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의지 (7)
서울. 한국 육상 연맹 사무실. 박문기 회장이 대한 체육회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징계를 걸 만한 사유가 없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니. 국가 대표 호출을 선수가 거부하는데... 이걸 징계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대한 체육회는 각 종목의 선수 선발을 연맹의 권한으로 일임하고 있다.
다만, 선발에 있어선 공정과 원칙을 권고하는 바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이어진 육상 연맹의 비선발전 대표 선수선발에 관하여 안 그래도 한 번쯤 이야기를 해 볼 마음이 있었단다.
"그럼... 작년에 이야기를 하든가."
"그때는 구마하 선수가 있었잖아요."
"..."
실력이 곧 능력임을 입증하는 스포츠 세계였다.
구마하의 항명은 박문기의 목을 겨누는 칼날이 되었다.
"공정하게 선발전을 여시죠 회장님. 그게 맞습니다."
"이봐요. 축구나 야구도 선발전을 엽니까?"
박문기는 천병욱 전무에게 했던 말을 되돌려 받는다.
"어디와 비교하시는 겁니까. 기록경기랑 전술 경기가 같을 순없잖아요."
사정을 안 이상,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와 연맹의 분쟁을 두고 볼 수 없다.
최대한 빠른 시일에 갈등이 원만히 해결되고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란다.
대한 체육회는 그렇게 박 회장의 요청을 무마시켰다.
"허-! 언제부터들 그렇게 공정을 준수했다고..."
이 나라 스포츠 협회 우두머리는 기업 회장에 준하는 파워를 가진 자들이 선출되어 올라간다.
박문기도 자존심이 있었다.
제아무리 구마하라 하더라도 이쪽은 사회적 경력과 연륜이 있다.
저쪽의 요구 사항을 순순히 받아들일 순 없었다.
그는 사람을 불러들였다.
"그래서. 지금 그 친구 하나 때문에 이 사달을 벌이고 있다 이 거구만."
"예... 그렇습니다."
"그럴 거면 지가 와서 제대로 부탁을 하든가. 뭐 하는 짓이야."
현역 실업 대학 팀 코치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박문기도 구마하와 이동민의 소식을 들었다.
그의 격정적인 반응에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다들 한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회장님. 그냥 선발전을 여시는 게..."
"현역 선수들도 조금씩 사기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대표 팀에 대해서 다들 의욕이 그리 크지 않았었는데."
"..."
결국 스포츠는 스포츠로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권력과 자금을 쥐어흔들더라도 체육인들의 가슴 속엔 공정에 대한 대원칙이 자리하고 있었다.
"후우..."
* * *
"네. 교수님."
"잘 지내고 있냐?"
"그럼요. 열심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전주에 있다면서?"
"어?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
슬슬 전주 거리가 눈에 익고 맛집 리스트가 완성되어 가던 어느 날이다. 연세대 이현석 교수님에게 연락이 들어왔다.
연맹에서 지침이 내려왔단다. 육상 선수 구마하에게 국내 대회의 출전을 허락하지 않겠단다.
박 회장님의 감정적인 결정이긴 하지만, 나름 이유도 있었다.
나는 현재 대학생 신분도 아니고 실업 팀 소속도 아니다 보니, 내가 뛸 시니어 무대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뛰겠다면 동호회 수준의 국내 대회는 거부하지 않겠다는데. 후후후 박문기 이 치졸한 새끼.
"근데 이건 국내 사정이고. 넌 엄밀히 세계 선수권 우승자니까.
세계 랭킹 1위의 선수가 뛸 국제 무대는 널려 있다."
"네. 그럼요."
"상률이는 뭐라고 그러냐?"
"감독님 연락 안 돼요."
"무슨 소리야? 한 감독 어디 갔는데?"
"신혼여행에서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지금까지 안 돌아와?"
"모르겠어요. 사모님한테 연락해 보려고 해도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보니까."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한 달은 다녀오신다고 했는데, 지금은 한 달 반이 넘었으니까..."
"흠..."
아무튼,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국제 육상 대회가 있다.
지금 박문기가 대표 팀을 소집해 움직이는 이유도 바로 이 국제대회에서 포인트를 확보해 한국 선수들의 세계 랭킹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국가 지원은 못 받더라도 사비로는 얼마든지 나가 참가할 수 있다.
돈은 좀 아깝겠지만. 그래도 엘리트 체육을 거부하는 나로선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너한텐 국민들이 있으니까. 너 돈 많이 벌었잖아."
"하하! 그럼요."
"마하야. 이게 니가 원하는 길인 거지? 자유롭게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운동하는 거."
"네. 교수님."
