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40화 (240/401)

<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기면 좋겠어 (1) >

"새벽에 강가에서 조깅이라. 니네 은근 분위기 따진다?"

"안개 장난 아니야. 불암산도 이렇진 않았는데."

"동민이 형. 이렇게 운동하면 사람들 쳐다보지 않아요?"

"존나 보지. 근데, 그게 마하 훈련이야. 하다보면 익숙해져."

"근데 주인공은 왜 이렇게 안 와?"

"어. 진수 형. 저기."

"야! 빨리 와!!"

구마하는 유진 볼트를 계주 코치로 영입하며 모두를 전주로 불러들였다.

"왔어."

"응."

"아 빨리 와야 될 거 아냐! 코치라는 놈이 젤 늦게 나오고 있어."

"코치니까 늦지 새끼야."

"하하하! 이 새끼."

"마하야. 근데, 다 누구야?"

"어. 인사들 해."

"Hi guys~!"

"오... 진짜 흑인이..."

"형님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너가 정수구나."

"네! 진수 형님이시죠!?"

"아니야. 진수는 여기고. 난 진운이."

"아~ 네. 안녕하세요."

"몇 살이이에요?"

"네? 저 고3."

"지성이가 형이야. 정수야. 인사는 나중에 하고."

구마하, 이동민, 이정수. 세 사람이던 팀은 다시 김진수와 김진운. 그리고 권지성에 유진 볼트를 더해 일곱명이 되었다.

"니네 선배라는 분은?"

"민구 형. 이야기는 했는데, 당장은 학기라 같이 하긴 어렵다고 하더라고."

"그럼 훈련은 계속 개인으로 가는 거야?"

"어. 모든 훈련은 전과 동일하게 갈 거야. 대신 이제부턴 팀 계주 훈련이 더해지니까 개인운동은 짬짬이 알아서 챙겨 넣어야 돼."

구마하는 모두에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육상 에이스라는 너희가 지랄해준 덕분에 어른들한테 국가대표 감독직을 맡으라는 말까지 들었다.

피곤하고 귀찮지만 난 그 제안을 피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너희를 지금보다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구마하의 다짐에 선수들은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빛냈다.

"빡실거야. 니네가 날 원망할 수도 있어. 그래서 난 포기하는 놈은 그냥 거기서 나랑 인연 끝나는 걸로 받아들이기로 했어."

"좋다. 난 좋아."

"나도."

"저도 상관 없어요."

"쓰읍. 난 좀 그런데?"

"이 새낀 꼭 주변에 애들 있으면 튈라고 이러고 있어. 넌 씨발 포기하기만 해 봐. 뒤질 줄 알어."

"하하! 미친놈."

구마하가 동료들에게 당부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 가지를 반드시 잊지 말아라.

그것은 명경지수(明鏡止水)였다.

"난 운동장이든 슬로프든. 꼭 운동 전에 1분 정도 명상을 하고 시작해."

땀을 흘리기 전 심장을 뜨겁게 만들기 전, 언제나 내 몸을 맑고 투명한 물 위에 띄운다고 여기며 운동을 해왔다.

승부도 승리도 의식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순간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결과는 따라오게 될 거라고 믿고 달려왔다.

그러니 너희도 그런 마음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오케이 알았어."

"그래. 그럼 그만 떠들고 시작하자."

"가자!!"

"형. 대열 맞춰서 뛰어요?"

"알아서들 하고. 유진. 렛츠 두 잇. 정수야 따라 와!"

"Okay BRO."

"네!!"

사람이 더해지자 구마하의 마인드도 바뀐다.

전보다 더 큰 책임감이 그의 다리를 무겁게 만들지만, 구마하는 묵묵히 모두의 앞에서 팀을 끌었다.

"훅. 훅! 시작부터 무리하지 말고!"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내공은 노력이 빚어내는 힘이다.

이 또한 나를 성장시키고 더 어른스럽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구마하와 친구들은 매일매일을 땀과 열정이 함께하는 시간을 보냈다.

5월 말. 천병욱 전 육상 연맹 전무가 전주를 찾아왔다.

"제가 올라간다니까. 힘들게 왜 오셨어요."

"아니다. 너희들 운동하는 거 보고 싶었어."

천병욱은 얼마 전 수술을 받고 회복 단계에 들어갔다.

구마하는 그를 보며 가슴이 아려온다.

현역 시절 10,000m 선수였던 천병욱.

언제나 체력에 자신 있어 하던 사람이 지금은 볼이 핼쑥해서 누가 봐도 병자라는 느낌을 전해준다.

"날이 좋구나."

"괘... 괜찮으세요?"

