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이 피니 나비가 모이는구나. (7) >
구마하와 유진 볼트. 정선영과 박지연. 그리고 뒤따라 오고있는 서재민까지.
혈기 넘치는 20대 청춘 남녀가 신촌 거리를 가로질러 레지던스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얘들아 잠깐만. 여기서 마실 거 좀 사가자."
"선배 안 이러셔도 돼요. 저 그냥 언니 데리고 갈게요."
"괜찮아. 나도 사람 많은 거 불편해서 그래."
"아니. 그게..."
"혹시 우리랑 있는 거 싫어서 그래?"
"아! 아!! 아니요. 절대."
자유분방한 박지연과 다르게 운동만 알고 자라온 정선영은 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구마하는 하나의 우상이였다.
다가가고픈 존재와 이렇게 빠르게 거리를 좁히고 술자리를 가지게 된다는 건, 만족과 부담감이 두루두루 섞인 복잡한 감정을 전해준다.
"언니. 언니 정신차려."
"으음..."
정선영은 박지연을 흔들어 깨워본다.
구마하와 유진볼트가 장을 보러 간 사이. 그녀는 한쪽 구석에 조용히 술에 취한 듯 앉아 있었다.
"왜 이래? 취했어?"
"으응. 하지 마."
"이래서 무슨 2차를 가고 3차를 간다고."
"야. 하지 말라고."
비틀비틀 취한 사람의 목소리가 또랑또랑 맑게 흘러 나온다.
"뭐야...? 취한 거 아냐."
"야. 그냥 가만있어.
박지연이 슬쩍 눈을 떠 신촌 거리를 둘러보고 정선영은 그녀를 두렵다는 듯이 보았다.
"서... 설마 연기하고 있는 거야?"
"야. 어디로 간다 그래?"
"내가 어떻게 알어..."
"아. 고민되네. 원래 내 목표는 구마하였는데, 유진 쟤가 은근 애가 귀엽단 말야? 피부도 맨들맨들하고. 냄새도 안 나고."
"..."
"저런 흑인애들 보기 어려운데~ 흠."
정선영은 처음으로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지연은 입맛을 다시며 슈퍼 계산대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본다.
"야. 누구로 할래?"
"뭘...?"
"센스 있으면 방 두 개 잡겠지?"
"그러니까 뭘?!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아닌가? 여자끼리 한 방 쓰게 해달라고 말해야 되나? 구마하 쟤 외제차 타고 다닌다는 거 사실이야?"
"몰라. 내가 어떻게 알어."
"헙! 애들 온다. 야 나 조금 어지러운 거다?"
"어... 언니..."
"조용히 해."
박지연의 행보에 정선영이 부들부들 두려움을 느끼는 가운데, 구마하와 유진 볼트가 큼지막한 비닐봉투를 들고 다가왔다.
"선영아. 지연 씨. 괜찮아?"
"네? 어... 네..."
"Michelle. are you okay?"
"으음. 유진. a little thirsty."
목 마르다는 소리에 유진 볼트가 걱정스레 이온음료를 건네주자, 박지연이 꿀꺽꿀꺽 잘도 받아 마신다.
"하아~ 땡큐~!"
땡큐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선배도 더 놀고 싶어 하시고, 이런 기회 흔치는 않고. 무엇보다 지금 여기서 친구의 가식과 아양을 까발린다고 내 입장이 되돌려지는 것도 아닌데.
여차하면 그때 몸을 던져서라도 막으면 그만이란 생각에 정선영은 일단 조용히 일행을 따라 나섰다.
신촌에 위치한 레지던스 호텔.
구마하는 투 베드 큰 방 하나를 결재했다.
"어우 씨. 오줌 마려라."
"Hey MA-HA! I'm First!"
"기다려 새끼야!!"
중문 하나를 놓고 화장실이 현관에 붙어있는 레지던스 룸.
남자들이 화장실을 나오자 여자들과 자리가 바뀐다.
정선영이 변기에 앉아 소변을 누며 한숨을 쉬고 있는데, 박지연이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 거울을 보고 있다.
"아 이런. 선영아. 너 혹시 붓 있어?"
"내가 그런 게 어딨어..."
"흠. 아쉽지만 뭐."
"언니."
"응?"
정선영은 남자들과 한 방에 있다는 자체로 긴장되는데, 그녀는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꾸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진짜... 진짜로..."
"진짜 뭐?"
"아니야."
"뭐? 할 거 냐고?"
"어어. 으어어..."
어떻게 해야되지. 대체 어떻게 해야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거지...
