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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246화 (246/401)

<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기면 좋겠어 (7) >

나는 시차만 아니면 여간해선 늦게 일어나는 법이 없는데, 오늘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아마도 간밤의 헤프닝(?) 때문이겠지.

낮선 공간에서 한 두 시간 더 늦게 눈을 뜬 아침.

그럼에도 포근하고 나른한 기분으로 한참을 침대에서 밍기적 거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좁나 했더만..."

"쿠우~"

"왜케 붙어있어..."

혜정이가 옆에서 무방비한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낯설기도 하면서 익숙해 한참을 지켜본 것 같다.

잠든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기도 하고. 안아보기도 하고. 팔베게도 해주고, 돌려 눕혀도 보고.

이리저리 별 짓을 다 해도 깨질 않는 걸 보면 얘가 그래도 나를 많이 믿긴 하나보다 싶었다.

둘이 낮잠은 잔 적 있어도 이렇게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은 건 처음인데 긴장도 안 되나?

"그만큼 편하다는 거지? 그치?"

"쿠우울. 쿠우~"

"코까지 고네 이제는..."

경쟁과 긴장이 없는 상황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진짜 평화 그 자체인 거 같다.

얘는 어떨지 몰라도, 나한테는 혜정이가 그런 존재가 된다.

아 진짜 다 때려치고 싶다...

그냥 연애나 하고 편하게 살고 싶은데...

여러 가지 뭐 하나 쉽게 떨쳐낼 수 없으니...

생각하지 말자.

세상 젤 한심한 게 놀 때 공부하고, 공부할 때 놀 생각하는 거랬어.

지금은 휴가야. 내일까진 머리를 비우고 쉬는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을 비우고 싶어 서둘러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산 공기에 산책로나 한 바퀴 달려볼까 싶은데, 마당 한 켠에 공구리 친 역기가 눈에 띄였다.

펜션 주인 아저씨가 혼자 운동하는 기구 같아 보이는데 남한산성 산 할아버지 생각도 나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가 역기를 들어보았다.

"후욱! 그렇지. 이거지."

깔끔하고 단정된 체단실이나 헬스장도 좋지만. 녹슨 쇠봉에 습기를 머금은 콘크리트 역기의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

뭣보다 자연에서 하는 운동은 근본이 다르다.

모든 활동이 바로 몸으로 쭉쭉 빨리는 기분이랄까?

"훅. 후욱!"

오랜만에 초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그래. 난 원래 산에서 운동했었어.

그것도 곤륜같은 위대한 자연이 아닌 동네 뒷산 남한산성이 내 주무대였다고.

서서히 몸이 데펴지고 근육이 당지자 잡념이 사라지며 마음이 느긋해진다.

역시 운동이 좋다.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운동은 나를 위해서 하고싶어.

그 결과를 모두와 나누는 게 고맙고 감사한 거지. 언제 어느때고 운동의 본질은 자기발전이라고.

연맹도 선수도 다 부질없다. 흔들리지 말자.

결과가 아닌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로 했잖아.

진수 지성이. 그리고 진운이. 애들도 그냥 순리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매달린다고 될 것도 아니고. 편안하게 가자.

"훅. 후우욱!"

"와... 진짜 아침부터 대단하다."

혼자 쇠질을 시작하고 삼십여분 지났을까?

한참을 집중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선아가 꿈벅꿈벅하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일어났냐?"

"아침부터 뭐해...?"

"운동. 훅!"

"이 시간부터?"

"이 정도는 노는 거지. 훅. 후욱~!"

선아가 후드 집업 츄리닝을 입고 잠결에 눈을 비비며 다가온다.

평범한 일상의 모습에 괜히 어젯 밤 들려오던 야릇한 순간이 겹쳐보였다.

그래도 뭐. 연인간에 그럴 수 있지. 나도 어제 혜정이랑 했는데.

"잘 잤어?"

"응."

"정석이는? 훅! 후욱!"

"아직 자."

"그래? 피곤한가 보네. 니네 어제 나 자고 술 많이 마셨냐?"

"음. 뭐 대충..."

"혜정이 방에 있어."

"알어..."

"훅. 후욱. 안다고?"

"응. 어제 다들 잘 때 씻으러 갔는데. 2층은 뜨거운 물 안나오길래 1층 왔다가..."

"하하하~! 아하하하!"

"야! 웃지 마..."

"아니. 근데 오해하지 마라. 내가 꼬신 거 아니다. 걔가 왔다."

"니네도 참... 모르겠다."

"뭐 어때. 느긋하게 가자고. 서로 모르는 것도 아니고."

역기를 내려놓고 일어나 선아를 보며 말했다.

"걱정 마. 나 이런 거 어디가서 안 떠들어."

"역시... 다 들었구나. 아 쪽팔려..."

"뭐 어때? 괜찮다니까."

"아 이정석 진짜... 애들 밑에 있다고 하지 말라는데."

"술기운에 그랬겠지. 원래 술 들어가면 용감해지잖아. 대책없기도 하고."

"혼자 기분 낸다고 퍼마시고..."

