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기면 좋겠어 (3) >
5월 말 체코 오스트라바에 가기 전만 하더라도 하루하루 파이팅 넘치는 일과를 보냈다.
정수가 본 건 그때까지의 풍경으로,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는 웃음 넘치는 매일이였을 것이다.
외국인 친구이자 젊은 코치도 함께하는, 지겨운 훈련이 다채롭고 재미나게 다가오는 일상들.
하지만, 열 길 물속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모두가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연한 소릴 하고있어. 걔네도 목표가 있는데."
"그렇겠지. 목적이 있으니까 모였겠지..."
목표가 있는 건 좋다. 다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리고 있는 거니까.
근데 왜 이렇게 결과를 빨리 보려고 하는지...
진수부터 시작이었다.
난 진수가 그렇게까지 2등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줄 몰랐다.
정석이 말대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진수는 누구보다 나에게 바라는 게 많은 녀석이었다.
매일 운동 시작과 끝에 꼭 기록을 재는데, 자기는 왜 동민이같이 기록이 단축되지 않느냐며 나중엔 내가 뭔가 감추고 있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미친 거 아냐? 그런 게 어딨어. 지가 운동하겠다고 왔으면서 왜 널 의심해?"
"구마. 진수가 누구냐? 우리 가게 왔었나?"
"왔었어. 너도 몇 번 봤어."
"그래? 손님이네. 그럼 난 뭐라고 못 하겠고."
"하하하! 이 새끼."
"아니 근데, 난 니가 누굴 편애한다는 게 별로 믿음이 안 가는데...?"
"내 말이... 근데 애가 안 믿어."
내공에 대해서 설명을 해줬지만 믿질 않았다.
힘은 쌓이는 것이다. 기술은 발달된 몸에서 자연스레 발휘된다.
그러나 그런 걸 듣고 싶어하질 않았다.
훈련은 고달픈 과정이다. 그건 누구에게나 그렇다.
진수는 그런 과정을 뛰어넘고 싶어했다.
급기야, 나중엔 자기는 동민이만큼 친하지 않아서 그러냐는 개소리를 하더니 마지막 브리티쉬 대회에선 혼자 부상을 입었다며 태업을 하기 시작했다.
"정석아 태업이 뭐야?"
"농땡이 뭐 이런 거 아냐?"
"비슷해. 진짜. 진수가 그럴 거라곤..."
"그럼 걔만 빼고 운동하면 되잖아."
"계주 대표가 네 사람인데, 한 놈 빠지면 뭐해. 다 종치는 거지."
차라리 진수는 열정이 있어서 그랬다고 이해라도 된다.
800m에서 메달을 딸 거라 믿었던 진운이는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이놈은 옆에서 쪼지 않으면 운동에 나태함이 드러나는 녀석이었다.
무엇보다 알게 모르게 화려한 삶을 선망하고 있던지라...
"나도 중간중간 스케쥴 있어서 그런 걸 갔는데. 거기 따라와서."
"너 스케쥴 뭐?"
"일. 광고나 뭐 그런 것들..."
진운이는 과정보다 결과 이후의 삶에 더 큰 관심이 몰리고 말았다.
광고 촬영하는데 몇 번 같이 가더니, 갑자기 파마를 하며 옷이 바뀌었고, 운동복도 점점 기능보다 패션 위주로 바뀌더니 신발까지 갈아신기 시작했다.
그 결과 브리티쉬 대회에선 그냥 경기를 포기하고 한국에 남아버렸는데.
마지막으로 그나마 믿었던 지성이까지 멘탈이 박살이 나버리니...
"권지성이면 너 다음으로 빠르다는 애 아냐?"
"오~ 이혜정 너 뭐 많이 안다."
"뉴스에 나온다니까."
"후우... 빠르면 뭐하냐고..."
"왜? 다쳤어?"
"아니. 이쪽도 실력이 안 나와..."
지성이는 두 녀석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타입이었다.
애가 기본적으로 성실함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쪽은 동갑내기 유진 볼트와 연습 경기를 많이 가졌는데, 9초대 선수라는 자부심이 유진을 맞서며 산산히 박살나고 말았다.
유진 볼트는 자메이카 대표선수였다. 그것도 나보다 어린 나이에 두꺼운 선수층을 뚫고 나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
월드랭킹부터 본인을 앞서는 게 당연한데, 그런 놈과 경기를 치를 때마다 넘어서겠다는 의욕을 가지는 게 아니라 이게 자신의 한계라는 듯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결국 지성이는 세계대회에 나가선 제 실력의 반도 내질 못 하고 돌아왔다.
토리노 때 상택이 형과 비슷한 경운데. 저쪽은 사람이 투지가 있어 이겨낼 수 있었지만, 이쪽은 어려서부터 반듯하게 운동만 하던 놈인지라 세계의 벽을 더 통감하고 기가 죽어버린 것 같다.
