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륜기로 가버렷-248화 (248/401)

< 라스트 댄스 (2) >

7월 중순. 장마가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덥고 무더운 날씨에 나는 대구로 호출을 받았다.

"어. 마하 씨 왔어요."

"네. 행사장은요?"

"저쪽이요."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연맹에서 대구에 큰 육상진흥센터를 건설하고 있었다.

오늘은 기공식이 있는 날.

즉, 얼굴마담 하는 날이었다.

"그래. 마하 왔구나."

"네 회장님..."

"오랜만이다."

"예. 잘 지내셨죠?"

"그래. 일단 사진 찍고 다시 이야기 하자."

박문기도 오랜만에 본다.

안 보고 사니까 좋았는데...

"하하하~ 기자님들 우리 사진 잘 찍어주셔야 합니다."

"네 걱정마시고요."

"저 구마하 선수 키가 너무 커서 현수막이 잘 안 나오는데요. 조금만 옆으로 가주시면 안 될까요?"

"으음. 그럴 수 없지. 기자님이 조금 옆으로 가서 찍으면 되겠구만."

"하하! 아 네. 그렇네요."

젠장. 기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다니... 어디서 정체모를 악플과 비난 글이 올라오게 생겼구만.

행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겨가는데, 박문기는 그때도 나를 놔주지 않고 여기저기 인사를 시키고 다녔다.

"마하야. 여기 문체부 위원님이신데. 인사 드려라."

"네. 안녕하세요."

"으음. 이야~ 멀리선 봤지만 실물로 보니 인물이 훤하구만."

"감사합니다..."

"위원님. 마하가 이번에 국가대표 감독직을 맡게 됐습니다."

"그래요? 아니 그러기엔 나이가 조금 젊지 않나?"

"실력으로 가는 거죠. 우리 연맹은 늘 투명하게 운영되니까요."

아 피곤해라... 진짜 이짓 때문에 메달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다.

한참을 여기저기 얼굴을 팔고다닌 뒤에야 겨우 연맹 사람들끼리 자리에 앉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선수들은 좀 어떠냐?"

"네. 뭐. 다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선발전 기대하고 있다."

"..."

외부인 앞에서의 박문기와 내부인과 있을 때의 박문기는 다른 사람이 된다.

남들 앞에선 그렇게 자랑하고 끌고 다니더니, 면대 면으로 얼굴을 마주하니 어디 한번 큰소리 친 만큼 실력을 보여봐라 라는 듯 눈을 날카롭게 쳐다 본다.

"열심히 하는 거죠 뭐."

"기록으로 자른다. 알지?"

"그럼요. 당연한 말씀이죠."

"너도 봤다시피 여기저기 돈 나갈 곳이 많다. 이제는 크게 팀을 운용하기도 어려워."

권력을 잡으면 건물을 높이 세운다고 했던가.

실내 경기장. 좋지. 아주 좋아. 특히 요즘같이 덥고 기습적으로 비 쏟아질 때면 정말 필요하지.

근데 대구에 있는 시설을 누가 얼마나 이용할 수 있겠어. 운동을 뭐 맨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할 것도 아니고.

전주에 터전을 잡고있는 우리도 웬만하면 장소를 옮기지 않는데...

남들은 박문기가 육상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고 여기겠지만. 왜일까. 내가 어려서 그런가. 난 이것도 결국 이 사람이 스포츠를 발판삼아 더 큰 물로 나아가기 위한 사욕을 채운 게 아닐까 싶어진다.

하지만, 그조차 육상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대면 나도 할 말은 없다.

그냥 간사하고 치졸한 인간이 아닐까 싶다...

아시안게임 결과 잘 안 나와봐라. 얼마나 들들 볶을까...

"진짜로 감독 같은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그렇겠지."

"이런 스트레스를 혼자 누르지 못하니까 어른들이 애들을 그렇게 쪼지."

"그러게. 이제 형의 고생을 조금 알겠냐?"

대구에서 돌아오는 길. 운전대를 붙잡고 형한테 전화해 불만을 털어놓고 있었다.

뭔가 책임있는 일을 맡으니까 요즘 형이랑 대화가 잘 된다.

형은 식당 운영하는 부담이 어떻게 대표팀과 비교 될 수 있겠냐고 하지만, 내가 볼 땐 먹고 사는 문제는 다 똑같으니까.

"아무튼, 그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한 눈으로 다르게 쳐다보는지."

"형이 말했잖아. 그런 게 다 보인다고."

"후우... 아 형. 진짜 피곤하다."

"운전 조심하고. 그리고 너."

"어. 뭐?"

"음. 아니다."

"뭐? 말해 뭐?"

"요즘 혜정이 만나냐?"

먼저 펜션 여행을 갔다 온 뒤로. 나는 선아 말대로 혜정이랑 자주 연락을 하고 있었다.

