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기면 좋겠어 (4) >
"마하야. 알겠는데, 이제 슬슬 돌아가자. 나 조금 추워지는 거 같애."
"내가 따뜻하게 해줄까?"
"아무리 너라도 돌로 때리면 피 정도는 나겠지? 근육 보다는 돌이 단단하니까."
"말 살벌하게 하는 거 봐라..."
혜정이랑 있는 동안, 어느정도 답이 보였다.
그래도 결국 내가 부딪혀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지만, 국대라는 의미를 다시금 되새겼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우리는 산책에서 돌아와 펜션으로 향했다.
"2층 전원주택이라... 서울에 저런 집은 진짜 비싸겠지?"
"넌 왜 꼭 서울에서만 살려고 그래?"
"좋잖아. 일자리도 많고. 인프라도 좋고. 교육도 잘 돼 있고."
"누가 부동산 딸 아니랄까 봐..."
"전세 언제까지지? 내년 아닌가?"
"오래 있어도 돼. 처음 집 구할 때 집주인이 그렇게 말했어."
"흠."
"집은 별 일 없냐?"
"일찍도 물어본다..."
두런 두런 떠들다 보니 다시 펜션.
선아는 들어가 있고 정석이는 마당에서 담배를 물고 있었다.
혜정이도 집으로 가고 정석이랑 잠깐 앉았다.
"선아는 담배로 뭐라 안 하냐?"
"쟤도 피는데 뭐."
"어?? 진짜??"
"재수할 때 배웠데. 조만간 끊는다곤 하는데 모르지."
"허허... 선아가 담배를 처음 알았네."
"자주는 안 펴. 부모님은 모른다고 하시니까."
"쟤네 부모님은 너 알어?"
"그럼. 가게와서 밥도 드시고 하는데."
"너도 진짜..."
정석이가 펜션을 한번 슥 둘러본다.
거실 창으로 혜정이와 선아가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둘이 얘기는 잘 했냐?"
"뭐 얘기하고 자시고... 나 혼자 떠들고 나 혼자 납득하고. 또 혼자 고민에 빠지고. 늘 그렇지."
"그러지 말고 그냥 연애를 하라니까?"
"하기 싫어 안 하는 게 아니라고."
"니가 여자를 정리해. 미친 놈아."
"아 씨발. 알아서 할게."
"나같음 다 정리하고 제대로 밀어붙이겠다."
"하하하! 아 이 새끼 진짜..."
"근데 쟤도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예전엔 존나 이쁜 거 같았는데, 오늘 보니까 그냥 평범하게 예쁜 얼굴이었네."
"표현력 봐라. 평범하게 예쁜 건 또 뭐야. 예쁜 건 예쁘고 아닌 건 아닌 거지."
"선아가 낫다 이거지."
"세상 지 혼자만 연애하나..."
"야. 신기하지 않냐? 어떻게 이렇게 뭉쳤을까?"
"니가 신기하지. 난 솔직히 우리 중 혼자 죽는 놈이 있다면 그건 늘 나 아니면 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후후. 이대로면 김태윤만 혼자 죽게 생겼구만."
"태윤인 뭐하냐?"
"김태윤. 요즘 제대로 여성혐오 걸렸지. 아니 인간혐오에 빠졌어. 웬만하면 한동안 연락하지 마. 존나 피곤해진다..."
"왜? 무슨 일 있었나?"
"걔네 밴드부에 존나 예쁜 애가 하나 들어왔는데. 나도 미니홈피 보니까 애는 괜찮더만."
"들이대다 까였데?"
"그 정도가 아니야. 여자애가 밴드 멤버들 다 저울질 하다가"
친구들 소식도 듣고 둘이서 한참을 떠들고 있는데 선아가 나온다.
나도 있는데 정석이만 콕 집어서, 추우니까 들어와서 얘기해 라고 하는데 그 말이 참 부럽게 느껴졌다.
"어. 알았어."
"오~ 이 새끼 갑자기 목소리 바뀌는 거 봐. 존나 재수없어."
"병신아. 추우니까 들어오라잖아. 거기다 대놓고 뭐 소리라도 질러야 되냐?"
"진짜 뭘 어떻게 했길래 둘이 사귀는 거냐? 무슨 약점이라도 잡았어?"
"또라이 새끼. 무슨 약점을 잡어. 대가리에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진짜 볼 때마다 의심스러워... 남수는 헤어지고... 넌 다른 애도 아니고 선아를 만나고."
"니네랑 다르게 난 진짜 남자니까. 사랑을 하고 있는 거지."
"남수는 왜 헤어졌냐?"
"말 돌리냐?"
"개소리는 흘려 듣는 게 건강에 이로우니까. 아무튼 진짜 은정이랑 깬 거야?"
"너 때문이야."
"아 씨. 장난하지 말고."
"진짜야."
"왜? 내가 뭘 어쨌다고?"
"겨울 동안 남수가 니 차 끌고 다녔잖아. 그 사이에 은정이가 눈이 높아져서."
