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스트 댄스 (3) >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처음의 부담감이나 스트레스도 동료들이 적당히 나눠들자 나만의 부담이 아니게 되었다.
무엇보다 애들도 가능성을 본 만큼 점점 더 목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명경지수. 명경지수. 합! 명경지수!"
"...뭐하냐?"
"뭐하긴. 명경지수 중이지."
"그게 그렇게 한다고 되는 거야??"
누가 먼저 시작했더라? 진운이였나? 지성이였나?
갑자기 친구들이 운동 시작 전 양손을 합장하며 명경지수라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근데 애들 딴에는 나름 진지한 루틴이 잡혔는가, 막상 명경지수 주문을 외우고 나면 운동 할 때는 집중력이 높아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민아."
"흡. 왜? 말걸지 마. 집중중이야."
"너까지 그러냐..."
"이걸 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내일 선발전 가서는 하지마라."
"왜!! 닥쳐! 내 마음을 흐트러 놓지 마!!"
명경지수는 맑은 물 위에...
아이고 됐다. 알아서 해라...
동민이가 정좌를 틀고 앉은 가운데, 진수와 진운이까지 셋이 삼각형을 이루고 앉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지성이가 다가와 말했다.
"우리 집 기독굔데."
"...딱히 종교적인 의미는 없어."
"신기하네요. 진짜로."
"뭐가 신기해. 효과가 있잖아. 쟤들이 이상하게 해석을 해서 그러지."
"그게 아니라. 처음이에요."
"음? 뭐가?"
"그냥 이렇게 운동한 거.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고. 다들 각자 운동하고. 그런데도 서로서로들 필요하면 뭉치고."
"팀이 된 거지. 우리가."
"팀이라... 살면서 육상부를 떠난 적은 없어도 팀이라는 생각은 못 해봤는데."
지성이가 말했다.
다들 실력이 좋고, 누구 하나 떨어지지 않고. 그리고 또 누구 하나 게으리지 않다.
여기 와서야 진짜 엘리트 스포츠를 하는 것 같다.
"야. 꺼져 뭔 엘리트 스포츠야."
"형 그거 알아요? 결국 형이 젤 엘리트 선수야."
"닥치라고. 난 좆밥이니까."
"후후. 계속 쭉 이렇게 가면 좋겠다."
그것도 선발전 결과에 따라서. 그리고 연맹의 입맛에 따라서 바뀌겠지.
아무튼 내일이 지나면 또 새로운 대표팀이 꾸려지겠지.
나도 진짜 감독이란 직분을 맡게 되겠고.
* * *
8월 말. 아시안게임과 2007 세계선수권까지 운영 될 육상대표팀 선발전이. 그것도 자그마치 서울 잠실에서 열리게 되었다.
"와... 잠실..."
"여기서 어릴 때 딱 한번 뛰어봤는데."
박문기 회장... 사람은 재수 없을지 몰라도 손 큰 건 알아줘야 돼.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치러낸 잠실 운동장은 모든 육상인의 성지와도 같다.
나도 이곳에서 비공식 테스트를 거쳤었지.
그때는 밤이었다.
대낮에 운동장을 뛴다는 건 뭔가 다른 기분이었다.
선발전에 앞서 각자 소속된 팀으로 돌아갔다.
나도 연세대로 돌아가 후배들도 보고. 민구 형도 보고.
"선배?"
"어. 선영아. 왔어."
"역시 선배는 운동복 입고 있어야 잘 어울려요."
"하하하! 너도 오늘 잘해라."
이현석 교수님도 뵙고 이두희 전 감독님도 인사를 드렸다.
"마하야. 오랜만이지 않냐?"
"그러게요."
"뭐가 오랜만이야 인마. 딱 한번 뛰어놓고서."
"아 감독님... 감독님이 먼저 오랜만이라고 하셨잖아요."
"하하하!"
이두희 전 감독님이 다시 연맹으로 돌아오셨다.
다만, 대표팀을 진두지휘 하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내 자문과 고문역을 맡아 아시안게임을 다녀오실 예정이다.
"선생님이 부탁하셔서."
"아버진 좀 어떠세요?"
"괜찮아. 다만 사람이 한번 무너지니까 일어나기가 힘든 것 같다."
천병욱 대사부님. 나의 양아버지는 호전되던 병세가 다시금 악회되어 재수술을 받으셨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저려온다.
"너무 제가 고집을 부렸던 거 같아요."
"아니야. 잘 했어. 그 고집이 있었기에 다른 선수들이 기회를 얻었다."
"..."
"권력을 잡은 사람을 견제하기란 어려운 일이야. 누구 말대로 결과는 뻔하다고 하더라도.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던 건 잘못 된 게 맞어."
"감독님..."
"넌 니가 할 일을 한 거야. 오히려 그렇게 따지면 어른들이 미안하지."
