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니 나비가 모이는구나 (1)
"잘 먹을게 지성아. 우승 축하한다."
"아니 형들 다 돈 버는데 왜 내가 사야 되는데?"
"우승했잖아. 인마."
"동민이 형도 준우승했잖아요."
"준우승이랑 우승이랑 같냐!"
"지성아. 난 아직 학생이야."
"진운아. 너 학원 강사 뛰는 거 다 알아."
"그거 주말만 하는 거야."
오랜만에 친한 애들끼리 한자리에 모였다.
다들 흥분되고 즐거운 표정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는 어쩐지 기분이 멍했다.
진수가 치킨을 뜯어 먹다가 고개를 돌린다.
"마하야. 너 왜 안 먹어?"
"어? 어..."
"왜? 동민이 우승 못 해서 기분 별로야?"
"형 그런 거예요?"
"아니. 아니야. 별로 상관없어."
"뭐? 상관이 없어!? 이 새끼가..."
갑자기 멍해진 이유. 그건 경기 후 인터뷰를 마친 뒤 아버지 천병욱 전무님과 이현석 교수님이 건넨 이야기 때문이었다.
* * *
"전주에서 훈련하고 있었지."
"네."
"그럼 사비로 운동한 거냐?"
"돈 별로 안 들었어요. 헬스장 하나 전세 내고. 밥값이야 뭐. 그 정도는 어려울 거 없으니까요."
"그래도 운동장이 있어야 되잖아."
"시민 운동장이 많잖아요. 전주도 있고, 익산, 김제. 여차하면 군산으로 건너가서 운동해도 됐었구요."
"사람들 쳐다보지 않았냐?"
"봤죠. 근데 어차피 큰 무대 나가면 다 관중들 있으니까요. 저도 고3 때 학교에서 혼자 운동할 때 대학생 형 누나들 보는데 개의치 않고 뛰었잖아요. 그런 게 뱃심 기르는 데 도움 됐고요."
"그렇지. 그런 것도 실력에 영향을 주지."
"어떻게 보면, 한 자리에 묶이지 않고 다양하게 왔다 갔다 한 게 더 운동이 다채롭고 즐거울 수 있었던 경험이 된 거 같아요. 그 때그때 먹는 거에 대한 기대감도 있고."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경험이었다.
의지만 있다면 태릉이 아니어도, 연세대 같은 좋은 훈련 시설이 아니었어도. 어디서든 운동할 수 있는 것이 육상이라는 걸 알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천병욱 아버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마하야. 다음부턴 훈련 가기 하루 전에 전화해라. 어디든 운동장 비워 두라고 할 테니까."
"네? 아우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넓은 장소가 필요할 거다."
"헬스장은 어떤 데냐? 시간 되면 나도 가서 좀 둘러보자."
"교수님. 저 잘하고 있는데요..."
"너한테 사람들이 몰릴 거야."
"...네? 무슨 사람들이요?"
"마하야. 동민이랑 운동할 때 쓴소리도 하고 그랬니?"
"예 뭐. 근데 자주는 아니고요. 아무래도 친구다 보니까."
"엄할 땐 엄하게 가야 된다."
"저... 두 분 지금 저한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세요...?"
"선생님이 얘기해 주시죠."
"마하야. 만약에 말이다. 정말로 선발전이 열리지 않게 된다면 말이다"
* * *
아버지가 나한테 국가 대표 감독직을 맡으라고 하셨다.
마라톤이나 기타 종목은 그쪽으로 경험과 연륜이 있는 분들을 선출하겠지만, 트랙에 있어선 내가 담당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하셨다.
실제로 동민이가 이번 대회에서 엄청난 발전을 보인 만큼 두 분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보고 계셨다.
감독이라고? 내가?
것도 어디 고등학교나 중학교 육상부도 아닌, 태극 마크를 책임지는 수장이 되라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아무리 친구에 잘하는 애들이라도 그렇지. 너무 큰 책임이 아니던가.
"그럼 니네 밥은?"