"겨우 그런 이유로? 진짜로?"
"자꾸 나갈 때 차 갖고 오라 그러고. 없으니까 아빠 차라도 끌고 오라고 했는데 은근히 비교하고 그랬다고 하더라고."
"와... 걔 그렇게 안 봤는데..."
"여자들 보기와 다르지. 우리 선아는 안 그러지만."
"뭐지? 내가 미안해야 되는 건가?"
"그런 게 어딨어. 걔들 문젠데. 그리고 어차피 남수도 깰려고 했었어. 가을에 군대 간다고 그 전에 헤어진다 하더라고."
"군대라..."
"난 너 다른 걸 떠나서 면제 받은 게 젤 부러워."
"나도 완전 면제는 아니야. 아무튼, 우리가 또 그런 나이들이 됐구나."
"친구들 중에 벌써 간 애들도 있어. 100일 휴가 나온 애들도 있는데."
세상 나만 걱정 고민 끌어안고 있는 줄 알았더니, 다들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평범한 인생이란 없는 것 같다.
그냥 모두들 주어진 과제를 잘 수행해 나가는 것 뿐.
"구마. 난 근데 니 얘기 들으면서도 이해 안 되는게. 왜 니가 그런 큰 일을 떠안게 되는 거야?"
"...내가 한국 육상계에서 젤 운동을 잘하니까."
"그래도. 감독 같은 건 짬이 되야 될 거 아냐."
"이번에 최 코치님 통해서 더 자세하게 한번 들었는데. 짬 있고 명성있는 감독님들일수록 내가 있어서 다들 맡길 꺼려하고 계셨데."
"왜?"
"별로 감독이 돋보일 게 없으니까."
"...그런 병신같은 이유가 있어?"
"있어. 선수는 원래 자기 프라이드로 사는 거라. 국가대표 코치까지 맡았는데 결국 구마하 덕이란 말 들을 바에는 안 하는게 낫다는 거지."
"난 우리나라 체육계 볼 때마다 좀 이상한 거 같애."
"어쩔 수 없지. 세상 어딜가나 부조리란 건 존재하니까. 장사는 안 그러냐?"
"역시 연대생. 존나 쉽고 빠르게 이해되네. 난 가끔 가게 낼 게 아니라 그냥 사장님 옆에서 계속 있을까 싶기도 해. 진상들 마주할 거 생각하면 무서워."
"무섭지. 사람 무서워... 나도 이번에 제대로 느꼈어."
정석이가 줄담배를 물며 어두컴컴한 밤 하늘을 보며 말했다.
"오늘 혜정이랑 잘 거냐?"
"야 이 미친놈아... 대화의 맥락이라는 걸 좀..."
"아니. 들어가면 슬슬 잠자리 준비할 거 아냐. 피곤하기도 하고."
"너 선아랑 자. 누가 뭐래?"
"그러니까. 넌 혜정이랑 잘 거냐고?"
"아 신경 꺼! 니네 2층 쓰고. 우린 1층에서 알아서 잘 테니까."
복층으로 마련 된 펜션에서 정석이 커플한테 2층을 쓰라고 하고 나머진 알아서 한다고 했다.
그런데 혜정이와 선아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는가 보다.
"나 저쪽 침대 쓸 거야. 너 들어오지 마."
"미치겠네... 아니 내 이미지가 대체 왜 이렇게...?"
"근데, 애들도 넌 여자 없으면 잠을 못 잔다고..."
"니가 그랬냐?"
"아니. 김태윤이 먼저 가게 왔을 때."
"그 새낀 씨발 평생 혼자 늙어 뒤지야 돼!!"
멤버가 멤버다보니 연애 이야기나 과거 이야기로 수다가 무르익는다.
"그럼 니네는 주로 분당에서만 있는 거네."
"그런 식이지. 정석이 쉬는 날 아니면 일찍 끝나야 보니까."
"흠. 아쉽지 않어?"
"별로. 넌 아쉬워?"
"아니. 우리도 가끔 여행도 가고 그래."
"어디로?"
"혜정아. 너 외로워? 얘가 은근 연애에 관심을 가지네."
"아니 신기하잖아. 친구들끼리 사귀면 뭐하나 싶고."
"다 똑같지 뭐."
"그치. 다 똑같지. 영화 보러 가고. 밥 먹고. 카페갔다가 백화점 갔다가."
뭔가 애들 이야기가 재밌어 보이는데, 피로에 해외 경기에 난 소파에 앉아 계속 졸고 있었다.
"야. 구마. 너 들어가서 자."
"으음. 아냐 됐어. 얘기해."
혜정이도 가만히 보다가 말해준다.
"야. 너 방에가서 자. 내가 거실에서 자면 되니까."
"괜찮아. 그보다 난 좀 씻어야 겠다. 어우 몸이 찌푸둥하네."
"씻는다고? 여기서?"
"씻어야지. 니네는 샤워 안 할 거야?"
