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스트 댄스 (1) >
"다 왔냐?"
"어. 둘 끝."
"진수는?"
"진수 형은 오늘까지 쉰다고 그랬어요."
"그럼 진운이는?"
"진운이가 진수한테 가서 이야기 듣고 전해준 거야. 오후엔 내려온데."
"그래. 쉬고 싶은 놈들은 쉬라고 그러고."
"야. 그러지말고 니가 연락 한번 해 봐."
"네. 진수 형도 형이 오라면 바로 올 건데."
"됐어. 내가 강제할 권한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어."
"아 이 새끼..."
"형?"
"됐어. 시작하자."
넘어야 할 관문 앞에서 사랑은 잠시 접어둔다.
나도 내가 이런 선택을 할 거라곤 믿기지 않지만, 뭐가됐든 지금은 내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한국 육상의 위상을 세계적인 레벨로 올려놓고 싶다.
진수의 개인 행동. 진운이의 겉멋. 그리고 지성이의 자신감 위축.
하나하나 시간과 열정을 기울이다보면 해결 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시작해. 아니면 너네도 쉴 거야?"
"오케이 가자 지성아."
"...형 정수는 안 와요?"
"정수 기말고사 들어갔잖아. 아직 학생이고."
"하긴. 학생이 여기 와 있는 것 부터가 좀 이상했지."
"가자. 있는 사람에 집중해."
묵묵히 셋이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점심이 지나고 진운이가 진수를 끌고 내려왔다.
"왔냐?"
"어."
"병원에선 뭐래?"
"..."
"쉬어야 되면 좀 더 쉬고."
"아니야. 됐어. 나도 시작할래. 삼일 푹 쉬었더니 몸이 풀렸어."
평생 안 보고 지낼 놈들도 아니고.
다들 바라는 게 있고 목표한 게 있는 걸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지난 두 달간의 감정은 접어두고 우리는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그러게. 야 이제 밤도 슬슬 더워지는 거 같은데?"
"여름이 온 거지."
"바야흐로 육상인의 계절이 돌아왔네요."
"마하야."
"어. 진운이 왜?"
"우리 오늘 회식 안 할래?"
"회식? 어제까지 쉬고 왔는데?"
"그래도. 우리끼리 나름 뭉치자는 뜻에서."
나와 진수 사이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지.
진수한테도 물어보니 좋다고 해준다.
"그래. 가자. 밥 먹고 간단하게 치맥 해."
"오케이. 얘들아! 저녁 따로 먹지말고 뭉쳐."
어쨌든 서로간에 쌓인 게 있긴 했었다.
풀 건 풀고 나아갈 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들 모인 자리에서 말했다.
"건배!"
"아 시원하다. 형 저 휴지 좀 건네주실래요?"
"아 피부 타는 거 별론데... 썬크림을 더 발라야 하나."
"진운아. 너 갑자기 왜 이렇게 피부를 신경쓰냐? 어울리지 않게?"
"그냥. 원래 까만 거 싫었어."
애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진수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진수야 피곤하면 들어가."
"...넌 진짜 나한테 할 말 없냐?"
"아. 이 새끼..."
동민이와 다른 애들이 바로 분위기를 눈치채고 돌아본다.
"니네 또 왜 그래?"
"그래. 진수야. 진짜 특별한 거 없다니까? 나 그냥 마하 운동 똑같이 따라갔을 뿐이야."
"...이번에 병원 갔다 왔잖아."
"어. 뭐 있다고 그래?"
"없어..."
그랬겠지. 문제가 있으면 내공에서 이상이 드러났겠지.
일반인은 몰라도 운동선수는 작은 변화에도 몸이 크게 반응을 하니까.
알면서도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진수야. 이상 없으면 좋은 거잖아. 왜 이렇게 초조하게 그래."
"근데. 그 말이 더 기분이 나빴어."
"...왜?"
"그냥. 내 능력이 여기까지라는 거 같아서."
몸에 이상도 없고. 그렇다고 훈련을 빠지는 것도 아니고.
여기까진가. 내 능력의 한계는 여기가 전부란 건가.
진수는 그런 판단을 하고 있었다.
당장 자기보다 못했던 동민이가 기록을 앞서기 시작하자 초조한 건 이해를 한다만...
"야. 김진수."
"마하야. 잠깐만. 내가 먼저 말할 게."
"해. 편하게 얘기 해."
진수가 모두를 슥 둘러보았다.
눈빛에 결의를 담고서.
"지성이는 어릴 때부터 봤고."
"..."
"동민이도 대회 나가면 꼭 보던 친구고."
"그랬었지."
"진운이. 솔직히 진운이는 크게 신경을 안 썼어. 어차피 나랑 뛰는 종목도 다르고 하니까."
"나도 그랬어."
"그리고 마하. 니가 진짜... 말도 안 되는 놈이지."
난 별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 줬다.
"일단 미안하다. 나 빠지면서 마지막 시합 못 뛰어서."
"아니. 다행이다."
"야 이 새끼야..."
"아 마하 형."
"왜 나한테만 뭐라고 그래..."