"...다들 생각은 했다지만, 몸소 부딪혀 보는 건 니가 처음이구나."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선발전에 대해서도 각 팀과 선수들의 목소리가 모이고 있다고 하셨다.
어른들은 강하게 맞서지 않으면서 연대하여 싸우는 법을 택하고 계셨구나. 역시 체육인들의 마음은 하나로 통한다.
교수님은 그것도 누구 하나가 총대를 매 주니 가능한 일이었다며,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 세상이 내가 홀로 싸운 이야기를 알아줄 날이 올 거라고 해 주셨다.
"딱히 세상이 알아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는데..."
"후후후. 친구와 하는 운동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어... 교. 교수님.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거예요...?"
"하하! 이놈아. 내가 공으로 이 자리에 앉은 줄 알았어?"
"어... 우와..."
"동민이라는 친구라며. 시합 영상 찾아봤다. 짧은 경력치고는 자세가 나쁘지 않더라."
"다시 단거리로 돌아왔어요."
"진짜?"
"네. 그래서 같이 계주 나가서 금메달 따 오기로 했습니다."
"하하하. 아하하하하!"
왜 이렇게 호탕하게 웃으시는가 여쭤보니 교수님이 재미난 말씀을 해 주셨다.
"안 웃을 수 있나. 지금 니가 그 친구를 코칭하고 있다는 거 같은데. 이대로 가면, 구마하 팀과 국가 대표 그리고 대학 팀 선수들까지 다 맞붙지 않겠어?"
"오오~ 또 이야기가 그렇게 되네요."
"마하야. 지도자는 선수와는 또 다른 평가를 받는다."
"하하하..."
"재미난 판이 짜여지는구나. 니 녀석이 고집하는 스포츠의 방향과 우리가 해 왔던 방법. 박 회장의 방법. 셋 다 결과가 말을 해주겠지."
딱히 동민이를 앞세워서 내 뜻을 주장하고자 했던 건 아니지만, 일이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대회에서 보자."
"네 교수님."
상황이 정리됐다.
어차피 국내 대회는 나가기 조금 꺼려졌는데, 잘됐어. 오히려 내가 없는 게 선수들한테 더 나아.
난 국제 대회로 움직여야지.
그랑프리고 기업 대회고 다 참가해서 시합 감각을 유지해야겠다.
바빠지겠구나.
근데, 이런 일정을 논의해야 할 감독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 걸까?
* * *
"그럼 넌 대회를 못 나가게 된 거야?"
"그렇다네."
"야 아 그러니까 연맹이랑 맞서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한국 육상 연맹이 낀 대회를 못 나가지. 해외는 상관없어."
대충 혼자서 스케줄을 정리했다.
5월 한 달 예정되어 있던 시합은 다 빠지고, 6월부터 열리는 해외 시합을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다.
"형. 근데, 다른 사람들은 국가 지원받고 움직이는데, 형 혼자서 움직이면 손해잖아요?"
"괜찮아. 난 손해라고 생각 안 해."
"얘 돈 많잖아."
"하하! 돈을 떠나서. 국가 지원으로 움직이면 딴짓을 못 하잖아."
"뭔가. 니네 교수님이란 분이 연맹을 돌려 까는 방법을 알려주신 거 같다."
"음. 그러니까 이렇게 대회 리스트도 쫙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 주셨지."
아직은 선발전이 공식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걸음 전진했다고 본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사냐..."
"몰라. 될 대로 되겠지. 우리 할 거나 집중하자."
다시 훈련이 이어지는 나날이 이어지는데, 며칠 뒤 정수가 중간 고사가 있어서 성남으로 먼저 돌아가게 됐다.
"안 봐도 되는데..."
"야. 우리도 시험은 봤어."
"형들 솔직히 찍어 놓고 잠만 잤잖아요."
"그래도 찍는 거라도 해야 내신이 나오지."
"그래. 시험 안 보면 그냥 없는 거야. 졸업 못 할걸?"
"알겠어요. 중간고사만 보고 바로 또 내려올게요."
정수를 올려보내자 뭔가 허전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시합이 있어서 컨디션을 가다듬었다.
"이번 대회에 애들 나온다더라."
"훅! 훅! 연락 왔냐?"
"응. 진수가 전화 왔어. 대표 팀에서 국내 대회 치르고 오라 했다네."
"훅! 후욱! 재밌겠네."
진짜 교수님 말대로 삼파전이 됐구나.
정말 어떻게 되려나.
"대회도 안 나가는 놈이 왜 이렇게 땀을 빼고 있냐."
"빼야지. 어차피 세계 무대로 가는 건데."
"...마하야. 그거 나도 나갈 수 있어?"