"다들 저한테 잘 해주셨잖아요."
나도 육상이 좋다. 스키도 좋지만, 자줏빛 8개 트랙은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커다란 가치가 있다.
받은 만큼 세상에 돌려주고 싶었는데, 그 와중 생각보다 많은 힘듬과 어려움을 느꼈다.
그냥 배워간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은 뭔가 결론을 내기도 어려운 문제고.
오전 시합 선서를 하고 바쁘게 기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박문기가 흘렸는지 아니면 기자들이 어디서 소스를 얻었는지 내가 차기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된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럼 구마하 선수는 이번 아시안게임에 참가 안 하는 건가요?"
"아니요. 저 지금 번호 표 달고 있잖아요. 플레잉코치로 갑니다."
"그럼 선수 선발에는 관여하지 않는 건가요?"
"선수 선발은 실력이 우선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판단하거나 선별할 일은 없습니다. 혹시나 문제가 되는 선수들이 있다면 그런 분은 연맹에서 신경써 주실 거라고 봅니다."
그래도 누가 기자들 아니랄까봐. 하나 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구마하 선수. 이번에 선발전 열리기 전 까지. 따로 팀을 꾸려서 훈련하고 있었는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구마하 선수와 가까운 사람들 위주로 팀을 꾸리는 거 아니냐는 의혹이 있는데."
"의혹이 아니라. 실력으로 평가 되는 거고요. 그 친구들이 저와 가까운 사람들이고. 또 저를 찾아와서 같이 운동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기록이 안 되면 떨어지겠죠.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어도 반대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작년 약물의혹때도 겪었지만 언론과 대중 앞에선 진짜로 말을 아낄수록 나를 지키는 것 같다.
오전부터 트랙과 필드. 그리고 높이뛰기와 장대 등. 여기저기 다채로운 경기가 펼쳐졌다.
다들 오랜만이거나, 아니면 처음으로 잠실 구장에서 운동을 하는만큼, 의욕적이고 꽤 활기찬 기록이 나오는 것 같다.
"재민아."
"어. 이야~ 멋있는데? 거기 서 봐. 사진 좀 찍자."
"익범이는?"
"화장실."
"아. 안녕하세요."
"네. 누구셔?"
"익범이 여자친구."
"아~ 아.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구라치지 마. 너 우리 자주 보지도 않잖아!"
"시끄러 새끼야. 원래 이러는 거야."
연대 친구들이 응원을 와줬는데, 친구들은 작년 연고전으로 잠실구장을 사용해 본 만큼 나보다 더 이 공간에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아. 연고전... 진짜 가보고 싶었는데."
"와. 오면 되지. 어차피 매년 하는 건데."
"대표팀 떨어지면 연고전이나 가서 소리쳐야지."
"이 새낀 말을 무섭게..."
친구들도 봤고, 익범이 여자친구랑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해주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연세대 육상부로 내려왔는데, 이현석 교수님이 부르신다.
"네. 감독님."
"...저기 마하야."
"네. 말씀하세요."
"혹시... 너 뭐 이야기 들은 거 없냐?"
"네? 뭐요?"
나도 모르던 소식을 교수님이 주변을 통해서 듣고 오셨다.
"네? 그게 무슨 소리세요...? 한 사람만 나간다니요?"
"후우. 박 회장 이 인간..."
천병욱 아버지가 계실 적 대표팀은 많은 선수들에게 보다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운영되었다.
그래서 실속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세계무대를 경험하고 돌아온 선수는 우수한 지도자가 되어 육상의 뿌리와 토대를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하지만 이제 그런 육상 생태계를 걱정하고 신경쓰던 농부는 자리에 없다.
지금 연맹은 박문기 회장과 그 주변 사람들로 조직이 구성된 상황.
올해 선발전은 아시안 게임을 몇 달 앞둔 상황에서 치러지는만큼, 메달 가능성이 없는 선수는 굳이 대표팀으로 차출하여 뽑지 않는다.
그것이 오늘 시합을 치르는 가운데 벌어진 공식적인 발표란다.
"이두희 감독님도 그런 말씀 없으셨어요."
"두희 형도 지금 얘기 듣고 위에 항의하러 가셨어..."
"..."
"종목별로 세계 기록과 대조를 해서 뽑는다고 하는데."
"저. 교수님... 진짜로 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종목별 메달을 딸 수 있는 선수라고 한다면...
아무리 아시안게임이라 하더라도 단거리에서 나 하나... 여유롭게 봐주면 진운이 둘 정도...
나머지는... 특히나 계주는 기록으로 측정을 하는데.
어차피 뽑을 선수가 나 하나라면 계주 팀도 꾸릴 수가 없다.
이런 좆같은... 그런 의미의 잠실 구장이란 말인가...
