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니 나비가 모이는구나 (4)
"회장님 또 기자들한테 연락이 들어왔는데요."
"바쁘다고 해."
"저... 한영진 기자님이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한영진이든 뭐든 지금 바쁘다고!!"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고사가 있다.
2004년 모든 이들이 아테네로 건너가 선수를 뒷바라지할 때 박문기는 홀로 남아 언론을 앞세워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건 되돌아 온다.
구마하는 국민 영웅이 되었고, 연맹의 선수단 운영에 반대 깃발을 높이 세웠다.
구마하가 대표 팀에 소집되지 못했다는 말에 언론은 이빨을 앞세워 박문기를 압박하고 있었다.
"천 전무 좀 불러와. 아니. 이 사람 지금 어딨어? 내가 가지."
담판을 지어야 할 상황이 왔다.
박문기는 천병욱을 찾아갔다.
"회장님? 제 방은 어쩐 일로?"
"당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인터뷰를 한 겁니까! 네?!"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니 뭐라도 답을 해 줘야죠."
"그래서? 선발전을 열면 공정한 경쟁이 된다 이 말이세요? 대답해 보시죠."
"..."
"아니. 남들은 몰라도, 당신은 그런 말 할 자격 없지 않나?"
과거 육상 연맹엔 어둠이 있었다.
92 바르셀로나와 96 애틀랜타 두 대회에서 한국 마라톤은 감동적인 금메달과 은메달을 손에 넣었다.
그들에겐 많은 관심과 지원금. 그리고 재능 있는 선수들이 몰렸다.
그러나 당시는 지금보다 더 주먹구구식으로 연맹을 운영하던 시절이었다.
운동에 전념하다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은 경영을 몰랐고. 친분과 선후배 관계는 인맥과 학연이란 부정으로 둔갑하여 어린 선수들의 재능을 썩혀 버렸다.
연맹은 검찰 조사도 여러 번 받았고 능력 있는 지도자는 사회면에 이름을 올리며 물러나고 말았다.
그들 모두는 천병욱의 선배 후배 그리고 동기들이었다. 그는 이런 시대를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천병욱은 연맹의 자정 작용을 위하여 사외 이사들을 대거 불러들이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경영은 전문가에게 자신은 선수들에게. 그렇게 연맹은 변하기 시작했다.
기업 경영을 맡았던 이들은 확실히 투명하고 발전적인 방향을 보여 주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며 그들의 머릿속에 선수보다 실적이 우선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알면서도 천병욱은 한국 육상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걸 감내하고 받아들였다.
"뻔하잖아요. 선발전 해 봐요. 어차피 또 뒷돈 받고 승부 조작할 거고. 이기는 놈 이기고. 밀어주는 놈 나오고. 누군간 투서 보낸다고 언론에 찌르고!!"
"회장님 세상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선수들이 땀을 흘리며 실력을 키우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믿을 만한 놈들만 끌고 가자는 거 아닙니까!
내 말이!!"
천병욱의 가슴에 통증이 밀려온다.
그는 심장을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회장님이 그러셔도 애들은 태릉을 벗어날 겁니다."
"왜요? 우리가 뭘 어쨌다고!?"
"더 실력 있는 지도자를 발견했으니까요."
"그게 누군데요?"
"마하입니다."
또 구마하란 말인가? 그 자식은 번번이 왜 이렇게 발목을 잡는지...
박문기의 머릿속에 구마하란 이름에 안 좋은 감정이 쌓여 갔다.
"대체 그놈은 뭐라고 애들을 선동하고 있는 겁니까?"
"왜 자꾸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마하는 그냥 실력을 보여 줬을 뿐이에요."
"뛰지도 않은 녀석이 무슨 수로 실력을 보여요!"
"동민이가 역대 3위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마하랑 같이 훈련해서 얻은 성과죠."
박문기는 이동민을 떠올려 본다.
작년 2005 세계 선수권 때 구마하와 함께 운동했다길래 믿음을 갖고 선발한 선수였다.
하지만,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여 주었기에 올해 첫 번째 퇴출명단에 이름을 올려 두었다.
"애들은 감독도 선출되지 않는 대표 팀에 있느니, 나가서 마하랑 같이 훈련할 겁니다."
"그래서. 대표 팀을 거부하겠다? 그럼 뭐 지원도 뭣도 다 필요 없다 이거죠? 세계 대회니, 뭐니, IAAF 주관 리그도 지들 돈으로 움직인다 이 말이죠?"
"회장님!!"
박문기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쉰다.
"한 감독입니까?"
"한 감독이 지금 왜 나옵니까?!"
