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이 피니 나비가 모이는구나. (6) >
"아우 미안해요. 잠깐 얼굴만 보고 간다는 게 어쩌다 자리까지 참석해서..."
"아니에요 선배님! 저 오히려 옆에 계셔서 너무 안심 됐어요. 사람들 앞에서 말하려니까 떨리고 그랬는데."
"올림픽도 나가면서 뭐 이런 걸로 떨어요."
"그래도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아니. 오늘 처음 본 사이에 어떻게..."
재민이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줬다.
"야 얘 우리 후배야. 니가 편하게 대해줘야지."
"허허... 이거 학교 생활을 열심히 안 하다 보니까... 휴학생. 아까도 위에서 얘기 했었죠?"
"말씀 편하게..."
"불편하다잖아."
"아. 알았다고."
잠깐 인사만 하고 오려던 자리에서 졸지에 30분을 떠들고 말았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갔는지. 완전 어두워졌네. 노천극장 쪽은 콘서트장이 됐고.
아이고 익범이 혼자 유진이 데리고 있기 벅찰 텐데...
"재민아. 애들 연락 없었냐?"
"어."
"없어...?"
"없어. 아까 익범이 어디 있다고 문자 하나 보내고 말 없어."
"흠."
진유정 후배가 옆에서 슬쩍 물어본다.
"약속 있으셨나봐요?"
"아. 친구들이랑 같이 공연 보러 가기로 해서."
"유정아. 같이 갈래?"
"네?"
"친구들이 자리 몇 개 맡아놨다고 했는데. 약속 없으면 같이 가서 보자."
"아 저..."
흠. 으흠. 오호라~ 그런 거구나.
어쩐지. 이 새끼 갑자기 열정적으로 단상으로 사람을 밀더라니...
"그러게. 같이 가자. 원래 저런 데 친구들 없으면 은근 가기 어렵잖아."
"아... 그래도 될까요?"
"하하! 설마. 진짜 친구 없어?"
"야!! 넌 애한테 말을"
"어... 없어요."
"없다네."
"없어? 정말?"
"네... 친하던 애들은 거진 대한 체대로 가서."
"아~"
"가자. 재민아. 가면서 이야기 하자."
그래서 친구 없는 진유정 후배님까지 노천극장으로 방향을 바꿨다.
슬슬 걷는 가운데, 우리는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OT를 갔었어? 올림픽 끝나고 얼마 뒤 아니었나?"
"해단식하고 다음다음 날이었어요."
"와. 부지런 하네."
"재민 선배님은 그때 인사 드렸었는데."
"인사만 했지. 상택 선배가 와가지고..."
"하하하! 상택이 형한테 붙잡혔구나."
"네. 그래서 교수님이나 선배님들이랑 이야기 하다... 마하 선배님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저기. 뭐가 됐든 나한테 그 '님'자는 빼. 괜찮아."
"진짜야. 얘 지부터도 선배들한테 막 덤벼."
"내가 또 언제 덤벼. 이 새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
그럭저럭 떠들다 보니 어느새 노천극장.
유진이와 익범이를 찾아 인파를 뚫고 관객석 높은 곳에 오르니, 두 놈이 어떤 여학우들과 같이 있었다.
특히 유진 볼트가 걱정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지내고 있는 것이. 어떤 여학생과 서로 어깨동무하고서 야광봉을 흔들고 있다.
"익범아."
"어. 왔냐. 뭐하다 이렇게 늦었어?"
"지나가다 숲속의 향연에 붙잡혀서."
"응? 재민이 옆에는 누구야?"
"야. 그러는 유진이 옆에는 누구냐?"
새로운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먼저 익범이가 같이 있던 일행들을 소개해 주는데, 한 사람은 우리 과 후배고 유진이와 어울리는 분은 경영학과 사람이란다.
"육상부라고 하던데?"
"아. 그래. 얼굴이 먼저 봤던 거 같다."
"그리고 저 분은 갑자기 니 팬이라고 그러면서 확 친해졌어."
"으음."
"재민이 옆에는 누구셔?"
"저기도 우리 후배. 진유정 선수. 이번 쇼트트랙 3관왕. 숲속의 향연에서 만났어."
"우와... 소문은 들었는데 처음 본다."
유진한테도 어깨를 두드려 내가 왔다는 신호를 보냈다.
녀석은 웃고 소리치느라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져 있었다.
오히려 유진이보다 내 팬이라는 경영학과 사람이 더 성화였다.
"꺄악! 안녕하세요!! 박지연이라고 해요!"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야 야! 선영아 너도 인사 해!!"