"그럼. 괜찮지.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

천병욱을 마주하자, 구마하는 지난 시간이 후회로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양아들의 그런 마음조차 이해하고 넘어간다.

"고개 들어라."

"..."

"빨리 이놈아. 누가 누군지는 소개해줘야 될 거 아냐?"

"아. 네."

"저 어린 친구는 누구니?"

"친구 동생이요. 아직 학생인데, 그냥 몸 좀 더 키우고 싶다고 따라와서 같이 하고 있어요."

"열정이 대단하구나. 뭐하는 친군데?"

"춤 추고 싶어해요. 어차피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거. 이제는 체력도 붙고 그만 가도 된다고 하는데,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배우고 싶다고 저러고 있더라고요."

"너희가 좋은가 보다."

"그런 것도 조금은 있는 거 같애요."

"저 친구가 그 자메이카에서 온 코치고?"

"네. 유진 볼트요."

"키가 엄청나구나. 너보다 더 큰 거 같은데?"

"좀 더 커요."

"계주 상황은 어떠니?"

아무리 몸이 약해졌어도 천병욱은 언제나 육상인이었다.

선수들의 상태를 둘러보고 훈련 상황을 체크하는 그의 눈빛엔 생기가 돌고 있었다.

"아버지..."

"뭔가 낯설구나."

"뭐가요?"

"오늘따라 니가 아버지라 부르는 게 진정성이 느껴져."

"...속상하게 해드렸잖아요."

"그래. 자식이 그런 거지."

무거우면서 훈훈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구마하는 천병욱을 만났던 어두컴컴한 잠실운동장을 떠올려 본다.

처음부터 환한 미소와 함께 큰 호감을 보여주던 사람이었다.

두 손을 잡으며 반겨주고 기록을 보자 덩싱덩실 어린 아이 같이 춤을 췄었다.

틈틈이 혼자 운동하던 그를 찾아와 밥도 사주고 나가서 고기도 먹이고. 늘 잘하고 있다, 대견하다, 넌 해낼 것이다. 아낌없는 칭찬을 전해줬었다.

구마하의 금메달에 누구보다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사람도 천병욱이었다.

그것은 구마하에게 있어, 처음으로 중년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경험이었다.

한상률이 있어도. 형 구마윤이 있어도 그런 안정된 느낌은 처음이었다.

구마하는 울컥하는 감정을 꾹 눌러 참으며 입을 열었다.

"훌쩍. 아. 그리고 저 아버지..."

"응?"

"저 이제 800 안 뛰어요. 400미터로 바꿨어요."

"그래? 800은 왜?"

"스키 타면서 근력이 변해서요. 지구력이 좀 떨어졌어요."

"후후. 넌 뭘 하든 잘 할 거다."

"...꼭 메달 따서 돌아올게요."

"그래."

천병욱은 묵묵히 구마하의 허벅지를 두드려준다.

"최 코치는 만나봤니?"

"아직이요. 근데 통화는 한번 했었어요. 선발전 끝난 다음에 대표팀 감독으로 공표 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괜찮은 사람이다. 잘 협력해서 팀 조율하고."

"네. 근데, 선수 선발은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전 그냥 뽑아주는 사람들 훈련만 신경쓰려고요."

"최 코치 쪽도 지금 비밀병기를 하나 준비하고 있다 하더구나."

"상관 없어요. 저흰 저희 운동하면 되니까요."

"여자애라고 하던데. 니네 또래야."

"아우 아버지. 지금 우리 체력 키우기도 빡센데. 여자애 신경쓸 여유가 어딨어요."

그쪽이 뭘 하든 운동이 우선이었다.

선발전도 나중이다.

구마하는 당장 다음 주 초 유럽에서 열릴 그랑프리에서 단체전 결승리그를 나가는 게 목표였다.

"저랑 약속 하세요. 11월까지는 꼭 몸 회복하시는 걸로."

"그럼. 중동 가야지."

"퍼스트 클래스로 모실게요."

"하하! 됐다 이 녀석아."

"전 그럼 내려가 볼 게요. 여기 계세요."

"그래. 난 천천히 둘러보다 올라가마."

"어?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괜찮다고. 올 때도 혼자 왔어. 가서 운동해라."

"네. 아버지."

구마윤은 늘 동생에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의(義)가 기본이라고 전해주었다.

옳은 것은 바른 길을 간다. 구마하는 배운대로, 주변에 받은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갔다.

화창한 6월의 날씨가 시민들의 옷을 완연한 여름으로 만들고. 푸릇하던 나무와 풀들은 진한 풀색을 띄고 있었다.

덥고 무더운 공기가 에어컨 바람으로 대체되던 어느 날.