"얘가 다 샀어."
"오~ 구마하."
"역시 마하 형. 돈 많지."
"동민아. 장비 같은 건? 썰매나 기타 등등은 너네 팀에서 가져오고?"
"응. 그건 우리 시청에 있는 거 쓰고. 운동장은 그때그때 여기저기 왔다 갔다 했어."
마침 애들도 동민이한테 우리 훈련 이야기를 묻고 있었다.
"야. 그럼 너 집은 어떻게 한 거야? 설마 동민이네 있던 건 아니지?"
"아니지. 구했지."
"어~ 어... 전주 집값 싸냐?"
"난 같이 있어도 된다고 했는데. 정수라고 우리 친구 동생이 하나 있는데, 걔 같이 오는 바람에 얘가 따로 구했어. 너 그거 전세였냐?"
"단기 임대. 근데 니네 왜 이렇게 우리 훈련에 관심이 많아?"
지성이가 먼저 말했다.
"형. 나도 같이 가서 운동해도 되요?"
"..."
"야. 나도. 시청에 허락받고 올게."
"800미터는 안 껴 줘?"
"뭐래 새끼들아... 니네는 태릉으로 가. 왜 이쪽으로 온다고 난리야."
"그거야 뭐. 동민이 기록 나오는 거 보면."
"당연한 거죠. 마하 형. 찾아보면 주변에 다 형한테 가겠다는 애들 많을걸요?"
"야. 800은 안 껴 주냐고. 너도 800 선수잖아."
잠깐만. 이야기가 이렇게 된다고? 진짜로?
난 그냥 동민이 생각하고 박문기 하는 짓 좆같아서 개인 행동한 건데. 얘네가 이렇게 나오면...
"너네 연맹은 생각 안 해?"
그러자 애들이 막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뭐래. 니가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그러니까 조금 황당하다... 우리가 걱정할 때는 됐다고 그랬으면서."
"마하 형 우리는 별로 실력 키워 주고 싶지 않아요?"
"난 찬성이야. 너네도 이 새끼 본성을 알아야지. 악마 같은 새끼."
"..."
학생 때부터 친한 애들이기도 하지만, 여기 모인 친구들은 명실 상부 대한민국 육상의 에이스들이다.
지성이 진수.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단거리 스프린터로 올라선 동민이.
그리고 아마 나 말고 최초의 국제 대회 메달리스트가 될 수도 있을 800m의 김진운까지.
얘들 넷이 나에게 온다면 그건 육상 연맹의 모든 것을 가져오는 이야기가 된다.
아버지나 교수님은 이걸 예상하셨던 걸까...
두 분은 이미 박문기와 반대로 가기로 결정하셨다는 건가?
"아 몰라. 나도 다음 달 대회 있어. 지금 너네 챙길 여유 없어."
"이 새끼 그냥 운동하는 거 따라만 가도 돼. 내려와."
"뭐래 병신아 그걸 왜 니가 결정해."
"우리 시니까 그러지."
"...그리고 무슨 내 운동을 따라가. 다 각자에게 맞는 운동법이 있는데."
"우리도 태릉에서 개인 운동 했어요. 한 감독님 계실 때랑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고."
"그치. 그래도 그때는 구심점이 있었지만, 이번엔 좀 뭐랄까...
따로 흩어지는 기분이라서 태릉에 있기도 좀 애매해."
"같이 운동하면 재밌긴 하겠다. 나도 마하랑 중거리 훈련 해 보고 싶었어."
대표팀 감독이 공석인 상황에서 다들 의지하고 기댈 곳이 필요했다.
형이 말한 대로 이대로 모두를 끌어안고 팀 구마하를 단단하게 만들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동민이와 다른 세 녀석은 엄밀히 입장이 다른 상황이다.
이놈은 할 수 있는 놈이 안 하고 있던 거고, 세 녀석은 이미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다.
공부에 비유를 하자면, 평균 60점 받던 학생을 80점대로 끌어 올리는 것과 90점 받는 애들을 95점으로 만드는 건 엄밀히 다른 이야기다.