"어. 선배님... 오셨어요? 먼저 대회에서 인사 드렸었죠...?"
"응. 그래. 기억난다."
"Hey MA-HA! It's a great party!! MAN!!!"
"그래 그래. 그레이트 파티. 엔조이 브로."
정선영. 얼마 전 안동에서 잠깐 민구 형 통해서 인사를 한 얼굴이었다.
진유정에 선영이까지. 학교 오니까 후배들 여럿 알게 되네.
1학년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과 멀리 바다를 건너온 친구. 그리고 학교에서 새롭게 알게 된 인맥까지. 오랜만에 학교에서 다채롭고 새로운 인물들과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경영학과 04학번 선배님이 호들갑스레 말씀하셨다.
"저 빠른 86이에요!!"
"아 그러세요."
"응! 말 놓자고 친구끼리!!"
와우 사교성 이정석 못지않은 사람인데? 엄청 살갑게 다가오는구만.
경영과 박지연이란 분은 다들 이대로 헤어지기 너무 아쉽지 않냐며 자기네 과로 막무가내로 우리를 끌고갔다."
"응? 가요. 가서 더 놀자. Eugene! what do you think about it?"
"Let's GO! BRO!! whatever!!!"
"야. 난 얘 때문에라도 가서 어울리고 와야겠다."
"그래. 그럼 우리도 같이 갈까?"
"유정아 넌 어떻게 할래?"
"저도 좋아요."
정선영이란 후배는 빠지고 싶어하는 눈친데, 박지연에게 붙들려 막무가내로 끌려오고 말았다.
공연 멤버 그대로 우리는 경영학과가 운영 중인 주점으로 몰려갔다.
나도 있고. 유진이에 진유정 선수까지 있다 보니 우리 그룹은 자연스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분위기는 뜨겁고 반쯤 걸쳐있는 관계까지 더해져 꽤나 흥미진진한 자리가 되었다.
무엇보다. 박지연이란 분이 유진이랑 아주 그냥 짝짜쿵 영어로 웃고 떠들고 난리가 났다.
"와 저분 왜 이렇게 잘 놀아?"
"나도 잘 몰라."
"선영아. 저기. 니 친구라는 분 일부러 오버하시는 건 아니지...?"
"아... 저 언니 원래 노는 거 좋아해서... 죄송해요 선배님... 제가 친구분한테 그러지 말라고 얘기 할 게요."
"으음. 아니야 아냐! 신경쓰지 마. 잠깐만 나 화장실 좀 갔다올게."
적당히 놀다가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유진이는 박지연이란 사람한테 붙들렸고. 재민이는 진유정한테 홀딱 빠져 흑기사를 자처하고 있다.
좋구나. 역시 대학은 이래야 제 맛이지.
아~ 씨발 운동선수는 괴로워...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나오는데 익범이와 마주쳤다.
"야 잠깐만 기다려봐."
"왜? 딸이라도 치게? 망봐 줄까."
"이런 놈이 무슨 금메달리스트라고... 야. 저 진유정 쟤는 왜 너네랑 어울리고 있는 거야?"
"몰라. 난 잠깐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숲속의 향연 끝나고 재민이가 데리고 왔어. 친구가 없데."
"뭐야? 니네는 빨리 온다고 해놓고 뭐하고 다닌 거야?"
"미안. 근데 우리도 붙잡힌 거라. 뭐라고 하지마.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말리냐."
과연 서재민의 사랑은 이루어 질 것인가. 익범이와 철학적인 고민을 해봤다.
"근데, 진유정이 너한테 관심이 많은 거 같던데... 니네 회사 이름도 아는 거 같고."
"그러니까. 아까는 괜히 난처하데."
"아무튼, 잘 해보고. 난 간다."
"응? 야. 뭐야 어딜 가."
현역 대학팀 소속인 익범이는 대회가 있어 놀고 싶어도 놀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아이고. 그런 상황에 유진이랑 있느라 고생했다..."
"아냐. 재밌었어. 오랜만에 영어 써서 좋았고."
"그래. 야 내가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게."
"넌 요즘 어디서 뭐하고 있냐?"
"전주. 한번 내려 와. 전주 맛있는 거 존나 많어."
"하하! 여자친구랑 시간 되면 갈 게."
"타임 타임!! 어이! 고익범이! 야 이 씨발 그건 또 뭔데?"
"뭐 새끼야. 아 씨 나도 여자친구 사귈 수 있지."
"아니. 그런 말 한 마디도 없었잖아??"
"다른 학교야. 다음에 소개해줄게. 간다."
"그래. 고생해라."
