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니 나비가 모이는구나 (3)
성남에 위치한 비즈니스 호텔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오자 형은 정좌를 취하며 기를 다듬었다.
유진 볼트는 형을 보면서 신기한 듯 물었다.
"뭐 하시는 거야?"
"일종의 치료 준비지."
"...형이 의사셔?"
"음. 설명이 조금 복잡한데. 잘 들어 봐."
유진 볼트는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들은 사람일 것이다.
그냥 진솔하게 말해 줬다.
우리는 원래 한국인이 아닌 티벳 고원에서 살던 사람들인데. 마을에 화가 닥쳐 형제만 도망쳐 한국 국적을 가지고 한국인이 되었다.
"너 난민이었구나!?"
"그렇지. 난민이지."
"어... 근데 이런 건 어디서도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긴데..."
"깊은 사정이라 거기까진 언론에 얘기 안 했고. 어쨌든 우리 아버지가 고향에서 이름난 무술가셨는데. 형이 아버지한테 그런 걸 배웠어."
카리브해 자메이카 섬에서 작은 희망을 찾아 여행을 온 유진 볼트에게 티베트와 아시아의 신비는 매력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맞아! 그래서 미스터 한이 널 찾아가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음. 일단 옷부터 벗고."
"어?"
"위만 벗으면 돼. 편하게 앉아 있어."
형도 준비가 됐는지 깊은 심호흡을 뱉었다.
유진이는 착실하게 옷을 벗고 형을 마주 보며 두 손을 합장해 고개를 숙였다.
"...친구한테 뭐라고 한 거야?"
"그냥 다 말해 줬어."
"이상하게 생각 안 해?"
"안 해. 그냥 형 하던 대로 해."
형은 유진이한테 돌아앉으라 말하고 등에 손을 얹었다.
"MAHA. w... what's going on?"
"릴렉스 브로. 트러스트 미."
형은 유진이의 기를 읽었다.
얘도 엄청난 몸을 가지고 있구나. 삐적 마른 거 같은데 근육이 진짜 꽉 차 보인다.
나보다 빠를 수 있다고? 그럼 대체 얼마를 뛸 수 있다는 거지...?
두 사람은 대충 한 시간 정도를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형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유진이도 걱정스레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뭐가 잘 안되고 있는 걸까?
"후우."
"됐어? 어때?"
"마하야. 친구한테 혹시 태어났을 때부터 뼈에 문제가 있었는지 한번 물어볼래?"
형의 말을 전해 주니, 유진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Y... yes sir."
"형 그렇데."
"역시... 평상시에도 많이 아팠을 건데 어떻게 운동을 했을까."
이번에도 또 이야기를 전해 주니, 유진이 얼굴에 감동과 두려움이 서리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아는 거야?"
"말해 줬잖아. 우리 형은 기(氣)라는 걸. 즉, 인간의 에너지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마... 말도 안 돼. 그런 게 진짜 가능해?"
"티벳은 신비로운 땅이니까."
"우와... 마하 너..."
"유진 웨이트. 톡 투 레이터. 형 뭐? 얘기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치료 불가였다.
유진 볼트는 아픈 상태로 너무 오랜 시간 그만의 방법으로 단련하고 성장해 왔다.
"일종의 사파 무공 같은 거야."
"그게 뭔데? 나 무림 몰라."
"새로운 흐름이라는 거지. 이 친구는 이 친구 나름 안정적인 방향으로 내공을 운영해 왔는데. 이제 와서 아픈 몸을 치료하고자 무리하게 외부적인 힘을 주입했다간 뒤틀린 뼈가 잡히는 게 아닌 환골탈태가 일어나."
"외과수술이 낫겠네..."
"아무리 독특한 기혈이라도 그 나름대로는 작동하니까."
"으음."
"대신, 정말 엄청난 노력을 해 왔을 거야. 어떻게 보면 너보다 더 어려운 시간을 이겨 냈을 수도 있어."
유진도 형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어렵다는 거구나."
"음. 미안하다. 너도 시즌 중에 기대하고 왔을 건데."
"아니야. 그럴 수 있지..."
작년 2005 세계 선수권에서 내가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때. 유진 볼트는 몸이 아파 트랙 중간에서 달리는 걸 멈추고 걸어서 결승점을 통과했다.
나중에 애들한테 들은 얘기론 대기실에서도 엄청 울었다고 한다.
울고 있는 친구에게 다가가진 못했다.
뭔가 우승자가 값싼 동정을 주는 것만 같아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친군데. 생각보다 더 어려운 시간을 이겨 내고 있었구나.
"근데 형이 그랬어.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니라고."
"그래?"
"어. 형 맞지?"
형이 고개를 끄덕여 준다.
아픈 몸을 가지고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몸을 단련한 덕에.
"이대로 더 참고 고통을 이겨 낸다면, 그땐 기대 이상의 미래가 열릴 수도 있을 거래. 통증도 사라지고."
"정말 그렇게 될까? 미스터 구. 정말입니까?"
"내가 널 따라잡을 수가 없다고 그런다."
날 넘어설 수 있다는 말에 유진이가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다.