"그냥. MT 왔다 생각해보면... 굳이?"
"나도. 여자애들이랑 있는데 샤워까지?"
"난 맨날 땀을 흘리는 사람이라. 목욕을 꼭 해야되서. 이야기들 해라."
원래는 잠이나 좀 깨려고 씻는다고 한 건데. 씻고 나와서도 애들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특히 혜정이랑 정석이가 식당 일을 하고 있는지라, 둘이 통하는 게 많았다.
"그런 건 그냥 사장한테 얘기하고 빠져야 돼. 진상들이 바라는 건 해결책이 아니라니까."
"처음엔 몰랐지. 다 내가 잘못 한 거 같고 사과하면 끝나는 줄 알고."
"야 잠깐만 마하야. 너 들어가서 자."
"어...?"
"너 지금 코 골았어. 방에 가서 자."
"아냐... 얘기들 해."
"야. 구마. 꺼져 새끼야. 재미나게 얘기하는데 옆에서 졸고 지랄이야."
"아 왜 이러지..."
혜정이까지 방으로 가라고 그런다.
어차피 모레까지 있을 건데 침대 방은 자기가 다음 날 쓰면 된다고 하길래 그러자고 하고 방으로 왔다.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친구들이 있어서 더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껴 그랬다고 생각한다.
* * *
"저 새끼 코 왜 저렇게 골지?"
"피곤하겠지. 당장 며칠 전까지 시합하고 왔다며."
구마하가 빠진 세 사람.
이혜정도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안방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기보다 힘든가 보더라."
"혜정아. 아까 나가서 둘이 무슨 얘기 했어?"
"별 얘기 없었어. 쟤 혼자 막 제자리 맴돌면서 자기 이야기 하고. 난 그냥 들어주고."
"그래도 구마 저 새끼가 너 많이 의지해."
"흠... 그러든 말든..."
"야. 마하랑 백설이랑 깨진 것도 너 때문인 거야?"
"백설이가 누구야?"
"그 하얀 언니 있잖아."
"몰라... 관심 없어.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리고 넌 백설이가 뭐냐?"
당장은 간신도 많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것 같았지만, 이정석도 피곤하다며 2층으로 올라가고 이혜정과 김선아만 둘이 남았다.
"너가 싫다고 했다며?"
"누가 그래?"
"예전에 마하가 한번 이야기 해줬어. 서로 좋아는 하는데 연애는 싫다고 했다고."
"볼 수가 없으니까."
"왜 볼 수가 없어? 어차피 너 지금 쟤 집에 살고 있다면서."
"쟤 올림픽 끝나고 집에 온 적 없어."
"진짜?"
"어. 정석이 동생한테 물어 봐. 쟤 바로 전주 내려가서 거기서 운동하고 있는앤데. 이런 자리 아니면 쟤 보기 어려워."
"그래? 난 그래도 정석이 만나러 가면 은근 봤는데."
"거긴 형이 있잖아."
1년에 한 두 번 볼까 말까한 사람과 무슨 연애를 하라는 거냐.
난 보기보다 더 상대방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옆에 있어주지 않고 마음이 통한다 같은 걸로는 만족하기 어렵다.
이혜정은 친구에게도 그런 진솔한 고백을 털어 놓았다.
"너네들 보면 좋아보여."
"우리야 뭐 평범하지."
"그러니까. 나도 그런 평범한 연애를 하고 싶은 거야."
새벽 2시. 여자들의 수다도 기운이 빠진다.
김선아도 자러 가야겠다며 2층방으로 올라갔고 이혜정도 내일 보자며 이불을 챙겨 나왔다.
"올라와서 우리 옆에서 자든가."
"괜찮아. 그리고 나 원래 집에서도 거실에서 잘 자."
"아니면 마하랑 같이 있어."
"됐거든. 나도 좀 씻어야겠다. 자 선아야."
"어."
이혜정도 샤워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이불을 챙겨 누웠다.
적적함을 누르려고 TV를 켰는데, 새벽 시간 지나간 예능을 챙겨보자니 그것도 뭔가 아닌 것 같아 TV를 끄고 눈을 감는다.
생각지도 못하게 놀러왔지만,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
마하가 차가 있으니까, 내일은 다 같이 어디 근처라도 가보자고 해볼까.
좀금씩 잠에 취하는 이혜정.
그때 갑자기 2층 계단을 타고서 미약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애들 있잖아."
"다 자는데 뭐. 구마 코 고는 소리 여기까지 들리고."
"그래도... 혜정이도 있고..."
"혜정이도 자겠지. 걔도 아까 보니까 눈 반쯤 감겼었어."
"음..."
아직 안 자는데... 쟤들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이혜정은 이불을 꼭 눌러쥐고 눈을 떠 2층 쪽을 바라본다.
두근두금 심장뛰는 소리와 함께 슬며시 불이 켜진 방문을 보고 있는데.
"아~"
갑자기 친구의 가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