"오~ 잔소리. 오오~"

너무 걱정말라고. 다들 알아도 모르는 척 지나갈 거 의식하는 사람만 부끄러워 지는 거라고 해줬다.

"되게 쿨하게 반응하는데?"

"쿨하게 반응해야지. 애인끼리 서로 사랑한다는게 흉도 아니고."

"...유명인은 진짜 마인드가 다르구나."

어떻게 하다보니 선아랑 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니가 너무 고마운게. 너 있어서 정석이가 안정감을 찾을 수가 있게 됐어."

"나 뭐 한 거 없는데?"

"왜 한 게 없어. 맨날 옆에 있어주고. 가게가서 밥 먹고."

"고기를 주니까."

"그래. 그게 고마운 거지. 정석이가 지금 하는 일이 그건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니까."

"난 사람 그렇게 안 봐. 너도 뭐. 그냥 운동선수지."

"하하하! 맞어. 나 그냥 선수지 뭐. 내가 뭐라고 그치?"

국민들 응원으로 먹고 사는 입장이라 잘 안다.

뭘 하든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게 정말 큰 힘이 된다.

아마 정석이도 우리나 형이 아니라 선아가 가게에 와서 편안하게 혼자 밥도 먹고 잠깐이라도 있어주고 하는 모습에 지금 일에 자신감을 얻게 됐을 거다.

"정석이한테 지랄은 해도 되니까. 가급적 오래오래 옆에 있어주라. 진짜로"

"넌 그렇게 잘 아는 애가 혜정이한테는 왜 그래?"

"뭐? 아니 내가 꼬신 게 아니라니까? 난 자고 있었어."

"어젯밤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너 혜정이한테 연락도 안 하고 그런다며."

"아 그건... 내가 진짜 바빠서..."

"똥싸러 갈 시간도 없냐?"

"넌 누가 이정석 만나는 애 아니랄까봐. 연애를 무슨 똥 싸러 가는데 비유를..."

"여자는 남자랑 달라. 남자랑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잘 수 있겠지만,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몸을 주지 않어."

"알어. 내가 쟬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니까?"

"그럼 좀 자주 연락도 하고 애 좀 챙겨."

"그럴 시간이 있어야..."

"내가 너 잘은 모르지만. 맨날 운동만 하니까 더 힘들어지는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래? 근데 열심히 해야 되는 건 맞는데."

"열심히 하는데. 적당히 즐거움도 챙기고 살라고."

"...어떻게?"

"야. 너 진짜 뭐야? 너 그때 그 피부 하얀 언니는 어떻게 만났어?"

"그쪽이 나 좋다고 했었어."

"...그럼 고등학교 때 잠깐 만났다는 애는? 그 뭐 하나 있었다며."

"걔도 먼저 찾아와서. 아니 뭐 근데."

"잠깐만. 마하야. 그럼 한번도 니가 먼저 여자한테 다가간 적은 없는 거야?"

있지. 그렇지만. 그건 섹스를 위한...

"아아~~"

"와... 얘 진짜..."

"아아~ 어어~~ 오~~ 와 이제 알았어."

"너 진짜 대책없다..."

존나 소름이 막...

그러네. 나는 한번도 여자애들한테 마음으로 다가가질 않았네.

왜 이렇게 나는 섹스로만 이어지는 연애가 될까 했는데.

"그럼 뭐부터 해야 되는 거야?"

"전화나 해!! 문자 꼬박꼬박 보내고!!"

"그... 그럼 연애가 돼?"

"야. 내가 이정석 쟤 왜 좋아하겠냐? 애 성실하고. 딴 짓 할 일 없고. 언제 어느때고 늘 그 자리에 있으니까 그렇지."

"오... 우리는 진짜 고기 잘 줘서..."

"야. 너네는 진짜 날 어떻게 보고..."

황당하게 연애의 꿀팁을 알게 됐다.

늘 섹스. 사랑 이런 거창한 것만 보고 있었는데.

서로간에 마음이 통하고 싹트게 되는 건 그런 큰 게 아닌 작고 작은 신뢰가 쌓여야 한단다.

신뢰. 잘 알고 있었지. 재민이가 진유정 좋아한다고 할 때도 나왔던 이야기고.

그런데 이게 내 경우가 되니까 엄청 간과하고 있던 이야기가 된다.

허이고 그동안 대체 뭐한 거냐...

아이고 아까운 정자들아...

짧지만 더없이 알차고 즐거운 휴가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은 내가 차가 있어서 애들을 태워다 줬다.

서울에 들어오자 선아가 먼저 자기들 청량리에서 내려달라고. 지하철 타고 가면 된다는데, 정석이 새끼가 잠깐 반발을 하지만 결국 여자친구 말을 거역하지 못해 쫄래쫄래 끌려간다.

"어차피 얘네 한 집 살잖아. 그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한 방향이고."

"아. 피곤한데."

"야. 잠깐 나 얘랑 사는 거 아니라니까!"

"됐어. 우리 가면 돼. 마하야 태워다줘서 고마워."