결과적으로 이놈들이 한국 육상의 에이스였고, 연맹과 갈등을 빚으면서까지 나에게 온 터라, 나는 뭔가 확실한 성과를 보여 줄 입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 꿈과 희망이 되어줄거라 믿은 놈들이 이 지경이니...
결국 우리들 내부 문제는 연맹 수내부의 귓가에 들어갔고. 천병욱 아버지가 안 계시는 상황에서 밀려오는 모든 비난은 내가 감수해야했다.
이현석 교수님이나 이두희 전 감독님도 선수 관리에 대한 조언을 들려주시는데, 막막한 상황에선 그 모든 이야기가 다 내가 똑바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잔소리로 들렸다.
"어이 구마 스톱."
"그래. 좀 멈춰 봐. 너도 선수아냐?"
"내 말이. 니가 왜 그런 걸 다 감당해?"
"후우... 그게... 여러 가지 상황이 있는데 그런 조건까지 더해서..."
박문기의 뜻을 어기고 선수 선발전을 열 게 된 것이니까...
모든 구설수가 나에게 향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 한상률은 뭐하고?"
"감독님 해외에 있어..."
"왜? 거기서 뭐하는데?"
"나 프로모션... 거긴 연맹과 달라. 회사로 움직이는 중이야."
감독님은 이참에 확실히 한국 운동계와 선을 그었다.
세계라는 무대를 향해 과감하게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계시는 중이다.
나쁠 건 없다. 그 덕에 우리는 돈을 벌고 또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으니까.
먼저 유럽에서도 느꼈지만 한국이 아닌 세계 시장은 단위가 다른 무대가 펼쳐진다.
감독님도 도전하고 있는 것이고, 나도 엘리트 체육을 넘어서고 싶다는 개인의 목표를 수행중이다.
우리는 한구스포츠로 서로가 서로의 꿈을 응원해주고 있다.
다만, 차곡차곡 목표한 바를 이뤄내는 감독님과 달리, 난 내가 꿈꾸던 이상이 엄연한 현실앞에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 다를 뿐.
그것이 지난 두 달간 커다란 의욕을 앉고 덤빈 끝에 나에게 떨어진 성적표였다.
"유진이는 뭐하냐? 그럼 걜 빨리 보내. 보니까 옆에서 도움도 안 되는 거 같더만."
"근데 정석아. 아까부터 니가 말하는 그 유진이 누구야?"
"선수야 혜정아. 흑인 선수. 남자야 남자."
"누가 너한테 물어봤어..."
유진... 그나마 좋은 소식이라면 유진 볼트가 이번에 제대로 일을 냈다는 거다.
나에게 200미터 은메달을 안겨 준 경기. 체코 오스트라바 대회.
거기서 유진은 생에 최초 200미터 세계신기록을 갱신했다.
허리 통증이 사라지고 매력적인 여자친구를 만난 덕에 애가 승부의 부담을 떨쳐낸 것 같다. 진짜 형이 말한대로 유진이가 제대로 달리자 내가 녀석을 당해내질 못 했다.
그래도 우리는 승부를 즐겼다.
다음을 기약하며 더 큰 노력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유진의 발전과 나의 도전까지...
곁에 있는 누군가에겐 욕망이 되고, 부러움이 되었고. 질투의 대상이 되어 팀 구마하를 흔들고 말았다.
"유진은 계약 끝나고 돌아갔어."
"그래도 하나는 잘 됐네."
"잘 됐지. 근데 이놈은 어차피 우리 선수도 아니고..."
여러 일을 겪으며, 갈등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최근에서야 깨닫는 건 나도 아직 스물한 살이라는 것이다.
이 나이에 왜 이렇게 쓸데없는 짐들을 떠안고 있는 걸까...?
매일매일 그런 고민을 한다.
주류에서 벗어난 것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흔드는 걸까?
하루하루 도전과 성장이라 생각하며 부딪혔는데, 알고 보면 나는 그냥 개좆밥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 이제는 진짜 운동이 버거워지는 감을 느낀다.
"근데 이거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게..."
"응. 여자인 우리가 들어도 굳이 니가 나서지만 않았으면 되는 거 아닐까 싶은데..."
"자신감이 과했지. 뭔가 내가 하면 다 잘 될 거 같았어..."
친구들 앞에서 털어놓는 하소연은 멈출 줄을 모르고. 어스름한 하늘은 어둑한 밤이 되었다.
고기 불판은 캠프파이어가 되어 있고 대화는 술술 이어졌다.
"그래서 동민이는 좀 어떠냐? 이제는 괜찮아?"
"어. 그나마 동민이가 처음부터 기대한 게 적어서 그런지 가장 흔들림은 없어."
"동민이가 걔지? 한주 고 다녔던. 우리 동갑인 애."