진수도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번에 쉴 때 태릉 갔는데, 육상팀은 다 자리 비웠다고 하더라."
"새로 선발전이 열리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마하 니가 무슨 생각으로 고집을 부렸는지 알 거 같애."
"진수야. 돌리지 말고 그냥 얘기 해."
"...난 여기까지 하고 싶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자고 싸고 일하고 공부하고.
다 궁극적인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행복하지 않다면 더는 그것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진수가 느끼는 절망감이 얼마나 큰 지 개인적으로 다 이해할 순 없지만.
그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알 수 있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 뭐라는 거야. 미친놈아."
"그냥. 여기까진 거 같애. 그리고 병원 갔을 때."
"아무 이상 없다고 했다면서요?"
"지금은 그렇지. 근데 더 나가면 몸이 어떻게 될 수도 있다는 소리는 들었어."
"진수야. 그래도 이렇게 은퇴하는 건."
"난 어릴 때부터 지성이만 보면서 달렸어. 그런데 마하가 나타났고. 이제는 동민이까지 나를 넘었다. 국내에서도 안 되는 거 굳이 뭐하러..."
"진수야. 잠깐만."
일단 애 말을 끊었다.
여기선 단호하게 나가야 될 거 같다.
"병원에서 피로 쌓였다고 그래?"
"여기서 피로 없는 놈이 어딨어... 다 있지."
"애들 말고, 너. 니 몸 어떤데?"
내공이라고 만능은 아니다.
다 죽어가는 노인도 강기를 뿜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공은 어마무시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데 속은 중학생 정도 기운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런 내공 외공을 떠나 몸은 그 자체로 운영되는 별개의 기관이다.
"너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거 알어."
"..."
"근데, 나도 이번에 잠깐 친구들 만나고 오면서 느꼈는데. 사람이 앞만 보고 달리면 안 돼."
진수에겐 더 쉬라는 말을 해줬다.
아니. 이 친구는 쉬어야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도 초조하고 의사도 몸이 아슬아슬한 지경에 놓여있다는 말을 해준다.
피로는 답이 없다. 정말 쉬어야 한다.
"나 예전에 다빈이 만났을 때. 그때 나도 그랬어."
사귀다 헤어진 건 알지만, 왜 헤어졌는지는 다들 모르고 있었다.
어디가서 말하기도 쪽팔린 일이라 더 언급을 안 했는데, 오늘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 거 같다.
"다빈이 뭐?"
"그 쪼그만 애가 진짜... 뭐랄까... 내 정기를 다 빨아가는데..."
그러자 친구들이 눈이 동그래져서 돌아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 씨발. 대충 알아듣고."
"너 걔랑 했냐?"
"형 다빈이 누나랑 했어요?"
"뭐라는거야 이 병신들은..."
아무튼, 그렇다.
길게 설명하긴 나도 씨발 남잔데 쪽팔리고. 그냥 몸이 지치면 운동이고 뭐고 다 피곤해지는 법이라고.
"쉬어. 의사도 그렇게 말했으면 넌 지금 운동이 부족한 게 아니라 휴식이 필요하다는 게 맞는 거 같애."
"그럴까...?"
"그래. 괜히 씨발 은퇴니 뭐니 헛소리 하지말고."
딴에는 용기를 내고 다 끝내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래도 잡아주니까 애 얼굴에 부담이 내려가는 게 보인다.
"그래. 마침 말 나온김에. 나도 니네한테 느낀 거 다 좀 얘기해 보자. 이건 내가 차기 대표팀 감독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지난 유럽 갔다 오면서 느낀 거야."
진수가 말문을 열었기에 다 털어놓아 본다.
진운이는 지금 겉멋에 빠질 때가 아니다.
니가 바라는 그런 삶은 메달을 따고 결과를 내고 난 다음에 생각할 문제지 벌써부터 피부니 뭐니 하고 있을 거면 너야말로 운동 그만두고 연예기획사 문을 두드리라고 해줬다.
"야... 뭘 그렇게까지 말해."
"실망하지 말고. 독하게 말한다고 상처입지 말고. 니가 화려한 삶을 살고 싶으면 지금 운동하는 것 보단 그게 맞어."
"..."
"정수 우리랑 같이 운동했잖아. 우리 걔한테 연예계 이야기 많이 들었잖아. 몸 좋고 날렵하면 그건 그거대로 또 새로운 기회 있다고 하니까."
"알았어 열심히 할게."
"진운아. 너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정말로 그냥 현실을 말해주는 거야."
진운이가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따고.
더 나아가 베이징에서 800미터 금메달을 받더라도 내가 누린 인기와 혜택을 얻기란 힘들 것이다.
나는 처음이라 그 혜택을 누린 거지. 두 번째 메달리스트에게도 그런 삶이 펼쳐지리라고는 자신할 수 없다.
만약 진운이가 원하는 게 그쪽 방향이라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운동을 그만두고 그 길로 나아가게 해주고 싶다.
"광고 찍으면서 알게 된 기획사가 몇 군데 있긴 해. 뭐 내가 말해본다고 들어먹진 않겠지만, 그래도 한번 물어는 볼 수 있어."
"..."
"진짜야. 진수랑 다르게 너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봐."