정선영이 고민에 빠져 스륵스륵 속옷을 올리는데, 박지연이 그녀를 보며 묻는다.
"너 혹시 처음이야?"
"으아아... 이 언니 진짜 미쳤나 봐... 뭐라는 거야 사람을 앞에 놓고...?"
"흠. 팬티가 조금 아동틱하긴 하지만... 뭐..."
"그만 좀 해! 그러고보니까 왜 남 오줌 누는데 따라 들어와 있어?!!"
박지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쟤네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안 그래! 선배가 그럴 사람인가."
"내기할래? 쟤네 아까 장 볼 때 콘돔 샀다 안 샀다?"
"..."
"그래. 이 언니가 큰 마음 먹는다. 구마하 너 해."
박지연이 정선영의 어깨를 붙잡고 결의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차려! 방 하나 잡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침대 두 개 잖아?"
"언니!!!"
"창가 쪽 쓰고 싶으면 써."
"으아악!! 제발 입 좀 다물어!!"
안 되겠다. 가야되겠다. 구마하 선배를 봐서도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고, 이 언니를 봐서도 절대 그런 일은 벌어져선 안된다.
정선영은 당장 가겠다는 인사를 하려고 방으로 돌아왔다.
"선배! 저희 그냥!!"
"응. 둘이 뭘 그렇게 시끄럽냐?"
"어... 어라? 재민 선배님도 계시네요?"
"너네들 바로 따라 왔어."
구마하와 유진 볼트만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까 학교에서 헤어진 서재민이 있었다.
신은 있구나. 역시 사람 자기 욕심대로만 살 수 없는 거야.
"어..."
"전화해서 바로 오라고 했어요."
"아 그럼 진유정 그 친구도 오나요?"
"아니요... 유정이는 기숙사 돌아갔어요..."
박지연도 서재민을 보면서 이건 예상에 없던 그림인데? 싶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입장은 바뀌어 정선영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언니. 이제 술 깼지?"
"..."
"그래도 많이 마시면 안돼. 알았지?"
"쳇."
누군가의 계획(?)은 어긋났을지라도 즐거운 분위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야. 말도 안 되지. 남자들은 그걸 몰라."
"왜? 말이 안돼?"
박지연이 서재민의 연애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니가 걔를 언제부터 좋아했든, 저쪽이 싫다면 그만인 거야."
"아니... 난 그냥 가까이 다가갈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니까?"
"기회가 있든 없든. 그건 아니지."
한 학번이 높지만, 박지연은 나이가 같은 관계로 86년생들과 친구를 맺고 있었다.
구마하는 유진 볼트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유진 볼트도 고개를 끄덕이며 청춘의 고민을 함께 한다.
"Hey Jae-min?"
"야 나 영어 못 해."
"내가 해석해 줄게. 유진 킵 고잉."
정선영은 구마하의 영어 실력에 또 한번 반한다.
유진 볼트의 질문은 대체 진유정 그 사람을 왜 좋아하냐는 것이었다.
"왜가 어딨어... 그냥 학교에서 오며가며 보다 보니까."
"그럴 외모는 아닌 거 같던데."
"어이 이봐요. 경영학과?"
서재민과 박지연 그리고 유진 볼트가 어우러져 사랑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구마하는 그들을 보고 웃고, 정선영은 그런 구마하를 경이롭게 보고 있었다.
"하하하! 새끼. 응? 선영이 왜?"
"어... 선배님은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 하세요?"
"으음.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영어 공부는 좀 빡세게 했어. 외국 나갔을 때 버버거리는 게 싫어서."
"우와..."
"선영이 넌 종목이 뭐야?"
"세단뛰기요."
"오~ 세단 뛰기. 그럼 넓이뛰기도 해?"
"원래는 같이 했었는데, 대학교 오면서는 그냥 하나만 하기로 했어요."
두 사람은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심도있게 나눴다.
"선배님은 달리기만 하시죠?"
"그렇지. 트랙과 다르게 필드 종목은 기술이 필요하니까."
이 얘기를 해줄까 말까...
정선영은 두근두근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대화를 나누던 서재민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용기를 가지고 다가간 거라니까!!"
"용기를 가지고 다가가지 말고, 그 사람 곁을 지켜주라고!"
"...아직도 진유정 얘기 중인가?"
"그런 거 같은데요...?"
서재민도 구마하에게 묻는다.
"마하야. 니가 봤을 때 내가 유정이한테 부족해 보이냐?"