흐음. 익범이가 갔다라... 그래도 익범이 있어서 여러모로 든든했는데. 돌아가면 뭔가 분위기가 나한테 몰릴 거 같은데.
역시나, 다들 익범이가 간 건 크게 신경쓰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정이는?"
"아. 유정이도 화장실요."
"으음. 그래서 재민이도 없구나."
"네? 하하... 선배님."
"선영이 넌 유정이랑 동기라면서 친구 아니었어?"
"얼굴을 못 보는데요. 그리고 저쪽은 대표팀이고 저는 뭐... 그냥 선수고."
"와~ 1학년도 이런 게 있구나. 아 진짜 난 그런 거 하나도 모르고 살았는데."
"선배님이야 잘하시잖아요."
박지연과 러브샷을 마시던 유진 볼트가 같이 있던 친구는 어디갔냐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회가 있어서 훈련 때문에 갔다고 해주니, 얘도 얼굴이 많이 아쉬워 보였다.
"유진. 왜? 우리랑 있는 건 싫어?"
"언니. 방금 한국 말 했어."
"얘 한국 말 알아들어!"
와 진짜 미친 사교성이다.
주변에서 다 쳐다보는데 흑인이랑 웃고 떠들고 몸 막 비비고...
엄청난 오픈 마인드네. 이런 사람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될 줄이야.
"언니가 술이 조금 취해서..."
"응? 아. 아니야. 괜찮아."
"Eugene! Eugene! Look at me!! 자~ 짠. 건배."
한쪽은 오픈 마인드의 여대생. 그리고 다른 한쪽은 자메이카 출신의 매력적인 흑인 운동선수...
내 팬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쉽다는 게 아니라, 이래서 흑인한테 간 여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마하야. 너 오늘 성남 내려가?"
"어..."
"왜? 우리 말 놓기로 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성남 사는 걸 지연 씨가 어떻게 알고?"
"아하하하! 한국에 구마하 집 모르는 사람들 있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이 개인정보를 술술 읊으니, 새삼 유명인의 고달픔이 느껴진다.
그 와중에 유진 볼트 이놈은 소맥에 눈이 반쯤 풀려서는 지 아는 지명 나왔다고 "Seongnam! my brother's hometown!!" 이지랄 하고 있다.
"선배님 친구 분 많이 취하셨네요..."
"쟤가 저래 보여도 자메이카 국가대표야."
"아~ 우와..."
"올림픽에서 만났어. 엄청 빠른 애야."
"와..."
아무튼, 박지연이 내게 집으로 갈 거냐 물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으니.
"선영아."
"응?"
"우리..."
둘이서 뭐라뭐라 속닥거리더니 정선영 후배가 질겁을 한다.
"미쳤어! 안돼! 싫어!!"
"뭐 어때."
"..."
"가자. 응?"
뭐 때문에 그러냐고 물어보니, 후배가 난처한 얼굴로 말을 해주는데.
"언니가... 학교는 사람도 너무 많고 사람들도 막 오고 이러니까..."
"그러니까?"
"넷이서 따로 자리 옮겨서 놀자는데 그 장소가 우리 집으로 가자고..."
투룸에서 자취중이란다.
어딘가 아찔한 제안에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데, 박지연은 유진볼트에게도 귓속말로 플랜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자.
"Let's go BRO. Why are you wasting time?"
시간을 버리긴 뭘 버려... 집 주인이 따로 있으니까 그러지...
"근데 자리는 옮기는 게 좋겠다."
"네?"
"아니. 너네 집으로 가자는 게 아니라. 저분도 그렇고. 내 친구도 그렇고 술이 좀 과해지고 있어."
* * *
"그래서 우리 옮기는데. 너네도 올 거면 이쪽으로."
"재미나게 놀아... 나도 갈래."
"왜? 와. 우리 일부러 따 시킨 거 아냐. 그냥 사람이 너무 몰려서 자리 빠졌어."
"알지... 그럼."
흑기사를 자처하던 녀석이 갑자기 방랑기사가 됐을까?
이유야 뻔하지 뭐...
"너 설마 유정이한테 바로 들이댔냐?"
"뭘 들이대... 그런 거 아니라니까."
오랜만에 학교라 그런가 사람들이 치이는 느낌이다.
일단, 재민이와 진유정의 관계는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다.
관여하면 할수록 우정을 잃게 되니까 모르는 척 빠지는 게 좋다.
"일단 이쪽으로 와. 혼자 있지 말고."
"어디 가는데?"
"그냥 방 하나 잡고 놀기로 했어. 와. 알았지?"
"음.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