소소한 근황도 나누고 뭐하고 있냐고 그냥 물어도 보고. 집 관련 문제도 좀 들어주고.

"아. 욕실이 고장났다고 그래서."

"으음."

"근데 그걸 형이 어떻게 알어?"

"어떻게 알겠어. 요즘 혜정이 어머니가 유독 자주 식사하러 오시니까."

"하하하... 아 진짜 아줌마 자꾸 그러니까 정말 부담되긴 하네."

"아무튼, 잘 지내고."

"어. 누나한테도 안부 전해 줘."

아직은 운전 중. 혜정이한테도 연락해 본다.

"사람 불렀어?"

"응. 욕조 아래가 조금 깨져 있었데."

"뭐했다고 깨져. 비싼 돈 주고 만들었는데."

"계산은 그 카드로 했어."

"잘했네."

"어디야? 운전 하는 거 같은데."

"어. 대구 갔다가 지금 전주로 넘어가는 중."

"진짜 넌 역마살이 있어. 무슨 영업 사원도 아니고 매번..."

대구는 왜 갔냐고 하길래 대충 설명을 해주려고 했는데.

"왜 하필 대구냐고! 아니 실내시설 너무 필요한데, 우리가 대구까지 언제 내려가. 차라리 대전이나 충청도 이런데다 했으면."

"하하하. 너 지금 너무 흥분한 거 아냐?"

"후우. 아무튼 그렇다."

"근데. 너 요즘 왜 이렇게 전화 자주 해?"

"응? 왜? 싫어?"

"아니. 바쁘다면서. 은근 시시콜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니까 신기해서."

그렇게 하래잖아. 그래야 사귈 수 있다니까.

난 뭐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그래서 좋냐?"

"뭐. 나쁘진 않네."

"넌 내가 맨날 여자만 만나고 다니는 줄 알지?"

"무슨. 관심 없거든?"

"아 그렇게 따지니까. 요즘 너무 외롭네."

"뭐가 외로워.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서."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좀... 뭔가 외롭고."

"올 거면 얘기해. 나 본가 갔다 올 테니까."

"야. 아 씨 넌 무슨 말을..."

"운전 해. 나 지금 책 보던 거 있어서."

"너. 방학하지 않았어?"

"방학 했으면 책도 안 보냐? 오히려 방학 했으니까 밀린 책들 봐야지."

통화를 마치고 잠깐 생각을 해봤다.

이건 거의 사귀는 단계 아닌가?

서로 일상을 나누고 근황을 묻고. 생활을 공유하고.

이게 남자친구 여자친구잖아.

근데 왜 또 이런 단계가 되니 잠자리를 거부하지??

"진짜 신기한 애야."

이혜정은 이혜정이고. 나는 다시 땀과 파스 냄새 범벅인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오케이! 진운이 좋고!"

"헉. 헉. 야 씨... 좋긴 뭐가 좋아..."

"자. 자 다음은 동민이 출발!!"

"아우 저 새끼. 열정 미친 놈..."

진수가 열흘 정도 푹 쉬고 돌아와 본래의 컨디션을 찾았다.

이제는 예전같이 조급해 하지 않는다.

그러자 진짜 놀랍게도 기록이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면 애가 또 마음이 급해져 운동량을 늘리려고 하는데. 최대한 서두르지 않도록 서로서로가 옆에서 조율해주고 보완해주면서 돕는 중이다.

"진운아."

"어."

"너 여자친구 만나러 간다고 했지? 차 필요하면 얘기해라."

"됐어. 사고라도 나면 뒷감당 어떻게 하라고."

"내 친구들도 타는 차라서. 보험 들어 놨어. 사고 나도 돼."

"야 안돼지!! 그러다 진짜 사고나면 난 어떡하라고!!"

진운이도 적당히 욕망을 풀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중이다.

누군지 아직 만나보진 않았는데, 여자애도 운동하는 애라더니 개념은 있는가, 남수네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도 매번 차를 내주는데 데이트를 갔다오면 애가 컨디션이 좋아지고 있었다.

"지성아. 넌 진운이 여자친구 봤냐?"

"학교 사람이라고 하긴 하던데. 몰라요. 관심도 없고."

"하여간... 넌 왜 이렇게 애가 재미가 없냐."

"형은 재밌으려고 운동하세요?"

"아. 진짜 답답한 놈. 됐어 인마."

지성이도 지성이대로 원래의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말수가 줄어드는 게 하루하루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 같다.

동민이는 이번에도 국내 대회에 나가 단거리 상을 받아왔다.

그것도 무려 우승이었다.

지 놈 말로는 나도 없고 진수 지성이 다 없으니까 빈집털이 했다고 하지만, 기록을 보면 딱히 빈집털이가 아니라 서로들 있어도 좋은 승부가 됐을 거 같다.