"그래. 가. 정석아 전화할게."

"그려 고생했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잠시 뻘쭘한 시간이 흘렀다.

"..."

"뭐? 왜?"

"아냐. 나도 그냥 지하철 타고갈까 싶어서."

"어차피 집이 한 방향인데 뭐."

"왔다 갈 거야?"

"하하하. 야 거기 내 집이기도 하거든?"

"오지도 않으면서..."

이번 여행에서 여러 가지를 본 것 같다.

선아 말대로 나는 운동과 여가의 경계를 너무 간과하고 있었다.

혜정이한테도 그런 이야기를 전해줬다.

"니가 좀 뭐 하나에 몰입하는 건 있는 거 같애."

"음. 근데 난 원래 잘하는 게 없었으니까. 늦게라도 잡은 적성 잘 살려봐야지."

"지금도 늦은 건 아니야. 오히려 빠르지. 우리 나이에 이렇게 성공한 애들이 어딨냐?"

잠깐의 어색한 시간은 다시 편안하게 흘러갔다.

혜정이도 X를 보면서 BMW 내부가 이렇구나 하는 둥 편하게 앉아 있었다.

"넌 어떻게 나랑 자도 아무렇지 않냐?"

"...뭐 하루 이틀인가."

"나 어제 너 아침에 막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한 거 알어?"

"응. 알어."

"근데 안 깨?"

"니가 내 몸 만진 게 하루 이틀 이냐고."

편안한 말도 왜 이렇게 야하게 들리냐. 그것도 어떻게 보면 재능이라.

"진짜 들어왔다 갈 거야?"

"음. 내려가야지. 그래야 내일 운동해."

"그럼 그렇지. 그런 애가 무슨 운동을 그만둔다고."

"혜정아."

"응."

"..."

"말해. 뭐?"

잠깐 신호에 걸린김에 진지하게 돌아보며 물었다.

"넌 내가 니 옆에만 있으면 좋겠어?"

"...뭐 딱히 그렇진 않어."

"그럼 내가 내 일 열심히 하면서 너한테 더 신경쓰면 되는 걸까?"

"무슨 의미로?"

"우리 연애하는 거."

혜정이는 굳이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정면만 보고 있었다.

"그렇지."

"내가 너한테 전화도 안 하고 연락도 안 해서 삐진 거지?"

"야. 그건 삐졌다고 할 게 아니라."

"근데 지금은 진짜로. 너도 어제 그제 들었다시피 내가 뭐 할 게 정말 많어."

"..."

"지금은 가뜩이나 먼저 스키 탔던 거 때문에 더 육상에서 불을 켜고 있는 상태고. 그런 건 조금 이해를 해주면 안 될까?"

"저기. 근데 있잖아. 내가 너한테 그런 걸 이해해주고 말고 할 관계가..."

"아시안게임 끝나고. 이번 대회 마치고. 그때 조금 정리를 할 거야."

"...뭘?"

"운동들. 스키도 그렇고 육상도 그렇고. 나도 조금씩 벅차는 거 같애."

11월이다. 더도 말고 딱 5개월 뒤였다.

이번 대회를 마치고 정식으로 연애를 하자고 말했다.

"진짜로. 우리 그때 제대로 사귀자."

"흠."

"아 생각하는 척 하지말고."

"척이 아니라 나도 생각을 해 볼 문제니까."

다시 천천히 서울을 가로질러 마포에 도착.

정말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시 머물고 있었다.

"뭔가 그 사이에 주변에 가게가 조금 바뀐 거 같다."

"몇 개 사라졌지."

"뭔가... 오랜만이긴 하네."

"넌 좀 역마살이 있는 거 같애."

"하하하. 어쩔 수 없지 뭐. 운동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그래서. 11월이라고?"

"어. 얼마 안 남았어. 그때까진 지금 하는 거에 집중하고 싶어. 해야만 하는 상황이기도 하고."

혜정이가 슥 고개를 돌리며 쳐다본다.

"난 니가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진 건 좋다고 생각해."

"고마워."

"근데. 뭐 일단 알았어."

"아냐 얘기해 근데 뭐?"

"아니야. 11월 알았어."

이혜정은 집을 올려다 본다.

"그럼 그때까진 여기 안 오는 거야?"

"곧 선발전이 있어. 그거 지나면 전주도 정리 할 거야."

"그 다음엔 태릉이라면서?"

"그러니까. 아 나도 좀 어디 한군데 묶여있고 싶다."

"내가 묶어줄까?"

"오~ 그런 플레이는 아직..."

"또 또 장난을..."

"그러고보니까 민서는 뭐하지? 소식이 뚝 끊겼네."

"야. 걔 얘기가 지금 왜 나오는데."

전주에 내려가서도 틈틈이 전화는 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지만 나를 옳아매는 여러 부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도 너가 있어서 다행이다."

"힘내. 잘 마무리 하고."

도망치지 않는다.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더라도 내가 받은 국민들의 응원과 기대는 반드시 충족시켜 주겠어.

그래서 반드시 내일의 행복을 쟁취하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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