"혜정이 너 알어?"
"뭐. 대충 얼굴은..."
"니가 그 학교 애들을 어떻게 알어?"
"선아 모르냐? 혜정이 지민이 형이랑 사귈 때 한주 고 자주 왔잖아."
"야. 넌 그 얘길 지금 왜 해?!"
슬슬 불도 꺼지고 여자애들이 추위를 타기 시작했다.
식탁도 치우고, 자리를 밖에서 안으로 옮기기로 했다.
정석이네 커플이 주변 정리를 시작하고, 나는 여러 가지 피로가 인정되어 산책을 허락 받았다.
혼자 시골 길이나 걸을까 싶을 때 혜정이가 따라온다.
"혼자 간다니까. 너 남아서 정리해."
"나도 움직이고 싶어. 그리고 커플 사이에 껴있으면 뭐해. 올 때도 그랬는데... 정석이가 너한테 가보래."
"저 새끼 웃기지 않냐? 우리한텐 욕 없으면 입도 못 여는 놈이 선아 앞에선 안 그러는 거 봐."
"선아가 잘 컨트롤 하나보지."
"사람이 컨트롤 한다고 되냐? 남자친구가 무슨 로보트야?"
"누구랑은 다른가 보지."
"왜 시비지...?"
"뭐? 사람 여기까지 끌고 온 건 너잖아."
뻘소리 주절거리며 둘이 설렁설렁 걷다보니 성남 아파트 단지가 생각났다.
"집에는 안 가?"
"왜 이래. 관심 꺼."
"아줌마가 볼 때마다 물어보셔. 너보다 날 더 자주 본다고."
"나도 바뻐. 할 거 많고. 엄마 괜히 그러는 거야."
"학생이 바쁠 게 뭐 있다고..."
"하하! 세상이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거든?"
그 말이 정답이구나. 세상이 날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데, 난 왜 이렇게 혼자 끙끙거리고 있을까...?
"..."
거 참. 얘가 옆에 있어 그런가, 짧은 생각 끝에도 뭔가 답이 그려지네.
"왜?"
"아냐. 잠깐 뭐 좀 생각했어."
"뭐. 사람마다 짊어진 무게는 좀 다르겠지."
"혜정아. 니가 볼 때 난 어떤 거 같냐?"
"넌 꼭 나 볼 때마다 그런 걸 묻더라."
"남자로서 말고. 그냥 선수로 봤을 때."
"아~ 뭐..."
"대단하다고 생각해?"
"글쎄다. 꼭 뭐 대단하다고 까지는..."
"맞어. 난 대단한 놈이 아니야. 그냥 내가 그런 인간이 되고 싶어 할 뿐이지..."
혜정이가 묵묵히 걷다 고개를 돌려 말한다.
"그렇게까지 고민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뭐가?"
"운동. 봤을 땐 맨날 여자만 만나고 그러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말했잖아. 나 힘들게 살고 있다고. 여자도 뭐..."
"됐어 거기까지. 듣기 싫어."
"그날 축제라, 그것도 유진이 한국 와서 어디 갈 데 없나 싶어서 학교 간 건데."
"됐다고. 듣기 싫다니까 왜 말하고 있어..."
다시 주제로 돌아가 하던 얘기를 이어갔다.
"동민이도 그렇게 실력이 올라왔고. 다들 열심히 하면 되겠다 싶었어. 그리고 그렇게 하다보면 나도 뭔가 더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욕심이 있었고."
"축제 때 누구 만났어?"
"듣기 싫다며. 뭘 묻는 거야..."
"그냥 말 나온 김에."
"됐어 얘기 안 해."
"잤어?"
"아 진짜 너..."
"지 불리해지니까 말 돌리는 거 봐..."
"야!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
"그래. 무슨 상관이냐."
산책로 중간 넓직한 바위가 놓여져 있었다.
분위기도 바꿀 겸 털썩 걸터앉아 하던 말을 이어갔다.
"애들도 노력하면... 다들 조급하게 굴어도, 내가 참고 가면 다들 믿고 따라와 줄 것만 같았는데..."
"세상 일이 바라는대로 되는 게 잘 없지."
"정말 그렇긴 해..."
"고생했네."
다른 걸 떠나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건 인정해주는 것 같다.
혜정이도 더는 아까같이 날선 반응을 보이거나 짜증을 부리진 않는다.
"근데 왜 나야?"
"뭐가?"
"힘들 때 왜 날 보고싶어 했냐고."
"모르겠어. 그냥 공항 도착하는데 니 생각이 났어. 전화 거는데 계속 씹혔고."
"다 잘 풀리는 것 같더라니. 알고보면 너도 뺑이 치고 다니는 구나."
"넌 여자애가 뺑이가 뭐냐... 뺑이가..."