"지연 씨가 부족하단 말은 안 한 거 같은데..."
"아. 어쨌든. 어땠어?"
"몰라 인마. 오늘 처음 본 애를 내가 뭐라고 얘기 해."
정선영은 또 한번 놀랍다는 표정으로 구마하에게 묻는다.
"선배님은 여자애들 얘기 잘 안 하세요?"
"하지. 하는데. 대상이 우리 아는 애고. 오늘 처음 본 사람을 뭐라고 떠들어."
"아 이 새끼 존나 매너"
"하하하! 너 취했냐? 사람들 있는데 왜 욕을 하고 그래."
박지연은 그 사이에 유진 볼트에게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정선영은 빨리 떨어지라고 그녀에게 손짓 하지만 박지연은 무시한 채 서재민에게 말한다.
"야. 서재민이. 연애는 자신감으로 하는 게 아니야."
"...그럼 뭐로 하는데?"
"믿음이지. 진유정이가 금메달을 땄든 뭐든, 걔가 여자고 니가 남자면. 먼저 그런 신뢰를 주라고."
"...어이 마하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구마하도 편하게 자세를 기대며 한 숨을 쉬었다.
"무시 못 할 이야기긴 하지."
"그럼 내가 못 미더운 존재라는 거냐?"
"하하! 그런 뜻이 아니라 새끼야. 여자들이 말하는 저 믿음과 신뢰라는 건 좀 복잡해."
"그럼 너도 모르네. 왜 아는 척 하고 지랄이야."
"하하하하! 니가 술 취하니까 욕을 잘하는 구나."
유진 볼트도 박지연을 통해 내용을 전해듣고 그에게 물었다.
"Hey MA-HA."
"응?"
"Which trust are you talking about?"
"어떤 트러스트냐라..."
구마하가 맥주 한 잔을 털어 넣더니 개인적 고민을 털어 놓았다.
"좋아하는 애가 있어."
"수빈이 누나?"
"아 저 새끼 진짜... 아무튼, 있는데."
"수빈이가 그 이대생?"
"엄청 예뻤었다면서요?"
"장난 아니야. 연예인 저리 가라였어. 차도 포르쉐 타고 다니나."
"에이 씨. 나 말 안 해... 저 미친 새끼는 다 끝난 이야기를 왜 꺼내가지고!!"
청년들의 자리가 늘 그렇듯, 진지한 이야기는 환영받지 않는다.
다시 웃고 떠드는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로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재민이 이 새낀 자네."
"분위기 메이커시네요."
"보자. 아 왜 이렇게 배가 고프냐. 유진 알 유 헝그리?"
"A little bit?"
"나가자. 가서 햄버거라도 사오자."
"선배님. 제가 갈게요."
"아니야. 내가 사면 돼."
"아니요. 그냥 심부름 시키셔도 되는데... 카드만 주세요."
"됐어. 내가 뭐라고 너한테 심부름을 시켜."
그래서 구마하와 정선영이 밖으로 나왔다.
"선배님은 그런 거 잘 안 시키시나 봐요?"
"당연하지. 선배가 뭐 후배 부려먹는 사람인가."
"...진짜 좀 다르시네요."
"응? 뭐가?"
"그냥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까. 뭔가 되게 어려운 분이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하! 그냥 선수 생활을 하느라 학교를 잘 못 나오는 것 뿐이야."
짧은 시간이지만, 정선영은 구마하와 신촌역 패스트 푸드 점을 찾아가는 순간을 심장 콩닥 거리며 만끽하고 있다.
"지연 씨 괜찮나?"
"네? 아 언니요. 괜찮을 거에요."
"아까는 몰라도. 지금은 은근 술 많이 들어간 거 같은데..."
"음. 그래도 재민 선배도 계시는데."
"어? 재민이가 왜?"
"네? 아. 아니요..."
"하하! 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유진이 쟤 그런 놈 아니야."
한편. 그 시각 호텔 레지던스 룸.
* * *
"M... Michelle?"
"으음. 아 어지러..."
미쉘은 박지연이 쓰는 외국 이름이었다.
서재민이 한쪽에 쓰러져 있든 말든 그녀는 게의치 않고 유진 볼트의 강철같은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H... hold on..."
"으음. 음."
그리고 당황하는 유진 볼트의 의사는 상관치 않는 그녀의 손이 자꾸 단단한 검은 사나이의 근육을 더듬는다.
딱딱하다...
그것이 유진 볼트를 만지는 박지연의 감상이었다.
그냥 몸이 이렇다면 대체 저 아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