훈련법도 달라져야 하고, 상황도 바뀌어야 한다.
내가 다채로운 사람들을 한데 묶을 수 있을까?
이건 진짜 프로 선수를 규합하는 일인데. 서로서로 라이벌이면서 각자 소속 팀도 다른 애들을 국가 대표란 이름으로 뭉치라고?
"허어..."
"야 너 진짜 왜 그래?"
"그러니까. 아까부터 애들이 무슨 말만 하면 멍때리고 있네."
"어이 구마하. 너 진짜 내가 우승 아니라고 지금 이러는 거 아니지?"
"아니면, 진짜로 동민이 형이 은퇴하기를 바라고 있었다든가."
"뭐? 아 이 새끼가 진짜..."
"하하하! 농담이죠."
애들끼리 웃고 떠들라 그러고 잠깐 화장실 좀 간다며 밖으로 나왔다.
"하아. 감독이라..."
지금 나이에 대표 팀 감독이라니... 좋은 거냐? 너무 빠른 거 아닐까?
친구들만 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선수들도 있는데.
무엇보다 감독은 성적을 내야 하잖아...
어이고 쫄려라. 동민이 한 새끼 경기 보는 것도 그렇게 두근거리는데, 사람이 늘어나면...
이래서 한상률 감독님이 매번 연맹에서 구애를 해도 손사래를 치시는구나.
"근데도 참 신기하지..."
걱정 드는 한편, 다른 쪽에선 도전 의식이 꿈틀거린다.
일단, 내가 감독이면 적어도 선수 훈련에 관한 권한은 생기는 거니까. 그럼 진짜로 엘리트 스포츠를 넘어선 나만의 운동법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만에 하나, 애들이 성적이라도 잘 나와 봐.
진운이 같은 애들은 분명 아시안 게임에 가서도 좋은 결과 낼거라고.
지성이도 그렇고, 진수. 동민이도 이제 막 싹트기 시작했고.
어쩌면 내가 이 나라 육상 훈련의 기본이 될 수도 있다.
이미, 한주고 시스템이 대한 체고의 스파르타식 훈련을 넘어서고 있다는 말들도 들리는데. 좋은 기회가 아닐까?
그래도 역시 감독은 감독.
결과로 평가를 받기에 선뜻 그러자고 의지의 깃발을 세우기가 어렵다.
"감독님. 진짜 어디 계세요..."
이런 큰 문제를 옆에서 같이 상의해 줘야지.
결혼했다고 그냥 훅 가 버리는 게 어딨어...
아니 그것보다 진짜 뭐 잘못된 거 아냐? 사람이 근 두 달을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게 말이 돼?
혼자 끙끙거리고 고민만 하다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애들이 동민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 새끼 왔네."
"왜? 내 얘기 하고 있었냐?"
"동민이가 너 진짜 도움 됐다고."
"뭔 씨발. 오글거리게 지랄이야."
"미친놈이 칭찬을 해 줘도"
"꺼져. 칭찬은 무슨..."
"아 이 형들은 친한 거야 뭐야."
"하하하! 야 니네는 같이 운동했다는 애들끼리 왜 그래?"
일단, 내 고민은 뒤로하고. 애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동민이의 날이니만큼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운동을 하며 재밌다고 느낀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노력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란다.
무엇보다.
"아까 엄마랑 통화했었는데."
"어. 연락하셨냐?"
"내가 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거 같아."
동민이는 부모님의 무관심을 힘들어했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무관심한 게 아니라 이놈을 생각해서 내색을 하지 않고 계셨었다.
"우리 엄마 너랑 나랑 친구인 것도 알고 있더라."
"병신아! 당연히 아시지!!!"
"마하 예전부터 니 얘기 많이 했었어."
"그러니까. 마하 형 한주고에서 운동한 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닥쳐 이것들아. 니네가 내 맘을 아냐고."
동민이의 문제는 잘 해결된 것 같다.