"내가 문제네..."

나는 나대로 제 실력 유지하고 혜정이와도 한 계단 한 계단 밟아가며 나아가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모든 일을 다 혼자서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광고도 간간히 들어오고 행사도 있고. 이제는 거기에 대표팀 문제까지 있어 연맹도 자주 왔다갔다 하다보니, 몸에 피로가 쌓이는 기분이다.

아니. 감독님은 대체 뭐하는데 이렇게 오래 있는 거야?

"네? 말씀을 좀 해보세요. 신혼여행 가신 거 아니세요? 이민 가셨어요?"

"바뻐 나도."

"아니. 나만 이렇게 방치해두고 혼자 바쁘다고 하시면..."

"내가 널 언제 방치했냐. 먼저도 화보 찍은 거. 그거 여기서 일 따서 보낸 거고."

"아 감독님. 일은 괜찮으니까. 좀 돌아오시라고요. 힘들 때 사람이 옆에 있어줘야죠."

"너도 이제는 어느정도 혼자 설 필요가 있어. 그리고 야 인마. 내가 버는 돈이 결국 니가 쓰는 돈이지. 너 왜 자꾸 회사 카드로 애들 밥 사주는거야?"

"그거야 뭐. 아니 그리고. 사무실은 걱정도 안 되세요? 지금 거기 빈 건물인 거 아세요?"

"아니. 직원들 있어."

"네???"

"일하는 사람들 있다고."

와. 진짜 서울대 출신이라 다른 거냐? 아니면 그냥 이분이 그동안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거냐.

"그럼 그때 촬영장에 왔던 분이 우리 직원이라고요?"

"어. 몰랐어?"

"모르죠. 전 그냥 그쪽 회사에서 오신 분인 줄 알았지..."

"하하하. 바쁘면 좋은 거야. 아무튼 난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말고."

"후우... 힘들어요."

"힘들지. 당연히 힘들 거다."

"대사부님도 요즘엔 연락이 뜸하시고요."

"왜 대사부야? 아버지지."

"아 그냥 둘이 있을 때 이야기죠."

"고생하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다 돌아온다. 잘하고 있어."

"하하하 감독님. 안 돌아와도 돼요. 그리고 뭐가 돌아와요 무슨 부메랑도 아니고."

"니가 혼자 못 해낼 놈이면 우리도 널 이렇게까지 믿고 맡기지 않어."

더는 날 학생이나 보호해줘야 할 선수로 인식하지 못하는 건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래도 결국 수컷들의 세계라는 게 혼자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환경이라는 건 변함 없는 사실이라고 말씀하셨다.

"한 사람의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생각하자고."

"그렇긴 하죠..."

"그리고 니 나이 때 그런 큰 일을 맡는 것도 값진 경험이야."

"박문기가 무섭게 노려봤다니까요?"

"들어보니까 결국 성적으로 대표팀 끊었을 때 지금 너희가 주축이 될 거 같은데."

"아무래도 그렇겠죠...? 애들 실력을 보나 성적을 보나."

"선발전 전에는 돌아가니까. 그때 한번 보자."

"네."

7월 8월. 남들은 골드시즌이다 뭐다 들로 바다로 해외로 움직일 때.

그래도 천병욱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있어 우리는 연맹의 지원금으로 또 한번 세계대회를 다녀올 수 있었고.

이번엔 먼저와 다르게 값진 경험을 쌓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인천공항에 돌아왔다.

"아 씨... 처음으로 결승 갔는데... 너무 쉬었어."

"쉬었으니까 그 성적이 나왔지. 잘했어 인마."

진수는 처음으로 해외대회에서 결승무대에 올랐다.

지성이는 결승은 넘지 못했지만 예선전에서 자기 기록을 경신하며 9.91이라는 성적을 냈지만, 준결승에서 허벅지에 무리가 온 탓에 시합을 기권했다.

진운이는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다만 이번 대회에서 아프리카 선수들이 대거 출전한 탓에 선수 난이도가 올라간 만큼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고 본다.

그리고 동민이. 나의 친구. 대기만성형의 우리 계주 마지막 퍼즐.

"마하야."

"응. 왜?"

"...존나 아쉽다."

"괜찮아. 5위 한 거야. 우리 한국 계주팀이."

나 진수 지성이 그리고 동민이까지 포함 된. 한국 계주 팀이 세계대회 계주경기에서 5위를 기록했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중국과 일본이 뒤섞인 시합이었다.

"니가 와줘서 가능했다. 중국이랑 일본도 만만하게 보지 못 할 거야."

"씨발놈들... 아 씨발 거기서 스텝이 꼬여서."

한발 더 나아간다.

친구들이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승부욕을 가지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세계는 몰라도 아시아의 정상은 잡을 수 있어.

이번에도 일본 중국과는 한 끗 차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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