"그럼 대체 누가 이런 걸 조장하고 있는 건데요."
"아무도 조장하고 있지 않아요. 왜 자꾸 그렇게 생각을 하시냐고요. 애들은 공정을 바라고 있고.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찾아갈 뿐이잖아요!"
"후우... 그러니까. 어차피 선발전 열어도 그놈이 그놈이 될 걸 뭐 하러..."
박문기 회장.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개인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사회적 관점에서 대기업 이사출신은 수없이 많다.
IMF란 광풍에 몰려 쉬고 있던 그에게 과거의 상사가 연락을 걸었다.
좋은 일을 하려 하는데 같이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
그렇게 박문기는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았다.
시간이 걸렸으나 구마하란 성과가 나왔고, 그에게 정치권과 사회 각층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는 부활했다.
무기력한 은퇴자에서 100억 가까운 예산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성공한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적어도 그의 시각에서 구마하란 결과는, 천병욱 사단을 떠나, 자신의 공로도 분명히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선수들의 요청을 미래를 보지 못하는 치기 어린 젊은이의 반항으로 볼 뿐이다.
"알겠습니다. 지들이 대표 팀 거부하면 우리도 방법이 없네요.
구마하든 누구든 두고 보자고요."
그리고 이런 박문기를 천병욱은 동년배의 사내로서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존심을 앞세우고 있다.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기에 남은 건 선수들의 불이익만 있을 것이다.
"회장님.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뭐라고요?"
"구마하 권지성 이런 친구들은 한국 육상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다른 아이들도요!"
"전무님..."
"부디 선발전을 열어 주십쇼. 선수들이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시라고요."
"진짜 가지가지들 하는구만..."
* * *
"어서 와요 최 코치."
"네. 회장님."
최일묵 코치는 이두희 전 대표 팀 감독과 동기로 태릉에서 육상트레이너를 맡고 있었다.
그는 천병욱 사단이 아닌 박문기 라인을 잡고 있는 최고참이었다.
"선수들이 태릉을 나온다는 말이 있던데."
"아... 예. 그게..."
"진짜입니까?"
"저... 이번에 마하랑 같이 훈련한 이동민이란 선수가 있는데요."
"알아요. 뉴스로 봤어요. 실력이 많이 올랐다고."
"예. 그래서도 지금 선수들이 기회만 된다면 구마하랑 같이 운동하고 싶다고들..."
"최 코치가 대표 팀 맡는 건 어때?"
"뭐. 젊은 놈들이 제 말 듣겠습니까..."
"쯧쯧쯧. 거 어른이란 양반이 사람을 그렇게 못 다뤄서 어떡해."
박문기는 덤덤한 자세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크흠. 오늘 천 전무가 물러나겠다는 말을 했어요."
"네? 아. 전무님이 왜 갑자기..."
"당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하하... 그럴 리가요. 전무님 좋으신 분이신데요."
"천 전무 없으면 최 코치 라인이 힘을 받겠어. 이두희 감독도 일선에서 물러났고. 이 교수야 뭐. 어차피 별 무게 없으니까."
"하하하... 그렇죠."
"최 코치가 앞장서서 선발전 준비해요."
"선반전을 치르신다고요?"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실적이 없으면 기업 후원금도 없다.
모든 재능 있는 선수들이 구마하를 따라간다면 박문기의 큰 그림도 여기서 끝인 것이다.
일단은 받아들인다.
다만, 계속 끌려가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친구도 들어오라고 전해요.
"그 친구라면...
"최 코치 조카 있잖아."
"아. 예! 안 그래도 조만간 귀국할 예정입니다."
박문기는 머릿속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구마하의 실력과 인기가 너무 높다 보니 자신의 무게감이 약해 진다.
결국 사람 싸움이라면, 스타는 키우면 그만이지.
처음엔 권지성을 세울까 생각했는데, 녀석도 저쪽으로 붙는다면 지원해 줄 이유가 없다.
"인물도 좋고. 스타는 모름지기 남자보단 여자가 낫잖아."
"그럼요. 우리 다빈이야 원체 실력도 좋은 애니까요."
"그 아이를 제대로 만들어 보자고. 건방지고 은혜도 모르는 놈들은 버리고."
"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 * *
"응. 일이 좀 생겨서 며칠 여기 있어야 될 거 같아. 정수랑 같이 운동하고 있어."
"그래. 야 근데, 애들 어떻게 할 거야. 다들 지금 온다고 난린데."
"소속 팀이랑 먼저 이야기하고 결정하라고 해. 태릉이니까 빼줬지. 내가 뭐라고 여길 보내 줘."