"좋냐? 이제 좀 웃네."
"물론이지. 마하 넌 내 목표니까."
어린 놈의 새끼가라는 말은 한국말로 해 주니 형이 갑자기 왜 싸우냐고 뭐라고 한다.
"아냐. 그냥 하는 말이지. 얘 이해 못 해."
"일단 상황은 그렇고. 그래도 당장 해 볼 수 있는 건 해 봐야지."
"뭘 할 수 있는데?"
"접골을 좀 해 줄까? 그것만 해 줘도 불편한 몸이 편해지긴 할 거 같은데."
접골이라고 뼈 우드득거리는 거 해 준다니 또 좋다고 형을 끌어 안는다.
형은 자리를 옮겨 유진을 침대에 앉히고 팔을 들어 목을 꺾고 등을 누르고 하여간 별 신기한 걸 해 주고 있다.
"으아악. 미스터 구!"
"와. 뼈 소리가 방안에 다 울려..."
"마하야. 긴장 풀라고 해 줘라. 잘못하단 다친다."
"릭렉스 브로. 저스트 릭렉스."
"어그그극..."
격한 치료가 끝나자 유진은 침대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좀 어떠냐?"
"모르겠어... 몸에서 아무 느낌이 안 나."
"음. 형. 혹시 일부러 나 때문에 얘 기량을 떨어뜨린다든가 그러진 않았지?"
"야 인마... 넌 지금 고생한 사람한테..."
"하하! 미안"
형도 유진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해 준다.
"마하 친구. 하루 이틀은 푹 쉬어야 돼. 그래야 자리 잡은 뼈가 몸에 안착이 될 거야."
"히 새드. 유 슈드 테이크 어 릭렉스. 원 올 투 데이 오프."
유진 볼트는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우며 땡큐 소리를 연발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이대로 잠이 들 것 같단다.
형은 가게 때문에라도 나가고 나는 엎드린 유진 볼트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마하. 이제는 너가 말한 동양의 신비를 믿을 수 있겠어."
"왜?"
"처음이야... 몸이 정말 물에 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몸이 안 좋았냐?"
"세임 유... 나도 위크 포인트를 굳이 떠들고 싶진 않았어."
형은 유진이는 나와 비슷한 성장기를 거쳤을 거라고 해 줬다.
단지 나는 온전하지 못한 몸을 무리하지 않고 한 방에 환골탈태를 하며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면, 이놈은 내가 겪은 그 고통을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변화시켜 왔다.
"야. 니네 나라에서 육상 무슨 큰 대회 같은 거 하지 않냐?"
"CHAMPS 말하는 거야?"
자메이카 중고등 육상 대회. CHAMPS. 전국민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세계 스프린터를 육성하는 토대를 이루는 대회다.
유진 볼트는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청소년 대표 팀에 들어갔었다.
"장난 아니네. 이런 몸을 가지고 그 두꺼운 선수층에서 우승이라니."
"원래는 축구를 하고 싶었어. 그런데, 달리기 훈련을 하다 보니 스프린터가 됐지."
"넌 꿈이 올림픽 메달이냐?"
"물론. 마하 니가 내 오른편에 서는 그런 장면을 늘 그리고 있어."
"하하하! 그럼 너가 동메달이라는 건가?"
"후후. 마하. 솔직히 미스터 한을 만나고, 반신반의하면서도 여길 온 건 다른 게 아니야."
"무슨 문제가 있었구나."
"도망치고 싶었어..."
"왜?"
"그냥. 뛰는 게 두려워서..."
우리가 처음 만난 아테네 올림픽 200미터 예선전.
그때도 이놈은 승부에 앞서 경직되고 긴장된 모습을 보여 줬었다.
발을 떨었지. 손톱을 뜯어먹고 있었다.
상택이 형도 올림픽이 주는 무게감에 짓눌렸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상택이 형은 세계의 높은 벽에 도전하는 걸 주저했다면, 유진 볼트는 세계적인 레벨을 가지고 있음에도 내면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에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응..."
"어쩔 수 없지...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실력이 있는 친구다. 하지만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고통을 이겨 내 왔다.
유진에겐 한 시합 한 시합의 무게감이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작용 받는다.
졌을 때 오는 대미지가 두 배로 오는 것이다. 왜냐면 또다시 통증을 참아 가며 운동을 해야 하니까.
여기나 저기나 사람 사는 거 별거 없구나.
승부나 메달이 아닌, 선수가 보여 주는 성장과 노력을 인정하는 문화란 정말 불가능한 일인가...
"두 번째야."
"뭐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거라는 말을 들은 거. 처음은 우리 부모님이고. 아까 너희 형이 나한테 두 번째로 그 말을 해 줬어."
"..."
"마하. 진짜로 어떻게 손만 대고 알 수 있는 거야?"
"우리가 운동을 하면 체내에 에너지가 쌓여. 동양에선 내공이라고 부르는데. 내공은 내가 살아온 방향과 시간을 몸 안에 기록하는 것과 같아."
"우와~"
"어디 가서 말하지 말고. 알지? 나 작년에 괜히 도핑 의혹 받았던 거."