분당 모처의 카페에서 이혜정과 친구 김선아가 마주보고 있었다.

"아. 혜정아 가자~~ 응?"

"싫다니까. 니네 둘이 여행가는데 내가 왜 따라가?"

"둘이 가는 거 아니야. 민혜가 취소됐을 뿐이잖아."

"어쨌든 정석이랑 너만 있잖아."

"아니라고! 남수랑 김태윤도 온다고 그랬어. 애들 다 부르기로 했어."

"그럼 그렇게들 가. 거기 나를 왜 불러."

"친구니까 그러지."

"후우..."

6월 말. 대학가는 종강을 맞이하고 학생들은 여름방학에 돌입했다.

김선아는 남자친구 이정석의 빠른 휴가에 맞춰 다 함께 여행을 가자고 이혜정을 설득하는 중이다.

"야. 난 걔네 안 본 지 진짜 오래됐어. 졸업하고 마주친 적도 없는데..."

"애들도 다 너 보고 싶어 해?"

"그건 그쪽 사정이고."

"와. 얘 서울 살더니 말 싸가지 없게 하는 거 봐..."

"야. 여기도 수도권이거든? 이상한 소리를 하고있어."

"가자~"

"아 싫다고. 나 할 거 많어."

아무리 매달리고 사정해도 넘어오지 않는 이혜정을 보며 김선아가 퉁명스레 한 마디를 던진다.

"...설마. 마하 때문에 그래?"

그 말에 이혜정은 단전 깊이 복식호흡을 하며 흥분을 눌렀다.

"후우음. 야. 김선아 잘 들어. 나 걔랑 아무 사이 아니거든."

"너 마하네 집에 있다며."

"...누가 그래?"

"아니. 그냥."

"이정석이 그래?"

"뭐. 어쨌든 뭐..."

이혜정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는 친구를 노려본다.

"그냥 빈 집 봐주고 있는 거야."

"근데, 왜 그렇게 싫어? 둘이 싸웠어??"

"넌 왜 사람 말을 안 들어? 싸우긴 누가 싸워. 나 걔 작년에 보고 보지도 못했다니까?"

"그러니까. 이번에 얼굴 보고 화해하라고..."

"아하하하! 너 니 남자친구 닮아가냐? 진짜 사람 미치게 만드네... 아니 싸우질 않았는데 무슨 화해를 하냐고!?"

"봐 봐. 지금도 마하 얘기 나오니까 괜히 버럭해서."

"가. 그래 가자. 어딘데? 어디로 가는데?"

"진짜? 혜정아 우리 대학생 되면 다 같이 여행가고 그러기로 했던 거 기억나?"

김선아의 투정을 이기지 못한 이혜정.

포기하지 않으면 더 이상한 소문을 낼 것 같아 억지로 그들의 계획에 동참해준다.

며칠 뒤 이혜정은 아르바이트 하는 식당에 사정을 설명하고 2박 3일 휴가를 얻어 약속장소 청계천 광장에 나섰다.

"어. 엄마. 거의 도착했어. 애들은 거기서 만나지. 무슨 소리야... 정석이가 뭘 어쨌다고... 아. 제발 거기 가서 내 얘기 하지 말라니까... 구마하가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알았어요. 도착해서 전화 할 게요."

이혜정은 한숨을 쉰다.

구마하가 있든 없든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목적에 두고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왜 이리 가슴이 불안한지... 이런 불길한 예감은 꼭 틀리는 법이 없던데...

그리고 역시나, 단체로 온다던 성남 팀이 친구 선아와 이정석 두 사람만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 들었어..."

"남수랑 은정이란 애는 헤어져서 못 온다고 했고."

"잘 만나던 애들이 갑자기 헤어진다?"

"근데 걔네 전부터 위태위태 했었어!"

"맞어. 은근 다들 있는데서 남수 꼽주고 막 뭐라고 하고..."

"어쨌든. 김태윤은... 아파서 못 오고?"

"그러니까. 아 개새끼들 진짜... 어떻게 당일에 와서..."

"야. 김선아."

"우. 우리도 오늘 들었다니까..."

"너 따라 와."

이혜정은 이정석의 뒤에 반쯤 몸을 가린채 시선을 피하는 김선아를 노려본다.

"너 이 씨. 처음부터 이럴려고!"

"미. 미안! 근데 마하는 바로 온다고 했어!!"

"걔가 오든 말든 관심 없다고!!"

"혜정아. 잠깐만! 선아한테 뭐라고 하지 마. 구. 구마가 꾸민 일이야!!"

"...뭐?"

"그 새끼가 너 자기 전화 안 받는다고... 그래서. 제발 자리 좀 마련해 달라고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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