대표 팀 모인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랬지... 내일부터 여름 해외 대회 준비해야지."

"회장님한텐 말씀드리셨어요?"

"아직 안 드렸다."

"제가 가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어차피 지금 상률이도 자리에 없는데, 제가 책임질게요."

"가만있어라. 연세대 학생들은 지켜야지."

인맥과 능력은 좋을지언정, 사람은 치졸한 인간이 박문기다.

괜히 한데 묶여서 다른 이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마하를 이렇게 놔둘 수도 없었다.

다음 날. 월요일.

천병욱은 큰 결심과 함께 회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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