꿈이 생겼고 의지가 깊어졌다.
훈련에 대해서도 설렁설렁하는 건 없어졌겠지.
녀석은 한발 더 나아가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마침 다들 모여 있으니까 말하는데. 아시안 게임. 계주. 우리 넷이 나간다."
"음."
"그러게. 늘 한 사람이 아쉬웠는데. 형까지 10초 초반이 됐으니까."
"아. 부럽다... 나도 팀 경기 하고 싶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일단 우리는 아시안 게임에서 중 국과 일본이란 벽을 넘는 걸 공동의 목표를 삼았다.
"이기자. 우리도 국제 대회에서 단상 올라가 보자고."
"오 동민이 형. 원래 이렇게 파이팅 넘치는 성격이었던가?"
"이 새끼 분위기 존나 타."
"꺼져. 반년도 안 남았어. 분위기 타야지."
"좋네. 넷이서 계주라. 이두희 선생님 이후로 아시안 게임 금메달 없는데."
동민이의 상승세가 모두에게 좋은 기운을 주는 것 같다.
좋아. 다 좋은데.
"후우..."
감독님. 대체 어디 계시냐고요...
아 이제는 진짜 혼자선 벅찬데...
* * *
다음 날. 동민이는 시합도 끝났고 부모님도 보고 싶다며 일찌감치 떠났고, 나는 아직 교수님도 계시고 우리 학교 후배들과도 안면을 틀 겸 안동에 남아 있었다.
"어이고 유명인을 이렇게 만나게 되는구만."
"형. 나도 바빴다니까요."
"그렇다고 학교도 한번 안 오냐? 상택이는 OT까지 따라갔다 왔다더만."
"그 형은 뭐... 원체 여기저기 끼기 좋아하는 성격이고."
상택이 형과 동기. 내가 만든 육상 팀의 실질적인 주장. 양민구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애들은 어때요?"
"잘해. 솔직히 이러고 내가 애들 코칭하고 있는 게 맞나 싶어..."
"왜요? 어떤 데? 누가 우리 형 무시해?"
"야 이 씨. 조용히 해. 나름 이미지 메이킹 잘해 놨단 말야."
양민구 선배.
육상 선출이기도 하고, 상택이 형과 다르게 의지가 되는 형이다.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 주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만약 내가 많은 선수들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이런 사람이 옆에 있어 주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애들 왜 이러냐. 너 없을 땐 니 얘기 많이 하더니, 막상 와 있으니까 다가오질 않네."
"저 민구 형. 형 혹시 다음 학기 휴학할 수 있어요?"
"응? 나 바로 임용 준비 할 건데."
"아. 그래요..."
"왜? 뭐 할 거 있어?"
"저기 다른 게 아니라... 어제 교수님이랑도 이야기를 했었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지?
내가 먼저 나 대표 팀 감독 할 수도 있는데 수석 코치 좀 해 달라고 해도 되나?
이렇게 사람을 친분으로 뽑아도 되는 걸까?
민구 형한테 그럴 능력은 있을까?
애들이 형 말을 들을까...?
"음. 아니에요."
"뭔데? 말해 봐."
"뭐 상의할 게 있는데. 형 오늘 끝나고 저녁에 저랑 술 한잔해요."
"오케이. 야 일단, 저 김진수 약점 뭔지 좀 말해 봐. 권지성도 그렇고. 어제도 씨... 니 친구들 때문에 우리 애들 하나도 결승전못 갔어."
"하하. 아 형..."
학교냐 우정이냐 난처한 선택을 강요받는 그 순간.
마침 전화기가 징징 울리며 자리를 피하게 만들어 준다.
"어디 가?"
"전화 좀."
"야. 너 지금 나 피하는 거지!"
"하하. 진짜 전화가 와 가지고."
어라? 농담 삼아 피하려고 했는데 진짜 안 받으면 안 되는 전화가 걸려 왔다.
"가... 감독님!!?"
"마하야. 잘 지내고 있었어?"
"어. 어디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