"그런 일도 있었어?"
"있었지. 외국엔 안 알려졌구나. 여기선 엄청 시끄러웠는데."
유진 볼트는 아테네 올림픽 참가 선수다.
이 친구는 내가 동하계 두 경기에서 메달을 석권했다는 게 무슨 의민지 알고 있다.
"약을 써서 하라고 해도 불가능한 이야긴데."
"후후.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나 자신을 증명했어. 이제는 나한테 약물 소리는 없어."
"헤이 브로. 나도 메달을 따면 세상이 나를 알아주겠지...?"
"유진아. 나는 널 인정하고 있어. 우리 감독님도 널 인정하고 있고. 그래서도 첫 번째 영입할 선수로 너를 만나러 가신 거야."
유진은 조용히 주먹을 뻗었다.
가볍게 주먹을 때려 주고 다시 의자에 앉아 녀석을 보며 말했다.
"쉬어. 비행기 타고 오느라 피로 쌓였을 건데."
"마하... 나도 가능하면 너랑 패밀리가 되고 싶었어."
"쉬라고.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수술 없이 측만증을 치료할 신비로운 방법이 있단 소리에 많은 기대를 품고 왔을 것이다.
올림픽 메달까지의 거리를 숫자로 표현하자면 유진은 지금 90m 정도의 길목에 서 있었다.
남은 10m의 노력도 해낼 수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여기까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 저 허리 통증을 이겨 내야 한다.
"자냐?"
"아직..."
"들어 봐. 이번에 내 친구가 허들에서 단거리로 돌아왔어."
"그런 사람들 많지. 허들은 부상이 많으니까."
"원래도 몸이 가벼운 놈이었는데. 보니까 허들 훈련을 해서 그런가 달리는 폼이 굉장히 경쾌하게 변했더라고."
유진도 고개를 슥 돌리며 물어본다.
"내가 아는 크레이지 보이들인가?"
"아니. 걔네 말고. 아무튼 이 얘기를 너한테 왜 하냐면은."
결국 통증이란 하중과 중력이 몸에 무리를 주기에 오는 것.
그것만이라도 조금 덜 수 있다면 훈련하는 데 있어 고통을 감내할 일은 없을 것이다.
동민이를 힌트로 생각했다.
"유진아. 점프 훈련 할 때 허들을 뛰어 봐."
"뭐가 변할까?"
"충격이 완화될 거 같아. 다리를 직각으로 내리는 게 아니라 멀리 두는 거야."
"그럼 추진력이 떨어지잖아."
"대신 보폭이 넓어지지. 넌 키도 크고 근력도 좋으니까."
나도 육상에서 작은 키가 아닌데, 유진은 나보다도 8cm가 높았다.
커다란 체구. 속이 꽉 찬 단단한 근육.
무사무시한 연습량과 끈기 등등.
어쩌면 유진 볼트는 그만의 주법을 만들지도 모른다.
"넓게 뛰라고?"
"무릎 허벅지만 뒷받침해 준다면 추진력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론적으론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지금 몸 편하다고 했지? 우리 형이 한 카이로프로텍은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니었어. 너도 돌아가면 병원 찾아 봐. 그리고 몸에 무리가 덜한 주법을 만드는 거야."
"...으음"
치료로 통증을 잠재우고 노력으로 몸을 변화시켜 실력을 키운다.
거기에 이 녀석 나름 오랜 세월 갈고닦아 온 내공이 더해진다면.
"그땐 진짜로 나도 따라잡지 못하는 선수가 되겠지."
"마하. 난 진심으로 널 이기기 위해 운동하고 있어."
"알아."
"근데 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 주는 거야?"
"뭐 어때. 나라고 놀고 있는 게 아닌데."
"후후후. 맞다. 넌 리얼 월드 챔프였지."
지독한 환경을 이겨 내고 여기까지 발전을 거듭해 온 유진 볼트.
나는 그에게 새로운 폼을 만들고 그에 맞는 새로운 근력을 더해 보자란 주문을 넣었다.
아마, 그동안 해 온 노력을 두 배 세 배 더하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난 이놈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나는 이기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게 아니다. 운동 그 자체를 사랑한다.
지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메달이나 승부를 나의 목적으로 보진 않겠다 다짐했다.
스포츠는 승패를 떠나 노력하고 도전하는 과정의 찬사가 되어야 한다.
이놈은 나를 감동시켰다.
노력을 해 왔다.
뭐라도 도움이 되는 걸 해 주고 싶어졌다.
"리슨 브로. 난 꼭 널 내 옆에 세우고야 말 거야."
"동메달이 왼쪽에 서는 건 알지?"
"크하하하! 퍽큐 맨!!"
5일이란 휴가를 받고 한국을 찾아온 유진 볼트.
여기 일정을 마치면 자메이카가 아닌 유럽으로 넘어가 대회에 참가한다.
기왕 온 거 푹 쉬다 가라고 해 줬다.
"잘됐다. 마침 낼모레 우리 학교 축제 하는데 거기나 가 보자."
"오~ 코리안 페스티벌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