오스트리아에서 스테판과 가족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었다.
그래서 나도 유진이를 잘 챙겨 주려고 했는데, 이놈은 형한테 접골을 받고 30시간이 넘는 시간을 쓰러져 자고 일어났다.
"어이고. 마침내 일어났구만."
"브로... 새로 태어난 기분이야... 내가 왜 한국에 와 있는 거지?"
"헛소리 그만하고 밥 먹으러 가게 준비하고 있어. 도착하면 전화할 거니까 호텔 1층으로 나와."
오랜만에 통증 없는 밤을 보낸 유진 볼트.
덕분에 그동안 쌓인 피로도 풀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단다.
배가 꺼질 것 같다길래, 바로 차에 태워서 형네 가게로 갔다.
"왔냐."
"응. 형 유진이도 같이 왔어."
"어. 그래..."
"Mr. KOO!!!"
"하하..."
유진은 정석이와도 인사를 나눴다.
서로 NBA 파티를 떠올리며 반가워는 하는데, 내가 봤을 땐 딱히 얼굴까지는 기억을 못 하는 것 같다.
"얘가 와 있었구나. 정수 지금 전주 가 있어."
"알어. 동민이랑 둘이 운동하고 있데."
"그 새끼 뭐 하긴 하냐?"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너도 니 동생 고생하는데 너무 뭐라고 하지 좀 마라."
"몰라 씨발. 지 인생 지가 알아서 살겠지."
"어이그... 밥이나 줘."
"앉아 있어."
삼겹살을 한국의 트레디셔널 푸드라고 소개하고, 유진이와 둘이서 40인분이 넘는 고기를 먹어 치웠다.
"Holy shit!!"
"야 그냥 좀 먹어. 하나하나 그렇게 반응하지 말고."
고기도 맛있고 야채는 더 맛있고 밥과 국까지 다채롭단다.
카리브해 출신 유진 볼트는 내가 아는 그 이상으로 끼와 흥이 넘치는 놈이었다.
마침 오늘은 아카라카. 대망의 연세대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신촌으로 향했다.
"아 그래? 넌 대학 안 갔구나."
"자메이카 공대가 육상으로 유명하지만. 난 그냥 운동이나 계속하려고."
"넌 영어 잘하니까 미국으로 갈 수도 있잖아."
"마하. 난 홈 타운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어."
옛날엔 실력 좋은 선수들이 미국이나 유럽 국가로 귀화해 출전하는 일들이 많았단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자메이카를 위해 선수들이 뛰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정체성과 애국심을 많이들 신경 쓰고 있다고 해 줬다.
"넌 국가 대표 된 걸 자랑으로 여기는구나."
"당연하지. 넌 아니야?"
"나도 그렇지."
순수하게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마음이 부럽다.
나도 가타부타 따질 것 없이 태극 마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은데...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 단숨에 서울을 돌파. 마포 쪽을 돌고 있었다.
"마하. 서울이 꽤 큰 도시구나... 처음 알았어."
"생각보단 괜찮지?"
"한국은 뭔가 기대와 많이 다른 나라 같아."
"유진. 룩 앳 댓. 저기가 내가 서울에서 사는 집이야."
"오오~~ 좋네."
진짜 오랜만에 집 근처를 와 보는 것 같다.
마포 집을 떠난 게 벌써 몇 달 전이냐? 시간 되면 오늘 잠깐 집에 들러 볼까? 혜정이도 한번 볼 겸.
"수업 중인가? 애가 전화를 안 받네."
"누구? 걸 프렌드?"
"애매한 관계지. 오피셜한 관계는 아닌데. 가까운 사이는 맞아.
친구야."
"빅토리아는?"
"으하하! 언제 적 빅토리아야. 연락도 안 돼. 그러는 넌 여자 친구 있냐?"
"지금은 없어."
"새끼. 야 근데 너 그때 누구랑 있었냐?"
"언제?"
"브라운 파티 때. 너도 그때 누구랑 사라졌었잖아."
"몰라. 기억 안 나."
"그날 진짜 재밌었는데."
"그러게. 멋진 밤이었지."
두런두런 추억을 나누는 가운데 북적거리는 연세대에 도착했다.
축제 날이라 그런가 오후 시간인데도 교문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우와..."
"여기가 우리 학교야."
"한국은 진짜 상상과는 많이 다른 곳이구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학우들이 쳐다보았다.
뭔가 느낌적으로 나보다 유진이를 더 보는 거 같다.
그것도 여자애들이.
흠.
"What? bro?"
"으음. 낫씽."
외국인이라 그렇겠지. 한국에서 흑인 보기 쉽지 않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