나머지 이 모든 선수들은 이곳에서 좋은 추억이나 안고 가라는 거냐...
"어. 두희 형님. 어떻게 됐어요?"
"아 이 개좆같은 놈들... 진짜. 씨팔."
"형. 애들 있는데."
"후우... 미친다. 세금이 장난이냐는 소리 밖에 안 해."
"그럼 진짜로 한 사람 뽑자고 이 큰 운동장을 빌렸다고요?"
"..."
이두희 감독님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보신다.
"너... 아까 인터뷰 했지?"
"네..."
"뭐라고 했냐?"
"..."
"설마 대표팀 감독이니 뭐니 그런 말 한 거 아니지?"
박문기 이 개새끼...
이렇게 엿을 먹이냐...
내가 대표팀 감독이 되고 나만 선발이 되면...
"회장님. 어디계세요?"
"마하야. 가만히 있어라."
"감독님. 어디 계시는데요? 사무실이 한 둘이어야지."
"...따라와라."
"형!"
"아 상률이도 없어! 선생님도 없고. 나라도 좀 나서봐야 될 거 아냐!"
"그럼 나도 같이가요..."
"너나 가만히 있어. 니네 애들 다치기 싫으면. 연세대 육상부 신생이야."
"아 이 씨..."
* * *
"음. 마하 여기 왜 왔어. 시합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회장님..."
"어. 왜?"
이 뻔뻔한 인간...
그래놓고 어떻게 이렇게 쳐다보는지.
"왜? 뭐 때문에 그래. 나 바쁘다."
"메달 가능성이 있는 선수를 뽑는다고 들었습니다."
"응. 선발전이 그런 거잖아."
"...가능성은 어떻게 보시나요?"
"기록이랑 대조를 해봐야지. 우리는 그런 운동이니까."
"회장님... 기록은요. 그날 그날 선수 컨디션에 따라 줄 수도 있고. 더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렇게 되지 않게 우리가 잘 보필을 해줘야지."
"그런 실패가능성을 낮추기 위해서 대표팀은 후보 선수도 있고. 대체 할 선수들도 있고요."
"마하야. 우리 연맹은 후원금과 세금으로 운영이 되는 곳이야."
천병욱 아버지가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셨을지...
이래서 힘에 대항하지 말라는 건가.
규율을 만들고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이 대가리를 굴리니 후장이 따이는 기분이다.
딜도를 쳐박고 딸딸이를 치래도 이보다 비참하진 않을 거 같다.
"회장님. 마하 말이 맞습니다. 선수는 보조 예비 포함해서 예년같이 꾸리시는 게."
"이두희 씨. 당신 이제 그런 말 할 위치 아니잖아."
나도 나지만 이두희 감독님도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박문기는 그런 모습조차 가소롭다는 듯 여유로운 자세로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다들 왜 이러는 거야? 아직 선발전 안 끝났잖아."
"...결국 모든 비난을 마하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려고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이봐요. 내가 한가한 사람같이 보여?"
박문기가 날선 감정을 비추며 날 쳐다본다.
"마하야. 내가 그럴 거 같니?"
"...기자들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한 말을 내가 어떻게 하라고?"
"제가 대표팀 감독이 되는데, 연맹이 저 한 사람만 뽑아버리면..."
"누가 하나만 뽑는다고 그러냐. 누가?"
박문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
"세금이 장난이야? 니들이 나라에 돈 맡겨 놨어!? 실력대로 하자고 선발전을 연 거 아냐! 그럼 실력대로 평가를 받으면 그만이지! 왜 와서들 시끄럽게 구는 거야! 당장 안 나가!!"
이렇게 되고나니 오기가 생기네. 좆같네 진짜...
"감독님."
"음..."
"아시안게임은 사비로 못 나가요?"
"안돼. 국제대회는 각 나라 스포츠 연맹이 선발을 해주는 게 원칙이라."
"계주는 나가야 돼요. 그리고 단거리도 저보단 다른 애들이!!"
"훗. 니가 상률이 제자는 제자구나."
감정에 빠지지 말라고 하신다.
상대방이 감정적으로 군다고 덩달아 휘둘리다간 그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 밖에 안 된다.
"그래도 지금 이런 상황에선. 아니 저보다 다른 애들이... 노력한 선수들이..."
"지켜보자. 아직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인지 아닌지..."
마음이 흔들리는 가운데 내 시합 순서가 다가왔다.
교수님도 그러시고 이두희 감독님도 그러고. 다들 일단 시합은 끝내놓고 보자고 하셨다.
"흔들리지마라.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상률이는 뭐하냐 이럴 때 옆에 없고."
"...어른이 되라고 하셨어요. 믿으니까 맡긴다고."
"어이고. 지나 좀 어른이 되라고 해라."