진운이 이야기를 마치고 지성이를 보았다.
"왜요? 저도 뭐 할 말 있어요?"
"있지. 니가 젤 많어 새끼야."
"듣기 싫은데..."
"왜?"
"그냥. 오늘 형 무서워서."
어이고 이 천재 새끼...
"지성아. 유진 볼트가 그렇게 무섭냐?"
"..."
"나도 이번에 걔한테 졌어. 아니 세계신기록 낸 놈을 무슨 수로 이겨? 그 새끼가 세계에서 젤 빠르다는데."
"그 말은 전 형한테도 이길 수 없다는 뜻이네요. 형도 세계신기록 보유자니까."
"승부에서 이기고 지는 걸 왜 이렇게 신경 써. 지는 건 당연한 거야. 나도 처음에 너한테 졌었어."
동민이가 갑자기 막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미친놈아.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왜 씨발. 나 그때 존나 상심해서 돌아갔는데."
"그리고 그건 지성이 문제도 아니었지."
"잠깐만, 마하가 지성이한테 언제 졌었어?"
"그러게. 언제??? 너 언제를 얘기하는 거야?"
"고등학교 2학년 전국체전 때. 그때 얘 우승했잖아."
"아. 그때."
나보다 강한 사람이 있으면 잡으려고 눈에 불을 키고 달릴 것이지 왜 지레 겁을 먹고 꼬리를 마는지.
"지성아. 세계적으로 봐도 9초대 선수는 몇 없어."
"..."
"9초에 들어왔다는 건, 그 자체로 월드랭킹을 만들 수 있다는 거야."
"9초... 씨발 존나 부럽다. 재수없는 새끼들."
"시끄러 인마. 이제겨우 10초 초반 온 주제에."
"뭐야? 이 새끼. 갑자기 왜 나한테 화살을 쏴?"
동민이와 진수가 입씨름 하는 가운데 지성이를 보면서 말했다.
"쫄지마라. 지레 겁먹지 마. 될 것도 안 돼."
"..."
"우리. 트랙 우리 혼자 달리잖아. 다른 애들 보지 마. 내가 처음에 운동 시작할 때 뭐라고 그랬어?"
"뭐라고 했었죠?"
"너 뭐라고 했지?"
"그러게. 마하가 한 말이 뭐지?"
"아... 이 씨발... 진짜 죽여버릴 놈들..."
"야. 다시 말해봐. 나도 기억이 안 나."
"후우. 명경지수. 개새끼들아..."
맑은 물 위에 떠 있는 가벼운 이파리같이 몸과 마음을 비워라.
결과가 나기 전에는 꿈도 목표도 잡념이다.
"무위(無爲).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뜻. 그러면서 운동에 집중하고 다른 건 생각하지 말라고 내가 그때 분명히 그렇게 말을 했는데."
"오오~ 어 그래. 들었던 거 같다."
"진짜? 얘가 그런 말을 했었냐?"
"나도 기억 나는 건 그때 유진 볼트랑 정수 찾아와서 누구냐고 했던 거 밖에."
"난 조금 기억나는 거 같애요."
"야. 됐어. 안 해. 다 때려 쳐. 씨발놈들 진짜..."
어느정도 감정이 정리 된 진수가 다시 본래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와 말해준다.
"하하하. 근데 마하야. 야 진짜 우리 처음 만나고 다들 들떠있는데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해."
"그러니까. 지가 흑인을 데리고 와놓고."
"유진. 처음 볼 때 진짜 인상 강렬했지."
"난 유진이보다 정수. 쟨 누구지? 하는 거 밖에 기억 안 나요."
"아우. 말을 해주면 뭐하냐. 기억을 해야지. 이러니까 운동하는 놈들이 어디가서 무식하단 소리를 듣는 거야!!"
부족한 건 채우고. 과한 건 던다. 그리고 없는 건 만들어 낸다.
한바탕 큰 실패와 갈등을 겪은 우리는 상처를 이겨내고 다음으로 나아가기로 약속했다.
"진짜 잘 기억해라. 이제는 절대 운동할 때 딴 생각하지 말고."
"오케이. 하여간 잔소리 존나 해. 이 새끼."
"동민이는 하던대로 쭉 가고. 진수는 일단 좀 쉬고. 넌 열정이 너무 과해서 문제야."
"나는 다시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그래. 진운아. 그렇게 하면 돼."
마지막으로 지성이를 보면서 말했다.
"다시는 어디가서 쫄지마라. 뒤진다 진짜..."
"격려에요... 협박이에요..."
"뭐든 말귀만 알아들어."
"젤 무식한 건 자기면서..."
"뭐 인마? 저 새끼가 씨."
"그건 지성이 말이 맞지. 니가 우리중에 욕 젤 많이 해."
"이동민. 니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아니야. 동민이보다 니가 욕 더 많이 해."
"맞어. 가끔 마하 너 인터뷰 할 때 보면 저러다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 돼."
"운동이나 똑바로 해 새끼들아!!"
다시 시작해본다.
이번엔 잘 될 거 같다.
진짜로 팀 구마하가 뭔가 일을 낼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