"뭐? 우리도 그런 말 많이 써. 알바 할 때도 엿 됐다. 오늘 진상들 오는 거 보니 뺑이 치겠구나."
"앞으로 뺑이라고 하지 말고 좆뺑이라고 해."
"됐어 1절만 해."
"원래 그렇게 쓰는 거야. 비속어를 쓸 땐 좆, 씨발, 개. 이 세가지를 적절하게 섞어주는 센스가 있어야"
"아 됐다고!"
혜정이가 긴 숨을 내쉬며 돌아본다.
"그래서 그랬던 거지?"
"뭐가?"
"한국 와서 연락도 없고 운동만 하고 있던 거. 그래서 그랬던 거."
"어. 뭐."
"힘들다면서.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어? 좀 내려 놔. 니가 그런다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잖아."
"..."
"아니야?"
"혜정아 다시 물어 봐 봐."
"뭘?"
"왜 그렇게 사냐는 거. 아까는 이 질문에 답을 못 했는데, 지금은 말 할 수 있을 거 같애."
"왜 그렇게 사는데?"
"니가 있어서."
"죽는다. 진짜..."
"아니 그게... 정말로 너가 있어서 그런가, 뭉쳐있던 생각이 좀 움직이는 거 같다고. 아 진짜야. 주먹을 왜 쥐는데."
혜정이는 선아랑 정석이 있다고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진짜로 마음이 그랬다.
정말로 나 혼자 끙끙 댈 때와 다르게 지금은 답이 그려진다.
"난 국가대표잖아."
"이제와서 새삼."
"아니. 그 국가를 대표한다는 게... 그게 뭔지 지금 확실히 느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발소리만 내며 제 자리를 맴돌았다.
혜정이도 가만히 쳐다보며 묻는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게 뭔데?"
"이번에도 한번 있었는데"
국가대표가 되어 메달을 따면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아는 척을 하고 다가온다.
단지 젊고 어린 사람들만이 아니다.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 지나가던 식당 사장님. 편의점 알바생 등등.
불편할 때도 많다. 귀찮을 때도 정말 많고.
헌데도 말이지, 진짜 아주 가끔은 그런 사람들이 있어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어두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예전에 택시를 탔는데 어떤 기사님이 알아보셨어."
"피곤하다. 난 싫어 그런 거."
"나도 피곤해. 근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감동을 줘."
이번에 전주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5월인데도 낮 기온이 30도에 달할 만큼 꽤 뜨거운 날이었다.
애들과 운동하다 잠깐 벤치에 모여 쉬고 있는데 아주머니 네 다섯 분이 큰 냄비를 들고 오셨다.
"국수를 삶아오셨더라고."
"국수??"
"어. 국수. 운동하는데 수고한다고 갖다 주셨는데, 젓가락질 못하는 유진이도 맛있다고 퍼먹고 그랬었어."
그런 소소한 관심과 응원을 받는 날은 뭔가 가슴이 뿌듯해져서 더 열정적으로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것이 내가 느끼는 국가대표.
사회의 인정을 받는 존재.
그리고 이 국대는 내가 가족, 친구, 학교를 떠나 내 힘으로 이루어낸 첫 번째 사회적 관계였다.
자기 과신이 아니다. 그냥 그게 나라는 놈의 보금자리인 것이다.
태극기를 짊어지고 있기에 세상이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
나도 가끔은 다 때려치고 여자들 만나고 벌어놓은 돈과 인기로 여기저기 프로모션이나 광고나 찍고 살고 싶다. 지금있는 자리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선택할 수 있는 삶이 그곳에 있다.
그런데, 정말로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남들은 쓸데없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들이 응원을 해주니까...
살다보면 스쳐가듯 마주치는 존재들이 기대를 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해주고 싶어..."
"..."
"구마하 하나가 아니라, 팀 대한민국의 금빛 레이스. 얼마나 좋아. 다들 이기는 거 보면 좋아하는데."
어른들의 이야기도 빠르게 이해된다.
천병욱 아버지나 감독님이 말씀하신 스포츠 선수의 마음가짐이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기대하는 누군가가 있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들을 웃게 해주고 싶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의 힘으로.
"대신 너가 피곤해지잖아."
"...피곤하지. 정말 지쳐가고 있지."
그런 관계가 지옥같은 부담에서 나를 놓아주질 않는다.
그리고 그 지옥같은 세상이 내가 살아가고 싶은 인정받고 싶은 세상이었다.
역설적이구나. 제기랄.
아 씨발 솔직하게 말하면, 포기하고 싶지 않어.
적어도 내 이름으로 팀을 꾸리는 한, 우리나라 육상이 멋지게 부상하는 순간까지는 이 자리를 지키고 싶어.
다만, 내가 원한다고 선수들이 말을 듣는 게 아닌지라, 캄캄한 어둠속에서 빛이 없는 터널을 해매고 있는 기분이 좆같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