"뭐? 국제 대회?"
"어."
"참가만 하면 될걸?"
"돈 많이 드냐?"
"안 들어."
"왜 안 들어. 비행깃값에 호텔비에."
"내가 내면 되잖아."
그리고 동민이도 국제 무대에 참가를 결정하고 있었다.
"..."
"하고 싶으면 말해. 같이 가자."
"아니. 내 돈 주고 가고 싶다."
"괜찮아. 한구 스포츠도 있고, 상택이 형도 회삿돈으로 훈련하고 그랬어."
"그 형은 대학생이잖아. 난 엄밀히 실업 팀 소속이고."
먼저 전주 시청에 문의를 해 보고 안 된다면 그땐 개인 자격으로 움직이겠단다.
"꿈이 생겼어."
"좋네. 뭔데?"
"말 안 할래. 꿈은 개인적인 거라."
"하하하! 그래 좋지."
꿈이 생겼다는 말을 들어 그런가, 아니면 훈련이 익숙해져서 그런가. 동민이는 운동하는 중간중간 빠져나가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나와 비슷하게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몸속 깊은 곳에 자리한 내공은 여전히 다가가질 않고 있길래 또다시 형한테 전화를 걸었다.
"너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야."
"힘이 있는데?"
"본성(本性)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본성?"
"그래. 동민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거야. 그 힘을 꺼내 쓰면 안 된다는 걸."
형이 말해 주었다.
무림에서도, 모든 이가 무술을 익힐 순 없었다.
할 수 있는 자들이 있고 안 되는 이들이 있다.
할 수 있는 자들 가운데서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강한 기운에 매몰되어 멸문을 맞이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동민이가 그 힘을 쓰지 않고 운동하겠다면, 그건 그대로 가야 하는 거야."
"그럼 너무 아깝잖아... 나 못지않게 강한 기운이 있는데."
"어쩔 수 없어. 지켜봐 줘. 응원해 주고. 어차피 처음부터 그러려고 같이 운동하던 거 아니었어?"
모든 게 내 욕심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친구가 내공에 눈을 떠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성공하는 모습은 결국 내가 바라는 것.
동민이의 꿈은 아니지 않던가.
이 친구의 꿈은 말하지 않은 자신만의 것으로 남아 있다.
"알았어."
"고생하고. 언제 둘이 올라와. 너가 제대로 못 본 걸 수도 있으니까."
"응. 안 그래도 대회 끝나고 한번 올라갈 거야."
* * *
"마하야. 오늘 운동 군산으로 가자."
"군산은 왜?"
"점점 사람들 늘어나는 것도 그렇고."
"하긴, 먼저 김제랑 익산도 가니까 사람들 나 알아보더만."
"오늘은 군산에서 해. 끝나고 내가 밥 살게."
"오오~ 니가 밥을 다 사고."
"한 번 정돈 내가 살 때도 됐지."
우리는 군산으로 넘어가 훈련을 마치고 유명한 중국집 앞에 멈췄다.
"어? 나 여기 드라마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나도 실업 팀 들어오고 예전에 딱 한 번 와 봤는데 맛있어 괜찮아."
"신기한 메뉴가 많네."
"다 시키자. 그냥 코스로 시킬까?"
"허허. 제대로 쏘는데?"
한주고 시절 회식은 늘 중국집이었다. 동민이와 둘이서 그때의 분위기를 즐겼다.
"이야~ 잘 먹을게."
"그래. 마하야. 먹으면서 들어 봐."
"아 또 뭐. 밥은 그냥 편하게 먹자."
"하하! 이 새끼 뭘 그렇게 민감하게 지랄이야."
어쩐지. 돈도 없는 놈이 선뜻 판을 깔더라니.
뭔가 중차대하게 할 말이 있어 던지고 있다.
"다음 주에 있는 대회 말이야."
"어."
"일단은 은퇴 무대로 생각하고 있어."
"...새끼 진짜 밥맛 떨어지게."
"하하하! 그러니까 들어 보라고."
자기가 봐도 나와 함께 보낸 지난 한 달간 참 많은 노력을 했었단다.
그렇게 노력을 했기 때문에 냉정한 평가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해도 안 되면, 더 이상은 운동에 길이 없다고 받아들이기로 했어."
"야. 나 오늘 오향장육 처음 먹어 본다고..."
"대신, 만약 이기면."
"이기면?"
"그때는 진짜로 니가 말한 그 힘을 끌어내기 위해, 더 참고 노력해 볼 생각이야."
내가 없는 한국 육상의 넘버 1을 가리는 무대.
시니어 첫 챔피언을 결정지을 대학 실업 팀 대회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